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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설 / 타자에 대한 필요와 배척 사이에서

이선영

타자에 대한 필요와 배척 사이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은설이 활용하는 독특한 매체는 풀이다. 작가는 딱풀 또는 물풀을 손가락에 발라 박수치듯이 천천히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면 나오는 끈끈한 섬유질의 형태에 매료되어, 그것을 ‘풀실놀이’로 명명하고 설치와 영상, 드로잉과 회화작품 등으로 변주해왔다.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 [최초의 감각](2017)은 투명 실을 뽑아 막의 형태로 만드는 과정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작업이라는 것이 겹과 결을 무한히 늘려나가는 과정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정방형의 왁구틀에 풀로 감싸는 작품 [풀실 놀이 수집](2017)은 투명한 풀실이 얼마만큼 쌓여야 가시화, 의미화될지 묻는다. 작품 [풀실 놀이](2016) 시리즈는 두 손들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같은 크기의 캔버스들이 나란히 걸려 있어 마치 애니메이션의 연속 동작 같은 모습이다. 손에 묻어나는 찐득한 물질은 촉각적이다. 최초의 감각은 촉각적인 것이고 그것은 다른 감각들보다 원초적이다. 김은설의 작품 목록에서 그림도 중요한 만큼, 시각적인 촉각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감각  1’ 32” 싱글 채널 비디오, 2017



 풀실놀이 수집 20cm x 20cm 왁구틀,풀 2017



 초상화 10cm x 29.7cm x 14cm 혼합매체 2017



어디선가 추출된 선으로 그려지는 형태는 2차원, 3차원, 또는 가상공간 속의 드로잉인 셈이다. 체액을 떠올리는 풀실은 자연스러움과 치열함을 동시에 함축한다. 그러나 이 끈적끈적한 느낌이 좋지는 않다. 거의 모노 톤에 가까울 만큼 색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인체 형상을 채우는 피부색은 피가 돌고 따스한 몸의 언어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생명체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위치 지어진 수동적인 존재들이다. 놀이나 작업 이후에 한참을 씻어도 말끔해지지 않는 잔여물들은 지저분하며, 찝찝함을 남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 또는 이것과 저것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애매하게 하기 때문이다. 질질 연결된 그것들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딱 떨어지는 이상적 형식과 거리가 있다. 심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경계가 불분명한 것들이 야기하는 매혹과 위험에 대해 지적해왔다. 이 어중간한 상태는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가지기에 금기와 위반이라는 인간사회 특유의 규칙이 만들어지게 했다. 


태초의 생명이 발생한 원시 수프(Primordial Soup)부터 애착과 혐오와 관련된 개인 심리까지, 종교부터 예술까지 관통하는 어중간한 상태는 기괴함(심리학), 비천함(인류학), 그로테크스(미학) 등으로 명명되었다. 불확실한 것들을 확실하게 정의하려는 이론적 지향들은 ‘담론에 내재 된 권력에의 의지’(미셀 푸코)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러나 경계(또는 한계)는 그 너머를 지시(또는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애매함은 누군가에게는 악취미로 취급받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규칙을 상대화하는 역할도 한다. 이 애매한 영역은 오래전부터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모든 생명의 자리이자 예술의 자리였다. 김은설은 풀실 놀이에서 발견되는 이중적 감정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상징을 발견한다. 작품 속 개체들은 분리불안 장애를 가진 사람들처럼 타자와 얽혀있다. 그러나 개체들은 한데 엮여 있을 뿐이다. 




