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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별 / 소용은 없지만, 그렇다고 없어서도 안되는

이선영

소용은 없지만, 그렇다고 없어서도 안되는

  

이선영(미술평론가)


  

사회가 더 시스템화될수록 그 반동으로 자율과 자유에 대한 희구는 커진다. 예술은 얼마 안 되는 해방구 중의 하나라는 기대치가 있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라는 씁쓸한 깨달음이 젊은 작가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정은별의 어둡고 우울한 풍경들은 삶에 대한 불안함이 스며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고 해왔던 것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원론적 해법이 있다. 그렇지만 작업에 몰입하는 것도 힘들뿐더러, 작업을 열심히 하는 순간에도 ‘내가 이것만 하고 있어서 되겠나’ 하는 의심이 매 순간 몰려온다. 그런 의심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치료는 성공했는데 환자는 죽는다’는 비유가 종종 현실화 되는 분야가 예술계다. 이 전시의 가장 큰 작품 [눈을 감은 일초]에서 열심히 나무를 하고있는 사람에게 몰려오는 해일이 바로 작가의 상황으로 추측된다. 작품 속 나무꾼은 개의치 않고 열심히 하던 일을 하고 있지만, 계속 밀려오는 파도에 갇혀 오도가도 못한다. 




갤러리 밈 설치전경



눈을 감은 일초,208X435cm



완벽한 날개, 설치 전경



완벽한 날개(세부)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또는 고집부리다가 익사할 수도 있다. 작가는 3개의 화면을 벽에 걸지 않고 간격을 두어 설치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상황을 보다 실감있게 다가오게 연출했다. 제목 ‘눈을 감은 일초’처럼 일촉즉발의 위급한 상황은 주체로 하여금 나름의 자율성을 지킬만한 시공간적 거리감을 사라지게 한다. 정은별에게 현실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겹겹의 층들에 의해 흐릿해진 시야는 한 치 앞도 확신할 수 없게 한다. 나침반 없는 항해는 불안과 위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작가가 ‘껍데기’라고 표현한 그러한 불투명한(또는 불투명하게 하는) 층들을 하나하나 걷어내면 본질과 핵심이 드러날 수 있을까. 작품들은 그에 대한 확신을 부정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층이나 막들은 더 부정적인 상황을 막아주는 완충재 역할도 하지 않을까. 삶의 폭력에 직접 노출되어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가령 쪽배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에 가려는 난민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떨까.


뉴스 란을 장식하는, 환상보다 더 환상적인 현실들에 비한다면, 사나운 파도가 치는 정은별의 작품은 초현실적으로도 보이기까지 한다. 어쨌든 거기에는 발을 딛을 바닥이 있다. 맹목적이지만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확실성은 사회학자가 장 보드리야르가 ‘투명한 악’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새로운 악의 면모이다. 악은 더이상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최후의 심판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매 국면마다 작동된다. 마주한 세상이 불확실하다면 주체 또한 마찬가지이다. 상황이 어떻든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나무꾼이 21세기에 걸맞는 작업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도 불안하다. 어스름하게 표현된 숲속에 종이로 접은 존재들 또한 나무꾼처럼 은유적 인물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종이는 얼마나 많을까. 소용은 없지만, 그렇다고 없어서도 안되는, 무한정 늘어난 ‘스펙’은 애꿎은 종이만 낭비하게 했다. 




