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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경 / 또 다른 기원을 향하는 기원들

이선영

또 다른 기원을 향하는 기원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조이경의 작품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타나는 현대 이미지의 속성이 나타나 있다. 도시에서 살고 작업했던 근대예술가들이 일찍이 감지한 파편화된 시공간 의식은 디지털 문화에서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생산자의 관점에서는 무엇하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자동성이 있다면 그 또한 창안되고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좀 더 쉽다. 이미 있는 것을 선택하고 조합하면 된다. 현대의 작가는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다. 작업은 노동과 달리 좀 더 총체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조이경은 소비자의 입장을 좀 더 강조하지만, 최종 산물은 소비 그자체가 아니라 소비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다. 간극과 균열이 많은 작품은 고전적인 의미의 작품(work)이기 보다는 텍스트에 가깝다. 텍스트는 수많은 맥락을 가진 또 다른 텍스트로 분열하고 합체된다. 그것은 매체가 디지털 방식으로 변화된 이후 소유보다는 공유가 일반화된 상황을 반영한다. 




 Patterns_ 80x80(cm)_ c-print_ 2017



전시부제 ‘Image of Others’는 기성의 자료들에서 선택하여 재생산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고전적 의미의 예술작품은 주체가 창조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텍스트로서의 작품은 예술이 타자로부터 온 것들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작품이 작가와 동일시되었다면, 텍스트는 텍스트로서의 주체를 전제한다. 작품과 마찬가지로 주체 또한 타자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먹은 것들이 내 몸을 이룬다면, 내가 지각한 것들이 내 정신이 아니겠는가. 예술작품이든 예술가이든, 강한 응집성을 가지는 동일자는 해체된다. 조이경의 탈구축(deconstruction)된 작품들은 중점적 이미지가 던지는 단일한 의미 대신에, 상호보완하고 대리하는 느슨한 비유가 있다. 작가가 기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유희했듯이, 관객 또한 작가가 재맥락화시킨 코드로 자유연상 게임에 임할 수 있다. 입체파가 최초로 시도했다고 기록된 꼴라주는 인류의 오래된 유희 방식이었고, 디지털 사회에서는 ‘딥페이크(deep fake)’같은 이음매 없는 기술이 발전한다. 


자본과 기술이 집중되는 대중문화가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절묘한 기술을 개발한다면 개별작가들은 가상에 몰입하기보다는 가상을 만들기 위한 재료와 과정을 노출한다. 완성작인가 의심스러운 작품 [살아남은 이미지](2018)에는 그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조이경의 작품에는 틈과 간극이 산재하며 굳이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매우 화려하다. 작가는 소비자 대중의 눈길을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작동하는 스펙터클의 방식을 참조한다. 순간순간 관심을 유도하지만 전체적으로 뭘 보았는지, 무슨 내용인지 불확실한, 즉 대중이 이미지를 소비하는 산만한 방식이다. 대중은 끝없이 보려고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는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물이 공간적으로, 인간적으로 보다 가까이 당겨오는 것, 이것은 현대의 대중의 열렬한 갈구가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갈구에서 사물을 감싸고 있는 고유한 분위기는 파괴된다. 




 Josephine_ 144x144(cm)_ c-print_ 2018



 Between New Year's Day and Valentine's Day_ 144x144(cm)_ c-print_ 2019



벤야민은 그것이 현대의 지각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복제의 중요한 수단인 사진의 발명으로 인하여 예술 전체의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 근본적 물음을 던졌다. 벤야민은 단지 예술의 성격이 바뀐게 아닌가를 물었지만, 후대 사람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술은 죽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곤 한다. 이브 미쇼는 탈미학화된 현대의 문화예술 상황을 진단하는 책 [기체 상태의 예술]에서 벤야민의 생각을 이어서 말한다. 그에 의하면 사진은 우리가 빠르게 지나쳐버리고 가볍게 여기며 부유하는 듯한 주의력에 호소하는 이미지들로, 사진의 도래 이후 그림은 더이상 기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일 수 없었고 기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려질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배치일 따름이다.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뒤샹의 작품은 가장 유명한 배치일 것이다. 


