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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 / 자연적 과정의 필사(筆寫)

이선영

자연적 과정의 필사(筆寫)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미진이 울산 북구예술 창작소에서 요즘 하고 있는 주된 작업은 드로잉이다. 낱장으로 완성된 것들도 있지만, 길이가 10미터 폭 1.4미터의 긴 종이 두루마리에 그리고 있는 대작도 있다. 크고 작은 종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것은 작은 펜 촉이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일회적 운동들을 지진계처럼 받아내는 하얀 표면들은 실재를 가시화하는 장이다. 잉크를 한번 찍으면 2-3분 밖에 지속할 수 없는 매체의 특성상, 단속적인 것이 축적되거나 배치되어 연속적 형상을 이룬다. 낱장의 종이에 그린 것도 있지만, 긴 종이에 하는 드로잉은 연결을 강조한다. 숨쉬기는 단속적이지만 그것이 모여 생명 활동이 되듯이 단속성과 연속성을 위한 전제이다. 작은 작품이건 아니건 명확한 형태도 방향성도 없다. 밀도도 고르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불균형 감은 잠재적인 운동감을 이끈다. 작업하다가 종이에 우연히 떨어진 잉크 자국은 활발한 연상작용과 더불어서 또 다른 시작이 된다.








The butterfly effect, India ink on paper, 1.4x10m, 2019



그것은 일종의 나비효과가 되어 또 다른 연쇄망을 이루면서, 마치 원래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인 양 연속적 변화를 주관하곤 한다. 이때 우연은 필연이 된다. 김미진은 회화, 설치, 도예 작업까지 여러 형식을 해왔지만,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위한 드로잉’은 2008년 부터라고 회고한다. 프랑스에서 18년을 작업하다가 작년에 한국에 왔으니, 드로잉 작업은 작가가 어디에 있건 늘 해왔던 기본 문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해왔던 회화도 명확한 형태와 의미가 없이 시작하지만, 연상되는 형태와 의미가 있다는 점은 드로잉과 유사하다. 펜은 화구이기 보다는 필기구여서 노트 크기의 작고 밀도 높은 화면에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정성껏 씌여진 필사본이나 비망록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러 형태로 호환될 수 있는 코드가 아니라 그자체가 실체가 되는 필사는 이제 보편적인 방식이 아니다. 현대는 필사의 시대처럼 선이 아니라 점이 지배한다.


점은 점과 점을 잇는 최 단거리를 지향하며, 미로와도 같은 우회로를 낭비로 간주하고 요점만 말해줄 것을 요구한다. 펜을 든 작가는 선과 점을 자유로이 운용한다. 의도치 않게 떨어진 잉크 방울은 점이 되곤 하는데, 그것은 기하학적인 의미의 점이기 보다는 무엇으로 변주될지 모르는 영역이다. 김미진은 계속 이어질 수도 있는 거대한 화면을 커버하기에 적절하다고 할 수 없는 펜촉을 가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물론 그것은 명확한 의미화로 연결될 분절된 단어나 문장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되기 이전의 상태, 또는 이후의 상태에 더 가깝다. 그것은 쓰기와 그리기가 수렴되는 상태를 말한다. 말에서 말이 나오거나 이미지에서 이미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이미지가 가능한 원초적 생태가 표현되는 것이다. 원초적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생겨나며 질서는 다시 혼돈으로 돌아간다. 그 중간에 카오스모스(chaosmos)의 상태인 것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질서는 무질서의 한 양상처럼 보일 정도로 무질서가 대세이다.