정은별-비밀의-숲-45X38cm-캔버스-천에-아크릴--2019



정은별-비밀의-숲-53X78cm캔버스-천에-아크릴--연필-2019 (1)



정은별-29X35cm



물론 시간을 비롯하여 사용된 모든 재화는 무엇인가에 소용되지만, 공부가 공부로, 작업이 작업으로, 노동이 그 노동의 댓가로 투명하게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쓸데없이 요구조건이 많은 가혹한 한국사회에서 젊은이는 더이상 미지의 세계를 기약하는 낭만적 존재가 아니다. 불확실성을 대신하는 순간순간의 목표들이 제시되지만, 작가는 그러한 기준 자체가 단번에 무화될 수 있다는 예감을 여러 작품에 표현했다. 개체가 태어난 상징계의 계획대로 정교하게 접힌 종이들은 나무숲이라는 엉뚱한 장소에서 쓰레기처럼 보여진다. 설계도면에 따라 정확하게 접혀 있다기 보다는 구겨져서 버려진 모습에 가깝다. 껍데기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작가에게 허기를 낳았고, 4번째 개인전의 제목이 되었다. 그 이전의 전시 제목도 ‘보이지 않는 나라’(2014), ‘사라지는 나날들’(2015), ‘꿈과 허공의 시간’(2016) 등, 삶의 구석진 모습을 애써 들춰내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전 작품 목록에는 그런 구석들만을 집중적으로 그린 수백장의 드로잉도 있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의 세계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끝없는 추구를 낳는다. 그것은 기표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욕망이 추동되는 양상이기도 하다. 청년기를 보낸 작가에게는 그동안 기준의 가혹함이 고통을 주었다면, 이제 그 보다 더한 기준의 임의성이 문제로 다가온다. 이 전시만 해도 3년 이내의 예술 활동만 인정하는 기준에 의해 힘겹게 준비되었다. 정은별의 작품에서 화면을 덮어버리는 액체는 표면 깊숙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킨다. 작품 [증발하는 사람들]에서 경작지로 나타나는 누런 배경은 삶의 터전인데, 그곳의 인물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한다. 구성원이 한 방향만 보고 무엇인가 추구하고 있는 상황이 악몽이지만, 위에서 흘러내리는 허연 물감은 그들이 찾는 불과 그들 전체를 모두 사라지게 할 것이다. 만약 레드오션이 분명할 그 게임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위에서 흘러내려 추가될 층은 재난으로만 여겨지지는 않으리라. 




정은별-증발하는-사람들-88X125cm캔버스-천에-아크릴--2019



정은별-장막-사이로90X118cm-캔버스-천에-아크릴--2019



정은별-증발하는-사람들-64X82cm캔버스-천에-아크릴--연필-2019



작가는 그런 식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기준의 상대성에 대해 발언하고 때로 복수한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세상을 변주할 수 있는 자의 특권이기도 하다. [증발하는 사람들] 시리즈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지배적 규칙에 압박을 느껴 사라지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한 사연에 작가의 상상을 보태어 기이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너무 힘들 때 그냥 땅 속으로 푹 꺼지고 싶은 상황이 반영된 이야기다. 자살은 너무 가혹하고, 그냥 투명인간처럼 쑥 빠져버리는 대안의 삶도 구매해야 한다는 점이 충격이라면 충격이다. 많게는 100겹 이상도 올라가는 층은 작가가 동의할 수 없는 사회의 지배적 규칙에 대한 의견과 관련된다. 명시적으로 강압적인 규칙은 이제 없다. 그러나 정은별의 작품에 감도는 한기와 습기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편재하는 권력이 무서운 것이다. 작품 [손가락으로 문지른 풍경]에서 보여지듯, 때로 그것들은 고인 물을 만들어 난데없는 곳에서 터져 나오기도 한다. 


개개인에게 삶의 목적을 부여하는 인간 사회의 규칙은 눅눅하게 구성원들을 감싼다. 작품 [장막 사이로]에서 관객의 시선을 막아서는 장막 아래는 심연이다. 심연에서 반짝이는 빛을 쫏는 사람들은 헤엄치고 있는지 익사하는 중인지 모호하다. 이 작품은 목표 또한 그 목표를 추구하는 자들의 희망만큼이나 취약함을 암시한다. 흐릿한 풍경 가운데서 상수처럼 등장하는 것이 나무숲이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콘크리트 문명인의 향수를 자아내는 야생성이 부족하다. 그것들은 너무 빈약하고 성글고, 나무하면 떠오르는 강한 존재감을 결여한다. 세계수는 커녕 나무젓가락이라도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인 가는 줄기들이 공중에 떠 있듯 표현되어 있다. 그것들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지 않고, 그만큼 태양을 향해 풍성한 가지를 뻗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숲은 그곳에서 삶을 시작했을 인간의 터전이다. 최초의 인간은 땅속 구근과 떨어진 나무 열매를 수집해서 삶을 이어 왔던 것이다. 




