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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 무명의 망자들을 위한 초혼가

이선영

무명의 망자들을 위한 초혼가


이선영(미술평론가)


‘애도연습’ 전의 작품들의 사연은 ‘애도’라는 키워드 중의 하나가 암시하듯이 대부분 슬픈 내용이다. 많은 부분에서 결정화된 삶이 주는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이라도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 유머란을 집중적으로 클릭하는 이들에게는 애써 회피하고픈 내용들이다. 총 3개의 화면으로 상영되는 내용은 총알받이로 죽은 소년병, 상황에 따라 아군도 됐다가 적군도 됐다가 하면서 한국 근대사의 어두운 면을 외줄 타듯 살아온 할아버지의 회고담, 한국전쟁 후에도 이어진 국가의 폭력과 그에 희생된 민간인들, 기지촌 여성들의 사연 등이 담겨 있다. 그들 모두 비운의 삶을 살다가 억울하게 죽었으며, 아직도 그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구천(九泉)을 헤매고 있는 억울한 망령들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구천 지하, 즉 ‘땅속 깊은 밑바닥’에 묻혀 있다. 김현주가 수년째 연구한 결과물은 그들이 아직 논바닥이나 숲 같은 곳에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몸 부름 말_single channel video installation_15min_dimension variable_HD_color_sound_2018



 The summer in Yugokri, 2015, single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25min 38sec  



작가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려 한다. 도시인에게는 힐링을 안겨주기도 할 푸르른 산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현재의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감춰진 역사적 무대의 비극성은 크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자연에 곁들인 노래나 춤은 역설을 더욱 크게 한다. 소년병의 죽음을 다룬 작품 [유곡리의 여름](2015)에서 처연하게 들려오는 [유산가]나 전쟁 때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폐허같은 장소에서 진행되는 학춤, 그리고 민간인 희생을 다룬 작품 [내 귓속에 묻힌 묘지들](2018)에서의 망자를 위로하는 듯한 무녀의 춤사위 등이 그렇다. 아름다울수록 슬퍼지는 이미지이다. 지금은 곡식과 수풀로 푸릇한 장소들이고 어디에도 비운의 죽음이 묻혀 있는 사연을 위한 흔적이나 기념비 따위는 발견할 수 없다. 대신 작가가 그러한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 이때 예술은 종교나 정치 못지않은 소명의식을 갖게 된다. 작업이 깊어질수록 작가는 감춰진 국면의 관찰자, 더 나아가 개입자가 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찾으려는 이에게 밝혀질 뿐이다. 


스펙터클이 의미로 고양되지 않은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은 그것이 생산이 아닌 소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일어난 일은 관객에게도 일어난다. 여러 심미적인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김현주의 작품 상당 부분은 의미에 대한 요구에 의해 추동된다. 시간의 간격 때문에 의미의 사슬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는 힘들기에 해석을 위한 관객 나름의 참여, 또는 최소한의 문제의식은 중요하다. 여기에서 역사의 텍스트는 단지 읽혀지는—바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소비되는’--것이 아니라, 씌여진다(텍스트의 생산). 영상들은 미친 여자의 웃음 소리같은 수수께끼로부터 시작한다. 영상 작품들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다른 부류들을 소재로 하지만 모두 얽혀있다. 비슷한 원인과 과정이 비슷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특히 국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근대에 성립된 국민국가는 국민을 어떻게 동원하고 관리하며 또 방치했는가. 




 (참고)The tombs in my ears, 2016-2018, 3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10min 24sec, 잠들지 않는 남도_ 너븐숭이의 유령'전_성북예술창작터2018 



 농무 2018, 1-ch video, HD, color, sound, 40min -스틸컷



작가는 작품을 통해 한때 국민이었던 이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마치 초혼가(招魂歌)처럼,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내는 것이다. 감춰진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김현주의 작품에는 청각성(또는 구술성orality)이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노래꾼뿐 아니라 보이스 퍼포머가 참여한 작품들에서 두드러진다. 한국처럼 역사적 기억이 허술한 곳에서 수십 년 세월이면 거의 고고학 수준의 기간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차원에서는 퍼즐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퍼즐은 연속적이 아니라 공시적이다. 가령 이 전시에서 가장 큰 화면에 띄워진 대표 작품 [몸부름말]에서는 3개 채널로 영상이 나눠지기도 한다. 읽기는 교란될 수 있지만, 장면들은 서로를 보충하면서 미지의 텍스트를 짜나간다. 김현주의 주요 소재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애초부터 예술에 적합한 면모도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민족에게 부실하게 다뤄진 역사에는 도처에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가 있을 수 있는데, 예술은 은유적 방식을 통해서 빈칸의 한계를 색다른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김현주의 작품에서 노래와 춤 등이 곁들여진 은유적 방식은 실증주의가 할 수 없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해결한다. 폐허 속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미군 담요 한 장도 큰 단서가 된다. 수용소의 벽에서 뚝 떨어진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곳에서 희생된 이들의 살점이 된다.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와 예술은 늘 비교되곤 했다. 역사가 실증주의에 호소하면서 장황하리만치의 자료 더미에서 주요 줄기를 잡아내려 한다면, 예술가에게는 같은 사실(또는 자료)도 어떻게 말할 것(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더 나아가 최초의 무엇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시대상에 너무 매달리는 순간, 즉 역사적인 방식에 치중하는 순간 예술작품은 장황하고, 나쁘게는 소재주의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된다. 사실의 전달, 사회적 고발 등에 매달렸던 재현주의는 예술 언어가 가지는 가능성을 최소화한다. 사실의 중요성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조차도 사실은 어느 정도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 