영상의 시대에 나고 자란 조이경은 예중과 예고를 다녔지만, 회화보다는 사진이나 영상이 먼저 문화를 통해 체득되었을 것이며, 작품의 재료로 물감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전 시대의 작품같은 아우라를 만들기 힘들 것을 안다. 오늘날 프로페셔날한 화가들은 그러한 아우라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화이트 큐브를 비롯하여 지원되어야 할 사항이 아주 많다. 이번 전시의 최종 산물은 사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영상, 사진, 그림, 설치 등을 어지럽게 섞어 썼던 기존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러 매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이미지는 휘발되어 잘 알아볼 수 없는 대신에 새로이 접속된 것에서 생성되는 것이 있다. 조이경이 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쿨하다.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 앞에서 놀 듯이 작업하고 작업하듯이 논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이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개진한 이론에 의하면, 조이경의 작품은 쿨미디어에 속한다. 




 오월의 어떤 날_ 144x80(cm)_ c-print_ 2018



 The World News_ 90x60(cm)_ c-print_ 2016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의하면 핫 미디어 하나의 감각만으로 채워진 매체이다. 마샬 맥루한이 말하는 핫 미디어란 단일 감각을 확장하여 높은 정세도(high definition)를 지닌 것을 말한다. 이러한 예는 모더니즘 미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시각성이라는 하나의 감각에 의존하며 거기에서 충만함과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반대로 쿨미디어는 여러 감각이 공존한다. 하나의 감각, 하나의 기호가 지배하지 않는 쿨 미디어에서 모든 감각, 모든 기호가 병존한다. 인쇄의 시대를 넘어 전기와 전자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서 한 종류의 감각에만 의존하는 매체의 운용 방식은 빛을 바랬다. 핫 미디어에서는 인간의 확장된 감각들이 집합적으로 상호작용한다. 맥루한은 이러한 감각들의 집합적 상호작용을 지혜라고 하면서, 하나의 감각작용인 지식과 구별하기까지 한다. 조이경의 작품에서 SNS를 비롯하여 어디선가 발췌해온 기표의 조합은 패턴으로 나타난다. 


작품 [Patterns](2017)은 제목처럼 여러 패턴들이 뒤엉켜 있다. 대체로 다 화려한 색상과 눈에 띄는 무늬들이다. 의상 등 몸의 일부이며, 신체의 일부가 함께 드러나기도 한다. 지시대상이나 의미로부터 자유로워진 기표들은 경쾌하다. 많은 작품에서 규칙적으로 적용되는 듯한 정사각형 프레임은 시선이 통과하는 화면이기보다는 부유하는 기표들을 순간적으로 한정시키는 장치로 다가온다. 작품 [Josephine](2018)은 꽃다발을 든 손이 어색하게 꼴라주된 하얀 드레스의 몸통이 크게 자리한다. 얼굴이 없다는 점에서 익명적이지만, 그 주변의 화려한 모자, 집, 정원의 파편들의 소유주처럼 느껴진다. 어디선가 취해진 기표들은 자유롭지만 완전히 우연적이지는 않다. 미끄러지는 관계 속에 있는 기표들은 순간적이나마 고정된다. 작품의 물리적 속성 속에서, 그리고 관객의 심리적 시선 속에서 말이다. 또한 최종 산물도 하나의 화면으로 보이는 한에 있어서 시각적 관습을 따른다. 




 The Good, The Bad And The Queen_ 144x144(cm)_ c-print_ 2018


작품 제목 또한 의미의 방향타 정도는 제시한다. 작품 [Between New Year's Day and Valentine's Day](2019)는 ‘발렌타인 데이’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 하트 모양의 패턴들과 살덩어리의 이미지가 풍부한 축제적 분위기다. 그러나 자유로운 기표의 조합 속에서도 중력감은 보존된다. 작품 [The World News](2016)에서 화면의 중심이나 중력감은 확실하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내려오는 실내를 무대로 해서 사람들과 식물 이미지가 배열된다. 어디선가 떼어온 이미지에도 삶의 역설은 묻어있다. 우리는 그것을 온전한 이미지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작품 [The Good, The Bad And The Queen](2018)에는 계급의 격차를 알 수 있는 도상들의 대조를 이룬다. 땅을 딛고 서 있는 중앙의 인물은 영국 여왕이다. 작가를 찔러왔던 미묘한 매력(푼크툼)을 담지한 자주색 구두를 신은 발목은 정확히 재현되어 있다. 


