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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여대 동양화과 대학원 작품 전

이선영

성신여대 동양화과 대학원 작품 전

  

이선영(미술평론가)

  


1. 김도현-회화의 조건

  

김도현의 작품은 두툼한 질감을 가진다. 그림이라기보다는 거의 부조같은 느낌을 준다. 큰 화면이나 작은 화면을 여러 개 연결한 작품이나 같은 방식이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얇은 종이에 스며들 듯 날렵한 선을 날려는 동양화의 방식과는 큰 거리가 있다. 물감을 화면에 스미게 하기보다는 쌓기로 표현하는 웬만한 서양화보다도 층이 두터운 것은 그가 물감뿐 아니라 핸디코트같은 공업용 재료로 바탕을 만들기 때문이다. 보색대비 등, 색을 두드러지기 위해 어둡게 처리하는 바탕 작업 때 이미 대부분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의 작품은 큰 붓으로 자신감 있게 휘두른 듯한 붓질의 형태를 가진다. 큰 작품에서 붓질은 사각 프레임 안에 빼곡이 담겨있지만, 작품 [Gold on Black]처럼 1호 크기의 작품이 수십 개 모여 있는 것에는 다양한 모습의 필획들이 사각 프레임을 넘나든다. 작은 작품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어서 전시장 규모에 따라 가변크기로 설치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경계를 넘나드는 필획처럼 확장성을 가진다. 



김도현


김도현은 핸디코트로 밑 작업을 한 후 여기에 아크릴로 덧칠해서 물감의 층이 만들어 내는 듯한 질감을 살린다. 올 오버(allover) 구도의 작품이든 배경과 형태가 구분되는 작품이든 마찬가지이다. 두세 가지 색이 함께 있는 화면은 덧붙인 것인지 파낸 것인지 모호한 굵은 붓자국이 연출되어 있다, 그는 어떤 대상도 재현하지 않은 채로 붓자국 만으로도 원근감의 환영을 만든다. 회화에는, 특히 동양화에는 일필휘지, 또는 일획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과정보다는 결과를 통해서 그 비슷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색다른 방식일 것이다. 실제로 단숨에 그어진 듯한 일부 추상화에는 일획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형태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들이 일획을 강조하는 것은 지시대상이나 이야기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현대회화에서, 화가의 수행적 행위에 과도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례와 무관치 않다. 회화라는 순수한 정신력의 발현에 대해 어떠한 군더더기도 붙어서는 안된다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은 어떤 의미라도 ‘자유롭게’ 갖다 붙이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곤 한다. 그래서 모더니즘 회화에서는 화면을 비울수록 필요한 의미는 많아지는 역설이 초래된다. 그러나 회화에서 육체와 물질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불가능한 배제들은 물신주의와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관념론의 소산일 따름이다. 예술작품에서 대상이나 의미가 아니라면 작가의 의도 또는 무의도와 관련된 어떤 신비적 과정만이 남는다. 공업용 재료도 마다하지 않는 김도현의 작품은 회화가 물감을 포함한 물질이 다루어지는 인공적인 장(場)임 명확히 한다. 인공적 색감뿐 아니라 붓질을 강조하는 점이 그렇다. 그림이 다른 매체와 다르게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찾으려 했을 때 추상회화가 만들어졌던 것처럼, 그 또한 시각성을 극대화하는 표면을 강조한다. 가장자리가 빛나는 푸른색 붓터치들의 모음이 있는 작품은 밤에 핀 개나리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자연 또한 인공적 조건 속에 있음을 말한다. 



2. 이나림-그림으로 말하기 

 

연작이 아닌 한, 한 화면으로 무엇인가 말해야 하는 회화는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힘든 매체로 간주되어 왔다. 서사는 소설이나 영화같이 시간성을 따라 전개되는 매체에 더 적합하다. 회화는 공간적인데, 이야기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회화의 단점이 아니다. 회화는 이러한 단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회화의 거장들은 화면이라는 정지된 공간에도 시간성이 전개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왔다. 한 형태의 시간적 추이를 공시적으로 담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만약에 그림에 서사가 있다면 그것은 단번에 그 진의가 파악되는 순간을 담아야 했다. 또 하나는 아예 서사적 요소인 문자를 삽입하는 것이다. 동양에서 시서화의 전통이 대표적이다. 그림만큼이나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이나림은 작품에 문학적 요소를 적극 끌어들인다. 자신이 읽은 문학에서 따온, 또는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문장들은 작품 제목이나 작품 내용으로 취해진다. 그래서인지 제목이 매우 긴 작품이 꽤 있다. 



