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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레레) / 상징적 질서에 대한 여성의 이의제기

이선영

상징적 질서에 대한 여성의 이의제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성추행을 비롯한 성관련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이 다르다. 가해자의 기억에는 아예 없을 수도 있는 사건이 피해자에게는 뼛속 깊이 새겨진다. ‘배 지나간 자리 표시 나나?’라고하면서 ‘호방하게’(?)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는 자기 합리화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큰 상처를 이렇게 기괴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운 없는 경험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선의 작품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의식화하고 작업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전 작품 [사실 바랐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_열두 살](2011)에 나와 있듯이, 12살 이른 아침 교회에 가는 길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은 이후 뻥 뚫린 가슴을 가진 존재나 몸통 위에 복잡한 선들로 가득 채워진 문양이 새겨진 형태를 낳았다. 신을 닮은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미확인 생물체나 괴물같은 모습의 개체들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다지류처럼 많은 다리를 내기도 하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한다. 




삶을 좀먹는 믿음과 기반을 무너뜨리는 의심 사이에서, 가변설치 / 2019, 석기질점토에 스크래치 드로잉, 청화, 흑유



작품 [우리는 모두 괜찮을 것입니다](2014)처럼, 겨우 두발로 서있는 경우조차도 머리는 부재하다시피 한다. 머리를 없애면 나쁜 기억도 사라질까. 드로잉 베이스의 작업이 입체로 확장되는 작품 속 복잡한 무늬들은 몸이 ‘그것’을 기억함을 알려준다. 여러 작품에 나타나는 공간공포증이 느껴지는 빽빽한 선들은 읽을 수 없는 문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20년도 더 흘렀지만 작품 속 주체는 아직도 그 사건과 투쟁하고 있다. ‘괴물과 싸우면서 자신도 괴물이 되어가는’(니이체) 듯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작품을 통하여 상처를 가시화하는 과정은 그자체로 치유라고 할 수 있다. 갈팡질팡하는 만신창이의 심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공적인 표현을 얻을 때 고통은 열락으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괴리감’을 표현한 작품 [증명할 것](2011)이 보여주듯, 무엇인가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홀딱 까뒤집는 듯한 날이 선 형태가 자주 발견되는 작품들은 오직 하나의 문제에 집중한다. 


하나에 고착되어 있다기보다는, 그 사건이 함축하는 바가 너무 전형적이기 때문에 파헤칠수록 줄줄이 딸려오는 것이 많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논구하는 종교에 까지 이른다. 미술계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초상이며 자기 이야기인 작품들이 많다. 근대 이후 주체가 비대해지는 국면을 지나면서 예술은 종교가 맡아왔던 자기 존재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거의 떠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과가 다 허심탄회한 것은 아니다. 얼마나 우리는 자기 일을 남의 일처럼 대상화하면서 고상하게 말하려고 애쓰는가. 고상하지 않은 사람이 고상한 척하려는 위장술(또는 승화) 때문에 문제가 더 꼬이는 수가 있다. 그러한 위선적인 태도가 예술이라는 마지막 해방구를 재영토화 시킨다. 세라믹 창작센터에서 발표된 대작 [삶을 좀먹는 믿음과 기반을 무너뜨리는 의심 사이에서](2019)는 복잡하게 얽힌 지하의 동굴의 침식된 바위같은 그로테스크한 형상이 원형 좌대 위에 올려 져서 밝은 조명을 받고 있다. 




삶을 좀먹는 믿음과 기반을 무너뜨리는 의심 사이에서_세부



샬롬 연작_1,1층부터 4층까지, 54.5X78.8 / 2019 , 판넬에 아이언페인트, 부식액



샬롬 연작_2, 1층부터 4층까지, 54.5X78.8 / 2019 , 판넬에 아이언페인트, 부식액



누군가의 책제목처럼 ‘상처가 무늬가 된’ 미세한 표면을 눈으로, 손으로 따라갈 수 있다. 이 작은 무대 위의 미확인 생물체는 갑작스러운 빛에 당황하지 않고 홀로 겪어왔던 고통스러운 몸짓을 다수가 향유할만한 비극적인 춤사위로 변화시킨다. 강한 힘, 영감일수도 폭력일 수도 있는 힘이 몸 또는 물질을 관통하는 듯한 이 작품은 여러 개체가 한데 얽혀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체의 몸부림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대결이 아니라, 주체와 주체 안의 타자와의 사투인 것이다. 하나의 몸에서 시작되었지만, 기관이 분화되지 않은 김영선의 작품은 ‘뫼비우스 띠처럼 안팎이 유동적인 표면들’(엘리자베스 그로츠)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를 횡단하는 선들로 가득하다. 방향도 없이 내달리는 선들은 흙에 새겨졌다가 유약을 바른 후 다시 닦아내는 과정에서 선명해 지며, 1250도의 불 속에서 완전히 자기(磁器)화 됨으로서 불가역적인 과정으로 완결된다. 