풀실놀이,   각 30.4×50.3cm 가변크기,   캔버스에 아크릴,색연필,   2016



영향,  91 × 116.8cm,  캔버스 위에 아크릴, 색연필,  2015, Influence,  91 × 116.8 cm  , water colorpencle, acrylic on canvas  2015



침묵의 밤 91 x 116.8cm 아크릴에 캔버스 2017 Silent Night 91x116.8cm Pencil,Acrylic on Canvas 2017



타자는 곁에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나를 좀 먹거나 위협하는 존재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누군가와 붙어야만 생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주체로서의 자율성을 훼손한다. 붙어야 한다는 필요성과 붙어있음이 야기하는 불쾌함 사이 어딘가에 여러 유형의 인간관계가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풀 대신에 낙지의 빨판 같은 것을 그려 넣기도 했다. 빨판 이미지는 풀실 보다 강도가 더 세게 느껴진다. 작품 [나도 마찬가지구나](2012)와 [소리 없는 손뼉](2012)에 대해 작가는 ‘최초의 감각처럼 붙고 떼는 것을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느낌이 나는 빨판이 몸에서 생긴 걸 상상해 봤다’고 한다. 서로 쩍쩍 달라붙는 강한 밀착은 상처같은 흔적을 남긴다. 무엇인가 붙어있던 유쾌하거나 불쾌한 기억으로 남는다. 목과 등에 뭔가 붙었다 떨어진 자국이 보이는 작품 [인연의 흔적](2013)은 질병의 징후처럼 부정적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인연의 흔적이 풀실 놀이의 후유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은설의 작품은 ‘타자와의 관계가 이미 동일자(자기) 내부에도 있음’(줄리아 크리스테바)을 암시한다. 누에고치나 거미줄처럼 체내에서 분비되는 듯한 끈적한 섬유질 형태는 먼저 그 자신을 감싸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아전인수, 개인주의, 이기주의 등으로도 바꿔 말할 수 있는 자기 지시적 상태이다. 그것은 개성과 자폐라는 양날의 칼을 보여준다. 타자와 비교되기도 도전받기도 원치 않는 그러한 상태들은 수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이다.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가 엉뚱한 대상을 향하면서 또다시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더 단단한 고치를 만든다. 외부감각 기관이 뭉개져 있는 개체들은 맹목적 존재에 대한 상징이다. 타인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인상은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로 하여금 눈 코 입도 머리카락도 없는 인간상을 만들게 했다. 강제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면 유의미한 상호관계를 보여주지 않는 그것들은 마네킹이나 사이보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들은 3D 프린터의 사출물로부터 만들어질 것이다. 




조형물 145.5 x 89.4cm 아크릴에 캔버스 2018  The Symbolic Scupture 145.5x89.4cm Pencil, Acrylic on Canvas 2018



지극히 개인적인,  145.5×89.4cm,  캔버스에 아크릴, 색연필,   2016



셀프감옥,  각 72.7×72.7cm 가변크기,  캔버스에 아크릴,색연필   ,2016



일종의 어느 시스템,  116.8 × 72.7cm,  캔버스 위에 아크릴, 색연필,  2014,  some system,  116.8 × 72.7 cm  , water colorpencle, acrylic on canvas  2014



9.패스트 푸드,  116.8 × 72.7cm,  캔버스 위에 아크릴, 색연필,  2014,  Fast Food,  116.8 × 72.7 cm  , water colorpencle, acrylic on canvas  2014



공중에 붕 떠 있는 발들이 살 색 섬유질로 감 싸인 작품 [지극히 개인적인](2016)에 대해 작가는 ‘스스로 격리하고 개인적인 걸 감싸고 있다’고 말한다. 거미줄에 칭침 감긴 사체처럼 보이는 인간들을 그린 한 작품은 유해할지 모를 바깥으로부터의 자극들을 차단하기 위해 가사(假死)상태로 자기 안에 칩거하는 코쿤(Cocoon)족을 떠오르게 한다. 건전한 혹은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는 자율적 개체 간의 상호관계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 인 퇴행적 개체들에게 관계는 나르시시즘의 연장, 또는 변주일 따름이다. 타자에게서 집요하게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동기가 겉도는 소통의 중요한 동기를 이룬다. 개인부터 사회까지 여러 단계의 관계들이 상징화된 김은설의 작품은 개인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질식되기 전에 이미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질식함을 암시하는 듯하다.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복적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풀실 구조물은 처음부터 취약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취약해진다. 


