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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환 / 삶 이전, 또는 이후의 시공간

이선영

삶 이전, 또는 이후의 시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설치작품이든 회화든 아래로 향하는 중력감이 두드러진 안민환의 작품은 멜랑콜리하다. 한편 중력은 무중력 상태와 달리 삶의 중심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것은 어둠이 없다면 빛이 빛일 수 없음과 같다. 삶의 반대 항에 죽음이 있다면, 삶 한가운데서 호출된 죽음은 삶의 양상을 더욱 뚜렷하게 해줄 것이다. 물질적이든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삶의 에너지가 집약되어야 가능한 예술적 행위는 그 찬란한 낭비 속에서 삶의 이면에 있는 짝패를 불러낸다. 죽음은 몇몇 예술가의 취향이 아니라 삶, 특히 작업하는 삶 깊숙이 자리한다. 안민환의 회화 작품에서 유화로 얇게 바른 표면은 아래로 쓸어내리는 붓질 자국을 그대로 남긴다. 이러한 붓질은 중립적이기 보다는, 마치 묵시록에서 종말의 시점에 지상의 모든 생명을 걷어내는 거대한 낫의 움직임 같이 파국적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조차도 축축 늘어져 있다. 








배경과 구별되었던 형태들은 줄줄 녹고 있으며, 얼룩만 남아있는 것도 많다. 능선들이 겹겹이 있는 풍경에서도 대지의 육중한 고체감보다는 액체감이 압도적이다. 산도 용암같은 액체가 굳어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러한 대지의 운동은 선사시대에 이미 끝났을 것이다. 안민환은 자신의 풍경에서 시간에 가속도를 붙인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은 공간을 일순간 점유할 뿐이며, 곧 시간의 습격을 받는다. 몇 년 전 갔던 겨울 베를린의 칙칙한 풍경처럼 낮에도 해를 볼 수 없다. 여행지에서 본 소재들이 분명히 작품에 드문드문 박혀있지만,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지워져 있다. 그의 풍경에는 바닥이 없으며 그림자 또한 없다. 누구나 베를린을 그렇게 체험하지는 않는다. 특정 장소보다는 작가의 감성이 그러한 순간들을 길어낸다고 보여진다. ‘그날도 어김없이 해가 떴고 나도 어김없이 눈을 떠야만 했다’라는 안민환의 전시 제목은 그의 작품에 깔린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마치 퍼즐처럼 잘 이어붙이면 이야기로 완성될 수 있을 듯한 그의 작품에서 희망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노톤의 화면 속의 녹색이 그것이다. 집 뒷산에서 나무의 돌림병을 막기 위한 포장재로부터 영감에서 시작된 녹색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매우 취약한 것으로 드러난다. 안민환의 작품에서 나무는 대개 나목으로 나타난다. 녹색은 지붕이나 길, 블록 같은 모습인데, 그 또한 해체의 와중에 있다. 녹색 지붕의 아래는 없으며, 블록들은 나무에 관통되어 있거나 거센 물살에 흘러가 버린다. 지상 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서 있어야 할 집은 하반신은 사라져 있고, 나무 뿌리 또한 가지와 같은 모습으로 가는 섬유조직들을 빈 공간에 드러내고 있다. 인류의 상상계에서 나무는 지하/지상/천상을 이어주는 우주목 같은 위상을 가지는데, 그의 작품에서 나무는 엉뚱한 곳에서 때로는 파편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등장하지 않으며,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모습은 동상이다. 청동주물로 만들어진 그것들은 쉽게 녹아내리지는 않겠지만 이미 죽은 채 서 있는 셈이다. 다른 작품에서 희미한 실루엣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작품에서는 얼룩으로 사라진다. 함께 걸린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에서 관객은 전후 관계를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배경을 흐르는 얼룩으로 표현함으로서 그 앞의 것들 또한 그렇게 사라질 것임을 예견한다. 한편으로 흐릿한 배경들은 전경의 것들의 수직 이동의 속도감을 부여한다. 그것들은 비처럼 아래로 떨어진다. 물론 그것들이 가닿을 바닥은 심연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안민환은 모하에서의 전시에서 그림만 30여 점을 걸었지만 원래 조각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의 조각 또한 지상에 우뚝 선 기념비적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업실에서 본 라텍스로 이루어진 설치작품들은 삭아서 터지고 썩어서 너덜거린다. 


그것들은 살처럼 썩으려 사라지며 멜랑콜리한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중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모든 것은 사라짐을 향해 가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분위기는 작가의 주변 사람들의 사고나 죽음, 더 결정적으로는 파리의 카타콤에서 본 60만구의 해골에 대한 깊은 인상에서 왔다. 안민환은 베를린에서도 홀로코스트의 흔적에 주목하고 휴지뭉치를 들고 아시안을 기리는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만들기도 했다. 삶의 필연적인 귀결은 죽음이지만, 사람들은 애써 그 사실을 잊고 지내려 한다. 그것이 삶에 더 유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무의식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죽음을 의식의 전면에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성욕과 폭력은 죽음(동시에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한 개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격세유전적인 운명을 직시한다.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아래로의 흐름 또는 바탕으로의 사라짐은 삶을 삶 이전/ 또는 이후의 시공간에 배치한다. 이를 통해 삶은 철저히 상대화되지만, 그럼으로서 삶은 더 치열한 무엇으로 드러난다.  

 

 












출전; 모하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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