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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식 /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바탕

이선영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바탕

  

이선영(미술평론가)


  

‘自·自·⾃’라는 전시 부제로 열리는 이규식의 개인전은 자신을 반복적으로 호명한다. 벽에 걸리거나 천장으로부터 늘어뜨린 작품들 안에도 ‘李·규·식’이라는 세 글자들이 가득하다. 그는 이 세 글자를 이어서 새기거나 쓰고 있지만, 최종적 결과물은 마치 원자들처럼 자음과 모음이 표면이나 평면을 뒤덮는 모양새를 이룬다. 글자는 다른 차원에서 볼 때의 낯설음, 오랜 수행적 작업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적 리듬 등이 어우러져 오묘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는 자신을 작품의 중심에 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작품에서 구사하는 반복의 전략은 자신의 유일성을 무화시킨다. 그것은 나를 각인함과 동시에 나를 지우는 역설이다. 쓰거나 새겨진 이름들은 반복이 거듭됨에 따라 흐릿해지곤 하기 때문이다. 작업의 진행에 따른 자연스러운 배치는 또렷한 형태들 사이의 틈을 줄여 나간다. 형태들이 같은 위치에 같은 크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반복은 강화가 아닌 약화가 된다. 






그렇게 무화된 바탕에서 다시 쓰기가 시작되지만, 또 다시 무화 되고 만다. N 번째 무화에서 형태는 색으로 포화 된다. 형태들에 의해 만들어진 바탕에서 시작되는 글자들은 첨가되는 것인 동시에 바닥에서 떠오른 듯 보인다. 바탕과 형태 사이에는 상승과 침전 같은, 위아래의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그의 작품은 아이들의 모래성 장난이나 티벳 승려들의 만다라 제작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생산의 시대는 축적하고 건설하기를 권했지만, ‘오래된 미래’의 근본적 가치는 놓기를 권한다. 새롭게 우주를 건설하기 위해, 또는 새롭게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것들은 해체되어야 한다. 대부분 둘둘 말거나 포갤 수 있는 그의 작품 형식은 다음의 자리를 잡기를 위해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유목민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규식의 작품은 선적 시간성보다는 순환을 떠올리기 때문에, 무화나 무너짐 등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필연성이다. 


작업이란 최종적 결과물보다는 거듭되는 시작일 따름이다. 인생에서 그러한 시작이 재차 주어지는 일은 흔치 않다. 누군가 말했듯이, 예술의 자유로움이란 ‘시작의 자유’를 말한다. 작품마다 새로 시작되는 주기와 양상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관객이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그림자처럼 보이는 반투명의 인체 실루엣이 줄줄이 걸려있다. 490~500cm 크기로 100cm 가량 바닥에서 띄워 매달아 놓은 것들은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알몸 실루엣이다. 방충망 재질의 평면 실루엣에 전기인두로 지져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정 간격으로 수직적으로 배열된 실루엣의 맨 앞쪽에 서서 바라보면 수많은 이름은 겹겹의 층들이 만들어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인체 형태들의 가장자리는 자세의 미세한 차이들에 의해 흐릿하며 잠재적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름 석 자를 반복해서 쓰는 것을 비롯해서 뭔가 근본적인 지점을 탐사하는 이규식에게 이들 그림자 형태는 회화적 재현에 대한 기원으로 소급된다. 




설치과정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회화의 기원은 그림자이다. 회화가 처음에는 사람의 그림자 윤곽선을 베껴 그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물이 드리운 그림자의 윤곽선을 베낀 그림자 그림은 이미 실물의 일부로 인식된다. [예술가의 전설]은 이 대목에서 한 인간의 소유물이나 육체의 일부가 그 사람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주술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작품의 도상을 이루는 자신의 실루엣이나 이름 쓰기를 그저 손쉽게 선택한 소재나 장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그림자와 그림자의 그림자로 이어지는 형태는 분열적이다. 전시장으로 통하는 로비의 창 가득히 글자를 써놓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도 같이 비추는 작품에 나타나듯, 그의 작품은 분열적 요소가 있다. 주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또한 분열증을 고무시키는데 일조하는 듯하다. 유리창 위에 가득 쓴 이름들은 거울의 방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자아의 반영물을 상징한다. 


