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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만든 사건들;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의 내용

이선영

사건을 만든 사건들;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의 내용

  

이선영(미술평론가)

  

1. 사건과 예술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작품에서는 당대의 충격적인 사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린힐 화재에서 22명의 딸들이 죽다](김인순, 1988)같이 당시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 작품 제목에 직접 기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같은 당대의 역사와 예술의 관계를 생각할 때, 보통 사건은 끝나고 작품만 남아있거나, 둘 다 사라지곤 한다. 예술은 사건의 희미한 흔적일 수도 있고 기념비일 수도 있다. 희미한 흔적은 물론 기념비 또한 예술 만큼이나 시간의 시험 아래에 있다. 그러나 예술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지체되었을 사회적 삶의 해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1980년대의 미술이 그러했다. 그것은 1980년 자체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파 인사들에게는 돌발적 ‘사태’로만 기억되는 그 사건은 한국사회의 모순이 중층결정되어 일어난, 그러나 아직도 낱낱이 규명되지 않은 큰 이야기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이 시작된 민중미술 또한 크게는 서사적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탄압받고 투쟁하는 민중의 이야기가 먼저 있었지만, 민중적 입장에 있는 여성의 이야기도 있었다. 이때의 여성은 이중의 타자였다.



김인순, 그린힐 화재에서 22명의 딸들이죽다, 1988


서사는 한국의 제도 미술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모더니즘적 추상미술에서 배제되어 있던 것이다. 1980년대에 발흥한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 담론들의 종말’(리오타르)를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역사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입장에서 서사는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적 모더니즘에 서사가 있다면 그것은 미술사 내적인 이야기이며, 그마저 서구적 선례가 있는 정보 게임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어떤 정보라도 절대화만 시키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 유용할 것이다. 가령 모더니티(모더니즘이 아닌)에 대한 탐구는 민중미술이나 여성주의에도 큰 빛을 던져줄 것이다. 민중미술은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상호작용이었으며, 여성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과 단절했다고 간주되었던) 근대성에도 여전한 가부장적 권력을 들추어 냈던 것이다. 변혁의 시대에 일종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감수성은 어느 때 보다도 컸다. 소수의 기득권과 다수의 피해자를 낳는 지배적 질서에 대항하는 와중에 억압받던 세력들은 누구보다도 할 말이 많았다. 


전형적인 노동자가 아니어도 비슷한 상황은 비슷한 방식의 투쟁을 펼치게 한다. 지금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북소리와 투쟁가, 걸개그림과 깃발, 머리띠 등의 대표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80년대의 사건 현장과 그 현장에 함께 있던 예술이 그 이후에 펼쳐졌던 전형적인 풍경을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사건은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 내고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꺼리를 만든다.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세력보다 현실의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들에게 할 말은 많다. 1980년대는 중립이란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역동적 시대로, 침묵 또한 긍정적이든 아니든 사회적 메시지였다. 변명이든 합리화든 침묵도 그 이유가 있어야 하는 엄혹한 시대였다. 전후 제국의 질서가 공고화되는 시점에서 세계화의 질서에 편입한 198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은 폭력적인 군부독재에 의해 더욱 극화되었다. 어느 시대든 사건은 있어왔고 예술은 그것을 반영해왔다. 그러나 고도성장의 시대, 사회적 모순의 결정체인 사건들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2. 승화되지 않은 예술?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가 더욱 체계화되면서 합리성과 투명성은 높아졌지만, 타자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발전 논리(발전주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순은 또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기에 1980년대 주요 사건들에 대해 상호작용했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 자료로만 간주 될 수 없다. 사회에 반응하는 미술에 대해 당대의 주류 평단은 '거칠다', '예술로 승화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전형적이었다. 그 점은 보수적인 평론가들 뿐 아니라, 여성주의를 지지한 평론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주1, 2) 승화란 대개 지배적 상징질서에 부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체계의 빈틈을 뚫고 발화되는 이질적 언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와 어법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다는 사고에서인지, 좀 더 완곡하게는 내용은 훌륭하지만 형식이 조악하다는 식의 비판도 발견된다. 물론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시대에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예술은 시대와 더불어 약화 될 수 있다. 



