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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혜 / 접속의 시대에 접촉을 생각하다

이선영

접속의 시대에 접촉을 생각하다


이선영(미술평론가)

 

부드럽고 신축성있는 천으로 덮여 있는 올록볼록한 표면이 풍경을 이루는 김영혜의 작품은 이전 전시의 주조 색이었던 푸른색으로부터 ‘살 색’—다문화적인 현대 사회에서 인종적 편견이 있을 수 있으니 살구색으로 칭하자—으로의 변화에 따라 더욱 몸과 가까워졌다. 즉 더 매력적이거나 더 징그러워졌다. 최근 작품에서 유두나 종기를 닮은 볼록한 형태는 살짝 건드리면 젖이나 고름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리얼함이 특징이다. 어떤 것은 이미 내용물이 빠져 나간 듯 납작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돌기와 패인 홈에 의해 미묘하게 출렁이는 굴곡면을 제한하는 유일한 것은 일정한 크기의 틀이다. 이 틀은 정사각형이든 직사각형이든 한 작품에서 같은 형태가 사용된다. 틀은 내용물을 채우는 곡선적인 요소와 대조되는 직선적 요소이다. 유기체적 부드러움이나 온기와 대조되는 딱딱함이다. 여러 개가 붙어있을 경우 틀은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표면에 집중하게 되지만 여전히 단위구조로 작동한다. 




 Tactile body pieces(촉각적인 몸형상들),160cm30cm,판넬위에 섬유, 부분채색,2019



작가는 이에 대해 ‘사각형 형태의 몸 형상들은 픽셀, 모듈, 유닛으로 환원된 개개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나보다는 여럿으로 작동하는 복합적인 작품들은 ‘개개인으로의 환원’이 ‘대중 개인주의’같은 모순어법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접속의 시대에 우리는 각각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다고 믿지만, 대개 정보 생산자가 아닌 정보 소비자로서의 개인은 ‘정보 양식’(마크 포스터)의 산물일 뿐이다. 다른 색의 바탕 면을 대고 바깥쪽으로 액자 느낌의 또 다른 틀을 덧댄 [공기와의 몸 접촉] 시리즈는 틀을 더욱 강조한다. [푸른 몸 조각]에 나타나 있듯이, 가구같이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容器)로 변주된 작품들도 있다. 오늘날 소비자를 유혹하는 상품들이 단순히 기능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서고자 할 때, 몸은 그 보편성과 직접성으로 인해 무한대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자원이 된다. 대표적인 것은 ‘미끈하게 빠진’ 자동차지만, 서랍장이나 가방같이 사소한 것들도 육체화 될 수 있다. 


상품은 육체, 육체는 상품이라는 도식에서 매끄러운 표피는 큰 역할을 한다. 일정 크기의 캔버스나 패널을 조합하는 이번 전시의 작품은 존 버거가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분석했듯이, 상품이 되기 위해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림(유화)의 역사를 떠올린다. 살덩어리 모양의 패널들을 푸른색 바탕과 대조시켜 액자와 비슷한 배치를 더욱 강조한 작품 [Tactile eight body pieces]는 형식이자 내용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시선이 관통해야 하는 투명한 액자의 형식을 촉각적 언어로 변주했다. 시각에 비해서 원초적이고 편재하는 감각인 촉각은 피부나 제 2의 피부인 섬유를 암시하고 활용하는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감각이다. 어떤 형식의 틀이든 그것은 마치 물그릇처럼 담길 내용물의 양태를 결정한다.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폴리에스테르 천은 출렁거리며 흘러 넘칠듯한 살덩어리도 무난히 쓸어 담는 신축성이 특징이다. 일정한 크기를 가지는 살덩어리의 조합은 작품마다 형태의 변주를 낳지만, 대량생산/소비 사회에서 몸 또한 상품의 회로를 공유한다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Tactile body shapes(촉각적인 몸 형상의 접촉상황)-부분, 60cm30cm, 판넬위에 섬유, 부분채색,2019