The summer in Yugokri, 2015, single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25min 38s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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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또한 이야기 아닌가. 100장의 역사적 자료로 1장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반대로 1장의 자료사진에서 100장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예술이다. 그러나 100장이 또 다른 100장이 되거나 1장이 또 다른 1장이 되는 동어반복은 피해야 한다. 동어반복 된 100장을 사람들은 애써 안 볼 것이다. 굳이 본다면 정확성과 객관성이 담보된다고 믿어지는 역사적 자료를 우선 볼 것이다. 만약 동어반복 된 것이 1장이라면 거의 선문답같은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역사적 서술은 가치 중립적인 것만은 아니다. 또한 역사는 현재적 관심으로부터 소급되는 것이다. 물론 가치 중립의 언어 확보는 인문, 사회, 예술 분야의 중요한 목표일 수는 있다. 과학은 언어의 (상대적) 투명성을 통해 많은 진보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사실에 기반한 소재라는 특성 때문에, 다큐멘터리 작가나 역사가들의 몫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많은 정보들이 공기처럼 대중을 에워싸는 시대에 충격 또한 그냥 흘러가 버리곤 한다. 


예술가들은, 물론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색다르게 하여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공지영 소설가의 [도가니]처럼, 예술작품이 묻혀 있던 사실을 상기시켜서 뒤늦게나마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킨 예는 적지 않다.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김현주의 작품에서 서사는 중요하다. 즉 그들은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더 의미 있는, 그래서 작가는 긴 텍스트를 전시공간에 비치해 놓았다. 가장 좋은 방식은 전시장이라는 강력한 인터페이스에서 질문을 얻고 간 후 작가의 웹싸이트나 기타 자료의 검색을 통해 확장하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의 항변처럼 예술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지 답을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적절하게 제기된 질문에는 답이 포함되어 있지만 확정적이지는 않다. 영상이 상영되기 위해 어둑하게 연출된 공간에서 작가가 비치해 놓은 또 다른 문자텍스트는 가독성이 없지만, 의지만 있다면 전시장 밖에서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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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깃거리는 분명 예술적 소재로 매력적인 것이지만, 소설이나 다큐멘타리, 또는 영화와 달리, 결정적 단면을 제시해야 하는 시각예술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이 전시에서는 작품마다 서사의 방식을 조금씩 달리했다. 은유의 비중이 좀 적다고 할 수 있는 작품 [농무]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에 집중한다.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돌아가신 대담자에 대한 송구함으로 과감한 첨삭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애도 연습’이기 때문에 지금의 텍스트는 언제라도 다시 씌여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이지만 소설같은 역사가 40분이라는 시간을 그리 길게 하지는 않는다. 죽은 소년병이나 민간인은 직접 내세울 수 없으며, 기지촌 여성의 경우에도 잘못하면 또 다른 대상화의 위험이 있는지라 은유적 화법에 치중한 듯하다. 대신 연극배우 등이 상황극을 이끌어 나간다. 배우는 사자(死者)의 공간에 공존하면서 사자의 대역이 되기도 하고 그들과 상호작용하는 현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일종의 빙의(憑依), 즉 ‘떠도는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옮겨붙는’ 경우이다. [유곡리의 여름]에서는 소년병의 여자 친구일 법 한 소녀나 어머니일 법한 여성이 등장한다. [몸부름말]에서 여자배우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듯한 길이었지만, 되돌이표처럼 질곡에 다시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기지촌 여성의 상황을 표현한다. [내귓속에 묻힌 말들]에서는 산야에 묻힌 민초들을 깨워서 온전한 가족의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상징적 대상도 자주 등장한다. 작품 [유곡리의 여름]에서 지금은 좋은 쌀 생산지로도 유명한 철원 평야에서 전쟁 통에 죽어갔던 이름 없는 소년병들을 상기시키는 쌀, 가히 국내의 ‘위안부’ 취급을 받아온, 만신창이가 된 기지촌 여성들의 몸을 떠오르게 하는 폐건물의 잔해 등이 대표적이다. 쌀은 죽은 자의 양분이 산자의 양식이 되고 있는 섬뜩한 상황을, 폐건물의 잔해는 여전히 상처받고 우롱당하는 기지촌 여성의 상황을 압축한다. 매매춘은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었지만 팔거나 사는 사람(또는 시스템)을 문제 삼지 않는 한 모든 질곡은 해당 여성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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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 배우들은 사건 현장이었던 상징적 무대에서 상징적 대상으로 상징적 행위를 한다. 이러한 겹겹의 상징주의 때문에 사전지식이 없이 그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이 있다. 하나같이 다 기구하고도 기괴하기까지 한 이야기지만 그들의 영혼이 소리 ‘연습’이라는 단어는 애도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현주의 전시에서 ‘연습’은 수년간 끈질기게 지속해왔던 역사적 소재를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려는 전략과도 관계된다. 필자도 2017년에 보고 소개하기도 했던 작품은 재편집되어 재맥락화 되어 다른 울림을 자아낸다. 영상은 거의 편집의 예술이다. 사실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는 무수하게 다시 배치될 수 있다. 자본과 대중 사이에 껴서 곤혹스러운 영화감독들이 감독판 작품을 따로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애도연습’ 전이 역사상의 억울한 사람들을 모아 나열하는 장은 아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 깔린 역사적/예술적 서사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국가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곡리의 여름]에서 소년병은 국가의 명을 받고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죽음의 들판으로 나갔다. [농무]에서 북한군도 되었다가 포로도 되었다가 남한군도 되었던 할아버지는 민초들에게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내귓속에 묻힌 묘지들]에서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죽은 양민들에게 가해진 ‘군인’의 폭력은 조직적이고 은폐 또한 그러했다는 사실에서 배후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국가가 진정 국민을 보호하는 ‘선량한’ 제도라기보다는, 정신분석학이 말하듯이 일종의 초자아로서 자아와 무의식을 검열하고 억압하는 역할을 했음을 암시한다. 기지촌 여성들은 국가의 보호하에 놓였지만, 매매춘은 처음부터 방조, 고무된 부분도 있다. 얼마 전 재개발을 앞둔 마지막 성매매 집결지 중의 한 지역의 화재 사망 사건을 계기로 난 신문기사--‘일본이 이식하고, 정부가 방관한 성매매 집결지 100년’/이하나 기자/ 2019.1.3. 여성신문—에 의하면, 해방 이후 이전의 공창을 대신하여 생겨난 ‘사창가’(성매매 집결지)는 국가의 비호 아래 번성했다. 