덮고 닦고 하는 이후의 과정은 최초의 각인을 무화시키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 한다. 특히 사건의 무대가 된 장소가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작가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영선은 자신의 작업을 크게 ‘비틀어진 자기감’, ‘피해자의 괴리감’, ‘생존자로서의 감각’, ‘교회 이야기’로 나누는데, 종교는 사건의 의미를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며 자신의 작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삶을 좀먹는 믿음과 기반을 무너뜨리는 의심 사이에서]와 [샬롬] 시리즈는 ‘교회 이야기’에 속한다. 교회에서 봉사라는 미명으로 착취되는 여성의 그림자 노동을 다루는 동시에, 은폐되는 교회 내 성폭력을 이야기하는 작품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019)--제목은 다윗의 밧세바 강간에 관하여,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꾸짖는 장면을 언급한 성경을 인용한 것이다--는 대표적인 단순노동 작업을 상징하는 영수증 심지를 총알의 탄피처럼 늘어놓았다. 어수선하게 흩어진 형태들 위에 얼룩이 산재한 작품 [교회를 오염시키는 것](2019)은 유기체적 질서에 기반 하는 고전적인 미와 거리를 두는 현대미술의 어법이 비판적 태도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알려준다. 




증명할 것, 68X52X105 / 2011, 석기질점토에 흑유 드로잉



증명할 것_세부



초대하지 않은 거주민, 2013년.



들려요? 저기요...2014년.



나 불렀어? 2015년.



[샬롬 연작 1,2](2019)는 부식액으로 칠해 표면에 녹슬게 해서 추상적이면서도 ‘교회에 머리가 없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표현한다. 그 작품에 의하면, 한국의 일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교회는 몸’이라는 성경말씀과는 거리가 있다. 이후 상처 입은 어린 소녀는 작가가 되어 가부장제도와 종교, 그리고 성폭력이라는 보일 듯 말 듯 연결된 인과 고리를 파헤치고 있다. 한 문제에 집요하게 천착하는 작품들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또 다른 합리화도 거부한다. 종교는 이미 자신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에, 자기의 자리에서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다. 피해봤자 문제는 반복된다. 학교에서 공장에서 회사에서, 가부장적 권력이 살아있는 그 어디에서고 말이다. 몸의 변형체라고 할 형태에 새겨져 있는 선들은 ‘내 뼈에 새겨진 교회법과 관습’ 같은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한데, 김영선에게 교회는 그러한 공동체 중의 하나이다. 자신이 비롯된 곳이 교회라면 변화는 그곳에서 일어나야하는 것이다. 


교회음악의 다섯 순서 중 가장 앞선 순서인 속죄곡에서 따온 제목의 작품 [Kyrie Eleison](2014)은 신이 있는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들이 갈구하는 듯한 자세를 함축한다. 2011년부터 사용하던 예명 ‘레레’도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Miserere Nobis)’이라는 문장에서 온 것이다. 거기에는 작업 활동을 통해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녹아 있다. 신은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도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 이후 작가는 무성애자(asexual)로 커밍아웃을 하고 보수적인 교단 내에서 성소수자를 이단시하는 경향에 대항하는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했다. 2018년에 결성되어 작가도 그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불화자 콜렉티브](대표; 강철)는 여성인권과 성소수자 의제로 오픈되어 있는 단체이다. 여성, 퀴어 등의 인권을 중시할 뿐 아니라 동물권도 중시하는 등, 억압받는 타자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성인이 되어 선택한 ‘새로운’ 정체성인 무성애자는 생물학적 성차로부터 비롯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초의 상처가 낳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최초의 상처가 한 개인의 정상적인 성정체성을 왜곡시켰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교회를 오염시키는 것, 가변설치 / 2019, 페이퍼클레이에 흑유 드로잉



