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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 노주미, 피오나 래 전 / 미물의 아름다움

이선영

미물의 아름다움

  

니키 노주미 전 (2018. 11.21—2019. 1.13, 바라캇 컨템포러리)

피오나 래 (2018. 11. 23—2019. 1.20, 학고재 청담)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림과 미시 정치


강남과 강북에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공간에서 열린 두 외국 작가의 작품들에는 유화라는 기조아래 동서고금의 기법들이 참조되고 종합되었다는 점과 다양한 층위의 이미지가 공존하며 그 관계 속에서 서사를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영미권에서 거주하고 활동하지만, 중동이나 아시아에서의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체득한 ‘이국적인’ 요소 또한 공통적이다. 지평선이 보이는 대지 한가운데 잡초를 배치한 니키 노주미(Nicky Nodjoumi, b.1942, 이란 케르만샤 출생)의 작품과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감미롭고 환상적인 피오나 래(Fiona Rae, b.1963, 홍콩 출생)의 작품은 미소한 존재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그들의 그림은 작은 존재를 기념비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을 주시하게 한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또는 명백해 보였던 것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이러한 방식은 그 작가들의 성향이나 취향일 뿐 아니라 정치이기도 하다. 물론 예술은 다소간 강제성이 있는 법적 효력이 아니라, 스며들 듯 행해지는 공감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한다. 권력은 불확실한 곳에서 작용하는 것이니 만큼 예술과 권력은 그리 외재적 관계는 아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시 전경(사진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옛날 옛적에 인어의 노래를 듣다, Once upon a time hears the sea-maid’s music, 2018, Oil on canvas, 129.5x183cm_image copyright Fiona Rae(사진제공; 학고재)



그래서 예술과 권력은 쉽게 연결되고 쉽게 단절된다. 정치인들은 불확실한 존재들인 예술가들을, 예술가들은 어디서 어떻게 위임 받은 지 알 수 없는 정치인들의 권력행사에 대해 서로를 의심한다. 고국 이란의 정치적 압박을 피해서 미국에서 작업하고 있는 니키 노주미는 정치인들이 상징화되어 작품에 나타나기도 한다. 재현적 요소가 없는 피오나 래의 작품에도 날렵하고 경쾌한 화면 가운데 폭발적인 활기로 충전된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암시된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모여 있는 장(場)인 화면에서 경쟁과 투쟁, 공존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장에서 다양한 요소들의 균형은 아슬아슬하게, 작업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그 작은 존재들은 대개 무시되기 때문에 그러한 소재 및 주제의 선택은 작가의 지향을 선포하는 셈이다. 또한 그들이 선택한 그림이라는 형식 또한 스펙터클의 시대에 그 존재감이 의심받고 있는데, 왜 회화인가에 대한 질문은 이전에는 굳이 자문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의 화가는 그 매체를 ‘아직도’ 고수하는 이유를 각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반드시, 적어도 설득력 있는 대답이 가능해야 회화도 ‘현대미술’에 속할 수 있게 된다. 


회화는 현재에도 조형예술의 기본이 되고 있고, 근본적인 것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나므로 회화는 늘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다만 그러한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근대시기에 ‘회화는 결국 평면이다’라는 식의 정의는 사진과 영화의 발명 및 여타의 시각 환경의 급변을 맞이한 화가와 이론가들의 대답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었지만, 굳이 화가가 평면을 강조하지 않아도 실제로 세상은 너무 평평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회화/그리기를 포함하여 모든 실재적인 것들이 허구화되는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여야 한다. 평평한 세계가 평등한 세계인가를 포함한 문제들을 자기 문제로 삼은 회화는 자기도 모르게 세계의 비밀과 마주한다. 회화에 대한 모더니즘의 대답은 회화를 관념화시켜 단지 감성적인 것에 호소하는 경향보다 더한 악습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니키 노주미와 피오나 래의 작품은 그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형식적 효과와 확장성 있는 서사를 가진다. 그들의 붓끝에서 만들어지는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 바로 그림이구나’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기쁨을 준다. 그림은 이론적 선명성이 아니라, 이러한 멋진 그림들에 의해 존재 의미를 부여 받을 것이다. 

