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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 / 기억을 통해 활성화되는 시공간

이선영

기억을 통해 활성화되는 시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이경민은 어떤 공간에 담겨있던 것을 또 다른 공간에 다시 담아낸다. 대개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이나 전시 공간이지만, 2019년 가을 서울의 갤러리 카페 코소에서의 전시처럼 그 장소의 특징을 작품 내용으로 삼는 경우에 양자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러나 전시 공간은 대개 작품이 출발했던 공간과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있던 그대로 재현될 수는 없다. 재현하려면 사진이나 사실주의풍의 그림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재현을 대신한 제시에는, 결정적인 한 장면을 ‘대리 보충하는’(데리다) 수많은 요소들이 투입된다. 정확하게 재현되지 않은 채 생략된 빈칸들에서 무엇인가 새로이 생겨난다. 압축된 대상들의 재배치를 통해 소멸되는 것과 생성되는 것들이 있는 이경민의 작품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곤 하는 서로 다른 공간이 지각을 통해 연결되면 어떤 기억이 활성화된다. 새로운 배치를 통해 만들어진 공간은 연극적 무대같은 모습이며, 그 상황은 어떤 시간, 즉 기억을 호출하는 것이다. 




villa cappuccino_이경민, 2019년 갤러리 카페 코소에서의 설치전경



villa cappuccino_이경민



작품은 기억을 촉발하는 사물, 텍스트, 영상 등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자신의 몸을 포함 하여, 한 공간에 오래 담을 수 없는 현대적 삶이 반영된다. 이경민의 작품에는 국내외, 한국의 여러 도시의 흔적들이 담겨있다. 갤러리 카페 코소에서의 전시는 얼마 전에는 식당으로, 요즘에는 갤러리 카페로 용도 변경된 한 장소의 여러 이력을 반영한다. 무엇을 팔았든 그곳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장소였고 그 매개가 된 것들이 있었다. 투명 플라스틱 컵을 기둥처럼 쌓아서 구조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커피 찌꺼기로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 쌓은 작품 [villa cappuccino]는 커피 찌꺼기에 남아있는 냄새가 공(共)감각적인 상상을 야기한다. 그 공간에서 소비했던 커피들로 층층이 쌓은 작품은 불사리탑(stupa)처럼 끝이 뾰족한 구조를 가진다. 커피 찌꺼기로 만든 부분들은 상대적으로 완벽한 형태부터 주변에 가루를 흘린 채 부서지고 있는 것까지 여러 계열이다. 커피 찌꺼기들은 허물고 다시 쌓을 수 있는 모래성처럼 재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커피 찌꺼기로 형태를 찍어내는데 사용했을 법한 작은 스텐레스 컵도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작품 [villa cappuccino]에는 담겨진 것과 담는 것의 공존이 있다. 전시공간을 포함하여 수많은 공간들은 겹겹이 무엇인가를 담아낸다. 기억은 매번 재구성될 수 있으며, 커피 향기가 실어나를 기억의 단초가 된다. 레이첼 허즈는 [욕망을 부르는 향기]에서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드는 것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맥락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에게서 떨어져나와 현재의 순간들이 계속적으로 혼란스럽게 이어지는 망망대해에 떠다닐 뿐이다. 후각은 수많은 방법을 통해 우리의 삶에 풍부한 결을 만들고 깊이 있는 감정을 안겨준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레이첼 허즈도 많은 부분 소개하고 있는 ‘프루스트적 기억’의 특징은 ‘냄새로 인해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일이 생생한 감정을 동반하여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단번에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시켜주는 기억의 우연성과 즉각성은 후각이 아닌 다른 지각에도 적용된다. 