이나림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라고 해서 삽화는 아니다. 문자 자체를 조형화하는 방식이다. 동양화에서 그러한 조형적 방식은 상형문자나 서예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나림의 작품은 마치 비망록의 손글씨를 옮겨 쓴 듯한 빼곡한 화면을 보여준다. 기호의 물성이 강화된 만큼 가독성은 없다. 장지에 혼합재료로 그린 작품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나 [어쩌다 당신이, 그런, 아름다운 일을 겪으면, 절대로 발음해서는 안돼요. 우리의 포옹은 명분이 필요해요, 여기가 그렇게 외로운 곳이에요.]에서는 화면에 삐뚜름하게 배치된 채 아래로 번져 있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어서, 관객은 제목을 통해서 화면에 조형화된 문장을 예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랑, 고독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문장의 표현은 형식 또한 멜랑콜리하다. 먹, 목탄, 호분 등의 재료를 사용한, 아래로 축축 처지는 번진 글자들은 마치 흐르는 눈물에 지워지는 여인의 마스카라나 시간의 흐름에 덧없이 방치되고 있는 문자의 흔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우연히 버스 창밖에서 본 메시지인 ‘위급 시 아이를 먼저 구해주세요’라는 문장이 있는 작품에 나타나듯, 글자와 사물이 같이 배열된 작품에서도 글자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갑자기 닥친 비극에서 삶의 우선순위를 미리 고지하는 부모의 심경이 줄줄 녹아내리는 듯한 장난감 등 아이에 관련된 물건에 드러나 있다. 글자가 없는 작품에도 문학의 내용이 될만한 사연이 담겨있다. 작가의 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 [뜨거운 줄도 모르고, 손이 하나가 될 때까지]는 늙은 할머니와 아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면이라고 하는데, 화면은 초가 녹아서 두 사람 손이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이다. 죽음을 기리는 다양한 도상으로 가득한 화면은 굳이 작가가 맨 처음 생각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관객의 상상력이 펼쳐질 수 있는 열린 무대로 작용한다. 회화는 한 화면에 정지된 듯한 장면을 담는다 할지라도 상징적 대상들을 관객이 보는 순서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3. 이대영-나만의 시공간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잠든 모습을 그린 작품 [하루 끝]은 하루의 시작과 끝이 스마트폰 화면인 여느 젊은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밝은 배경에 신체 부위만 도드라진 화면은 마치 물속에 잠기듯 배경에 푹 파묻힌 모습인데, 그것은 숙면에의 희망을 표현한다. 깊이 자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상황도 여의치 않은 현대인의 고통을 그 또한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의 한 단면을 재현하는 것이자, 소망이 투사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불면의 밤을 더 가속화한 것은 작품 속 인물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일 것이다. 스마트폰은 밤을 정복한 전구 이래, 24시간 뺑뺑 돌아가는 시대를 진정한 의미에서 실현한 물건이다. 월드와이드웹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의 경계를 없애버렸다. 관객의 눈길을 끌어야 살아남는 콘텐츠 전쟁에서 자극적인 것에만 반응하는 ‘팝콘 브레인’이 양산되는 즈음, 한국화 전공자로서는 먹과 종이라는 고전적 매체가 너무 슴슴하지는 않을까하는 염려가 있다.  