    


‘벌거벗은 생명’과 고삐 풀린 상상력


천정이 높은 매력적인 전시공간에 10여점이 걸린 니키 노주미 전 제목 ‘Please Sit Down’은 국내외에 영향력이 있었던 작가를 자신의 권력 아래 두고자했던 혁명기—겉으로는 혁명이지만 왕정(王政)인--이란 당국과의 불쾌하고도 두려운 만남에서 연원한다. 결국 국가는 이 ‘불온한’ 작가를 추방했지만, ‘앉으시오!’라는 자못 정중한 듯한 명령어는 마치 권력이 정해준 자리에 얌전히 있어야 할 것을 종용하는 듯하다. 권력이 체계적으로 재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이 대상화 되어 원근법 상의 꼭지점같은 전능한 지점에서 파악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 도상을 자유롭게 구성하는 니키 노주미의 작품은 그러한 일괄적 시점을 해체한다. 그의 작품은 꼴라주처럼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크며, 이러한 간극으로부터 의미가 생겨난다. 유화라는 방식은 이러한 간극들이 너무 벌어져서 무의미로 해체되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조성한다. 전시 부제와 같은 제목의 최근 작품을 보면, 네발 짐승인 양이 불편하게 서있고, 두 남자, 또한 한남자의 시간차를 둔 두 동작이 어색하게 공존한다. 앉기에 너무 작아 보이는 의자, 뒤집힌 차, 무엇보다도 가면 쓴 남자가 들고 있는 긴 막대기는 불길하다. 희생양은 하반신은 벌써 붉은 색 고기로 변해가고, 작은 의자에도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니키 노주미, 플리즈 싯 다운, Please sit down, 2018, 221X173cm


니키 노주미,  조각난, Silenced, 2017, 216X165cm


니키 노주미, Untitled III-From the Environmental Series,2018,178X127cm


니키 노주미,  오후의 차, Tea in the Afternoon, 2012, 216X274.5cm



니키 노주미의 작품에 잘 나타나는 화면 하단의 또 다른 세계는 권력이 밀실을 통해서 증식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권력을 가진 남자의 하의는 삐에로 복장이다. 권력자들의 일부는 때로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추상화된다. 그것은 이 익명적인 남자가 더 큰 권력을 재현하는 꼭두각시임을 알려준다. 작품 [오후의 차](2012)는 심문을 받기 위해 앉아야 하는 고문의 의자, 또는 심문하기 위해 앉아야 하는 권위의 의자, 그 의자를 사이에 두고 봉을 쥔 남성/권력자와 벌거벗은 여성이 마주한다. 공식적 의상을 입은 남자와 벌거벗은 여성의 조우는 주체와 타자가 만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대조 항은 문명과 자연, 지배와 피지배 등, 서로 연결망을 이루는 일련의 대조 항들을 끌어들이며, 화면에 가득한 얼룩들을 비극의 결과물로 다가오게 한다. 사고를 암시하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배경으로 로드킬 당한 것같이 산산이 부수어진 동물을 전경화한 작품 [강요된 침묵](2017)은 문명의 질주 때문에 오늘도 소리 없이 희생되는 자연을 거대한 크기로 대면시킨다. 작품 [무제 #3 -환경 시리즈](2018)는 풀 한포기를 화면 가득히 일으켜 세운다. 이 기념비적인 존재는 국가를 비롯해 억압적 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다. 니키 노주미의 작품에서 자연은 ‘주권과 대립하는 벌거벗은 생명’(조르조 아감벤)으로 나타난다. 