그러나 치마의 주름부터 시작해서 손과 얼굴을 사라진다. 원경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대조된다. 한 화면에 대비되는 삶의 이미지들이 공존, 충돌하는 이 작품은 미디어의 전형적인 속성을 반영한다. 작품 [오월의 어떤 날](2018)은 파편적 이미지들이지만 오월의 화창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화면 상단의 구름 하늘과 초록빛 대지의 조합이 그런 느낌을 준다. 파라솔, 공 등 놀이적 분위기. 화면 상단의 하체는 환희의 기표일까 절망의 기표일까 확신할 수 없다. 높이 솟은 송전탑이나 안전요원, 거꾸로 선 교회 이미지가 무조건 행복해야 할 계절의 여왕 오월에 일어났던 불길한 사건일 수도 있다. 계층과 사건뿐 아니라 오감도 대조를 이룬다. 비린내나 향수 등, 후각을 자극하는 작품 [Between The Shower or The Bath](2016)에서 여인의 등줄기를 떠오르게 하는 거대한 생선 가시는 목욕이라는 행위에 담긴 오염의 제거라는 행위를 무색하게 한다. 




 타인의 고통_ 144x144(cm)_ c-print_ 2018



수잔 손탁의 책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는 작품 [타인의 고통](2018)은 재현이 아니라 재현의 해체를 지향한다. 정확하게 재현된 장면은 그 의도가 어떠하든 다시금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특종을 노리는 대중매체도 너무 가혹한 장면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한다. 이 작품은 고통의 이미지로 생각되지 않는 화려한 구성이 특징적이지만, 화면 상단에 슬픔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생각하게 한다. 불꽃놀이도 연상시키는 폭발 이미지나 그 앞에 놓은 촛불, 버려진 인형, 특히 희생을 떠오르게 하는 초식동물 등은 현대사회가 상시적으로 겪고 있는 일상 속의 전쟁, 즉 테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기원을 가진 기표들이 혼합되는 작품은 자연과 문화의 구별을 무색하게 한다. 자연은 이미지화 되면서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오지만, 문화 또한 정글 못지않은 난맥상을 보여준다. 


작품 [덩굴부터 엄마까지](2016)는 인간의 계획과 손길이 닿은 듯한 자연 풍경이지만 마치 원초적인 숲처럼 혼란스럽다. 관객의 시선은 어디로 들어가 어디로 나와야 알 수 없을 만큼 표면에 떠 있는 이미지들이 많다. 마치 원초적 숲이 순조로운 입장을 허락하지 않듯이 말이다. 화사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주는 자연은 작품 [Das Bild](2018)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는 여러 층의 식물 이미지 층을 통해 만들어진 자연 한가운데 벌어진 어떤 사건의 단편이 일부 보인다.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라는 전통을 떠오르게 하는 소풍 이미지 안에 자리한 난데없는 전복된 자동차 이미지는 역설이 일상화된 현실을 말해준다. 작품 [살아남은 이미지](2018)에는 다른 작품과 달리 공백이 많다. 그것은 이미지들이 쌓이고 지워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의자와 슬리퍼의 일부는 사라지고 없고 후경의 이미지는 무엇인지 전혀 연상이 안 된다. 이미지들은 블록처럼 쌓이고 무너지는 단위로 작용한다는 것일까.




 덩굴부터 엄마까지_ 120x180(cm)_ c-print_ 2016



 Das Bild_ 120x80(cm)_ c-print_ 2018



공백은 그 위에 얹혀진 사물/이미지들을 잠식하며 바닥없는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기표의 형식으로 축약하여 조합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정된 화면 속에 무한정 넣을 수는 없는 법이다. 가능한 총량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무엇인가 생성되기 위해 무엇인가는 소멸되어야 한다. 이때 문화는 자연과 같이 취급된다. 매체와 매체가 여러 차례 섞이면서 원래의 이미지나 매체가 불확실해지는 현상도 두드러진다. 가령 이전 작품에서 물감을 칠한 아크릴판에 영상을 투사한 후 사진으로 완성한 작품이나 현실 공간 또는 3차원적으로 세팅된 구조에 영상을 투사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완성한 작품이 그러하다. 영상과 사진뿐 아니라, 때로는 물감도 개입되기 때문에 화면의 이질성이나 복잡성은 매우 커진다. 여러 매체를 횡단하면서 원래의 이미지는 세탁된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의 흐름을 타는 대상에 작가는 시간을 가속화 한다. 마치 자연의 과정을 압축 재현하면서 실험을 행하는 과학자처럼. 