이대영


물론 한국화 또한 그러한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 만큼이나 엄청나게 화려하게 표현될 수 있지만, 이대영은 푹 쉬고 싶다는 평소의 희망이 작품에도 반영된다. 마치 소복이 내린 눈 속에 파묻힌 듯 자는 인물로만 화면이 가득 채워진 작품은 그리는 것만큼이나 안 그린다. 배경이 없는 화면은 아무리 자신과 닮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재현과는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등장하는 한 이야기는 생기기 마련이므로, 더 최근 작업에서는 자는 사람(또는 자기 위해 뒤척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는 공간을 그린다. 작품 [어떤 하루]에서는 햇빛이 들어오는 빈 침대만 있을 뿐 이야기를 이끌어 갈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보다 사물에 더 에워싸여 살고있는 현대인에게 사물은 인간만큼, 아니 인간보다 더 잘 이야기한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빈 침대는 주요 수면 시간대인 밤을 훌쩍 넘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의 연출을 통해 그는 자기만의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잠과 꿈의 시공간을 늘려잡는다. 


가득 들어찬 충만한 햇빛은 방전된 몸을 충전시키는 긍정적 에너지로 다가온다. 아무렇게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있는 작품 [일상의 무게]는 숙면이 요구되는 지친 하루의 일정을 떠올림과 동시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표현된다. 그는 옷을 갑옷과 비교한다. 작품 속 옷은 셔츠와 바지 등 평범한 것들이지만, 그에게 겉모습을 상징하는 옷은 타인과의 대면(또는 대결)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갑옷과도 같은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구조의 우위는 인간을 후 순위로 남게 했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실존주의적 언명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이제 익명의 시스템과의 접속이 타인에의 필요성을 대체해 가기 때문이다. 사물로 이루어진 환경의 현대인에게 사람과의 직접적 관계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먹의 다양한 농담이 있는 이대영의 옷가지들은 보는 즐거움을 줌과 동시에, 확 풀어진 채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을 전해준다. 빈침대로 나타나는 빈공간처럼 알몸이 빠져나간 껍질들은 인간 대신 인간을 말한다.  

  


4. 박나회-애도의 공간

  

깨진 유리컵, 꺼진 촛불, 버려진 조각상, 말라가는 나뭇가지, 죽은 금붕어 등이 등장하는 박나회의 그림은 수수께끼같으면서도 어둡다. 유리컵이나 조각상은 무생물이지만, 나뭇가지나 금붕어 등 동식물로 소재가 확장되면 죽음의 그림자는 짙다. 몇 년 전에 갑자기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이 짙게 깔려있는 탓이다. 남은 가족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이 투사되는 그림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도 눈에 띄는 것이 그러한 부정적인 대상들이라고 한다. 물론 컵이나 조각상, 금붕어 등은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작품에서 그것들은 불가역적인 과정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그러하다. 시간은 되돌릴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불가역적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 예전의 순환적 시간관, 즉 가역적 시간관은 삶의 불화를 해결하는 시점(illud tempus)이 있었다.



박나회


그러나 현대는 그것을 신화로 치부한다. 박나회에게 작업은 어둠을 더 짙은 어둠으로 지워보려는 행위이다. 동물은 같은 동물인 인간이 그 죽음을 가장 체감할 수 있는 소재지만, 금붕어처럼 표정이 잘 나타나지 않는 동물을 택했다. 박나회에 의하면 금붕어는 애완동물이긴 하지만 ‘죽어도 금방 대체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기에 선택했다. 어류 애호가들은 인정할 수 없는 의견일지 모르지만, 화면에 죽은 개나 고양이가 있다면 훨씬 더 자극적일 것이다. 금붕어는 지워진 배경에서 헤엄치거나 바닥에 누워있거나 작은 접에 담겨있다. 곧 죽거나 죽은 상태를 암시한다. 이러한 소재들을 이루는 배경은 지워져 있다. 텅 비워진 공간 속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갑자기 다가온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려는 행위로서의 작업 만이 시간의 흐름을 남긴다. 고대 조각상이 있고, 얼굴 부분을 금붕어가 헤엄치듯 다가가는 작품 [무제]에서 때 탄 조각상이 버려져 있었던 장소도 금붕어의 생존환경도 부재하다.