The butterfly effect, India ink on paper, 1.4x10m, 2019


Insect collection, ceramic, 4x6cm(variable size), 2019



온전한 유기적 전체가 아니라 파편들이 조합된, 또는 무엇인가로 완성되기 이전에 또 변해버리는 와중의 형상들은 차이의 뒤섞임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모호한 것들은 순수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가능성이기도 하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순수와 위험; 오염과 금기의 분석]에서 모든 분류체계는 반드시 비(非)이례적인 것을 낳기 마련이며, 모든 문화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반항하는 사건들에 직면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오염은 우주 구조이든 사회 구조이든 구조의 윤곽이 명확치 않은 경우에 발생하는 위험이라고 하면서, 형식 중에는 능력이 있으나,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부정형의 영역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짐짓 무질서해 보이는 김미진의 드로잉은 위험과 능력 양자를 상징한다. 그것은 결정장애나 악취미라기 보다는 변신(metamorphosis)에 대한 선호이다. 개체발생적이면서도 계통발생적인 시원과 닿아있는 작품들은 예술이 반듯반듯한 근대양식이 지배하는 현대 보다는 괴물에 대한 신화학이나 연금술과 근친 관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김미진의 작품에서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차이들 둔 반복, 또는 변모가 중요하다. 하얀 종이 위에 남겨진 검은 잉크의 궤적은 섬세하고 날카로우며, 차갑고 속도감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불안하고 화난 느낌’도 발견한다. 그것은 작업을 지속한다는 사실만 빼고 삶의 많은 부분이 불안정한 작가의 영원한 조건이 반영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깨어있음의 기호이기도 하다. 날렵하게 나아간 선과 으깨짐, 번짐 등이 어우러진 우연과 필연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흔적들로 가득한 화면은 조화와 조율보다는 충돌과 공존이 두드러진다. 날카로운 촉과 체액같은 잉크가 만나서 대자연에 조응하는 인간 내부의 자연을 필사한다. 멀리서 보면 이것저것이 모여 있는 풍경처럼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무엇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행위의 흔적들이다. 만약 그것이 무엇이라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며 흔적일 터이다. 거기에는 눈에 포착될 수 없는 미물들의 생로병사가 압축되어 있다.










White Night, ceramic, dimensions variable, 2019



수많은 주름들로 된 형상들은 질 들뢰즈가 [주름]에서 서술한 바로크 시대의 이미지처럼, 접혀져 있다가 때가 되면 펼쳐지고 다시 접힌다. 모든 것이 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것이라고도 저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행기의 대상들이다. 명확히 특정되지 않아 매력적이거나 흉물스러운 괴생명체들이다. 그것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여러 계열을 이룬다. 삶과 죽음은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유기체로부터 탈피하는 해체적 형상들은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생명의 그물망이라는 자연적 모델을 가지는 선들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또는 이어짐을 향하는 움직임이다. 물론 이러한 연결망은 재앙도 통과시키기 때문에, ‘신성한 하나’라는 전일적(holistic) 사고는 기약 없이 유예된다. 그것은 희망 사항이지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실로 김미진의 드로잉 작품은 예측할 수 없는 이질성들이 교호하는 장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수면 밑의 더러움 휘져어 다 올라오게’ 한다고 표현한다.


미생물학자나 낭만주의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깨끗한 것에서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이 주제로 카오스와 과학의 내재적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명확한 형태가 없이 이합집산하는 선과 얼룩은 하얀 표면에 남겨진 오점이라고 할 것이다. 검정은 원래 그 색이 연유했던 것처럼 불타고, 썩고 죽어가는 것의 부산물처럼 보인다. 빨리 사라지지 않아서 재앙인 문명의 시대에 이러한 소멸의 기호는 긍정적이다. 하얀 바탕에 검정 필 선은 빛과 어둠 같은 근본적인 범주의 강한 대조 속에서 어떤 사건을 극화한다. 사건들은 불안한 평화부터 생동감있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열을 이룬다. 작가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블랙의 풍부함을 말하면서 블랙에 대한 강한 선호를 표명한다. 그것은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 넣고 자신은 작품의 그림자가 되고 싶은 소망일 수도 있다. 한편 문화는 이러한 예술적 자의식과 정반대로 움직인다.










White Night, ceramic, dimensions variable, 2019



현대의 포스트 휴머니즘이나 누보로망, 구조주의가 아니더라도, 인간에 집중되는 대중적 서사는 정형화되어 있다. 이와 별개로 화가들이 검정 의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작품이 돋보이게 하는 검정의 중성성에 있을 터인데,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화가들이 검은 옷을 사랑하는 이유는 화가가 ‘보는 사람일 뿐 자신의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회화나 설치, 도예에 이르는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하면서도 드로잉이 주력 매체가 된 것은 그러한 과정을 순수하게 재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의 설치작업을 보면 작가가 사용해 보지 않은 재료는 없을 만큼 다양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잉크를 묻힌 펜 하나로도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기에 드로잉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근자에 김해 클래이아크에서 실험한 세라믹 작품에서는 흙 판을 조각도로 파서 나오는 형태가 구워져 만들어진 필연과 우연이 복합된 표현을 즐긴다.