Tactile body shapes(촉각적인 몸 형상의 접촉상황)-부분, 88cm27cm, 판넬위에 섬유, 부분채색,2019



마트에 가면 절단육이 부위별로 진열되어 있듯이, 성형외과에 가면 미의 기준이 되는 신체 부위가 제시되어 있듯이, 잘게 나뉜 채 살 수 있고 팔 수 있는 것이 몸이다. 현대적 노동시장도 평생직장이 아니라 파트 타임화 되어 있고, 그만큼 비숙련화 되어 누구와도 무엇으로도 쉽게 교체될 수 있다. 노동력처럼 생산의 영역뿐 아니라 소비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몸이 유통의 회로를 통과하려면 분절화는 필수적이다. 실재라는 덩어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잘려야 한다. 단편이 되어야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물신화의 회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피를 흘리지 않고서 엉덩이 살덩어리를 베어오라는 어떤 소설의 내용처럼 불가능한 기획—라깡은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이 살덩어리를 욕망과 비유했다. 즉 그것은 불가능하다—을 전제한다. 물론 불가능한만큼 유혹적이다. 물신은 전체가 아닌 단편과 관련된다. 유기체와 닮았지만, 구조적으로는 레고 블럭처럼 이리저리 조합할 수 있는 ‘기관 없는 신체’(들뢰즈)들은 성적 물신(프로이트)과 상품의 물신(마르크스)을 교차시킨다. 


왕족과 귀족의 후원을 넘어서 익명적 상품화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바로크 시대에 캔버스 위에 그린 꽃그림 전문가, 과일 그림 전문가가 분화되었듯이, 오늘날 쌍꺼풀 수술 전문 의사와 가슴확대 수술 전문 의사가 따로 있을 수 있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생존과 연관된 묵직한 존재로서의 생명은 포터블한 방식으로 변모된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부분들은 얼마든지 바꿔 끼워질 수 있고 이동할 수 있다. 오늘날 유통의 혁명 속에는 이전에 배달하지 못했던 것들 배달할 수 있는 기술이 깔려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가방의 형태로 변주된 작품에서 특히 명확하다. 의학 분야에서는 이미 기관들이 가방에 담겨 이동하지 않는가. 유기체보다는 사물이, 사물보다는 코드가 더 소통되기 쉽다. 유통의 용이성에 의해 소통의 가능성 또한 결정된다. 유통과 소통은 일종의 교환인데, 교환이 정당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전제돼야 하는 투명성이 자동적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푸른몸조각, 17cm17cm10cm, 혼합재료,2019



평등이라는 이상과 달리, 인간 사회 도처에 ‘불가능한 교환’(장 보드리야르)이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사회학적 분석보다는 심미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그래서 더욱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진 저서 [불가능한 교환]에서 세계의 불확실성은 세계가 어디에서도 자신의 등가물을 가지지 못하고 그 어떤 것과도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사유의 불확실성은 사유가 진리나 실재와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현상은 어떤 궁극적인 합목적성과도 교환될 수 없다. 과학 또한 결정적인 불확실성에 접근한다. 보드리야르는 무엇인가와 교환되고자 하는 모든 것은 결국 불가능한 교환의 벽에 부딪힌다고 본다. 그러나 불확실성 자체가 게임의 규칙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부정적인 숙명이 아니다. 늘상 불확실한 예술가들 또한 그러한 게임에 깊이 참여할 수 있다. 접속과 접촉이라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영역을 대면시키는 김영혜의 작업은 접속으로 접촉했다고 할 수 있는가, 접속이 있는데 접촉이 왜 더 필요한가 등등의 물음과 더불어, 두 개의 주요 범주가 동등한 비중을 가지며 교환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또한 포함한다. 


