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태량 / 기호가 생성 소멸하는 장

이선영

기호가 생성 소멸하는 장

  

이선영(미술평론가)

  

이태량이 십 수년간 계속 사용해 오는 ‘명제형식’이라는 제목은 반어적이다. 그의 그림은 야성적이다 못해 무질서해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명제’도 ‘형식’도 참과 거짓을 구분 짓는 엄격한 규칙을 떠오르게 하는 준 수학적 개념이다. 말과 사물의 거리가 느껴지는 이 어울리지 않는 제목은 자기 보호를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말랑말랑한 것일수록 단단한 외피가 필요한 것이다. 하기야 삶 자체가 역설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세계를 생각하는 순간, 유한한 평면에 무한한 형상 또는 내용을 담으려는 순간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 그리고 혼란이 야기하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 사회는 자못 그럴듯한 매뉴얼을 제시하면서, 그 기준에 걸 맞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준다. 보수적인 시기에는 이상적인 삶의 유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오직 불균등한 분배를 위해 독려 되는 생산성을 위한 시스템은 지배적 게임에 고분고분한 참여자도 질리게 만들곤 한다. 


그것은 알량한 소비생활 외에 보상받을 길이 없는 한계가 명확한, 진정 낭비되는 삶이다. 그래서 사회의 소수자는 자기 주도형 게임을 창안하고, 거기에 몰입하곤 한다. 예술가가 대표적이다. 몇 년 동안 봐왔지만, 이태량은 그러한 전형적인 작가상을 가지고 있어서 흥미롭다. 물론 예술계에도 게임의 원리가 있고, 그것은 인생의 축소판같은 것이기도 해서, 작업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버티기는 힘들다. 어쨌든 이태량은 어릴 때부터 작가 이외의 삶은 생각해 보지 않은 채로 50대 중반에 도달했다. 예술을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도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날것/요리된 것을 구별함으로서 자연과 문화를 규정했던 저명한 인류학자의 기준에 의한다면, 이태량은 날 것—날 것/요리된 것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범주에 썩은 것을 첨가한 이도 있다--에 집착한다. 그가 그림이라는 형식까지 저버리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날것을 요리로서 담아낸 그릇같은 것이라고 할까. 


어쨌든 관객은 작가의 고통과 희열이 교차 되어 만들어진 한상차림을 전시장에서 맛볼 수 있다. 결과물의 자유분방함과 달리, 작업하는 삶은 명제형식만큼 엄격해 보인다. 그는 독산동의 스산한 공장형 아파트에서 작업에만 몰두하는 전업 작가이다. 놀이를 포함한 자유의 구가야말로 일정한 시공간의 자율성을 요구한다. 특히 전시를 앞둔 작가의 상황은 보이지 않는 감옥에 있는 것과 같다. 이제 됐다 싶을 만큼 했을 때야 그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작가는 실제의 출입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완성한 작품을 통해서 밖으로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품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못한, 또는 그럴 수 없는 이는 그저 숙제만을 안고 있을 따름이다. 밖으로 나온 자는 홀가분하게 다음을 도모할 수 있지만, 들어가지조차 못한 이는 무겁기만 하다. 니체가 예술가에게 가벼움을 요구했을 때 그는 철학자의 관념보다는 예술가의 자기체험으로 조언한 것이다. 


숙제만을 안고 사는 이들은 인생이 방해했다기보다는 자기 한계가 먼저 왔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안 해도 되는 숙제는 안 하게 되기 마련이므로 예술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작업에 돌입하는 시점은 매번 다르다. 하루를 기준으로 할 때, 하루종일 고민하다가 그 끝자락 쯤에 붓을 한번 놀리는 것으로 어떤 결과물을 낳을 수도 있다. 물론 다음날 그것을 다시 지울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진전의 과정이다. 많은 층으로 이루어진 이태량의 작품은 긍정과 부정이 수없이 엇갈린다. 그래서 반복되지 않는다. 추상이라도 기하 추상처럼 깔끔한 마무리감이 있는 작품은 그 과정이 감춰지지만, 어느 것이 먼저 칠해진지 알 수 있을 법한 붓질이 남아있는 경우는 다르다. 추상화는 어디까지가 완성인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그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추상화가 어렵다는 인상을 생겨나게 했다. ‘완성작’에 대한 첨삭 또는 완전 폐기에 대한 선택은 작가에게조차 열려 있다. 