작품 [초상화](2017)는 작은 나무조형물 두 개를 풀실로 씌웠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먼지와 날벌레 시체가 쌓여가고 균열이 생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시간의 시험에 놓여있는 것이다. 최초의 결속은 덧없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느슨해지고 결국은 해체된다.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닳아가는 대상처럼 여성도 남성도, 아이도 어른도 아닌 작품 속 인물들은 작가가 비유하듯 ‘장노출 사진’처럼 흐릿하다. 김은설의 작품에서 풀실로 이루어진 개인이든 사회든 구조의 산물이다. 심리학자와 언어학자들의 주장처럼, 개인과 사회를 이루는 무의식과 언어 또한 구조적이다. 김은설의 작품에서 무의식과 언어의 색은 블랙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불투명하다. 아크릴로 그려진 피부 빛 인체들의 배경을 수직으로 내리꽂으면서 칠해진 연필(또는 샤프) 선은 긴장감을 준다. 작품 [조형물](2018)에서 펜슬로 죽죽 내려 그은 선과 조형물처럼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 사람들은 동형적 구조이다. 




너를 물어뜯고,  72.7 × 90.9cm,  캔버스 위에 아크릴, 색연필,  2012,  I Will Bite you,  72.7 × 90.0 cm  , water colorpencle, acrylic on canvas  2012



소리 없는 손뼉 Soundless clap 27.2cm x 15.8cm  Acrylic on canvas  2012



나도 마찬가지구나 Same here 27.2cm x 15.8cm  Acrylic on canvas  2012



인연의 흔적,  19 × 24cm,  캔버스 위에 아크릴, 색연필,  2012, Sings of relationship,  19 × 24 cm  , water colorpencle, acrylic on canvas  2012



드로잉 또한 풀실 놀이처럼 반복된 실행의 결과물이다. 배경과 인간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살아있음의 특징은 주변으로부터의 도드라짐이다. 그러나 김은설의 작품에서 보이는 개체와 환경 간의 상호적 스며듦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작품마다 여러 상황이지만 대개 옴짝달싹할 수 없음에 대한 은유로 수렴된다. 인간을 나무처럼 움직일 수 없는 식물적 상태와 비유한 작품들도 보인다. 블랙 드로잉 시리즈에서는 적대적이거나 무덤덤한 관계를 가지는 사람을 검게 표현하기도 했다. 김은설의 작품에서 인간은 호환 가능한 균질적 존재이며, 실체감이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이다. 피부색과 공존하는 연필 선들은 인간을 관통하고 인간을 사회적 관계에 걸맞게 구조화할 것이다. 연필은 처음 쓰기를 배우는 아이 때부터 사용했던, 향수를 자아내는 아날로그 매체이다. 그러나 이 필기구는 SNS를 비롯한 많은 간접적 소통을 대변하는 듯하다. 


자판을 두들기고 전송하는 수많은 메시지들은 진정한 상호적 소통이기보다는 독백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고속도로를 갖추었다고 인간적 관계망이 그만큼 내실이 있는가. 오히려 정반대이다. SNS가 소통을 대신해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모여있지만 결코 긴밀한 관계망을 가지지 않는 김은설의 작품 속 익명적 대중들의 고립도는 상당히 높다. 현대인은 각자의 관속에 이미 누워 있는듯한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인간이라는 대상을 매달아 놓거나 정렬시킨다. 인간이 자기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추상적인 좌표 속에 위치할 따름이다. 인간은 환경과 적극적으로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관들이 묶여 있다. 그들은 칭칭 감겨 있고, 자유자재로 이동하지 못한다. 작가는 자신을 포함하여 개체들을 수난에 빠트리는 어떤 체계를 구체화하려 한다. 발들에서 나온 섬유질이 모여 누군가의 손에 장악되어 있거나 타인의 손들을 국수처럼 말아먹는 입 등의 이미지는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하다. 