이때의 조각도가 지나가는 흙 판은 종이와도 같이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그 사이의 변모가 기록되는 장이다. 세라믹 작품을 레고처럼 구멍에 맞춰 줄줄이 연결시켜 공중에 설치하는 작품은 3차원상에 구현된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자유롭게 만든 구성단위를 조합하는 확장성 있는 작업이다. 공중에 그려진 드로잉은 매번 다르게 짜맞춰질 수 있다. 세계는 한 번의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창조된다. 설치 또는 드로잉으로 보여지는 김미진의 작품은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작품 내부에 움직임이 가득하다. 이 움직임은 차고 이지러지는 달처럼 파도치는 바다처럼 활화산을 품은 대지처럼 유동한다. 그 점에서 김미진의 작품들은 바로크적이다. 이상(異狀)을 병, 심지어는 악과 연결시켰던 이전 시대의 사고를 거부하는 조르주 캉길렘은 [정상과 병리]에서 바로크 예술을 높이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고전 예술가와는 반대로 바로크의 예술가는 자연 속에서 미완성적인 것, 잠재적인 것, 아직 제한되지 않는 것만을 본다.








White Night, ceramic, dimensions variable, 2019



조르주 캉길렘은 ‘바로크의 인간은 지금 존재하는 것에 흥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앞으로 존재할 것에 흥미를 갖는다.’(뵐플린)고 인용한다. 세라믹으로 만든 곤충 컬렉션은 곤충, 새, 식물 등의 구성요소들이 조합된 돌연변이체로, 하나의 형태가 다수의 형태를 품고 있다. 지금 곤충이었던 것은 언젠가는 새였고, 나무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의 종은 잠정적이다. 종과 종을 넘나드는 조합의 방식은 그로테스크하다. 김미진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풍경이어서 광물질 또한 그 계에 포함되는데, ‘그로테스크’라는 미학적 용어에 내포되어 있듯이, 무엇이 튀어나와도 어색하지 않은 복잡한 동굴의 지형을 떠올린다. 경계를 침해하기 위해서만 경계를 짓는 김미진의 방식은 새로움, 또는 이질성의 발생 장소가 이러한 모호한 영역임을 예시한다. 생성되는 것은 소멸의 기호를 담고 있으며, 소멸되는 것은 생성의 기호를 담고 있다. 이 계에서 존재는 한번 태어나 종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무너지는 것은 선적이고 불가역적인 시간들이다. 이 안의 모든 것들은 거듭나며 갱신된다. 작가는 살아 있음은 곧 변화이며 변화만이 영원하다고 본다. 서양의 고대와 동양에서 익숙한 순환적인 사유가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는 형상들의 퍼레이드에 깔려 있다. 길같이 펼쳐지는 긴 화면은 우주의 시공간을 압축재생함으로서 다소간 초월적이다. 그렇지만 그 풍경을 가까이 보면 작가 말대로 ‘총체적인 자연의 보고’에는 ‘고군분투하는 삶’들이 느껴진다. 작가는 빈 곳이 없고 정지되어 있지 않은 자연의 과정을 참조한다. 잠시 비어있는 듯이 보이는 공간은 또 다른 변화를 위한 잠재적인 장소이며, 정지는 순간 멈춤 동작일 따름이다. 유기물들이 고여있는 대지나 바다는 훌륭한 모델이 된다. 김미진은 자신의 작업도 그러한 실재계의 깊이와 폭이 담겨있길 바란다. 쉽게 코드화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는 오늘날 억압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동식물이나 미생물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은 아닌 자동기술은 작가의 무의식과 몸을 통과하여 나온 또 다른 실재이다.


출전; 울산북구예술창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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