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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민 / 욕망과 환멸이 교차하는 붉은 방

이선영

욕망과 환멸이 교차하는 붉은 방

  

이선영(미술평론가)

  


노경민의 청주 작업실의 바닥과 벽은 붉은 물감 자국으로 가득하다. 붉은색 모노톤으로 처리된 화면 가장자리는 더 한데, 작가는 여러 번 올려야 원하는 색이 나오기 때문에 색 테스트를 화면 가장자리에 직접 하기 때문이다. 작업실이든 화면 가장자리든, 전시될 때는 가려지는 부분이지만, 마치 사방에 피가 튄 듯한 느낌은 그녀의 작품이 그만큼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은 주체의 반영이나 표현이라는 이전 시대의 미학을 극복해 왔지만, 예술이 수많은 소통의 방식 중에서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는 소통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힘들게 하는 만큼 예술은 삶의 의미와 열정으로 가득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노경민의 작품은 무의미와 환멸로 가득하다. 열심히 작업하는데, 내용은 허무한 이 역설적 상황은 행동은 뜨겁지만 사고는 냉정하게 하는 작가의 일면을 보여준다. 무의미와 환멸이라 하더라도, 그 표현이 설득력이 있다면 어떤 질적 전환의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예술적 언어는 인생의 악재조차도 필연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낙원,장지에 수묵채색,126.0×189.0㎝, 2019



초대_invitation, 42.0×59.0㎝, 장지에 주묵채색,2018



우주, 59.0×89.5㎝, 장지에 수묵채색,2019



나비, 장지에 주묵채색, 69×45.5㎝, 2019



예술이 아니라면 악재는 그저 상처와 소진으로 남을 따름이다. 붉은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피색인지라, 화실의 물감 자국들은 화가의 치열한 핏빛 투혼의 흔적들로 보인다. 이 붉게 물든 작업장은 뿌려진 지 오래된 검붉은 피부터 막 흘린 듯한 선홍색 피까지 언제 흘린지 모를 것들이 한데 엉겨 붙어 있다. 꼭 붉은색이 아니어도 몇 가지 안 되는 색의 계열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색의 농도를 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희끄무레한 색과 푸른색 만이 붉은색과 대조를 이루면서 빛과 형태를 나타나게 한다. 정육점의 붉은 조명 아래의 고깃덩이 같은 육신은 물론, 실내장식의 일부인 우주 풍경조차도 불그스름하다. 노경민에게 붉은색은 그저 여러 색 중 하나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욕망이 타오르는 장소의 안팎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노경민이 쓰는 장지는 캔버스와 달리 번지며, 밑 작업인 아교 칠을 하지 않아 번짐이 더 강조된다. 핏물이 눌어붙은 듯한 짙은 붉은 색은 수십 번을 넘게 올려야 나오는 색조이다. 


흡수되며 색이 빠져나가는 장지라는 매체의 특성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집요한 실행이 요구된다. 하얀 튜브 물감으로 명암표현을 하는 것은 서양화의 기법이다. 동서양화의 기법이 한데 어우러진 작품에서 밝은 부분은 더 밝게, 어두운 부분은 더 어둡게 표현된다. 모노톤의 화면 속에서 과장된 명암법은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온통 붉은색 일색의 환경은 붉은 피로 가득한 몸의 연장으로 느껴진다. 집이나 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몸의 연장으로 간주 된다. 몸이든 집이든, 그곳은 원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몸은 여러 경계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경계이며, 인류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이 경계에서 순수와 오염을 가르는 기준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속 많은 방과 연결된 긴 복도가 있는 광경은 그러한 경계의 무색함을 알려준다. 모텔 내부의 여기저기는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아니더라도 그자체가 몸 같다. 관객은 관음증의 시선을 따라 그 내밀한 영역으로 빨려 들어간다. 