 The tombs in my ears, 2016-2018, 3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10min 24sec스틸컷



(참고) The tombs in my ears, 2016-2018, 3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10min 24sec, 잠들지 않는 남도_ 너븐숭이의 유령'전_성북예술창작터2018 



(참고) The tombs in my ears, 2016-2018, 3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10min 24sec, 잠들지 않는 남도_ 너븐숭이의 유령'전_성북예술창작터2018 



 The tombs in my ears, 2016-2018, 3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10min 24sec-세부장면



The tombs in my ears, 2016-2018, 3 channel video, HD, color, sound, 10min 24sec-세부장면



여성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겉으로는 성매매를 금지했으면서도 전국에 104개 ‘특정 지역’을 지정했는데, 미군 부대 앞 ‘기지촌’도 정부 관리 아래 놓였다. 1971년 용산경찰서장이 성매매 업주들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기지촌 여성들에게 불친절은 이적행위이며,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미군 손님을 동등하게 접대해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전한다. 김현주의 작품에서도 그 존재가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국가기관인 보건소는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감염 여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국가가 성매매를 공인한 셈이다. 치유의 형태였지만 관리를 앞세운 국가의 폭력은 여전했던 것이다. 작품 [몸부름말] 국가의 역할이 가장 내재적으로 부분까지 작동함을 알려준다. 작품의 무대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도 불렸다는 ‘낙검자 수용소’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수용소의 탄생 편을 떠오르게 하는 그 수용소는 성병 등에 감염된 기지촌 여성들을 치료해 준다는 명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절하지 못한 치료가 그녀들을 오히려 치명적인 후유증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근처에는 이름 없는 공동묘지가 있다.


프로이트는 ‘국가는 비행과 폭력을 금지하였으나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점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근대에 인간은 국민이 됨으로서 조직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한국처럼 오랫동안 군부독재가 있었던 국가는 국가의 폭력적 측면이 더욱 드러난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기보다는 국가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역사적 국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격동기였던 1980년대에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라는 논쟁이 생겨났듯이, 국가는 자명한 존재이기 보다는 민주주의라는 관점으로 매번 재정립되어야 하는 유동적 개념이다. 그러한 폭력성이 다소간 줄어드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시스템에서 또 다른 국가의 국민을 착취한 결과일 따름이다. 예술은 이러한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기 위해 자신의 작은 힘이 마나 보태려고 한다. 김현주의 작업들이 ‘연습’을 넘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거시권력부터 미시권력에 이르기까지 더욱 촘촘해지고 있는 시스템의 허와 실을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출전; 미디어극장 아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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