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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 조금씩 다르게 받아쓰기

이선영

조금씩 다르게 받아쓰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이번 전시에서 발표되는 이정희의 주요 작품들은 표지석 위에 새겨진 문구들을 담요나 옷 등에 사용하는 기모 소재의 천 위에 옮긴 것들이다. 전국에 산재된 표지석들은 매우 많을 수 있는데, 작가는 올해 3.1운동 100주기를 맞아서 국내외의 상징적인 장소에 세워진 표지석들만을 모았다. 여러 색깔의 담요 원단에 옮겨진 표지석에는 독립 선언문을 인쇄하고 배포하던 곳 등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딱딱한 반석의 표면에 새겨진 글들이 부드러운 천에 옮겨지는 것은 단순히 소재의 변주에 머물지 않는다. 털을 세워서 털이 눕혀진 배경과 차이가 나게 만들어 문자가 나타나는 사물의 표면을 손으로 문지르면 기존의 글자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손을 타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털이 일어나기 때문에 새겨진 글들을 흐릿해진다. 관객은 표지석들을 그대로 옮긴 문구들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을 지울 수도 있고 고쳐 쓸 수도 있다. 무엇인가를 기념하고 계몽하는 공적 언어는 이러한 상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작가가 조사하고 수집하여 활용한 표지석의 문장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인 상징계에 속한다. 상징계는 레비 스트로스같은 인류학자나 자끄 라깡같은 정신분석학자가 인간과 사회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활용한 이래 널리 알려졌다.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도 지배적 언어를 선택할 수 없다. 다만 그 세계에 던져질 뿐이며 교육같은 자발적, 타발적 과정을 통해 내면화해야 한다. 이 특권적 질서의 대표적인 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명령’이지만 동시에 ‘구조상으로는 무의식적’(레비 스트로스)이다.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지배적 언어를 통해 사회적 유대관계를 지배하는 규칙을 내면화한다.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언어는 타자로부터 오기 때문에 무의식적이다. 작가가 수집한 표지석의 문구에는 집단이 개인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식적 내용이 있지만, 동시에 무의식도 깔려 있다. 낡고 닳고 방치된 표지석들에서 독립운동 100주년을 떠드는 사회가 실제적으로는 소홀히 하는 역사의 위상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난다. 


작가가 즐겨 수집하는 오래된 사물들은 기억과 그 기억을 촉발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보고이 기도 하다.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쓸 수도 있는 이 작품에서 단순히 주어진 것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생산하게 한다. 이정희의 작품들은 작품(work)에서 텍스트(text)로 방점을 옮긴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비평가들처럼, 원저자의 의도나 목적보다는 독자/관객의 해석과 다시 쓰기를 더 중시한다. 의도나 목적이 아니라 해석과 다시 쓰기를 더 중시하는 것은 의도나 목적이 관객/독자에게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작가의 의도나 목적이란 것도 확실한 것인가?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나고 유가 가감 없이 전달되리라는 생각은 고전주의적 이상에 속한다. 쓰기든 읽기든 언어 자체의 불투명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현대예술은 현대철학과 더불어 재현주의에 근거한 이전 시대의 언어적 투명성에 대한 믿음을 의문에 부쳤다. 이때 재현의 대상에는 객체뿐 아니라 주체도 포함된다. 


작품은 주체나 객체를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이나 창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무의식의 발견이 큰 몫을 했다. 이정희의 작품은 프로이트가 주목한 다시 쓸 수 있는 메모판처럼 거듭 다시 쓰여질 수 있다. 프로이트가 비유한 메모판 장난감은 어릴 때 필자도 가지고 놀았던, 비닐이 덮인 작은 메모판으로, 뾰족한 것으로 무엇인가를 쓰거나 그린 후 들춰내면 이전에 썼던 것이 사라지고 다시 빈 판이 되는 장난감이다. 그러나 필기가 이루어졌던 표면에 필기 자국은 미세하게 남는다. 프로이트는 이 거듭된 쓰기가 이루어지는 서판에서 무의식을 본다. 반복되는 단어, 농담, 실수 등에서도 그러한 무의식의 흔적들이 남는다. 모더니즘적 새로움을 거부하는 문화사조에서도 거듭해서 쓰여진 양피지(Palimpsest)에 대한 비유가 사용되기도 했다. 필자가 1970년대에 가지고 놀았던 이러한 원시적인 장난감은 이제 사라졌지만, 스마트폰 필기용 펜으로 액정 위에 쓰고 그리는 최근의 실행에서도 그 비슷한 원리를 본다. 


