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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 흐르는 공간, 그리고 시간의 단면

이선영

흐르는 공간, 그리고 시간의 단면

정수진 전 (9.6--10.6, 이유진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2000년 사루비아 다방에서의 뇌해(腦海) 전 리뷰를 계기로 홍대 앞 빵집에서 정수진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번에 먹기에 과하다 싶을 만큼의 빵을 한보따리 사들고 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왜 그렇게 빵을 많이 사냐고 물으니 ‘나는 빵을 참 좋아한다’는 말 대신에, ‘나는 많은 게 좋다’고 대답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빵은 몰라도 ‘많은 게 좋다’는 말은 작품의 한 양상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의 컨셉 중의 하나인 ‘다차원’이 그것이다. 정방형같이 통상적이지 않은 비율의 캔버스에 가득한 도상들, 그 도상들 간의 불연속적인 관계가 정수진의 작품임을 알아보게 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정수진의 작품 스타일은 알아볼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읽기는 어렵다. 일러스트스타일의 도상은 알아보기 쉬우며 추상적 요소는 요리 위에 조금 뿌려진 소스 정도의 비중이다. 작품 자체가 작가의 관념 속에서 펼쳐지는 논리의 결과이며, 추상은 오히려 구체성을 요구한다. 한동안 그렸던 양파도 그렇고 음식물은 구체적이다. 




전시전경(사진출전; 이유진 갤러리)



전시전경



정물1, 동화의 구조, 2018, 린넨에 유화, 100x100cm still life1, The structure of fairy tale, oil on linen



정물2, 대우명제( 역이대우), (같음반대닮음다름), 2018, 린넨에 유화, 100x100cm Still life2, transposition(convers inverse transposition), (same opposite similar distinct),  oil on linen



정물 3, 차원높은 빵과 괴물들, 2018, 린넨에 유화, 100x100cm Still life3 High dimensional breads and monsters, oil on linen



밀가루 반죽 안에 여러 재료가 들어간 질감이 풍부한 빵의 단면은 흐르는 공간에서 순간 멈춤한 시간을 보여준다. 멈춤 자체에 수수께끼기 내재한다. 빵도 그렇고 양파도 그렇고, 그런 일상적 소재들이 이번 전시의 부제처럼 ‘다차원 생물-의미의 구조’같은 언명과 연결될 때 불가사의함은 더욱 강해진다. 주어진 규칙에 의해 기계적 일과를 보내야 하는 보통사람들로서는 이러한 수수께끼가 뻔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제시하는 유쾌함을 줄 수도 있다. 매혹된 대상에 대한 의미 풀이에 가담하면서 작가와 가상적 대화를 펼치는 것도 예술적 소통의 과정이다. 정수진은 ‘이미지 연산; 64개 형상소’라는 부제가 붙은 ‘符圖’라는 이론을 통해서 작업을 설명한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부도이론에서 관객은 혹 떼려다 혹 붙일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이러한 엄격한 규칙에 의해 동일성과 차이의 유희가 가능하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정수진의 작품이 이론의 단선적 결과도, 작품 이해를 위한 선결 요건도 아닐 것이다. 작품이 이론과 완전히 일치되면 굳이 작품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부도 이론을 같이 공부하면서 전시도 같이 했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의미의 구조’나 ‘형상소’같은 개념들은 작품의 언어적인 규칙성을 예시한다. 그림이라는 언어이기에 형상소인 것이며, 자고로 ‘OO素’ 라 함은 기본적 요소가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차이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면서 적용된 규칙의 폭을 확장하는 메커니즘을 가진다. 정수진은 자신이 정한 형상소들을 통해서 같으면서도 다른 유희의 세계를 펼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빵과 음료수, 또는 이상한 괴물들이나 얼룩들은 맥락에 따라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 등으로 조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법은 자기 나름대로 체계적일 뿐이어서, 발신자와 수신자 간에 주고받은 메시지의 동일성을 확신하기 힘들다. 한편으로 작가는 필연성과 우연성, 닫힘과 열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왔다. 작품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임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박적으로 그려진 것들은 스스로에게도 추후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위상 차원에서 공백의 개념, 2018, 린넨에 유화, 30x40cm



적형 차원에서의 공백의 구조, 2018, 린넨에 유화, 30x40cm The structure of void in the dimension of Accumulation of form, oil on linen



빵, 2018, 린넨에 유화, 30x40cm Just bread, oil on linen



[적형 차원에서의 공백의 구조]나 [위상 차원에서의 공백의 개념] 등의 작품 제목에서도 암시되듯, 형태는 물론 공백마저 포함시킬만큼 의미의 그물망은 촘촘하게 짜려 한다. 그러나 체계가 완벽을 기하면 기할수록 모순 또한 증가 된다. 이러한 파타피직스(pataphysics)적 역설은 현대 수학부터 자본주의 시스템까지 두루 관철되는 법칙 아닌 법칙이다. 철학에서는 필연과 자유를 일치시키려는 변증법적 논리도 있었지만, 정수진의 [삼단논법] 시리즈들처럼 싱거운 결과를 낳는다. 반면 빵에서 여러 국면의 유희, 특히 이렇게 저렇게 잘린 다공질의 단면은 동굴 속 또 다른 동굴로 이어지는 듯한 미로같은 양상이다. 다른 장르와 비교되는 그림의 특성을 규정하기 위해 근대의 미학자(1766, 레싱)들은 잘린 단면이라는 은유를 사용했다. 그림은 한순간의 정지화면이기 때문에, 그 전과 후를 함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언이다. 주제와 관련된 회화는 서사가 이해되기 위한 명료한 한순간을 중시했다. 그러나 재현주의적 서사는 현대와 더불어 해체되었고, 잘린 단면의 구멍새들은 어느 차원으로 빠져 나갈지/나올지 모르는 다차원적인 통로가 되었다.

  

출전; 아트인 컬처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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