둥지, 맥스테크민주노조, 1988년


그러한 ‘시류 영합적’인 예술은 시대와 함께 떠내려간다는 것이다. 어떤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예술은 ‘영원’해야 하는데 말이다.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작품’이 실제로나 기록으로나 많이 남아있지 않은 점, 최소한 명확히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가 없다는 점은 이러한 형식적 빈곤에 대한 비판 또한 어느 정도 수용할 수 밖에 없게 한다. 특정 사건에 일희일비하는 식의 대응에 대한 비판적 논리는 고전적인 기원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예술이 개별적인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기는 진리가 아름다움보다 더 강렬할 수 있다. 진리를 애매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은 아니다. 이미 있는 진리를 장식하는 것도 아름다움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발언해야 하는 시대가 있다. 계급적 지배가 더욱 교묘해진 지금의 기준에서 본다면 말이다. 80년대의 주요 사건들은 자본/노동의 대립에서 파생된 사건이라는 전형성을 띈다는 점에서 이미 보편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 법을 발의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명(또는 인명)에 ‘OOO법’이라는 표현을 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여성 작가에게 발견되는 페미니즘적 측면을 당사자가 굳이 부정하는--'나의 작품은 남녀를 떠난 보편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식의 논리--태도에도 '보편성'에 대한 상투적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80년대의 미술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사건과 연결시켜 보는 것은 시대에 대한 기계적 반영으로서의 예술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주의를 둘러싼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은 그 시대 미술의 내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여성주의를 둘러싼 안팎의 사건과 관련시켜보는 이번 분기의 시도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으로, ‘여성 25세 정년’에 대한 논쟁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그리고 한미 무역협정(UR)를 꼽고 싶다. 결혼할 때까지를 여성의 정년으로 본 당시의 판결은 지금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지만, 그때 여성계가 단합하여 투쟁하지 않았다면 여성은 자연에 묶인 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데 더 많은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부천 성고문 사건은 요 몇 년 새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미투’ 운동의 선조에 해당된다. 이 사건은 진보 진영에서 민족과 계급 중 어떤 것을 우위에 놓을 것인가에 대해 논쟁했던 시대에 성의 문제 또한 추가했다. 민족도 계급도 ‘인간’이란 표현과 마찬가지로 따지고 보면 한쪽 성만 호명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들 또한 ‘청년’으로만 호명된다. 1980년대의 대학문화에서 여성이 남성보고 ‘형’이라고 부르는 관습도 기억이 난다. 여성주의는 근대적 주체에 내재 된 남성성을 의식한다. 


근대적 주체는 외적으로는 중립적이지만, 중립적이지 않은 세계에서 중립은 그자체가 편파적이다. 페미니즘은 근대적 주체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별에 바탕한 부르주아적 주체라는 점을 밝혀냈다. 겉보기의 중립적 주체는 지배적 성의 관점과 긴밀하다. 역사의 진보를 추동하는 듯한 근대에 역사가 ‘history’임을 자각하고 ‘herstoy’라는 대안의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도 만들어졌다.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에서는 그림패 둥지의 작가 이정희의 [여성의 역사]의 예가 있다.(주3) 세계화 시대에 농민과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불균등한 무역협정에 대한 주제는 미술동인 두렁 등 주로 노동 현장 운동에 투신했던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나타난다. 두렁의 성효숙은 ‘우르과이 라운드에 대한 노동자들과 공동작업’을 작가의 주요작품 목록에 올려놓았다. 그 밖에 1984년 이화여대에서 처음 개설된 여성학과나 [성의 정치학](케이트 밀레트, 정의숙 옮김)같은 책의 번역 등은 여성주의 담론을 풍부하게 해주었던 ‘상부구조’ 내부의 사건들이다. 민중미술 운동에서 탄생한 여성주의 자체가 미술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들은 민중미술과 여성주의라는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3. 민족과 계급, 그리고 성