명확한 설계도도 없이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모래성을 쌓는 작가의 모습은 맹목적이기 까지하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속된말로 건지는 게 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전략적 사고의 결과물이 예술작품으로서 성공한 예는 드물다. 이태량이 사용하는 서양화 재료는 그래도 화면 안에서 엎치락 뒤치락 씨름을 할 수 있다. 20-30호 위주의 작품들이 주로 걸리는 이번 전시는 작품 크기가 작아서인지 이전의 대작들처럼 ‘일단 내지르는’ 스타일보다는 전후 관계를 고려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큰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큰 작품이든 아니든, 착수(着手)가 중요하다. 이미 있는 것을 재현 또는 정리하려 하지 않는 이태량의 경우, 착수란 바다에 던진 돌멩이처럼 막연할 수 있다. 착수란 최초의 방향타 정도만 가늠해 보는 단계이다. 그리고 확실한 목적지가 아닌 미지의 곳으로 나침반 없는 항해를 한다. 그러나 최초의 것, 또는 이전의 것이 지워지고 무너져도 밑 작업으로 남는다. 


밑은 그다음 층위에서의 밀고 당기기에 영향을 준다. 어느 과정도 완전히 무화되는 경우는 없다. 처음 의도의 배반조차도 또 다른 의도에 통합될 수 있다. 이태량의 작업과정은 맹목적인 듯해도, 오랜 작업 경험에서 오는 자기 확신에 기반한다. 작품에 따라 꼴라주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리기 싫을 때’, ‘굳이 안 그려도 될 때’, 현실의 단편은 화면 안에 들어와서 다른 물감의 층위와 상호작용한다. 그러나 대체로 사진이나 영상 등, 우리를 에워싸는 지천의 정보들은 그의 작업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잠깐의 시선을 붙잡은 뒤 흘러갈 뿐이다. 이태량에게는 2차 3차 가공물이 아닌 원초적 질료가 중요하며, 어떤 소재도 자신의 몸을 거쳐야 한다. 그 점에서 그의 그림은 내재적이다. 의미를 포함한 외재적인 무엇인가를 가리키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태량의 작품은 그가 무엇을 먹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즉 완전히 소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배설물과 유사하다. 


배설에는 섹슈얼리티 또한 포함된다. 물질이 에너지고, 그 역이 성립하듯, 긴장과 방출을 거듭하는 그의 화면은 전쟁터 같다. 색상과 명도의 차이가 있는 형상들 간의 밀고 밀리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 풀려나오는 생생한 또는 퇴락한 기운이 가득하다. 3개의 화면이 붙은 작품에 흩어져 있는 육신의 단편은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감을 체액처럼 보이게 한다. 이태량은 이전작품과 올해 전시작품과의 차이로 색을 들었다. 색은 화사하여 들뜬 듯한 에너지를 표현한다. 붉은 색감은 유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경계의 침투/파열 같은 양상과 결합하여 육감적으로 또는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밝은색은 위치나 색감, 형태에 있어서 구별되는 두 영역의 접속지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작품에 간간이 보이는 직선적 요소는 지우기/그리기, 구축하기/해체하기, 쌓기/뭉개기 등이 교차 되는 와중에 손상된 기호들이다. 이러한 기호의 무덤에서 새로운 기호가 생겨난다. 


기호의 단편들은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의미가 있던 곳을 가리킬 뿐이다. 화면에 써넣은 글자들도 마찬가지다. 가독성 없는 기호는 조형적 요소로 작용한다. 사람의 실루엣과 함께 하는 글자들은 색과 형태 등 조형적 요소와 함께 생각 또한 작가로부터 분비되었음을 알려준다. 검은 동그라미가 있는 작품은 그 아래로부터 꿈틀거리는 물질/에너지에 의해 그 경계가 침해되고 있다. 삼각형 두 개가 거꾸로 포개진 기하적 도형이 지워진 것은 경계는 무너뜨리기 위해서만 존재함을 알려준다. 경계를 지운 선은 또 다른 경계가 되어 변형의 표적이 된다. 경계들 간의 관계로 이루어진 그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이다. 형상을 그린 후 일정 간격으로 칼집을 낸듯한 작품은 경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경계는 넘어야 하고 틈은 더 벌려져야 한다. 칸트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들이 정의했듯이, 어떤 경계 안에서 잘 정리된 것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경계를 넘어서는 무엇, 즉 숭고가 구별되고, 숭고는 추상회화의 미학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숭고는 흡사 분탕질과도 비슷한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법도 하다. 이태량의 작품은 큰 것이건 아니건, 경계를 넘나드는 초과 또는 잉여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경계 내의 것들이 재현에 적합한 반면, 경계 위에 있는 것들은 재현 불가능하지만, 어떤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재현 가능한 것만 현실로 인정하는 것은 근대 생산사회의 특징이다. 미학적으로 미보다 숭고와 가까운 모더니즘은 노동과 생산만을 중시한 모더니티에 대한 미학적 반응이었다. 이러한 사회는 재현을 위한 겹겹의 장치들을 마련해 놓고, 모두가 그곳을 통과할 것을 명령한다. 단적으로 사회는 재현적 행위에만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이미 있는 것의 추인에 불과한 것을 ‘객관적’이라고 하며, 모두가 동의하고 떠받들어야 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이 진짜 폭력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지 않고 차이가 있다면 말이다. ‘명제’나 ‘형식’에 대한 이태량의 역설 어법은 그러한 ‘객관성’과 다른 기준으로 말하고자 마음먹은 이의 풍자행위이다. 