villa cappuccino_이경민



villa cappuccino_이경민



villa cappuccino_이경민



고개를 들어보니 문득_이경민



고개를 들어보니 문득_이경민



작품 [고개를 들어보니 문득]에는 작가의 (재)배치 작업에서의 우연의 역할을 드러낸다. 시멘트에 호박화석처럼 박혀있는 담배꽁초는 전시된 작품이 있는 공간에서 찾아낸 것이다. 영구히 보관된 우연한 흔적을 작품화한 것이다. 작품 [공간의 종류들_Especes despaces]은 화단을 가꾸는 원예 용품을 구입하여 갤러리 카페의 한구석에 구성한 것이다. 하얀 울타리와 녹색 지지대, 그리고 원색의 고깔 구조들 배치가 전시장 밖 창문으로 보이는 식물들과 시각적 조합을 이룬다. 녹색 지지대를 케이블 타이로 엮여서 탑처럼 쌓은 구조물은 주변 공간에 열린 망 구조라서, 그림자 또한 작품의 구성요소가 된다. 하얀 울타리 안팎에 녹색 철망구조가 마치 담 사이로 대화하는 이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얀 울타리 안에 둥근 공도 배치되어 있는데, 어디로 굴러갈지 튕겨갈지 모르는 공 모양의 구조물은 이경민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이다. 창틀에 놓인 공은 곧 중력의 작용을 받아 새롭게 위치한 자리에서 또 다른 사건-기억을 발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품 [공간의 종류들]은 구입 한 후 막 상표를 떼고 설치한 듯한 새 재료를 사용했다. 이 작품은 레지던시 때문에 잠시 머물렀던 공업 도시 울산에 대한 인상을 담고 있다. 일련의 구성적 단위의 조합을 통해 융통성 있게 형태를 만드는 재료들은 공간 재구성을 통해 기억을 호출하는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물건들처럼 보인다. 고색창연할 것까지야 없어도, 기억은 뭔가 오래된 사물과 관련되지 않을까. 기억은 무엇보다 깊이 침전되어 있는 것으로, 최초의 형태에 시간의 흔적이 쌓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최근 작품에 작가가 종종 사용하는, 누구나 구입가능한 물건(상품)들을 개인적 기억이 고일 수 있는 여지를 축소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현대적 공간 자체가 이경민의 작품 형식이 자주 그렇듯이 레디 메이드로 가변설치하는 방식으로 많이 나타나지 않는가. 재개발 공화국인 한국에는 건물뿐 아니라, 집회현장이나 축제, 간이 시장 등, 이미 만들어져 있는 단위로 급조했다가 사라지는 공간이 많다. 




공간의종류들_서울설치_이경민



공간의종류들_서울설치_이경민



공간의종류들_서울설치_이경민



공간의종류들_서울설치_이경민



공간의종류들_서울설치_이경민



행사 규모에 따라 밀물처럼 나타났다 썰물처럼 쫙 빠지는 방식은 빠른 생산과 소비의 순환주기와 관련된다. 빌딩 규모의 가건물도 흔하다. 진짜 벽돌이 아닌 레고 블록으로 잠시 구성된 듯한 건물은 지상에 뿌리를 내린 존재의 거처가 아니라, 가변적 설치의 진수라고 할 만하다. 이경민의 영상작품에 나타나는 자동차 생산 도시의 아파트촌은 집단적인 생산/소비를 추동하는 삶의 패턴이 집약된 풍경으로 나타난다. 자동차 생산에서 대표적인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야말로 ‘시간의 공간화’라고 할 만하지만, 예술가는 이러한 방식을 뜻밖의 지각과 기억을 출현시키는데 활용하고자 한다. 작품 [Nocturn]에 반영되어 있는,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가 있는 도시의 대규모 공장과 주거지는 표준화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미래 도시같은 모습이다. 작가는 불이 켜지고 꺼지는 아파트 풍경을 멀리서 포착하면서 각자의 기억이 담긴 개인적 공간에 대한 거시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먼 거리에서 결코 들릴 수 없는 일상의 소리도 첨가된다. 


이경민의 작품에서 빛은 영상의 사용과 더불어 지각과 기억을 활성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빛은 공간을 나타나게도 사라지게도 한다. 시각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지각인 시각에서는 물론이고, 모든 기억에는 그때 그곳만의 분위기가 있다. 빛, 냄새, 소리 등 공감각적 요소는 이러한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이러한 아우라는 ‘기계 복제의 시대에 사라질 운명’(발터 벤야민)이지만, 영상은 물론 디지털 애니메이션 등 현대적 매체를 적극 활용하는 세대에게 다시금 아우라는 복구된다. 디지털 애니매이션에서도 시간의 축에 따른 공간의 변형이 적극 시도 되는데, 영상은 설치작품과 공존하면서 또 하나의 차원을 첨가한다. 미디어아트와 그래픽 디자인도 같이 전공한 이경민의 경우에 많은 작품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두 방식이 공존한다. 특히 미디어로서의 책의 활용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작품 [공간의 종류들 (Especes d’espaces)]을 비롯하여, 책 제목을 작품 제목으로 사용할 만큼 영향 관계를 밝히지만, 책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Espèces d’espaces _CAEN 설치 세부, 혼합매체, 디지털애니메이션, 가변크기, 2016-17