그러나 리차드 세넷의 [살과 돌]의 주제처럼, 현대사회에서 접촉은 점차 줄어간다. 모든 것이 디스플레이 되는 스펙터클의 시대, 물리적 접촉은 최소화되며 그것이 이상적인 질서로 간주 된다. 사람들은 ‘기피 시설’에 민감하고, 취약한 거주지의 사람들과 길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계층적 이동은 더욱 불가능한 사회가 되고 있다. 접촉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는 해결되지 않은 모순이 잠복해 있는 위험한 사회일 뿐, 질서 있는 사회가 아니다. 김영혜의 작품에는 불쾌 유쾌를 포함한 여러 가지 접촉의 상황이 표현되어 있지만, 현재에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욱 그 모순이 격화될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굳이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실과 바늘, 천과 물감으로 작업하는 작가에게 접촉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나로그 기반의 예술작업에서 접촉은 접속과 대치될 수 없다. 단적으로 그것은 감각의 총체성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감각을 총체적으로 재현할 수 없을 때 좀 더 쉽게 기계로 재현될 수 있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기 마련이다. 




Tactile eight body pieces(촉각적인 8개의 몸형상), 60cm90cm,2019 



정보화 사회는 정보를 검색하는 눈과 클릭하는 손가락만 활성화하는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촉각성, 또는 촉각적 시각을 내세운다. 촉각과 손의 복귀는 새로움 까지는 아니어도 이질성을 도입한다. 손바느질로 일일이 작업하는 김영혜의 작품은 기계로 찍어내는 일반 상품과는 다르다. 그것들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모두 다르다. 똑같이 아름다워 보이고자 했다면 최상으로 결정된 조합으로 살색 단색화 풍의 작품이 만들어졌어야 할 것이다. 김영혜의 작품은 정상/비정상을 가늠할 수 없음으로 인한 다양성이 특징이다. 작품 속 몸 이미지는 하나의 이상이 아닌 다름과 이질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는 기괴하고 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아름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 수십억의 인구가 똑같은 얼굴은 없는 것처럼 특이성을 담보하고자 한다. 반면, 성형수술이 더 일반화되면 지금보다 더 비슷한 ‘미인’들을 많아지지 않겠는가. 김영혜의 작품은 연상되는 구체적인 형상, 즉 환영(illusion)이 있지만, 그려졌다기 보다는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여기에서 틀은 경계 없는 어떤 실재를 일련의 구조로 제한함과 동시에 연결한다. 


화이트 큐브의 좌표축을 반향 하는 캔버스처럼, 수직 수평의 축을 따라 연결망은 확장될 수 있다. 프레임은 일종의 마디(articulation)가 되어 연결되는데, 이 연결망은 제작된 작품 수와 전시공간이 결정하는 유연성을 가진다. 그것들은 좁으면 좁은대로, 넓으면 넓은대로 가변적으로 설치될 수 있다. 단위구조로 보이는 절편들은 확장성을 위한 역설적 장치인 셈이다. 이번 전시가 접촉과 접속이라는, 아나로그와 디지털 방식을 대표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아우르기 때문에 유기체적 형태를 품은 단위구조들은 세포나 픽셀같은 방식을 떠올린다. 암세포같은 이상(異常) 세포가 아닌 이상 건강한 세포의 증식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픽셀은 그렇지 않다. 디지털 방식은 속도와 복제 면에서 월등한 경쟁력을 가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뮬라크르는 ‘전 영토를 뒤덮는 지도’(보르헤스)처럼 실재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생명공학의 시대에 세포와 픽셀의 차이도 점차 무너지고 있으며, 바로 그 점이 작가로 하여금 유기체적인 만남인 접촉과 비유기체적인 만남인 접속을 동시에 다루게 했다. 