  

근대화는 도시집중을 야기하며 근대 도시는 여성들 또한 도시 노동자의 대열에 합류시켰다. 80년대 여성주의 미술에 반영되었던, 당시의 여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25세 여성 조기 정년제 철폐’(주4)에 관한 논쟁이 있다. 1985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직장인 이경숙(당시 22세의 전화교환원)은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25세 이후로는 가정주부로 살아갈 터인데, 가정주부는 일정한 수익이 없으므로 도시 일용노동자의 임금에 준하여 일당은 4천원으로 계산한다’는 판결을 받는다. 여성의 정년을 결혼하기 전 25세로 결정한 이 판례는 조영래 변호사 등 진보적 남성 법률가 뿐 아니라, 여성계의 투쟁을 통해 여성의 노동에 대한 문제를 수면 위에 올렸다. 여성의 사회적 노동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사노동 등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 또한 이슈화되는데, 그것은 2019년 현재에도 문제시 되는 것이다. 2018년 한해만도 여성의 그림자 노동에 대한 논의는 ‘히든워커스’(코리아나 미술관)전, ‘여성의 일’ 전(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다루어지기도 했다. 



여성 25세 조기정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노동자 이경숙(사진출전; 주석4 참조)


여성뿐 아니라 노동자를 소모품화하는 자본의 책략이 펼쳐지는 어디에서고 비슷한 투쟁은 이어지며, 그것은 권력이라는 대기 속에 살고있는 현대인에게 철저히 현재적이고도 미래적인 문제이다. 예술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하지만, 개인의 영역에 속한 그림자 노동의 영역에 속해 있다. 여성이자 작가에게는 두 모순이 중층적으로 작용한다. 김진숙, 김인순, 윤석남이 참여한 시월모임의 [반에서 하나로] 전(1985-1986년)과 그로부터 출발한 [여성과 현실] 전(1987-1994)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드러난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의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민중미술 뿐 아니라 여성주의 미술의 주요 발표의 장이 되었던 그림마당 민(주5)에서 1986년에 발표된, 검은 학사모를 쓰고 허드렛일을 하는 여성을 그린 김인순의 작품은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시기의 작품에 대하여 김인순은 ‘그것은 그림으로서의 이미지나 형상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가슴 밑에 쌓여져있던 여러 가지 분노들이 한꺼번에 소리쳐대고...내가 살아왔던 생활 속에서 여성으로서 눌리고 참아오고 체념했던 여러 가지 것들의 외침’(주6)이라고 토로하면서도 그러한 작품들이 과도기적임을 암시한다. 


80년대 중반을 넘어가는 즈음에는, 개인적 분노를 넘어서 사회적 ‘전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역사주의 풍의 비전을 떠오르게 하는 선적 진보로서의 전망은 여성 작가의 목표가 되기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여성 작가의 작품에 자주 호출되는 자연은 주체/객체의 관계 속에서 물화되는 자연이 아니라 순환적인 역사관을 가지는 대안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가족은 자연으로 간주되곤 했지만 여성주의 미술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여성주의 미술 내부에서 가족의 재생산을 위해 예술을 포기해야 하는 여성 미술인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다. 생업을 위해 예술을 포기하는 경향은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공적 영역에 속해 있는 드문 예술 관련 직업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점유하는 현실이 있다. 현실원칙이 보다 확고히 자리잡은 현재의 냉소적인 분위기와 비교하자면, 가히 폭발적인 논쟁의 시대였던 1980년대에 잡지사 주관으로 자주 열리곤 했던 간담회나 토론회 등에 자주 참여하던 인사들은 거의 넥타이를 맨 남성들이었다. 사회가 인정하는 미술계의 얼마 안 되는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자리는 희귀했다. 