연속적으로 보이지만 부분들로 잘게 나뉜 시공간에 분열적 주체가 있다. 자신의 이름을 계속 쓰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자각의 욕망이지만,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반복적 행위에 의한 형식의 일관성이나 약간의 질서감은 부차적이다. 수많은 이름들을 쓰는 자신을 보는 또 다른 창은 마치 반사상이 거듭됨으로써 무엇이 모상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나는 쓰는 자일까 쓰여지고 있는 자일까. 특히 작가라는 존재에게 이 둘의 구분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내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존재라면 쓰기라는 고된 또는 열락의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확실해 보이는 존재가 가짜라면? 기만적인 현실의 일부라면? 아니 최고봉이라면? 그것은 지난 세기에 있었던 주체 철학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적 비판의 대표적인 주장의 일부이다. 작가는 여러 장치를 구사하면서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설치과정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반사상이 많아지면 주체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분산하고 흔들어놓는다고 본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신기루처럼 붙잡고 그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성으로 환상이 조금씩 자리를 넓힌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시간을 자기 이름쓰기로 보내는 이규식의 작업은 쓰기와 자신을 혼동한다. [거울의 역사]는 쓰기를 매체로 하는 소설가의 예를 들고 있지만, 이규식의 작업은 조형적인 자기 쓰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한반사가 일어나는 거울의 방에서 자신의 단일성을 확보하고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작가의 삶 전체를 채우는(또는 비우는) 쓰기는 주체성의 확립과 소멸 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나는 찾아내야 하는 미지의 존재이지,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다. 자명한 출발점은 주체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합리적 이성이 개인을 행복하게 해준다거나, 특히 작가로서의 그의 작업이 자동적으로 잘되게 해줄 수 있을까? 


이성은 도구일 따름이다. 현실에서는 그러한 도구를 목적으로 삼는 가치전도가 일어난다. 이규식의 작품에서 구축과 해체를 반복하는 그의 이름은 이중적이다. 수 십 년의 인생을 통해 그의 정체성을 만들어왔을 이름 석 자는 사회에서 그의 위치를 알려준다. 대부분 ‘OOO 선생님’으로 불려왔을 그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다. 물론 작가로서의 OOO이라는 이름 또한 가벼울 수가 없다. 다만 상징계에서 작가의 위치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작가는 규칙의 수호가 아니라 규칙을 위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레비 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은 사회를 상징적 체계들의 결합으로 간주한다. 상징계는 점차 자율적인 구조가 된다. 구조를 지배하는 법칙은 언어의 법칙처럼 강고하다. 이 법칙은 개인으로 하여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엄격하게 규정한다. 반복을 통해서 의미화의 사슬을 끊어내는 이규식의 작품은 언어가 상징계에 속하며 이 상징계를 통해 주체가 구성됨을 말한다. 동시에 해체됨도 말한다. 




설치과정



자신의 이름을 여러 형태의 기표로 만들어서 주술적 반복을 행하는 이규식의 방식은 해체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상징계에 대한 정신분석학자들의 평가는 결정론적이고 비관적이다. 페터 비트머는 라깡의 이론을 해설한 [욕망의 전복]에서, 상징계는 진리와 거짓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정의한다. 주체는 기표, 믿음, 진리의 장소를 만드는 상징계의 차원에 위치한다. [욕망의 전복]에 의하면 라깡은 이것을 주체가 언어에 의해 관통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심지어 언어에 의해서 지워져 버렸다고 말한다. 언어는 구별 지으며 고립시키고 완전한 충족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말, 하나의 글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욕망의 충족이라는 인간의 지대한 목표 자체에 원초적 결핍이 깔려있음을 본다. 자신의 이름의 내용이 다 비워질 때까지 반복해서 쓰는 이규식의 작품은 어떠한 의미도 결국은 불충분하다는 원초적 상실감을 보여준다. 상실의 끝은 죽음이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반복 강박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반복 강박은 쾌락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더 기초적이며 더 본능적이다. 이규식의 작품에서 유기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느슨한 반복은 더 큰 결합체로 묶어 나가면서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반대된다. 그의 이름 석 자는 ‘무기물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생명체의 또 다른 경향’(프로이트)으로 배열되어 있다. 벽에 한 줄로 이어 붙여 놓은 51개의 나무 패널에도 그의 이름이 쓰여 있다. 글자들이 쌓이고 쌓여 보이지 않게 될 무렵 새로이 시작된 형태는 이전과는 다른 뚜렷한 색감을 지닌다. 그것은 형태와 바탕의 전환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수평으로 붙인 패널들과 수직으로 걸린 설치물이 각도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을 준다면, 수 백 개의 투명 플라스틱 보울을 한 줄로 쌓아 천정에서부터 늘어뜨린 작품은 중력에 보다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한때 시원하게 목을 적셔준 음료가 담겨 있던 용기들이다. 