 Espèces d’espaces _CAEN 설치, 혼합매체, 디지털 애니메이션, 가변크기, 2016-17


            
         Espèces d’espaces_ Ulsan in situ 디테일, 혼합매체, 디지털애니메이션 7'14’’, 사운드, 가변크기, 2018



이경민,_U의집합_전시전경,소금포갤러리,울산,2018



이경민_U의집합_, 혼합매체, 사운드, 가변크기, 2018



텍스트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문장은 중요하지만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다. 최초의 출발보다는 재해석이 더 중요하다. 시작은 어떤 저자의 작품일 수 있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예측 불가능하다. 결과물은 아티스트북 부터 접혀지고 펼쳐지는 면이 등장하는 작은 무대까지 변화무쌍하다. 민화의 책가도부터 청주 창작스튜디오 앞의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책에 대한 영감의 원천은 다양하다. 독서를 통해 부피가 불어나는 책(volume)은 통통 튀는 공이나, 구식 노트북에 장착되어 있던 마우스 볼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새로운 읽기와 쓰기를 만들어낸다. 세라믹을 포함한 다양한 형식으로 등장하는 공은 공의 모델은 구가 완전한 공간의 모델이라는 점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경민의 작품에서 원이나 구는 고정된 기하학적 상징이나 정점(定點)이 아니라 이동성, 특히 방향을 알 수 없는 자유로운 이동성과 더 밀접하다. 프랑스 유학 시절, 하숙집 아이들의 공놀이에서 영감받은 공은 누군가의 유년 시절로 통통 튀면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동성은 독서에도 적용될 것이며, 곁가지가 자꾸 자라나는 독서에서 논리적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선형적 질서는 해체된다. 


얇은 부피부터 공간까지 확장되는 작품에서 인용되는 텍스트는 극히 적으며, 작가가 새로이 첨가한 문장들이나 파생 이미지들이 더욱 많이 차지한다. 이경민은 책의 내용에 상응하는 또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이 문자 텍스트를 활용하는 전형적인 방식, 즉 맥락에 맞지 않는 지루하고 뜬금없는 인용과 거리가 있다. 책의 내용을 재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작업 대신에 했던 독서의 시간들을 증명하려는 듯, 줄줄이 복사하면서 작품을 포장하려는 경우이다. 그것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대조한 나무의 방식에 해당된다. 저자들에게 계통수로 대변되는 나무의 질서는 초월적인 질서의 상징이다. 반면 리좀은 무한한 연결접속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것이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고 말하면서,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 내리거나 가지 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라고 본다. 리좀은 긴 기억이 아니라 짧은 기억들로 나아간다. 



Espèces d’espaces _ 시간을 짓기 위한 공간 스케치 2, 디지털애니메이션, 6분. 2016-17



이경민KyungMinLee_ Cache-cache, 술래잡기 ,아세톤, 판화, 31x22x0.5cm,  2016



저자들에 의하면 나무로 대변되는 긴 기억(가족, 인종, 사회, 또는 문명)은 복사하고 번역하지만, 리좀은 새로운 지도를 그리며 이동한다. 저자들은 리좀은 발생 축이나 심층 구조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고 보면서,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원래 책은 긴 기억을 담은 사본의 대표적인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경민의 작품 속의 책은 작품의 또 다른 구성요소인 공처럼 방향성을 알 수 없는 연결접속을 야기하곤 한다. 매번 다르게 배치되어 다양한 입구와 출구를 가지고 있는 가변적인 설치는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하는 사본’(들뢰즈와 가타리)이 아니라, 미지의 시공간으로 도약하거나 비약한다. [천개의 고원]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경민의 작품에서 책은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는’(들뢰즈와 가타리) 맥락에서 활용된다. 애초부터 계속 이동하는 작가의 실존은 원본을 재확인하려는 사본의 재현과는 거리가 있다. 이경민의 작품에서 끝없는 연결접속은 배치를 통해 가능하다. 


책은 설치나 영상으로도 확장되어 관객이자 독자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인쇄된 문자들이 줄지어 있는 책을 읽은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이다. 그 안팎에서 소요하는 관객/독자는 연출된 공간에서 시시각각 지각과 기억이 자극된다. 도면부터 무대장치에 가까운 설치물, 책에서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를 돌고 도는 순환적 방식은 하나의 기억이 거듭된 해석의 방식을 따라 다양하게 편집되는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이때 기억의 촉발 인자로 활용되는 대상들 및 수집, 변형된 오브제들은 이동의 궤적을 기념비화 한다. 그러나 이경민의 작품에서 이 기념비들은 작은 성냥개비부터 소금가루에 이르기까지 극히 견고하지 못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건축적인 요소도 축소모델이나 간이무대같이 일회적이다. 그것은 작가가 지금도 계속 이동 중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이동과 정신적 이동의 궤적인 이경민의 작품에서 이동 중의 통로가 되는 현대의 전형적인 특징 없는 장소들은 기억을 통해 또 다른 아우라로 채워진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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