푸르스름한, 51.5×70.0㎝, 장지에 주묵채색, 2018



낮과 밤, 장지에 주묵채색, 50×75㎝, 2019



잠, 장지에 주묵채색, 128.5×192.0㎝, 2019



어떤 밤, 장지에 주묵채색, 52.0×78.0㎝, 2019



그림자놀이, 장지에 주묵채색, 62.5×63.5㎝, 2017



객실들이 좁은 통로로 연결된 공간의 원근법은 급격하다. 우주의 풍경이 있는 복도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욕망을 향한 다가감은 직선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선적 움직임은 빠르게 쇠퇴하고 긴 여운만 남아서 내부의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긴다. 실내의 얼룩덜룩한 무늬는 변질의 전조이다. 욕망은 강렬하지만 그만큼 빨리 소진되기 때문에 공허함을 남긴다. 그것은 불처럼 땔감을 많이 필요로 하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든다. 작가의 시선이 닿는 구석구석마다 그러한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은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바탕 한 세상의 축도처럼 다가온다. 상업시설인 모텔이 선택된 것은 욕망의 해소가 일어나는 의식(儀式)에 대한 생각을 반영한다. 욕망은 사랑의 일부이지만, 모텔은 사랑 없이도 그러한 의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적 장소이다. 자신의 속을 다 까보이는 듯한 이런 그림에 당혹스럽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벗은 남성이 타자의 시선에 방치된 채 있는 장면들은 성 역할을 조금만 바꿔도 얼마나 선정적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침대 위의 여성은 침대 위의 남성 이미지에 비해 더 흔해 빠졌다. 소위 보편적이다. 그런 시각 이미지들이 고급 예술이든 하급 문화든 막론하고 지배적인 시각적 전통을 이루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전도(轉倒)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성적 대상화가 될 수 있다/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주의주장에는 힘이 실려야 하지만, 권태와 환멸로 나른한 작품들에 의미화와 연관된 방점은 없다. 다만 작가는 각자 느끼라고 암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선택 부분이 화면 전면에 있는 작품들은 대상화나 의미화를 면제받기 힘들다. 작품 [몸](2017)은 얼굴과 사지가 생략된 채 국부가 포함된 몸통이 밝게 조명되어 있는 모습이 시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사물화를 보여준다. 포르노그래피를 비롯한 성적 대상화의 끝은 사물화이다. 포르노그래피에서 몸은 착취되는 노동력처럼 사물이 될 때까지 혹사 된다. 





몸_Body, 장지에 수묵채색, 57.5×87㎝, 2017



보통사람, 56.5×55.0㎝, 장지에 주묵채색, 2018



과일이 얹힌, 또는 과일 장식 속옷을 입은 사람의 엉덩이가 화면 가득 잡힌, 포르노 사진처럼 정확한 과녁이 있는 작품 [보통사람](2018)은 몸을 어설프게 가리고 있는 푸른색 속옷을 강조한다. 푸른 팬티를 입은 남자의 동체를 그린 작품 [토르소](2019)는 남성의 특징 선명하다. 커튼을 둘러쓴 사람이 마치 발기한 남근 같은 작품의 제목은 아예 [욕망](2019)이다. 다른 시기의 작품에는 여성도 등장하지만, 여성의 상태도 남성과 다를 바 없다. 이번 전시에 침대를 무대로 여기저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잠들어있거나 깨어있거나를 막론하고, 자신을 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거나 타인의 시선에 방치된 채 있다. 작품 [잠](2019에서 여성이 언뜻 보이지만, 그것은 모텔의 실내장식의 일부로, 그림 속의 이미지이다. 두 겹으로 허상화 된 여성은 자는 남자 위에 배치되어 마치 꿈속의 연인같은 위상을 가진다. 뿌연 공간 속에서 현실과 이미지는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작가가 여성임을 떠올릴 때, 욕망의 대상이기만 했던 여성이 욕망의 주체가 되어 전시 작품의 한 제목처럼 죄의식을 낳는 행위를 관장한다. 작품 [죄의식](2017)에서 남성은 얼굴을 가리고 있다. 장소의 특수성은 상대 여성의 시선을 암시한다. 보는 여성과 보여지는 남성의 대응은 흔치 않다. 이러한 드문 현실은 이 장면을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한다. 여성이라는 욕망의 대상은 남성의 욕망을 채워준 후 저 멀리 사라져줘야 하는데, 되돌아와서 주체/객체의 경계선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시각 이미지의 긴 역사 속에서 여성도 화가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일어났다. 경계 위반이라는 금기의 장면들이 ‘힘없는’ 작품에 긴장감을 준다. 노경민은 깨끗하고 편하고 익숙한 것을 위해 내몰려진 것들을 전면화하는 불순한 작가다. 전시되는 작품들은 ‘나보다 더 나갈 수 있어?’라고 되묻는 듯한 쎈 그림이다. 높은 밀도와 강도를 통해 소통하는 예술은 늘 도약이 일어나는 역치(threshold) 점을 겨냥한다. 역치점은 대개 점점 더 커지기 마련이지만, 그곳의 사람이나 사물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로하다. 