   

한국 최초로 소개된, 그것도 2018년에 제작된 최신작이 대거 포함된 피오나 래 전은 한글 발음과의 우연찮은 비슷함으로 한겨울에 기다려지는 봄의 설레임 같은 것이 있다. 작품 [공중으로 녹아들다](2018)처럼, 피오나 래의 작품은 옅은 안개나 미풍, 또는 구름 같은 공중에서 일어나는 미시적인 사건들을 닮았다. 로코코 시대의 감미로운 하늘 같은 바탕 면 안팎으로 강약이 선명한 선과 점이 자리한다. 녹아드는 것이 있으면 생겨나는 것이 있고, 이 쌍방향의 과정은 작품 속에서, 그리고 작품들 사이에서 연이어 발생하고 소멸한다.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따스한 색감을 가지는 작품들은 인어공주나 백설공주같은 동화 속 캐릭터를 적시한 제목을 가진다. 상상이나 동화가 그렇듯이, 세계와의 직접적 만남이 아닌 중간의 완충지대에 해당되는 부드러운 보호막이 있다. 작품 [옛날 옛적에 인어의 노래를 듣다](2018)에는 인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 노래나 목소리, 또는 속삭임을 듣는 주체도 없다. 대신 거기에는 ‘옛날 옛적’ 같은 모호한 시공간과 노래/듣다에 관련된 추상적 감각, 그리고 고삐 풀린 무한대의 상상이 있다. 부드러운 색감에 포인트를 주는 가느다란 직선과 곡선들은 뭔가 탁탁 터지는 듯한 경쾌한 감각이 있다. 만약 거기에 인어가 있다면 그것은 인어가 물속을 헤치고 지나가며 남긴 소리나 향기, 또는 신체의 분비물 같은 것이다. 




 백설공주는 자신의 세계에서 달을 꺼내 올린다, Snow White lifts the moon out of her sphere, 2017, Oil on canvas, 183x129.5cm_image copyright Fiona Rae



 인물 2e, Figure 2e, 2016, Oil on canvas, 183x129.5cm_image copyright Fiona Rae


공중으로 녹아들다, Melts into air, 2018, Oil on canvas, 61x49.5cm_image copyright Fiona Rae



 상상 1g, Figment 1g, 2015, Oil and acrylic on canvas, 61x49.5cm_image copyright Fiona Rae



백설공주나 인어공주가 여성 캐릭터임을 떠올릴 때, 피오나 래의 작품에서 여성성이 발견되는 것도 분명하다. 이미지가 추상적이기에 작가의 의도가 보다 직접적으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은 긴 작품 제목인데, 그러한 제목들에 여성성을 함축하는 어휘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백설공주는 자신의 세계에서 달을 꺼내 올린다](2017)같은 제목이 그렇다. 이 전시의 서문을 쓴 필자 길다 윌리엄스는 피오나 래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잭슨 폴록을 비롯한 ‘정력적인(virile)’(평론가 매니 파버) 남성 추상 화가와 비교하고, 남성답지 못한(effeminate) 경향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18세기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 그리고 ‘거세하지 않은 그대로의(non-castrated) 감정표현을 풀어놓는 것’(클레멘트 그린버그)을 권고한 남성 이론가들의 기준에서 벗어남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 일종의 언어인 예술은 자연이 아니라 문화이지만, 결국 작업이라는 것이 젖 먹던 힘까지 짜는 행위이다 보니, 작품에서 남성성/여성성을 찾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남/녀를 떠나서 ‘보편적’이기를 원한다. 특정 성으로 자신의 작품을 환원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피오나 래는 자신의 본성과 감각을 굳이 위장하려 하지 않으며, ‘누가 이기나 보자’ 면서 가공의 싸움을 심각하게 수행하는 이들과 달리, 경쾌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제 갈 길을 가는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그래서 피오라 래의 작품의 특징인 가벼움은 경박함이나 유치함이기 보다는 자유로움으로 느껴진다.     


출전; 아트인컬처 201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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