이전 시대에 비해 여성은 미술계에 많이 진출하고 있지만, 미술 자체가 여성화, 즉 타자화되는 상황에서, 현실은 남녀를 떠나서 더 치열한 작가의식을 요구한다. 약간의 개선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더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않을 때 여성에게 그 자리가 돌아온다’고했던 어떤 페미니스트의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서 첫 개인전을 했던 김인순보다 좀 더 젊은 세대였던 정정엽은 ‘내가 졸업하던 85년은 잠자는 화단을 두드려 깨우는 많은 변화가 일고 있던 때’(주7)라고 하면서, ‘이즈음 내용 없는 형식실험의 화단풍토에 식상하여 진솔한 삶의 자기표현을 원했던 6명의 동문들과 터라는 그룹을 결성하였고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 전으로 3회의 전시회를 가졌다’고 회고한다. 그 후에도 미대만 졸업하고 작업을 지속하지 않는 동문들에게 전시회에 같이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메시지들을 보내곤 했다.(주8) 그러나 30 여년이 넘은 현재에도 미술 대학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학생들 숫자에  비한다면, 작가를 비롯한 사회적 진출은 많다고 할 수 없다. 그 점은 여성주의가 여전히 필요한 대목임을 알려준다. 

  

4. 성과 혁명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심정으로 썼을, 여성주의 미술가가 쓴 긴 논문 [근현대미술에 나타난 여성이미지](김인순)(주9)는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의 저서 명을 본 따온 당시 잡지의 특집 제목처럼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에 답하기 위한 미술사적, 비평적 연구이다. 여성주의 미술에서 담론의 역할을 매우 중요해서 전시회에선 슬라이드 상영이 동원되는 세미나가 자주 열리곤 했다. 당시의 용어로 일종의 ‘의식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의식화가 병행되는 작업/전시방식은 1984년에 여성학과의 개설같은 이론적 차원의 지원과 당시에 앞서갔던 진보적 문학 담론과의 관련을 생각할 수 있다. 김인순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에 끼친 당대의 문학적 영향을 말한다.(주10) 1980년대 대학가의 주요자리를 차지했던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서점들, 그리고 당시 문학의 삽화를 수놓았던 강렬한 이미지들은 진보적 미술운동의 산물이다. 책자의 표지와 지면들은 당시의 미술로서는 중요한 매체였다. 


정정엽이 속해 있던 또 하나의 중요한 그룹은 미술동인 두렁이다. 두렁의 일원이었던 평론가 라원식은 [사랑과 투쟁의 변증 속에서 생장한 노동미술 1-80년대 노동(해방) 미술운동](주11)에서 1984년에 출발한 민중미술의 중요한 단체인 두렁에서 여성 작가들의 활약상을 자세히 서술한다. 민중의 삶과 세계관을 담는 민족적 형식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해 왔던 두렁에게 농민은 노동자만큼이나 중요한 주체였다. 1986년에 있었던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Uruguay Round of Multinational Trade Negotiation, UR)(주12)는 농민을 중시하는 문화예술단체에 큰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농민운동의 전통이 있는 우리에게 세계화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차원의 저항을 야기했다. 민족적이면서도 민중적인 내용과 형식을 고민한 단체 두렁의 작품들에서 기층민중으로서의 농민 이미지는 자주 발견된다. 두렁의 여성 작가들은 저개발 국가의 농민 희생을 담보로 하는 세계 무역질서의 재편에 대한 반발을 걸개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전시장 활동보다는 현장 활동에 치중했던 미술동인 두렁은 어쭙잖은 지식인/작가의식보다는 강력한 민중 지향성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당시 또 다른 중요한 민중미술 그룹으로 두렁보다 ‘현대적’이었던 [현실과 발언] 보다 여성의 참여가 활발했던 것은 전통과 현대의 관계 속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해 숙고할만한 대목이다. 생산력이 현대보다 떨어지는 전통사회에서는 이해관계의 대립이 덜 첨예했을 것이므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오히려 확실할 수도 있다는 추정을 해본다. 여성은 전통시대보다 자유로워진 듯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적 개인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한계가 많은 ‘자유’였다. 누군가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란 말이 없어질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80년대 여성주의 미술 에서 중요한 사건은 1986년에 벌어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주13)이다. 보통 은폐되곤 하던 성관련 사건을 용감하게 드러낸 여학생 권인숙은 30 여년이 지난 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은 크고작은 성폭력을 폭로하고 연대를 구하는 거대한 흐름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엄혹한 시절에 선구적인 실천을 하고 이후 여성학자가 된 권인숙은 요 몇 년간 봇물처럼 터지는 미투의 시대를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정권에 의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공격을 받은 ‘권양 사건’은 역으로 성 또한 민족이나 계급의 문제만큼 혁명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들은 혁명과 성의 관계를 지적했지만, 페미니즘은 성과 혁명의 관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권인숙 사건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을 다룬 작품들(주14)은 그 내용을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 화가가 재판과정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사건의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작가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형식적인 고민이 있었다. (주15) 내용을 중시하는 예술이야말로 형식의 문제에 예민해야 한다. 형식이 내용인 형식주의 미학은 궁극적으로는 동어반복적이어서 형식과 내용을 분리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내용을 부정하면서 예술이 가지는 근본적인 힘을 제거한다.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은 할 말은 많았지만, 효과적인 전달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보였다. 1990년대가 되면 민중미술 한켠의 여성주의를 넘어 다른 여성 작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불의 퍼포먼스 [낙태],1989년