정은별-손가락으로-문지른-풍경-41X36cm캔버스-천에-아크릴--연필-2019



정은별-손가락으로-문지른-풍경-25X36cm-캔버스-천에-아크릴--연필-2019



그러나 야생의 숲은 다른 동물보다 취약하게 태어난 인간에게 매우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문예사조사는 인간이 숲을 정복했을 때에야 본격적인 풍경화가 출현했음을 밝힌다. 이제 숲은, 아니 극지와 산꼭대기의 빙하까지도 모두 인간 문명의 파괴적 힘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 세계의 척도가 되었을 때 전면적으로 대상화, 도구화되어 착취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었을 즈음, 자연의 역습이 시작되고, 자연으로부터 자율화된 영역이라고 믿어지던 문명사회 또한 위기에 처한 자연과 다를 바 없음이 드러나고 있다. 지배적 규칙이나 기준이 의심스러워진 것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점이 물밀 듯이 터져 나온 탓이다. 작품 [비밀의 숲]에서 종이로 접혀진 존재들은 인공적 산물이지만, 자연으로부터 자율적인 존재 특유의 위상을 가지지 않는다. 망에 걸린 물고기처럼 엉거주춤한 종이 뭉치들은 종이가 비롯된 먼 원천(나무)과 애매한 관계를 맺는다. 


요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숲은 작년에 캐나다에 가 있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데, 작가를 포함하여 그곳에 모여있던 군상들에 대한 느낌이 담겨 있다. 광대한 자연에서 만끽한 자유로움에는 진정한 여유보다는 도피심리가 깔려있다. 머나먼 이국 땅에 온 자들은 보다 경쟁력 있는 존재로 변신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무난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작가가 등장하는 작은 작품 [색의 건설] 시리즈는 쇼파에서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닌 불안한 휴식을 보여준다. 화면 하단의 인물의 상상처럼 보이는 상단의 느슨한 이미지들은 더 많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에서의 복닥거리는 삶에 복귀하기 위한 유예의 시공간에서 만난 이들에 드리워진 그늘을 헤쳐나가야 할 겹겹의 장애물로 표현했다. 접힌 종이들은 일종의 변신이지만, 여기에는 카프카나 로트레아몽의 변신같은 극적 요소가 부족하다. 작가가 흥미롭게 보았던 다큐멘타리 [증발하는 사람들]에 나타나는 부류같은 소극적인 도피이다. 






정은별-색의-건설-드로잉-40X28cm캔버스-천에-아크릴--꼴라주-2019



정은별-색의-건설-드로잉-40X30cm캔버스-천에-아크릴--꼴라주-2019



다큐멘타리 속의 탈주자들은 결국 인생 막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방사능 오염의 도시 후쿠시마에 모인다고 한다. ‘회사는 지옥이지만 회사 밖은 더 지옥이다’라는 항간의 이야기처럼, 인간 사회의 지배적 규칙, 즉 상징적 질서로부터의 완전한 탈주는 불가능하다.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상징계는 인간을 인간이게 했기 때문이다. 새장과 박스를 연상시키는 구조의 작품들은 강고한 질서의 힘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완벽한 날개]는 빵부스러기로 경쟁하는 비둘기들이 날개를 원하는 인간의 책략에 걸려들었다는 기존의 소설에 작가의 상상을 보탠 것이다. 타자의 희생을 통해 얻은 날개로 인간은 날 수 있었을까. 그 날개의 무게가 추락을 더 재촉하지 않았을까. 겹겹이 드리워진 함정들 안팎의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채워지지 않는] 시리즈는 벽에 붙어 있는 박스형 작품들로, 큰 설치작품부터 작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관통되는 겹겹이 쌓인 모호한 세계를 보여준다. 