그 남자, 장지에 주묵채색, 41×32㎝, 2017



죄의식 _ Guilty, 장지에 수묵채색, 74.0×50.0㎝, 2017



찬란하고 아름다운, 2019,장지에 주묵채색, 146.0×97.5㎝



꽃과 그림자, 장지에 주묵채색, 58.0×86.5㎝, 2019



찰나의 시간, 장지에 주묵채색, 125.0×190.0㎝, 2019



이러한 피로감은 흐릿한 외곽선도 한몫한다. 바탕처리를 하지 않고 직접 색을 올리면서 생겨난 번짐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모호하게 만든다. 강렬한 색감이 동원된 표현에 먹(주묵)이 효율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번짐에서 오는 효과를 ‘진짜’ 포르노그래피나, ‘어둠의 경로’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몰카’ 영상과 달리 정확한 포커스가 없다. 무대 세트가 있고 등장인물이 존재한다면 행위의 정점이나 목적은 빠져 있다. 왜 그 부분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는 구성들도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작가의 눈에 불현듯 들어온 사진적 장면들이다. 사회적 인간이 누리는 타자와의 관계, 그 정점에 존재하는 이 무의미함이 노경민의 작품을 진정 불경하게 만든다. 초창기 작품 목록에도 있지만, 쾌락의 완벽한 충족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는 포르노그래피는 오히려 순진하다. 사물화된 세계에서 사물은 인간보다 더 설득력 있게 메시지와 분위기를 전달한다. 


작품 [초대](2018)에서 안쪽으로 손님을 이끄는 여관의 복도는 고속도로처럼 빛이 활주한다. 너무 많이 칠해서 벗겨져 나간 장지가 진부함으로 너덜거리는 장소를 재차 강조한다. 작품 [우주](2019)는 싸구려 숙소의 유치한 장식물이지만, 별천지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는 이 장소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데는 손색이 없다. 침대 가장자리에 놓인 장미꽃 바구니를 그린 작품 [꽃과 그림자](2019는 식물이 빛을 향하듯, 관심의 대상을 향해 쏠려있다. 장미 넝쿨무늬로 감 싸인 화장대가 있는 작품 [찬란하고 아름다운](2019)은 거울 건너편으로 어떤 그림이 비춰진다. 이미지를 비추는 허상, 그것을 그리는 또 다른 환영으로서의 그림, 노경민은 더 늘어날 수도 있는 이 겹겹의 환상 속에서 핵심을 뿌리째 뽑아버린다. 그 핵심은 세간에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랑이 타자가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향할 때 더욱 빠르게 소진된다. 그 결과 생겨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반복적 시도가 있지만, 유한한 인생을 나락으로 이끌 따름이다. 




욕망,장지에 수묵채색, 145.5×76.0㎝,2019



토르소, 장지에 주묵채색, 73.5×67.5㎝, 2019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오아시스’와 비유했다.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너는 자에게 오아시스는 현실일까 환상일까. 강한 환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사랑뿐 아니라, 종교도 예술도 그러한 환상 때문에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다. 전시 부제와 가장 잘 맞는 작품 [낙원](2019)에서 푸른 바다에 바람을 한껏 안고 미끄러지는 요트가 있는 모텔의 실내장식과 그 아래의 어수선한 자리는 비교된다. 그러나 낙원 이미지 역시 얼마 안 가 색이 바랠 것이다. 작품 [푸르스름한](2018)은 붉은 실내 저편으로 동이 터 오는 시간대를 포착한다. 실내풍경과 달리 실외 풍경은 길가는 사람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일 법한 모습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모텔 풍경은 행복에의 약속으로 고객을 유혹하는 간판으로 화려하다. 전시 부제 ‘오아시스’는 모텔 이름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이국적이고 이상향적인 모텔 이름은 작품 [하바나 모텔](2018)에도 나타나 있다. 작품 [귀빈장_V.I.P Motel](2017)에서 신기루처럼 붕 떠 있는 여관 간판은 유토피아처럼 그곳이 어디인지 불확실하다. 