바닥에 놓여진 촉각적인 몸형상2, 70cm 600cm(가변크기,부분), 캔버스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바닥에 놓여진 촉각적인 몸형상4, 70cm600cm(부분), 캔버스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작품마다 단위구조의 숫자는 다르지만, 증식되는 느낌은 여전하다. 물론 단위구조들은 확장뿐 아니라 압축도 되는데, 그때 각 단위의 틀을 넘어 돌출된 부분은 불가피하게 맞딱뜨리게 된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붉은 발진부터 터지기 직전까지의 긴장이 스며든다. 작품 [비자발적 접촉을 포함한 접촉상황]은 마치 출퇴근길 만원 버스나 ‘지옥철’에서 불가피하게 압착된 두 피부처럼, 또는 로맨스 영화에 자주 나오는 키스 씬처럼 ‘비자발적 접촉’의 일단을 형상화한다. 그 밖에 다양한 [접촉 상황] 시리즈가 있다. 접촉은 애초에 있었던 모체와의 접촉이라는 긍정적 모델뿐 아니라, 불쾌한 것도 포함된다. 후자는 개체의 민감한 경계를 위협하는 오염이나 감염이 대표적으로, 개체의 파열인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잠재되어 있기에 불쾌하게 느껴진다. 감염은 동일자의 경계를 재확인하게 한다. 물론 죽음에 가까운 쾌락인 열락의 조건 또한 한계의 파열이며, 예술은 이 상징적 죽음을 갈망하기도 한다. 


또한 접촉은 사유를 유발한다. 질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분석했듯이, 비자발적 만남은 반가운 것이든 아니든 사유의 촉발자가 된다. 접촉으로부터 비롯된 사건성은 예술적 영감도 되어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도, 타자와 접촉할 수 없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동시에 접촉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다.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는 복잡하고 역설적이다. 접속과 접촉이라는 키워드는 결국 타자와의 관계라는 이 시대의 화두와 연결된다. ‘나는 생각한다...’로 대표되는 존재에 관련된 철학적 언명처럼, 강한 주체를 열망했던 근대와 달리, 탈근대 사회에서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 동일자가 한시적으로 결정됨을 강조한다. 경계가 허물어졌다기 보다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표현하는 김영혜의 작품은 지저분(abject) 하지는 않다. 간혹 병적인 형태, 가령 감염되어 미생물의 사체라고 할 만한 고름이 가득한 피부 트러블 처럼도 보이는 것들도 있다.  



비자발적 접촉을 포함한 접촉상황,22cm27cm, 판넬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촉각적인 몸형상들4, 132cm81cm, 캔버스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그러나 대체로 만져보고 싶은 매끈한 외관은 내부로부터 시간이 되었거나 외부로부터의 자극 때문에 경계를 허물려는 형태들이며, 이는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젖꼭지같은 형태는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동물인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타자로부터 공급되어야 할 에너지의 원천을 상징한다. 풍경과의 비유도 있는 김영혜의 작품에서 돌기가 산이라면 패인 홈은 계곡이다. 세계의 중심과 배꼽을 중첩 시키는, ‘옴팔로스’라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상상이 있듯이, 소우주와 대우주는 조응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비롯한 이전 시대의 상징처럼 무조건 일치하지는 않는다. 배꼽처럼 보이는 구멍들은 작가 말대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출구이자 동시에 입구’가 된다. 접속을 통해서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는 이 또한 블랙홀이나 화이트홀같이 시공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는 통로를 통과할 수 있다. 부분과 전체로 동시에 작동하는 유연한 몸(그리고 정신)은 통과를 위한 카프카적 변신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여러 개의 패널이 직선으로 연결된 작품 [바닥에 놓여진 촉각적인 몸형상]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수평면에 최대한 밀착해서 볼수록 부드러운 능선을 가지는 산이나 사구(沙丘)같은 풍경에 다가간다. 사막의 모래폭풍은 풍경을 급격하게 바꿔서 그곳을 통과하는 자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한다. 뚜렷한 랜드 마크가 없는 사막은 열린 미로이다. 이러한 변화무쌍함은 척도와 경계를 잃어버린 새로운 몸에 대한 비유가 된다. 우리 조상들이 산과 계곡에서 성적 상징을 보았듯이, 작가 또한 ‘풍경에는 성적인 비유가 있다’고 본다. 풍경은 광활하지만, 성은 말단이나 구멍같은 협소함으로 가정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전 세기에 무의식이라는 빙산 아래의 거대한 실체가 가시화된 이후, 무의식의 거처이기도 한 몸은 갑자기 미지의 영역으로 부상한다. 가령 생명에 대한 유전자적 차원의 접근은 유전자라는 본질이 아니라 유전자와 주변과의 복합적 요인이 더 중요함을 밝혔다. 