전시부제 ‘Image of Others’는 작품에 사용된 소재들이 자신으로부터 기원한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소재들의 기원을 하나하나 따져 본다 한들 그 또한 다양한 기원으로부터 조합된 것이다. 10대부터 영화를 즐겨봤던 조이경이 많이 활용해 왔던 소재인 영화, 그리고 영화 전 단계의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사진 속에는 유성영화가 잠재해 있다’(발터 벤야민)--은 그자체로 이미 조합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편집자가 주어진 자료를 가지고 구성한, 여러 자리에서 찍은 사진의 일정한 계열, 이것이 완성된 영화라고 규정한 바 있다. 벤야민은 연극배우와 영화배우, 그리고 외과의사와 화가를 비교하면서 새로운 복제술이 가지는 단편성을 강조한다. 가령 영화배우의 연기는 카메라를 통해서 제시된다. 영화배우는 무대 배우에게 주어져 있는 가능성, 즉 공연 중 청중에 맞추어 자신의 연기를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한다. 



 Between The Shower or The Bath_c-print_ 83X125(cm)_ 2016



사람은 처음으로, 즉 영화로 인해 자신의 생생한 인격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부분으로서 그 분위기를 포기하면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상황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움직이는 배우는 자신을 자신의 역에 완전히 던져 넣지만, 영화배우에게 그러한 기회는 보통 주어지지 않는다. 그의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기가 아니라 여러 개의 분리된 연기를 가지고 한데 엮어낸 것이다. 조립하기 쉬운 삽화로 연기자의 연기를 쪼개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기계의 기본적인 요구가 작용한다.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과 같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거울 또한 신체의 부분들이 가상으로 봉합되는 장 아닌가. 벤야민은 회화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해석하는데, 그에 의하면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인 것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들로 새로운 규칙에 따라 조립된 것이다. 


현대미술의 어법에 큰 영향을 주었던 입체파의 꼴라주는 회화가 사진이나 영상의 방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꼴라주는 공간적 배치를 통해 가능하지만, 몽타주는 시간적이다. 시간의 예술인 영화는 시간을 매개로 이미지/단편들을 꼴라주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몽타주는 이미지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시간의 기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꼴라주나 몽타주는 시공간의 재배치를 통해 작품을 바깥으로 열어놓는다. 사진과 영상을 활용하는 조이경의 작품에서 시간성은 빛과 관련된다. 일상체험에서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지각의 조건은 빛이니 만큼, 빛의 조율은 중요한 과정이다. 또한 시간은 기억과 관련—‘시간 이미지는 기억의 이미지’(베르그송)이다—되며, 간극이 많은 단편들을 모종의 이야기로 이끈다. 단편들의 조합을 통한 기억은 명확한 연대기를 가지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 재현보다는 간극과 간극 속에서 생성되어야 하는 미지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살아 남은 이미지_c144x144(cm)_ c-print_ 2018



그렇게 해서 작품은 ‘시지각적이고 음향적 이미지가 기억의 층을 가로질러 동요하는’(로도윅) 촉발지점이 된다. 사진이나 영상을 재활용하는 작가가 사용하는 ‘원본’들은 이미 해체되어 있다. 실제 상황에서 비롯되는 일회적 현존인 아우라는 사라졌다. 사진이나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사람도 단편적이다. 작가는 더이상 사진을 인화하지 않고 인터페이스에서 순간적으로 소비하는 문화를 말한다. 조이경의 작품은 하나의 프레임에 안치될 수 있는 안정성이 아니라, 부분에서 부분으로 쉼 없이 시선을 이동하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조형적 영화이다. 그러나 정확한 줄거리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히려 영화의 본질을 겨냥한다. 즉 조이경의 ‘영화’는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인용된 바처럼, ‘고정과 지평의 중심을 결여한’ 영화, 즉 ‘사물의 중심 잡힌 지각으로 나아가는 대신, 오히려 중심 없는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며 점점 더 그에 가깝게 다가가는’(들뢰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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