교회를 오염시키는 것_세부1



교회를 오염시키는 것_세부2



이러한 선택에 왜곡과 일탈을 말하기 전에, 전통적인 남성/여성의 조합이 만들어냈던 그 수많은 비정상성이나 폭력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 자신도 성소수자였던 철학자 미셀 푸코는 [성의 역사] 연작에서, ‘성이란 그 독자적인 본성에 의해 형식화 될 수 있는 어떤 규범도 내재적인 규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개인은 선험적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푸코에 의하면 개인의 정체성이란 신체 위에, 행동과 욕망 위에 가해지는 권력 관계의 결과에 불과하다. 김영선이 말하듯이, 성추행의 문제는 단순한 성욕의 문제라기보다는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인 성을 타자에 대한 권력 행사로 삼는 관행에서 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신체에 대한 동의 없는 침해’가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이 비정상이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익에 관련된 활동을 하는 작가에게 종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종교냐 예술이냐의 갈등보다는, 종교 문제를 정면 돌파하려는 작가의 방식이 작업의 심도와 강도를 더해 주고 있다. 


보수적 교단은 성소수자를 비정상으로 낙인찍는다.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무성애자인 작가는 ‘출교 대상자’인 셈이다. 보수적 교단은 종교적 경전 외에 과학의 예를 들려할 것이다. 제프리 윅스는 [섹슈얼리티; 성의 정치]에서 19세기 이래 의학은 성을 규제하는 주요한 힘이었던 종교를 대신하려고 애썼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의학의 언어는 도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대신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 건강한 성과 병든 성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가부장제의 그늘 아래에 있는 종교나 과학의 분류법인 정상/비정상의 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몸은 문화도 생물학도 아니다. 몸은 ‘문화적으로 직조되는 자연의 산물’(엘리자베스 그로츠)이다. ‘자연’이 ‘문화’로 직조될 때 필요한 권력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권력은 지배하기도 하지만 저항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김영선은 종교를 비롯한 기성의 문화가 몸에 새겨온 법을 다시 쓰려한다. 드로잉에 기반 한 작업은 쓰기의 다른 변주이다. 




'정상'을 바라던 이야기, 2018년.



당신은 내 속을 볼 수 있다, 2016-2018년.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 가변설치 / 2019, 플라스틱 영수증 심지



Kyrie eleison, 76X80X85 / 2014, 석기질점토에 안료 드로잉



우리는 모두 괜찮을 것입니다(세부), 16X18X32.5 / 2014, 석기질점토에 청화, 안료 드로잉



작품의 표면을 가득 메운 자유로운 드로잉은 기존의 코드가 무력화되고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장이 된다. 현세의 제도를 비판할 뿐 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작가는 ‘법 보다는 사랑을 요구’(크리스테바)한다. ‘아버지의 법’은 여성에게도, 성소수자에게도 공정할까. 법 자체가 분리와 지배의 결과 아닌가.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기독교의 유산인 일신교는 여가장제에 대항하여 가부장제가 일으킨 투쟁의 결과라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기독교는 인간에게 부성적 기능의 상징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영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종교라고 지적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버지와의 동일화는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야기하며, 아이를 다른 차원의 주체, 다시 말하면 욕구 불만과 부재를 넘어서 언어활동이 펼쳐지는 상징적 차원의 주체로 만든다. 그에 의하면 법칙을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남근 상징적인 본능이다. 


인간에게는 언젠가 일어났던 원초적 상처가 아니더라도, ‘말하는 주체나 법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따라 내내 벌여야 하는 투쟁’(크리스테바)이 있는 것이다. 상징계는 가부장적이다. 상징계의 언어를 통해서 사회적 코드가 산출되고 유지된다. 성적 지배는 물리력이나 성욕 그자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권력의 편재성은 그에 대한 저항 또한 다른 전략을 요구한다. 상징적 질서에 대한 여성의 불만은 광기로 나타난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근원적 열정]에서 페미니즘에 자끄 라깡의 이론을 대입하면서, 남근적 권력과 동일시함으로서, 상상의 단계에서 해방되어 상징적 질서로 진입하는 소년과 상징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없어 언어 없이 타자로 추방당하고 상상의 단계에 머무는 소녀를 대조한다. 이리가라이에 의하면 이 상상의 단계에서 여성작가들은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자아형성의 과정에 균열을 가한다. 김영선의 작품은 평면이고 입체고 선적 표현이 가득하다. 이 교란적인 선들은 상징계에 군림하는 남근이라는 기표를 해체하려는 움직임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모두 괜찮을 것입니다



사실 바랐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_열두 살, 39X21X138 / 2011, 석기질점토에 흑유 드로잉




출전; 클래이아크김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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