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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 전 / 초기화(reset)된 테이블

이선영

초기화(reset)된 테이블

정정엽 전 (7.5—10.13, 이응노의 집,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이 전시의 대표작인 [최초의 만찬]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에서 형식적 틀을 빌어왔다. 최후가 아닌 최초의 강조는, 밥상 차리기가 최초의 성별 분업의 하나였고 그 역할의 담당자에게 여전한 질곡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구별 또는 차별 이전의 시점으로 초기화(reset)하려 한다. 1980년대부터 여성해방에 관심을 쏟아온 작가의 자료 및 작품들이 함께 걸린 이 전시에서 여성은 물론이고, 씨앗과 벌레부터 다중(多衆)과 천체에 이르는 만물이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이룬다. 자신의 죽은 모습을 상상한 작품이 있듯이, 생명과 물질의 생성과 소멸을 포괄한다. 감자 싹은 쓰레기지만 벌레들에게는 축제의 장이고, 때로 더 많은 감자들을 수확하기 위한 잠재력이다. 잠재력을 완연한 현실로 만드는 것, 그것이 자유이고 해방이다. 자유와 해방은 주체가 아닌 상호주체성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미래에 펼쳐질 가능성을 내부에 접어놓고 있는 씨앗같은 존재는, 그것이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자유와 해방을 외칠만한 대표성을 가진다. 




최초의 만찬 2 ,2019 oil, acrylic on canvas 50x 100cm



정정엽의 이미지로 각인되다시피 한 팥은 헤쳐 모이면서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형태소(morpheme)이다. 이 형태소는 구상과 추상을 아우른다. 조형언어의 기본단위가 점이 아니라 씨앗이라는 점은 공리적 체계로부터 출발하는 기하학적 관념론과의 단절을 암시한다. 참조 대상인 [최후의 만찬]에서 적용된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이 거울이자 무대였음을 떠올릴 때, [최후의 만찬]의 출연진이 모두 남성이었음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여성들만 있는 [최초의 만찬]에서는 맨 왼쪽에 성이 불확실한 사람이 보이는데, 그/녀는 아마도 페미니즘이 히스토리의 주체인 인간/남성에서 배제된 다양한 타자들과 연대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성적 소수자로 추정된다. 정정엽의 새로운 버전은 최후라는 단어에 내포된 비장감 대신 축제적 활기로 가득하다. 메시지가 전달되는 상징의 무대를 축제화 하면서 정전화된 미술사의 문법은 위반된다. 


축제란 모든 고정된 경계를 넘나드는 것, 금기의 위반이 이루어지는 장을 말한다. 이 축제의 장에서 다양한 시공간으로부터 온 여성들은 원근법에 내재된 시각적 통일감을 뒤틀고 균열을 낸다. 하나의 메시지를 향한 형식적 요소의 집중은 르네상스 미술이 이룬 업적이지만, 이후 원근법주의는 어떤 관념을 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왔는데, 가부장주의는 지배적 관념 중의 하나였다, 원근법은 근대를 거치면서 파시즘적 메시지의 전달에도 유효했으며, 그것은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았다. 다성적 대화가 있는 새로운 만찬, 즉 축제는 통합적 체계를 해체한다. 해체는 쇠퇴도 슬픔도 아니다. 하기야 밥상을 준비만 하던 그녀들이 역으로 밥상을 받고 있으니 즐거울 만도 하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각종 채소가 가득 담긴 캔버스는 그 자체가 그릇같다. 추상적 체계가 느슨해진 화면에서 개별적 대상의 질감과 촉감은 강조된다. 작품 속 대상들은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 단내도 나고 썩은 내도 난다. 


소재가 된 곡물이나 채소 등은 유사 이래 먹거리를 수집하거나 키우고 요리하며, 때로는 판매도 했던 여성에게 친숙한 것들이다. 신성한 빛을 발하기까지 하는 곡물과 채소들은 익명적 생산/소비의 체계인 상품과도 다른 가치를 부여받았다. 작가는 그림으로 한 상을 차려 낸 것이다. 전시 때마다 이렇게 온전히 작업으로 한 상을 차려 내기 위해 여성/작가는 얼마나 고군분투했을 것인가. 삶이자 예술을 위한 이 투쟁은 거대한 명분이 아니라 일상의 사사로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치열하다. 관객이 작품들을 다 보고 나가는 통로에 설치된 작품 [집사람]은 장을 보고 아이를 돌보며, 때로 생계의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을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표현했다. 명확한 형태와 색감으로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던 다른 작품에 비한다면, 바람처럼 스치는 하얀 천들 위의 이미지는 거의 휘발된 상태다. 작가는 ‘집사람’으로 국한된 여성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출전; 아트인컬처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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