여기에는 비닐쪼가리 위의 흔적같은 것은 남지 않지만, 여전히 포렌식 데이터 복구 등의 방식이나 빅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사용자들의 의식과 무의식이 검색될 수 있다. 오죽하면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이를 겨냥한 ‘디지털 장의사’같은 직업이 생겼겠는가. 사용자의 흔적에 남아있는 정보는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작가가 어릴 때 담요의 결을 이리저리 매만지면서 그림을 그리던 놀이에서 비롯된 이 작업을 한 지는 10여년이 된다. 마치 모래성을 쌓듯이 형태를 만들고 사라지게 하고 다시 만드는 이 방식은 사물에서 어떤 흔적을 떠내는 방식은 2016과 2018년의 개인전 ‘jean 한 드로잉’ 전에서도 발견된다. 오브제에 청바지에 사용되는 원단을 씌워 워싱한 작품들은 청바지를 입은 사람의 몸 흔적을 남기듯이 사물의 흔적이 표면에 남겨진다. 이정희의 작품 목록에서 다시 쓰기의 또 다른 예는 오래된 백과사전을 활용한 작품 [새로운 기록]이다. 작가는 시옷으로 시작되는 항목에 휴지로 만든 세월호 모형을 올려놓았다. 


우리 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세월호 사건은 백과사전이 인쇄된 50-60여년 전에는 없었던 사건이다. 정보는 계속 업데이트되며, 기존의 서술은 조금씩 변해간다. 백과사전을 활용한 작업은 새로운 항목이 생기고 기존의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은유한다. 웹상에는 수많은 독자들의 집단 지성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정보도 있다.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텍스트 이론가들이 사전의 메커니즘으로 자신들의 읽기/쓰기를 비유했다. 한 단어의 의미를 찾을 때 의미를 설명하는 단어를 또 찾게 되고, 이러한 과정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꼬리를 무는 항목 찾기는 어떤 개념을 정확히 규정하려 할수록 상호성에 열릴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유는 최초의 의미가 아니라, 계열을 이루는 무한한 해석과정을 중시한다. [악마의 사전](엠브로스 비어스)같이 자기만의 관점으로 사전을 쓴 저자의 책들도 꽤 많이 존재한다. 이정희의 다시 쓰기 작업은 표지석이든 백과사전이든, 어떤 대상을 사용하든 열려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설치작품 [너무 큰 장군]은 무의식을 탐사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빛의 반대쪽에 드리워지는 어둠인 그림자는 무의식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그림자는 동일자의 타자인 것이다. 작가는 작은 이순신 모형 장난감에 손전등을 연결시켜 벽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했다. 그림자는 명증하게 보이는 부분의 이면에 주목하게 한다. 손전등의 빛과 결합 된 거대한 상은 마치 태양 빛과 함께하는 위대한 기념비를 보여주는 듯하다. 원래 크기는 16cm인데 그림자만 보면 매우 큰 것 같다. 그것은 작은 것을 확대한 것, 나쁘게 말하면 과장한 것이다. 작가가 거주하며 작업하는 도시에 100미터 크기의 이순신 상과 타워를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영감받은 것이다. 그러한 소문은 작은 사찰 앞의 거대한 불상이 번쩍거릴 때 성스러움보다는 세속적 욕망을 떠올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준다. 이 설치작품은 ‘간단한’ 방식으로 풍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감각이 돋보인다. 


무겁지 않게 세태를 풍자하는 방식은 세월호 사건이나 일본군 위안부 사건, 촛불 시위 등을 소재로 한 이전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작가는 시대와 순발력 있게 대화한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공원의 벤치를 작품을 향해 배치한다든가, 지역의 대안공간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사형식으로 오브제를 배열한다든가 하는 작품들은 작가의 조형적 순발력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정희가 사용하는 오브제 자체가 시대의 무의식이 쌓여 있는 것이다. 작가는 몇몇 형식적 조치를 통해 오브제에 잠겨있던 무의식을 풀어헤친다. 예술을 통해 무의식은 의식화된다. 그리고 그렇게 전면화된 의식의 무의식이 다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무의식은 이전의 무의식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나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은 필연적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영원한 회귀’(니이체)의 중심점은 조금씩 달라진다. 이러한 운명에서 예술 또한 자연 및 역사와 보조를 맞춘다.    

 

출전; 창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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