후유증 시리즈 나 자신도 모르게 붙어버린



나의 무의식-블랙드로잉 시리즈 각 14.8 x 21cm Pencil on Paper 2017-2018



나무들2  21 x 29.7cm 종이 위에 연필 2018



작품 [너를 물어뜯고](2012), [패스트 푸드](2014), [일종의 어느 시스템](2014)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정체성을 구조화하는 타자와의 관계는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섭식에 관련된 원초적 본능까지 탐색 된다. 작품 [영향](2015)에서 마주한 두 인물은 전자 레인지의 가열로 녹아 붙은 찹쌀떡처럼 쭉 늘어나 있다. 귀와 정수리 부분만 남아있는 실루엣만이 그것이 인간들을 표현한 것임을 알려준다. 작품 [후유증 시리즈: 나 자신도 모르게 붙어버린](2013)에 나타나듯이 시도 때도 없이 붙는 현상은 개체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밀도 대신에 [셀프 감옥](2016)을 만든다. 김은설의 작품은 분리에 대한 불안과 영향에 대한 불안을 동시에 보여준다. 심리학자들은 타자와의 원초적 관계가 태내에서부터 일어난다고 본다. 심리학자들은 모체로부터의 분리인 탄생은 그자체가 트라우마라는 것도 강조한다. 상처와 고난을 딛고 성장하여 자율적 개체가 되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타인과의 영향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해럴드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영향’이란 단어는 일찍이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적 라틴어에서 ‘타자에 대해 힘을 갖는다’는 의미를 가졌지만, 수세기 동안 유입이라는 어원적 의미와 별들로부터 인류에게 발산되는 것, 혹은 다가오는 힘이란 근본적인 의미를 잃지 않았다고 본다.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별들로부터 어떤 사람에게 유입되는 에테르 같은 액체, 그 사람의 성격과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지상의 모든 사물을 변화시킨 액체를 받는 것을 의미했다. 신성하고 도덕적인 힘, 후에는 단순히 비밀스러운 힘이 그 사람의 자유의사와 무관하게 행사되었다는 것이다. 상징적 우주 속에 살던 고대인의 상상력에 바탕 한 해석이지만, 현대인도 여전히 또 다른 상징적 우주에 살고 있다. 타자로부터 말을 배우고 말하는 주체가 되는 모든 인간이 상징계의 구성원이다. 




나의 주변은 돌아간다 29,7 x 21cm 종이 위에 연필 2017



침묵하는 사람들 39.4 x 27.2cm 종이 위에 연필 2018



힘 없는 책임자 29.7 x 21cm 종이 위에 연필 2017



‘영향’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던 천문학적 거리감은 점차 줄어들어 이제 현대의 작품에 나타나듯 너무 밀착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여 사회적으로 재현했기에 가능했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화되고 증폭되어 진보와 파괴 그 모두를 추동한다. 원시와 고대, 중세에 영적 에너지로 가득했던 우주가 근대에 잠시 ‘텅 빈 상자’(뉴튼)로 바뀌었지만, 다시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다. 가장 지배적인 것은 정보이다. 스스로 분비한 물질로 감싸여 밀고 당기는 상황은 적절하게 반응할 수 없을 만큼 폭주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거의 단세포같이 반응하는 개체의 은유로 다가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향은 ‘비의도적이고 거의 무의식적인 경향’(해럴드 블룸)이 있다. 영향은 오해와 이해 모두를 통해 작용한다. 특히 작가라는 존재는 영향 관계 속에서 새로움을 창출해야 한다는 압박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는다. 작가에게 ‘영향에 대한 불안’은 중층적이다. 불안을 극복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반복을 통한 무화’(프로이트)이다. 김은설의 풀실 놀이는 불안한 삶과 예술에 대한 동시적 해결책으로 다가온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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