설치과정



그 안에 남은 물감 찌꺼기가 그것이 일회용품임을 알려준다. 이 세상에서 사용되어 왔던 용기(用器)만큼이나 끝없이 남아있을 찌꺼기들은 갈증이 충족되기 힘듦을 알려준다. 작가는 그 용기 안에 담겨있던 물감 찌꺼기들을 따로 모아서 미술관 바닥으로부터 120cm 가량의 높이로 전시장 둘레 가득 붙여놓았다. 물감 찌꺼기들로 이 벽면을 가득 채웠을 시간들, 또는 어떤 시간을 채웠을 공간들을 떠올린다. 빈 여백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은 물감 집합체의 우연적 실루엣들을 포괄한다. 무엇인가를 그리는데 쓰였던 물감의 잔여물들은 그자체로 미디어가 된다. 글자를 미디어로 사용하는 작가는 물감 또한 그렇게 활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글자나 물감이라는 미디어의 존재 방식은 불투명하다. 그가 방충망이나 합판 등에 쏟아놓은 글자들은 물감 찌꺼기만큼이나 무엇인가를 읽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규식의 작업이 엄격한 형식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自·自·⾃’라는 전시 부제는 자신뿐 아니라 자연스러움 또한 중시한다. 


그의 작업은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행되어온 결과물이다. 얼마 전에야 교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는 직무를 포함한 일상 속에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각 시간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품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도 한 수집물 또한 반복에 기반한다. 그의 작업실에는 영양제 껍데기부터 화장품 용기, 음료수 캔, 교실에서 뜯어낸 마룻바닥, 심지어는 체모까지 차곡차곡 수집되어 있다. 이전에 했던 작업들 역시 책자나 두루마리 형태 등으로 보관되어 있다. 그 모두가 반복적인 소비/생산의 패턴을 각인한다. 이러한 방식은 예술뿐 아니라, 노동과 종교 같은 삶의 다른 양식에도 선명하다. 그의 이름으로 빼곡히 새겨진 작품들은 수도사들이 종교적 경전을 필사(筆寫)할 때의 느낌이 있다. 필사물은 정확한 재현에서 벗어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반복적인 실행은 자신을 충만하게 채우기보다는 비워낸다. 작업에 임하는 순간의 즐거움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 작품들은 종교적 수행자들이 했던 방식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명상이 단 1초 동안 만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만약 명상을 1시간 했다면 1초의 순간이 연장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회한을 낳는 과거나 번뇌를 낳는 미래가 지워진 찰나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비워진 충만한 현재에 머무는 것은 행복의 조건이자 작업의 조건이 된다. 이규식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만약 가졌다면 불교를 가까이 했을 거라고 말한다. 시점과 종점을 가지는 시간에 내재한 역동적 드라마가 아니라, 찰나에 대한 그의 가치부여를 생각할 때 설득력이 있다. 그의 작업은 현재에 머물기 위한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이다.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적 관계가 붕괴된 상태는 정신분열에 가깝지만, 그 또한 의미를 비워내고 기표들이 쇄도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까지 근접한 예술적 실천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삶의 안전한 영역에서 이 극단적 실천을 예술이라고 칭하며 추체험한다.  

  

출전; 청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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