자매애(Sisterhood)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민중미술이나 여성주의 외곽에 있었지만 1980년대의 이불의 작품에 나타나는 성과 욕망의 문제는 1990년대를 예견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정립과 확산에 큰 역할을 한 김홍희는 이불의 작품을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해석한다(주16) 당시 이불의 작품은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나서도 주요작품의 면면에 흐르는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이불의 초기작품이라 할 수 있는 1980년대 작품들은 지금도 국내외 미술계에서 자주 호명되곤 한다. 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주요한 사건들과 상호작용하던 여성주의 미술은 1987년에 민주주의 운동이 대중화되는 시대가 열리자 물 만난 고기처럼 활발하게 활동했다. 라원식은 [새누리를 일구어내는 페미니즘 미술-80년대 여성미술운동]에서 이들의 활동을 생생하게 기록한다.(주17) 역사적 현장과 함께 했으며 같이 쓸려가기도 했던 여성주의 미술은 현재적 요구가 제기될 때마다 재차 호명되고 호출될 것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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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김홍희,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방향모색을 위한 페미니즘 연구], 미술세계 1992년 9월호 p28-39. 김홍희는 ‘[여성과 현실]은 여성주의 의식을 갖춘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1987년 9월 그림마당 민에서 개최된 [여성과 현실] 그룹전을 계기로 처음 여성에 의한 여성 미술과 구별되는 여성주의 미술, 즉 미술에서의 페미니즘이 공적으로 거론, 인식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1992년 7월 말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여성화가 4인전 [함께 걷는 길]은 민중 여성주의 화가들이 태동 후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여성주의적 의욕을 담을 만한 조형적 용기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예술보다는 이념을 앞세움으로써 남성 민중미술의 관례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차별에 대한 보편적 문제보다는 계층으로서의 여성과 그들의 의식을 가시화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은 여성주의 미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여성민중미술 혹은 쟁의적 여성미술이라고 불리워야 할 것이다...’

 

주2) 오광수, [86년 한국미술의 동향분석], 1986년 공간 12월호  p29  ‘...[우리시대의 성]과 [반에서 하나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구체성을 띈 실천의 방법적 접근이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방법적 접근을 구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빈곤한 상상력 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방법을 전연 지니고 있지 못한 편이다. 아니 숫제 그러한 방법 자체를 무시하려고 하고 있는 인상이다....’ 