발코니 장식이 화려한 [하바나 모텔]이나 동화 속 뾰족한 성을 흉내 낸 입구가 있는 작품 [행복하세요](2019)는 욕망의 충족에 대한 막중한 프로젝트가 온통 미지와 미래에 맞춰져 있음을 알려준다. ‘홍등가’라는 표현도 있듯이 욕망의 해소되는 장소는 붉은색과 많이 연관된다. 붉은색과 육체적 욕망과의 관계는 흥분할 때 피가 몰리는 해부학적인 사실, 그리고 육식과 관련된 포식자의 본능에서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노경민의 작품은 붉은색 먹(주묵)을 사용하지만, 그림을 위한 촬영 때부터 붉은 조명을 사용함으로서 붉은 기운은 더욱 강해진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붉은색을 ‘색 중의 색’이라고 하면서, 붉은색은 ‘사랑에서 증오까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모든 종류의 열정을 나타내는 색’이라고 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과 관련해서 본다면 붉은색은 ‘불과 피’(에바 헬러)이다. 인간이 불을 발견하면서 얻은 광명과 저주는 신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피는 생식과 죽음과 관련되어 신성시됨과 동시에 금기시된다. 




귀빈장_V.I.P Motel, 2017,장지에 주묵채색, 48.0×32.0㎝



하바나 모텔, 148.0×98.0㎝,장지에 주묵채색, 2018



행복하세요, 장지에 주묵채색, 59.0×96.5㎝, 2019









인디프레스 갤러리 설치 전경



붉은색은 붉은 등이 켜진 싸구려 숙소에서의 인상에서 온 것이지만, 시각적 전통에서의 붉은색은 양면적이면서도 선명한 상징성을 가진다. 붉은색에는 유혹, 금지, 부도덕 등의 관념이 얽혀 있다. 동양에서도 주묵은 악귀를 쫒는데 쓰는 주술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노경민이 붉은색을 통해 불러낸 욕망은 신기루처럼 늘 저만큼씩 멀어진다. 인간과 붉은 피를 공유하는 동물성은 이성적 인간이 극복했다고 믿어지는 것이지만, 노경민의 이전 작품 [늪] 시리즈처럼 불현듯 다시 나타나 밑바닥 없는 곳으로 끌어내린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율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현대의 정신 분석학은 욕망의 외재성을 말한다. 그것은 욕망이 주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간판과 실내풍경, 등장인물들만 조금씩 달라지며 반복되는 붉은 풍경의 배경은 욕망의 외재성과 충족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노경민은 가장 내밀한 인간관계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공허와 환멸을 속되고 진부한 장소를 통해 보여준다. 또는 연출한다. 


붉은색 실내외 풍경은 무의미하지만 반복되는 욕망의 풍경이다. 앙리 마티스의 유명한 작품 [붉은 방 Harmony in Red](The Red Room)(1908)은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조형언어의 자율성을 조화롭게 표현한 미술사의 역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이 드러나 있다. 조형적 언어의 자율성을 구가하는 현대예술 또한 어떤 그림자 같은 존재를 요구한다. 마티스를 필두로 하는 야수파 회화에서 여성은 여전히 욕망의 대상이며, 누군가 욕망의 대상으로 포획되어 있는 한 인간(남성)은 자유롭고 자율적이다. 그리고 ‘창조적’이다. 창조력은 ‘생식력’과 연관되곤 했다. 21세기 노경민의 붉은 방에는 남성이 있다. 그러나 그 우주는 형식적 언어의 자유로운 배열을 위해 내쳐져야 했던, 욕망을 비롯한 인간 감정의 잔여물들이 치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퇴행인가, 아니면 편향된 시각 질서를 바로잡는 균형추인가. 작가는 포르노그래피, 응시, 페미니즘 등 여러 분야를 연구해왔지만, 작품을 통해서는 굳이 어떤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저 징한 현실의 환상성을 보여줄 따름이다.       

 

출전; 인디프레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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