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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겸 / 조명(照明)된 일상

이선영

조명(照明)된 일상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다겸은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그림만 그리는 화가 그 자체라 할 만한 인물이지만, 학부 때와 독일 유학 때 미디어아트에 집중했던 작가이다. 다수와의 협업, 새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줄 새로운 기기를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 외에, 이제는 현실 자체가 미디어화 되어 있다 보니, 오히려 그림이라는 오래된 형식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삶 속에서 자율과 자유의 영역이 알게 모르게 줄어드는 현대에 회화는 무엇보다도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형식이다. 두 영역에 걸쳐 있었던 이다겸의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영상 및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회의가 문예사조적 차원이나 개인의 차원에서 ‘회화의 죽음’을 수없이 선언하게 했다. 그러나 회화는 죽지 않았고 죽였던 만큼이나 복귀했다. 그러나 복귀된 회화는 더 이상 이전 시대의 회화와는 차이가 있다. 




a casual plot-red tree_91x116.8cm_acrylic on canvas_2019



이다겸의 그림은 이전의 미디어 작업을 포함하여 일상 속 스펙터클의 체험이 녹아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스케치 대용으로 사진을 찍거나 작업의 자료를 찾기 위해 구글링을 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물론 화가도 작업을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참고용이며, 그 결과물에서 최초의 참조대상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현실적 출발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완전한 추상으로 기울지도 않는다. 미술사에서 초기 추상화가들이 했던 원론적 고민을 이다겸도 한다. 추상화는 신화, 종교, 역사 관념을 담은 지시대상으로부터의 자율이었는데,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기표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자유를 구가할 것인가. 허공에 매달린 자유가 아닌, 현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리얼리티와 소통을 담보할 수 있다. 그 현실이 비록 눈여겨 볼만한 구석이 없는 초라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이다겸은 산책길의 장면들을 찍곤 한다.


인덱스가 있는 사진의 속성은 지시대상이 해체될 지경까지 복잡해진 화면에서도 유지된다. 원색과 야광색으로 들떠 있는 화면조차도 최소한의 중력감은 있으며 위아래의 구별이 있다.  펄이나 형광 물감의 사용으로 웬만한 스펙터클만큼이나 현란한 이다겸의 그림은 수많은 스펙터클이 경쟁하는 도시 생태계에서 대중들의 눈에 띄기 위해 진화된 자극적인 시각을 참고한다. 모든 것이 아우성치는 형국에 잔잔함을 유지한다면 다른 소리에 묻혀 도태될 것임으로 소리는 더욱 커지며, 서로 간에 상충됨으로 인해 자극의 역치만 높아지고 일상의 진부함은 극복되지 않는다. 스펙터클이 범람하는 시대지만 시각적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 틈새로 소수자가 된 화가의 작업들이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다겸의 작품은 정교한 붓질이 더해진 튀는 색감이 특징적이지만, 소재는 매우 소박하다. 골목길에 놓인 초라한 화분이나 산책길 가로변의 풀숲 등, 누구도 자세히 보려 하지 않는 평범한 장면이 대부분이다.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전시전경



found narratives



이다겸의 그림은 그러한 평범함도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 작가는 화려한 소재를 화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소재를 화려하게 표현한다. 구석진 일상의 한켠이 눈부시게, 때로는 어른어른한 옵티컬 효과에 의해 눈이 아플 만큼의 강렬함으로 구현되어 있다. 내용과 형식 사이의 괴리에는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형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 느껴진다. 대상은 그림을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출발은 현실이지만 그것이 도달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어떤 대상을 그려도 작가가 정한 형식은 유지된다는 점에서 형식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최근에 제작된 작품 [a casual plot-red tree]은 마치 열화상 카메라가 찍은 듯 화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붉은 색 덩어리가 지배적이다. 그 주변을 찬 색 계열이 에워싼다. 자연스러운 색이기 보다는 인공성이 강하다. 자연에서는 독을 품은 유기체들이 화려한 외양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바닥의 보도블럭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숲은 아닌, 길가의 나무들. 붉은 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은 마치 지글거리는 에너지 같은 패턴으로 채워진다. 사물의 외곽선이 바탕으로부터 확실하게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눈은 숨은그림찾기처럼 화면의 표면을 떠돈다. 마치 공백공포증 환자처럼 구획된 공간을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채워나가는 치밀함은 길섶의 초라한 식물과 사물을 매우 화려하게 나타나게 한다. 작품 [plant pot plot 2]에서는 문 앞에 화분이 가득 있는 작은 집의 전깃줄이 걸쳐 있는 지붕 위도 보이지 않는 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다겸의 풍경은 따로 광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광원이 있는 듯이 자체 발산하는 빛이 특징적이다. 작품 [plant pot plot 3]에서 골목 귀퉁이의 화분들은 물론 시멘트 바닥과 벽돌에도 지문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작품 [found narratives-4]에서 광합성을 하려고 최대한 빛을 받으려 활짝 펼친 잎은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면서, 관객이 광원이라도 된 듯 식물이 관객을 바라본다. 