접촉상황2, 88cm27cm, 캔버스 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촉각적인 몸형상, 66cm27cm, 캔버스 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촉각적인 몸형상1 ,132cm27cm, 캔버스 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가장 확실한 듯한 자아와 주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몸은 이제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탐험을 시작해야 할 미지의 영역으로 물러난다. 그것은 신기루처럼 다가가는 만큼 멀어질 것이다. 나지막한 자세로 작품을 보면 모래 사막같은 둔덕들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작품은 사막의 부정성을 떨쳐낸다. 미로에서의 방황마저도 즐거운 유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어린 왕자의 말도 있지 않은가. 이전 전시 때 푸른색 바디스케이프(Bodyscape)가 주도했던 작품들만 해도 그러한 시적인 상상력이 지배적이었다. 이전 전시에서 푸른색 몸은 푸른 바다 뿐 아니라, 푸른 꽃(노발리스), 푸른 거인(알라딘의 램프), 칼리 여신 등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상상력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김영혜의 작업은 몇 년 사이에 접속과 접촉이라는 주제로 급격하게 당겨온다. 이 주제는 사이버네틱스로부터 사회학까지 걸쳐 있는 현실적인 주제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몸은 여전히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라 열린 장(場)으로 나타난다. 시점을 바꾸면 한계 지워진 존재들도 광활한 영토로 변모하는 것이다. 배꼽을 연상케 하는 작은 홈을 비롯하여, 깊이 베인 것같은, 접힌 것같은 긴 홈도 보인다. 패인 홈 또한 타자와의 접촉 또는 접속이라는 비유를 가진다. 배꼽은 모체로부터의 영양공급 통로의 흔적이다. 점이 아닌 선의 형태로 패인 것들 역시 바깥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패인 홈들은 배꼽처럼 생물학적인 필요, 즉 욕구와 관련된다면, 여러 각도로 접힌 부분들은 욕망이 고였다가 흘러가는 상징적인 장소처럼 보인다. 여러 개가 연결된 것들은 욕구나 욕망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온전한 전체가 아닌 부분들의 결합은 자아의 요구인 환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애초에 온전한 전체라는 것 자체가 단편들이 결합된 상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던져준다. 라깡으로 대변되는 현대 심리학에서, 생물학적 욕구/ 자아의 상상적 요구/ 주체의 욕망이라는 세가지 도식의 상호관계는 단위구조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서사를 만드는 작품을 설명해 준다. 




촉각적인 몸 형상들, 100cm60cm,판넬위에섬유,부분채색,2019



촉각적인 몸형상의접촉상황, 66cm27cm, 판넬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천으로 만들어진 유동적인 표면은 빙산 형태를 닮은 이전 시대의 계층적 사고를 떨궈내고 변화무쌍한 양태로 확산된다. 닫혀있음으로 열려있는, 이 역설적인 구조는 규격과 탈규격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작품들에서 선명하다. 심층이 표층을, 또는 표층이 심층을 결정하는 심층적 모델과 달리, 안팎이 수시로 바뀌는 표면의 모델은 생명의 본질과 더욱 가깝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생명체의 기본조건인 항상성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확보할 만큼의 닫혀있음이 필연적이데, 그것이 개방된(또는 훼손된) 흔적이다. 세포막처럼 닫힘과 열림의 유동성이 살아있음의 특징이라고 볼 때, 살덩어리 형상을 통한 접속이나 접촉의 비유는 우리 삶에 관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작품보다 더욱 살같이 연출한 섬세한 표면은 실재의 위상이 흔들거리는 시뮬라크르 시대의 알리바이를 확보한다. 그것은 가짜일수록 더욱 진짜 흉내에 연연해야 하는 그 숙명을 따른다. 