 

주3) 이정희, [나만의 밀실에서 해방된 세상으로], 가나아트 90년 9-10월호 p63에는 [여성의 역사] 시리즈 90 점 중의 하나가 게재되어있다. 이 작품들은 민미협 노동미술 위원회 여성부 여성분과 만화팀과 공동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4) 이 사건의 전반적 전개양상에 대해서는 웹 싸이트 ‘여성인권운동 아카이브 ARCHIVE MOON’의 ‘1985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여성단체 연합회 활동 보고서’ 참조.

 

주5) 그림마당 민(1986-1994)은 2000년대 이후에 주류가 되다시피 한 대안공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성주의 미술의 중요한 전시인 [여성과 현실] 전 등이 열렸다. [여성과 현실] 전은 미술계 내부를 향한 것이기 보다는 전체 여성운동과의 연동성이 특징이다. 가령 제3회 [여성과 현실] 전은 1989년 한국 여성대회 미술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것이다. 그 전시의 주제는 ‘민족의 젖줄을 거머쥐고 이 땅을 지키는 여성이여!’였으며, 민족미술협의회 산하 여성미술연구회(대표 김인순) 회원 30명이 참여했다. 그림마당 민과 여성주의 미술의 관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현아, [민중미술 운동으로서의 여성미술; 그림마당 민 전시를 중심으로], 홍익대 예술학과 논문 참조.


주6) 김인순, 가나아트 89년 11-12월호, p46. 

 

주7) 정정엽 [여성미술과 나], 가나아트 1990년 9-10월호. p66-67.

  

주8) 라원식, [새누리를 일구어내는 페미니즘 미술-80년대 여성미술운동], 미술세계 92년 9월 p40-45 ‘김인순, 윤석남, 김진숙, 김종례, 문샘, 정정엽, 최경숙, 신가영, 구선희, 김민희, 이경미는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도 스스로의 전공을 살리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는 수 많은 여성들을 여성미술 운동에 동참시키기 위해 페미니즘 미술전을 기획. 이들은 전시준비위원회를 꾸렸으며 미술대학 졸업자 주소록을 모아 4000명의 여성들에게 동참을 권유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40여명이 함께 참여하겠다고 답신을 보내왔으며, 87년 10월 [여성과 현실-무엇을 보는가] 전(87.10.11—17, 그림마당민)을 개최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의 폭과 의식의 테두리 내에서 맴도는 작품들이 다수였으며 여성의 현실을 제약하는 사회구조와 여성 자신의 의식 및 무의식 내부를 심층 있게 파헤쳐 이를 극적으로 드러내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귀했다...’  

 

주9) 김인순, [근현대미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가나아트 90년 9-10월호 p46-53.

 

주10) 김종길과 김인순의 대담, [김인순, 현실에 맞서다], 황해문화 2016년 12월호 p360. 그즈음 양평군립미술관에서 회고전(2016.10.21.-11.24)을 개최한 김인순은 이 대담에서,‘ (미술보다는) 문학운동을 통해서 배웠어요. 1980년 실천문학사에서 만든 실천문학을 통해서요’라고 대답한다.

  

주11) 라원식, [사랑과 투쟁의 변증 속에서 생장한 노동미술 1-80년대 노동(해방) 미술운동], 미술세계 92년 10월 p102-109. 

 

주12) 웹싸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루과이라운드’ 항목 참조. ‘...1980년대 들어 미국은 자국의 농업공황, 제조업 쇠퇴, 서비스산업 팽창이라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경상수지의 적자에 직면하여 새로운 무역질서 구축을 시도하게 되었다. 즉 농업·서비스산업 및 첨단기술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하여 세계 경제에 대한 패권을 회복,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 대자본의 이익추구가 GATT를 통해 반영된 것이 우루과이라운드이다...’