명제와 형식은 또 다른 명제와 형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실재로부터 나온다. 우선 자명한 실재인 육신을 가정할 수 있고, 육신을 가득 채우는 에너지 또한 실재이며, 질척한 물감 또한 물질적 실재에 속한다. 실재를 포착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지만, 객관적인 언어로 인정받는 것은 수학이다. 그러나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가 말하고 있듯이, 수학 한가운데에서는 불완전성이 있다. 괴델의 정리를 잘 요약한 레베카 골드스타인의 [불완전성]에 의하면,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에나 결정불능의 식, 곧 그 자체는 물론 그 부정도 증명도 할 수 없는 식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따름정리가 나온다.’ 즉 괴델은 ‘형식적 산술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괴델은 수학자니까 불완전성조차도 수학적으로 증명했지만, 미술가는 조형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이 강조하듯이,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는 수학에도 직관이 작용함을 암시한다. 그러한 직관을 거부할 때, 형식으로부터 형식을 설명할 뿐인 형식주의에 빠진다. 논리실증주의나 이후의 컴퓨터 언어(코드)에서도 그러한 형식주의가 발견된다. 그러한 형식주의는 누군가한테는 유용하다. 무엇이 형식이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최초에 그 위치는 힘에 의해 정해진다. 합리주의는 그다음이다. 법의 바탕에 폭력이 있었음을 주장한 자끄 데리다, 문명의 시작에 원초적 폭력(희생)이 있었음을 주장한 르네 지라르, 담론이 권력과 얽혀있다고 주장한 미셀 푸코 등은 A가 A를 가리킬 뿐인 순환 논리를 벗어나서, 최초의 규칙이 법칙이 되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밝힌다. 경제학 쪽에서는 마르크스가, 정치학 쪽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런 주장을 펼쳤다. 종교인이라면 율법(정통)보다는 신비(이단)를 강조하는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가령 토지의 소유권에 관련된 법이 있다면, 백인들이 내땅 네땅을 구별하는 기준이기 이전에 총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고 있던 인디언들을 몰살한 과정은 생략한다. 시작부터 불평등한 게임을 모두에게 따르라고 강요하는 사회도 마찬가지로 참/거짓을 구별하는 원칙에 내재 된 폭력을 감춘다. 기존의 형식주의가 거부되는 순간에 호출되는 것은 감춰져 있던 폭력이다. 새로운 법은 기존의 법을 위반한 사건을 계기로 수립된다. 어떤 계기가 없이 자연스럽게 한 형식이 또 다른 형식으로 변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가 진보했다면, 그것은 그러한 폭력의 결과물이다. 폭력은 정의롭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루소의 사회 계약설 등이 말하듯이, 인류는 계약을 통해서 직접적 폭력을 간접적인 것으로 전환 시키고자 했지만, 그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역사란 피의 역사, 즉 야만의 역사--‘야만이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발터 벤야민)--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는 일상에도 스며든다. 최강대국인 미국에서 한 해 총기사고 사망자 수가 4만 명에 가깝다는 통계(SBS, 2018년 12월 18일 뉴스에서)가 있다. 


전쟁만이 폭력은 아니다. 전쟁에 가까운 경쟁도 폭력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과도기의 시기가 지나 지배적 권력이 확립되고 그것이 새로운 법이 된다. 이태량이 화면에 가하는 폭력에 가까운 행위들은 역사가 진행되어온 비극적 과정을 반복한다. 자기소진적이고 자멸적이기 까지 한 행위들이다. 그에게 예술은 아늑한 재생산의 유희가 아니라. 냉정하고도 잔혹한 현실과 관계된다. 그는 예술을 통해 어쭙잖은 화해의 몸짓을 취하기보다는 동종요법으로 현재의 지배적 형식이 또 다른 도전에 의해 바뀔 수 있는 한시적 폭력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예술이 애초부터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가 아니라, 기존의 형식으로 포획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있음을 말하는 대안의 방식이다. 우리 앞에 겹겹이 그어진 경계는 그것이 있지 않았으면 터놓고 소통할 수 있었던 진실을 억압한다. 삶, 육신, 성에서 분출되는 직접적인 언어의 양상이 두드러지는 이태량의 작업은 예술이 형식적인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며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