더 진짜 같은 가짜는 육체와 성의 이미지를 관통한다. 가령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는 실제로는 큰 차이가 없는 여성성/남성성의 차이가 더욱 극대화되곤 한다. 민감한 경계인 몸의 유기적 외곽선이 사라짐으로 인해 이 유기체적인 형태들은 유기체의 한계를 넘는 무한증식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소우주로서의 인간의 비례를 주변 환경으로 확장하는 이전 시대의 척도는 무너졌다. 인간의 노동에 바탕 하는 이전 시대의 패러다임이 AI를 비롯해서 기계에 더욱 의존하는 시대에 인간적 척도란 철지난 휴머니즘이나 피상적인 일상성 등에나 관철된다. 이러한 경향은 일단 비극이지만, 인간이 한번 확보한 생산력을 포기하지 않는 역사의 방향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나로그와 디지털 방식이 조화로워야 한다는 이상이 있지만, 접속의 시대에 접촉은 점차 줄어든다. 사회의 견제 없이 생명공학이나 정보공학의 주도로 재편되는 현대사회는 ‘동일증식 집단’(장 보드리야르)이 대세가 되며, 그것은 이질적인 뒤섞임을 부정한다. 




.촉각적인몸형상의 접촉상황2 44cm27cm, 캔버스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촉각적인몸형상의 접촉상황3 44cm27cm, 캔버스위에 섬유, 부분채색, 2019



대세로 인증이 되면 변화는 빠르게 일어난다. 암세포처럼 번식하는 동일성의 증식은 점점 더 세계를 위험하게 한다. 블루 오션은 점차 레드 오션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접속의 시대에 접촉의 문제’를 생각하는 이유이다. 접촉의 부족이 야기하는 결과는 접촉만큼이나 직접적이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어미와의 접촉이 차단되었던 새끼들은 서로 마주치면 공격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말한다. 접촉으로부터의 분리는 좋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폭력적이고 외로운 동물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장류 실험에서 신체접촉의 결핍은 뇌 손상을 가져온다는 연구도 인용한다. 김영혜 또한 접속 때문에 접촉으로부터 점점 단절되어 가는 현대인에 속하지만, 수작업이 접촉을 요구함을 자각한다. 바늘과 송곳에 찔려 피를 보는 일도 흔한 이 위험한 접촉은 인간이 몸을 가진한 피할 수 없다. 가상현실을 현실과 완전히 등치시키는 가상현실 예찬론자들은 몸이 총체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것은 자연에 내재된 느릿한 순리에 대한 역행이다. 정보화 사회는 몸의 위상을 축소시키는데 집중한다. 


전체적인 감각이 아닌 정보를 탐색하는 시각을, ‘손이 아닌 손가락으로’(들뢰즈) 환원한다. 사이버 스페이스가 아닌 미술 전시장은 실재와 접촉하는 몇 안되는 영역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김영혜의 전시장에서 관객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의 하나는 ‘만져봐도 돼요?’라고 하는데, 그만큼 그녀의 작품은 미술작품은 만져서는 안된다는 금기 사항을 잊게 할 만큼 촉각성에 호소한다. 작가는 바느질 된 천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에 접속의 키워드를 내장하여 관객들과 만나는 인터페이스로 삼는다. 김영혜는 외배엽과 내배엽으로 나눠진 수정란의 예를 들면서, 외배엽이 신경과 피부로 성장한다는 의학적 정보의 예를 든다. 그에 의하면 피부는 뇌의 연장으로, 피부가 제 2의 뇌라는 가설도 있다는 것이다. 접속과 접촉을 아우르는 이 ‘스킨’은 말초적 감각과 사고를 중첩 시킨다. ‘생각할 줄 아는 장기’인 피부는 살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싸안을 수 있는 매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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