 

주13) 웹싸이트 나무위키의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참조. ‘1986년 6월 5일 부천경찰서(현 부천남부경찰서)의 경찰관 문귀동이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에 다녔던 학생운동가 권인숙을 성폭행한 사건. 흔히들 부천서 성고문 사건, 심지어 당시에는 성고문이라는 표현도 제외하고 '부천서 사건', 또는 '부천서 권 양 사건' 등으로 에둘러서 표현되었던 사건이다.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5공화국 정권은 권인숙에게 '급진 좌경사상에 의한 노학연계 투쟁을 전개했던 권양의 성적 모욕의 허위사실 유포는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훗날 권인숙은 진보 진영과 함께 하여 승소한 이 사건을 시작으로 1994년 유학을 거쳐 여성학자가 되었다.’

 

주14) 민혜숙, 김인순 작가론 [여성과 현실, 그 모순의 벽을 허물며], 가나아트 1989년 11-12월호 p44-53. 여성주의 미술이 자주 열리곤 하던 그림 마당 민의 큐레이터이기도 했던 평론가 민혜숙은 김인순의 [파출소에서 일어난 강간](1989)에 대해 설명한다. ‘...제3회 여성과 현실 전에 출품된 [파출소에서 일어난 강간](89)은...한 여인이 공권력의 상징인 파출소에서 두 명의 경관에게 강간을 당하고도 여성의 미덕을 지키지 않고 고소했다가 두 경관에게 무고죄로 맞고소를 당하면서 겪게 되는 검사와 경찰력의 상상을 불허하는 횡포와 정숙한 여인들의 손가락질을 그린 것이다...’

  

주15) 오혜주, [조용한 축적]. 가나아트 1990년 1-2월호 p172-173. 평론가 오혜주는 제4회 [여성과 현실]전 리뷰에서,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활용한 불화(佛畫)의 서사 양식을 지적한다. 

  

주16) 김홍희, 월간미술 94년 _월호, p142 [기획대담] 엘리노 허트니(미국의 미술평론가)가 본 90년대 한국미술/ 대담 김홍희, ‘우리나라의 경우 본연적으로 여성성을 표출하는 여성작가는 많지만, 페미니스트 의식이 있는 페미니스트 작가는 아주 드뭅니다. 성차별, 낙태 등을 주제로 작업하는 행위예술가 이불같은 작가가 있기는 하지만요. 페미니즘이 종래는 남성 고발적인 분리주의 차원보다는 성차별의 구조적 모순을 적발하는 문명 비판적 차원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할 때에 한국의 페미니즘도 포스트모던적 궤도를 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한국이 서구와는 다른 여성의 역사를 가졌을 것이라 말씀했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여성해방은 외국의 경우와는 다르게 개화된 남성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여성 자신의 피와 땀으로 얻은 자유와 해방이 아닙니다. 나는 페미니즘 미술만은 여성들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러리라 믿습니다.’ 

 

주17) 라원식, [새누리를 일구어내는 페미니즘 미술-80년대 여성미술 운동], 미술세계 92년 9월 p40-45. ‘[반에서 하나로] 전 이후 시월 모임의 김인숙, 윤석남, 김진숙은 김종례, 문샘, 그리고 터 동인(85년 결성)인 정정엽, 최경숙, 신가영, 구선희, 김민희, 이경미와 함께 여성 미술인 모임을 꾸렸다.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여성학과 현실주의 미학을 공동학습하면서 이 땅의 여성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켜나가는 한편, 여성(해방)미술의 진전과 확산을 예비하였다. 87년 6월 터 동인은 여성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었다. 그해 뜨거웠던 여름 항쟁의 중심지였던 명동성당 앞마당에서는 6월항쟁을 기념하는 민주 시민대동제가 신명을 북돋으며 펼쳐졌다. 김인순, 윤석남, 김종례, 구선희, 정정엽, 최경숙은 ‘시민과 함께 대동 그림 그리기’를 주도하였으며, 그 결과 걸개그림 [민주해방도]가 협동 창작되었다. 이 작품은 춤꾼 이애주가 바람맞이 춤을 추는 것을 주대로 중앙에 부각시킨 다음 좌우로 6월 항쟁의 이모저모를 옴니버스 식으로 펼친 것이었다.’

 




출전; 예술경영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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