자연에는 변화를 위한 여지 외에는 빈틈이 없는데, 작가 또한 그러한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자연의 재현이기 보다는 자연적 원리의 재연이다. 그래서 식물들은 겉모습이자 투시도처럼 보인다. 공기 중의 탄소를 고정하여 다른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내뿜는 자연의 공장은 쌩쌩 돌아간다. 꽃과 잎 등 식물을 이루는 요소들 간의 크기 차이는 있지만, 모든 부분에 강조점이 주어진 채색방식은 식물 패턴처럼 보이게 한다. 작품 [found narratives 3]에서 화면 가득히 그려진 꽃과 잎에서, 꽃잎의 결대로 칠해진 색은 꽃의 패턴이기도 해서, 꽃은 바로 꽃무늬가 된다. 소나무들이 있는 풍경 [a casual plot]에서 작가는 자연과 인공이 맞닿는 지역을 선호함을 보여준다. 자연적 대상은 곡선적 표현에 어울리며 자극적인 색감은 인공물과 어울린다. 길에 놓인 화분과 화단의 꽃 등이 있는 일상의 한켠으로, 작가는 이를 ‘사람 손은 탔지만 무방비로 내쳐진 곳’이라고 특정 한다. 


아크릴 물감으로 촘촘히 겹쳐가며 그리는 화면은 결국 가장 가는 붓이 지나간 선들로 나타난다. 종일 작업해도 근 한 달이 넘는 작품 하나당 5-6 자루의 붓이 닳아 없어지는 노동 강도가 필요한 작업으로, 그림이라기보다는 거의 사경(寫經)을 떠올린다. 작가는 이처럼 선으로 쌓고 채우는 방식을 쓰기와 비교한다. 작품 제목에는 서사라는 단어도 있다. 선의 나아감은 시간성을 암시한다. 이야기 또한 시간을 타고 진행된다. 공간적 매체인 회화에 수없이 접어 넣은 선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펼쳐 읽어볼 관객을 위한 이야기가 된다. 작가가 수행한 시간의 공간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간의 시간화라는 역순을 밟게 한다. 그러나 서사의 주인공인 인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시선을 남기는 흔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요즘 하는 작업은 2014년경에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는 인물이 주가 되었다. 그 인물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실루엣으로만 있으며, 그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기호였다. 






plant pot plot series



유명인을 검색해서 나오는 정보들로 유명인의 초상을 채우는 식이다. 유명세에 따라서 정보량이 정해진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에 관한 정보와 바꿀 수 있는 시대에 대한 반응이다. 거기에는 언어의 세계에 태어나 비로소 인간이 되는 상징적 인간의 운명이 있다. 정보로 채워진 초상 드로잉은 미디어 사회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면서 회화로 넘어가기 위한 단계이기도 했다. 드로잉 작업을 거쳐 색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반영한 것이 최근 몇 년 사이의 회화작업이다. 펄과 형광이 들어간 인공적 색감은 사물의 입체감을 회화적 평면으로 해소한다. 정해진 원칙대로 수행하지만 어렴풋한 톤으로 시작할 따름인 이다겸의 그림에서 즉흥의 여지는 많다. 그렇게 일상의 소소한 장면은 미디어 파사드 같은 화려함으로 재탄생한다. 인공적 스펙터클의 뒷면에 칙칙한 현실적 바탕이 있다면, 화가의 수행적 작업은 물화된 일상을 유토피아적인 에너지로 전환 시킨다. 


출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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