눈에 쏙 들어올듯한 작은 규모지만 화면은 몇 겹인지 가늠할 수 없는 불투명성이 특징이다. 나란히 배열되어 상호보충적으로 작동하는 화면들에는 의미가 불확실한, 즉 불완전한 기표들이 떠돈다. 숲에서 도끼질하는 인물이 작업하는 이에 대한 알레고리였던 것처럼, 세계에 대한 인상은 예술작품에도 마찬가지로 관철된다. ‘불확실함만이 확실한’(괴델) 역설적인 세계 말이다. 지시대상과 느슨한 관계를 가지는 화법을 통해 현대예술은 재현주의를 벗어났다. 현대미술은 중심이 확실한 상징의 세계가 아니라, 우연적 단편을 끝없이 쌓는 계열의 세계, 즉 알레고리이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의 충동]에서 ‘어떤 엄밀한 목표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사진 조각들을 한없이 끌어모아 놓는 방식’(벤야민)의 예를 든다. 구성 요소들 간의 유기적 질서가 확실하기 보다는, 하나에 또 하나가 덧붙여지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무한의 겹으로 쌓인 또는 쌓여가는 정은별의 작품 또한 벤야민의 작품처럼 알레고리적 동기를 지닌다. 




정은별, 채워지지 않는--24X36cm-2



정은별, 채워지지 않는--25X20cm-2



정은별, 채워지지 않는--36X25cm-2



정은별, 채워지지 않는--37X28.5cm-2



핵심적 내용과 본질이 끝없이 유예되는 양파껍질 같은 세계는 기의없는 기표를 늘려 감으로서 표현된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기의 없는 기표라는 개념을 현대적 예술의 특징으로 지적한 바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러한데, 그에 의하면 작품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경우, 그것은 더이상 자신의 자율성, 자족성, 초월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체의 우연성, 미흡성, 그리고 초월성의 결여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 영원히 좌절될 수 밖에 없는 욕망과 영원히 유보될 수밖에 없는 야심을 이야기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와 유예는 지배적 질서에 대한 수동적 태도만은 아니다. 유보와 유예는 총체적으로 작동되는 상징적 질서에 대한 해체적인 충동의 일환이다. 겹겹이 둘러쳐진 흐릿한 세계는 동요되는 기호를 보여준다. 그것은 강고함과 동시에 임의적인 기준들이 지배하는 상황, 즉 더 나빠질 것이 없는 현 상태에 변화를 암시한다. 


또는 반복함으로서 차이의 도래를 준비한다. 어느 작품들 보다도 압축적으로 알레고리적 세계를 보여주는 [채워지지 않는] 시리즈에서, 아크릴판에 물감으로 그린 이미지들이 꼴라주 되어 층층이 만들어진 공간에 자리한 이미지들은 층과 층이 만나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층을 넣고 빼는 것에 유연하다. 그 중 한 작품에는 양팔 저울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요즘 젊은이들의 정치적 관심사가 된 공정성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이어져 있는 큰 그림 세 개를 설치한 작품 [눈을 감은 일초]가 실제로 그 내부를 소요할 수 있게 한다면, 상자형의 작품들은 미시세계를 상징한다. 그 내부 역시 바닥을 알 수 없는 층들로 이루어져 있고 관객은 눈으로 그 내부를 이동한다. 권력은 미시세계부터 거시세계까지 그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데, 대안이나 저항은 가능할까. 정은별의 작품은 세상에 드리워진 겹을 작품으로 재생산하면서 그것을 걷어내는 암중모색의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출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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