둘이 만나야 할 어떤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그것은 ‘해부대 위에서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적인 만남’ 같은 부조리한 상황을 표현하려 했던 초현실주의자의 어법에 가깝다. 그러나 조각상이든 실제이든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이 얼굴이 침해되는 듯한 상황은 다소간 불안하거나 섬뜩한 느낌이다. 두 개의 유리컵에 균형을 잡고 놓인 나뭇가지. 바닥에 금붕어가 쓰러져 있는 작품은 한 개체의 죽음으로 깨진 불안한 균형이 느껴진다. 작품 [밑]은 다른 것과 달리 실내 어딘가의 모서리같은 구체적 공간이 나타난다. 여전히 그 안에 놓인 것은 시든 나뭇가지나 꺼진 촛불, 컵 안의 금붕어 등이며, 이러한 대상들은 밝은 배경에 큰 그림자를 남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린 메멘토 모리, 이 애도의 공간은 산자의 몫이다. 박나회의 작품은 죽은 이의 빈자리가 극명하지만, 죽음의 소재가 아니더라도 그림은 그자체가 죽음과 밀접하다. 박물관을 가득 채운 초상화나 정물화에는 이제는 없는 대상들이 담겨있지 않은가. 

 


5. 남선우—나를 찾는 상상의 무대

  

‘S를 찾아서’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는 자화상 작업을 주로 해왔던 남선우의 작품 이력에 의한다면 작가의 또다른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대체로 예술작품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는다함은 자신인 경우가 많다. 모든 예술작품, 특히 젊은 작가들의 작품 속 주체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제임스 조이스)일 수 있다. 작품 [S를 찾아서 1]에서는 문 또는 거울 앞에 선 듯한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데, 손에 무엇인가 든 모습은 소녀 앞의 밝은 평면이 캔버스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거울은 세계를 반영하는 투명한 창이자 거울로 간주되어 왔고, 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작가일 것이다. 거울, 창, 그림은 겉모습만 닮은 것이 아니라, 반영이라는 주제를 통해 연결된다. 그러나 세계를 반영하는 이 고전적 매개들은 이제 더 이상 투명하게 간주되지 않는다. 현대 심리학은 거울을 객관적 주체의 반영이 아닌, 자아가 연기하는 상상의 무대라고 본다. 



남선우


현대 심리학에서 거울단계가 상상적이라 함은, 거울이 조각나 있는 실제의 육체를 가상적으로 통합하기 때문이다. 균열이 봉합되는 과정에서 상상이 개입된다. 그림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상상적 풍경은 파스텔톤의 따스하고 화사한 느낌의 식물 패턴으로 가득한 배경에서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상상의 세계는 가혹한 기준이 작동하는 사회의 공식적 무대인 상징계와 다르다. 그것은 현실원리가 아닌 쾌락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명확한 경계가 없이 번져나가듯이 연결된 색은 감미롭다. 물론 자아나 주체를 포함한 무엇인가 찾는 여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을지라도...작품 [S를 찾아서 2]에서는 무엇인가 한아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배경의 것과 비슷한 종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발생하는 알이나 발아하는 씨앗처럼 미지의 가능성으로 차 있는 느낌이며, 소녀의 표정도 어둡지는 않으며, 몸은 무엇인가 충만하게 품고 있다.


일련번호를 통해 연작처럼 서사를 이어가는 방식에서 작품 [S를 찾아서 3]은 극적인 변환을 보여준다. 소녀가 꽃이나 곤충보다 더 작아진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신하는 카프카의 소설이 현대의 불안과 공포를 예기한다면, 분홍빛으로 화사한 배경 속의 변신은 부정적이지 않다. 현대예술에서 변신이라는 주제는 인간 아닌 것으로의 몰락으로도 볼 수 있지만, 탈주라는 주제와 연동되는 단계로 해석되기도 한다. 미소한 것으로의 변신은 현실 속에서 뚫을 수 없는 벽을 통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미소한 것은 작은 균열을 통해 자신이 벗어나고픈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작가는 마술적인 과정이 아니어도 변신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품을 통해서이다. 작품은 그때그때 마다 작가를 재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작품 [S를 찾다]는 결론 격에 해당된다. 소녀는 부쩍 성숙해진 채 누군가를 안고 있다. 그것은 짝패와도 같은 자신의 분신이 아닐까.

 

 출전;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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