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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진 / 진동하며 헤쳐 모이는 이미지의 소립자들

이선영

진동하며 헤쳐 모이는 이미지의 소립자들

안두진 전 (2008. 2.13--3.14, 사루비아 다방)

 

이선영(미술평론가)

  

 몇 년 전 다른 대안공간에서 열린 안두진의 전시 때처럼, 전시장은 또 하나의 성소(聖所)로 연출되었다. 브레인팩토리에서의 전시가 천정화와 제단,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면, 사루비아다방에서는 건물 같은 구조가 기둥을 끼고서 전시장 한켠에 조성되어 있고, 나머지 공간에 그림과 오브제들이 설치된다. 어두컴컴한 지하 전시장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변과 달리 강한 조명을 받는 중앙의 구조물에 칠해진 오렌지색은 현기증을 자아낼 만큼 강렬하다. 작은 것들이 우글우글 자리 잡은 그림과 오브제들에 비해 추상적인 평면을 이루는 단은, 색 그자체가 품어내는 활기로 어지럽다. 안두진의 그림은 환상적이고 기이한 이미지로 가득한데, 단색으로 처리된 이 추상적 구조물은 그 세계들에 빠져들기 위한 입구가 되는 셈이다.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는 무대는 여러 방향으로 입구가 뚫려있다. 다양한 요철을 가지는 벽면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가 된다.


벽면에는 크고 작은 그림이 걸려있는데, 모두 단 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단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따라 그림의 스케일이 달라지고, 그림은 그 아래에 설치된 조그마한 오브제들의 배경이 되어준다. 가령 창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는 작은 그림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장대한 원근법적 스케일을 가지는 그림이 걸려있다. 그뿐 아니라 관객이 직접 열고 닫을 수 있는 문도 있는데, 안쪽에 여러 색채로 꾸물거리는 패턴이 뒤덮인 문 뒤로 어디론가 다급하게 달려가는 기사와 마주치게 한다. 사루비아 다방에 뚫려있는 작은 굴로 연결된 문을 통과하면, 양쪽에 바깥으로 뚫린 마주보는 창문이 있는 방이 나온다. 마치 수도사의 작은 기도실 같은 그 곳은, 스테인드 글라스같은 효과를 주는 안료로 칠한 창문과 고딕 성당의 파사드같은 형태의 또 다른 창이 잔잔한 빛을 발한다. 


사원 밖은 안과의 조명 차이, 그리고 시멘트벽과 바닥 때문에 어둡다. 어둑한 여백의 공간에 작가가 수집하거나 직접 만든 작고 다양한 형형색색의 오브제들이 열을 지어 설치되어 있는데, 스케일의 차이 때문에, 관객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벽면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나 작은 오브제들이 바닥에 빼곡이 도열한 모습 등 은, 동화 속 왕국 작은 마을 같은 평화로움이 아니라, 뭔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돈다. 단은 높이와 크기, 위치, 밝기 등으로 사방의 것들을 바깥으로 만든다. 무엇보다도 태양의 색깔이기도 한 단의 색은 관객이 서있는 그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물리적인 위치가 중앙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벽면과의 거리를 다양하게 주고, 옆에 뚫린 감실과의 연결통로 등을 고려하여, 전시공간의 중심을 벗어난 곳에 단을 설치하였다. 장소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개별 작품들로 흩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강력한 맥락을 부여한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 쉬운 분열적인 이미지는 성소라는 상징적 구조에 힘입어 각자 제자리를 찾는다. 


안두진의 작품은 이미지의 소립자에 의해 구성되거나 해체된다. 그가 말하는‘이마쿼크 imaquark’는 image의 'ima-'와 소립자의 복합모델의 기본 구성자 ‘quark’의 합성어로, 그가 만든 이미지의 최소단위의 이름이다. 이마쿼크는 블록이나 유닛이 되어 다양한 형상으로 조합된다. 예전 작품에서 이마쿼크는 분열적인 이미지로 바닥과 기둥, 벽면 등 을 타고 다녔는데, 전체적으로 강력한 비주얼을 창출하기는 하였지만, 흩어짐 즉 무의미가 문제였다. 어여쁜 장식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안두진은 이미지의 최소단위들을 성소라는 중심적 구조로 집약시킨다. 이 국면에서 그의 작품은 종교적인 면모를 보인다. 성황당이나 성당 같은 모티브가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 장소에 응집되어 체계를 이루면서 구성요소들이 상호 조응하는 상징적 우주를 형성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헤쳐 모이면서 형상을 이루는 입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바탕을 중심으로 배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벽면 가득히 기표들이 쇄도하는 ‘히스테리성 숭고’(F. 제임슨)는  성화된 상징적 공간에 의해, 각각이 아닌 전체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현대의 작가인 안두진은 전통적인 종교의 상징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하위만화의 이미지가 도입되었는데, 두 가지 색상으로만 이루어진 모티브들이 그것이다. 이글거리는 색채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간 ‘블랙 시리즈’는 강렬한 그림자에 해당된다. 이 전시에서 관객이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기사가 이러한 방식으로 그려졌다. 작가는 블랙 시리즈의 연원을 빛과 어둠을 대비가 강한 바로크와 낭만주의 회화, 그리고 프랭크 밀러의 만화 [씬 시티 sin city]의 기법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의 작품에서 빛과 어둠의 대조는 종교적 상징주의 및 느와르 풍의 하위문화와 결합된다. 대중문화가 현대문화의 우세 종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파토스가 부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안두진의 작품은 그 접점에 놓여있다.  


물론 그의 작품은 종교예술이 아니며, 단지 종교를 소재로 삼은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종교와 예술이 만나는 근본적인 층위에 주목한다.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종교는 구체적인 신조나 역사적인 제도라기보다는, 신비로운 우주에 대한 인간의 생생한 관계라는 점이 중요하다. 작가에게 성스러운 존재와 만나는 체험은 먼저 심미적인 것이며, 안두진의 경우 이러한 경험은 장소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종교적 경험은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이며 감동적이고 심원한 경험, 곧 강렬함’(반 데어 레후)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루돌프 오토가 [성의 개념]에서 ‘누미노스’라는 용어로 범주화한 경험과 비슷하다. 종교학적 정의에 의하면, 누미노즘Numinosum의 원래 뜻은 ‘신의 의지에 의한 것’, ‘신적인 것’인데, 신성the Divine은 ‘신비스러우면서도 두려움mysterium tremendum’과 ‘신비스러우면서 매혹적임mysterium fascinosum’의 범주들로 경험된다고 한다. 신비와 경외의 감정이 복합되어있는 누미노스의 감정은 절대 타자인 신의 현시, 보이지 않는 힘의 인지와 관련된다. 누미노스의 체험은 역동적이고 심지어는 파괴적인 경험까지 야기한다. 


이러한 체험은 예술사 속에서 낭만주의의 숭고sublime의 미학에서 가시화 된 바 있다. 종교나 종교의 근대적 후예인 낭만주의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혁명이나 축제, 전쟁 같은 경험이 이에 비견될 수 있다. 그것은 개개의 존재를 작은 입자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전체성의 체험을 주며, 작은 기도실에서 광대한 전쟁터에 이르는 무대가 있는 안두진의 작품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서이다. 그는 이 전시에서 한 장소의 총체적인 연출을 통해 낯섬, 즉 절대적인 타자의 느낌을 자아내려 하였다. 주변의 어둠과 대조되는 밝은 빛을 연상시키는 오렌지색 단이나, 벽면에 걸린 그림들 곳곳에 나타나는 빛의 이미지는 예술과 종교 어딘가에 존재하는 강렬한 경험을 일깨운다. 바닥에 깔린 작은 오브제들로 인해 고딕 성당처럼 높아진 천정은 물리적 중량감에서의 해방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오브제나 이미지의 요소들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해 있지만, 결코 고착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은 매순간 갱신되는 세포들처럼 또는 떨리는 영혼처럼, 그 자리에서 유동하고 있다. 안두진의 이마쿼크는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면서 상징적인 우주를 매순간 유지하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출전;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 기사입력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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