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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연 /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현재

이선영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현재

  

이선영(미술평론가)


  

방수연의 ‘오늘 감각’ 전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 있는 오늘, 현재의 감각을 회화로 표현한다. 그림이 자기만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간적 요소를 억압한 근대 이래, 현재성은 충만함과 물화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하게 되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순간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한 루프넬의 저작을 분석한다. 여기에서 순간적인 것은 새로움, 순수함, 허무한 지속의 단절, 신성함, 명징한 의식, 풍부한 번식력 등등, 저자들(바슐라르와 루프넬)이 생각하기에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의 총아이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순간의 관념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완전히 집약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순간의 미학]에는 ‘우리는 단지 현재에 의해서만 그리고 현재 안에서만 실재의 감각을 갖는다. 그리고 이 같은 현재에 대한 감정과 삶에 대한 감정 사이에는 절대적 동일성이 존재한다’(루프넬)는 말이 인용되어 있다. 물론 저자들은 이러한 순간이 추상적이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유진 갤러리 전시전경



밤-결_oil on canvas_193.9×431.1cm_2019



그러나 모더니즘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지고의 순간 또한 개념화되고 물화되곤 한다. 모더니즘 이후에는 저자들이 ‘순간의 먼지들’이라고 폄하했던 지속이 부각된다. 순간의 산물인 ‘단순한 것, 강한 것, 항구적인 것’ 대신에 지속의 이질적 성격이 강조된다.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가 생명과 우주의 발생을 묘사하면서 말하듯이, 순수함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방수연의 작품에 깔린 어둡고 텁텁한 먼지구름은 사소한 일상의 단편부터 우주적 차원을 아우르는 사건을 위한 배경이 된다. 순간/지속은 모더니즘과 그 이후를 나누는 미학적 개념이기보다는,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는 오래되고 근본적인 문제이다. 정지된 매체인 회화가 순간을 극복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의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단어 ‘결’처럼 매 순간 다른 작품처럼 보이게 하는 결(주름)의 증식이나 시리즈 식으로 작품을 전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림이 시간을 해결하는 가장 평이한 해결책으로는 서사의 도입일 것이다. 


회화는 기억과 예견을 현재에 끌어들이면서 순간 속에 고정되는 매체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유한한 유기체의 삶에서 아름다움의 정점은 순간에 담겨있으며 회화는 그 순간들을 기록해 왔다. 회화는 수백 년 전에 죽은 여인의 뽀얀 피부나 만개한 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방수연이 ‘오늘의 감각’을 포획하기 위해 주목한 현실은 물웅덩이나 남의 집 창, 변두리, 빈약한 나무, 바다 위의 부표 등, 그자체로서는 그다지 주목할만한 대상이라 할 수 없다. 대부분의 풍경이 모노톤이어서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다. 빛이 이러한 우중충함을 찢고 나오거나 자잘한 형과 색을 덮어버리는 그림자로 만들 때 까지는 말이다. 작가는 일상적 소재에서 우주적 풍경을 길어낸다. 그 매개가 되는 것은 빛이다. 빛과 어둠은 인간의 상상력의 기본 질서인 이원적 구조를 형성해왔다. 질베르 뒤랑은 [상징적 상상력]에서 많은 문화 인류학자들은 문화의 유형들이 존재한다고 말했으며, 그 문화의 유형들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두 개의 커다란 그룹으로 분류되었음을 전한다. 




Black void_oil on canvas_91.0×116.4cm_2018



Shallow signals (Series)_oil on paper_30cmx30cm_2017-2019, 이유진 갤러리 설치전경



이유진 갤러리 설치전경



대표적인 것이 ‘낮 체제와 밤 체제’ 사이의 구분이다. 방수연의 작품에서는 그 둘이 섞인다. 깊은 밤을 연상시키는 두터운 구름층을 뚫고 나온 빛이나 어둠이 내린 도시의 창들에서 스며나오는 인공광이 그것이다. 빛을 본 후 눈을 감았을 때의 잔영 또한 생물학적인 반사작용이기에 앞서, 모태 속에서 간접 경험했던 빛을 떠올린다. 빛은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는 무한한 근원이며 동시에 색의 근원이기도 하다. 화가가 인간의 생존뿐 아니라 상상력과 관념의 중요한 요소인 빛에 주목한다 함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 걸쳐있는 문제이다. 현대미술은 추상화를 통해 더이상 외부로터의 빛이 아닌 색 그자체로부터 나오는 경향이 있지만, 방수연은 마치 고전주의자들처럼 ‘무한을 담기 위한 유한’(괴테)인 현실적 속성을 유지한다. 관객은 그 그림들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빛과 어둠에 의해 만들어진 단 한순간의 장면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작가노트)를 묻는다. 


동심원을 그리는 물웅덩이는 프림이 녹는 커피잔에서 은하계의 풍경에 이르는 동적 패턴이 새겨져 있으며,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햇빛에는 초신성 폭팔 같은 광휘가 있다. 일기 쓰듯이 그날 본 빛의 인상을 30x30cm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려나간 시리즈 작품 [Shallow signals](2017-2019)을 모은 작은 책자에는 ‘오늘, 사라진 빛과 희미한 별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인생을 초월하는 시공간의 스케일에 의해 오늘 내 눈에 도착한 빛은 이미 사라진 별의 흔적일 수도 있고, 매작품마다 응집된 작가의 에너지가 누군가의 시선에 의미 있게 포착될 순간이 언제일지도 가늠할 수 없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편재에서 매 순간 충만한 현재를 살고 싶은 욕망이 ‘오늘 감각’ 전에 담겨있다. 작가는 ‘[Shallow signals]는 현재에 관한 정의 내려지지 않는 이정표’라고 말한다. 자크 데리다는 [벤야민의 이름]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역사적 시간인, 현재하고 있는 이 순간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오늘 감각’을 통해서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현재를 사건화한다. 




Floating point_oil on canvas_112.1×162.2cm_2018



Blind-thinker_oil on canvas_97.0×193.9cm_2018



mur·mur·ing_oil on canvas_97.0×193.9cm_2018



 창백한 점_oil on canvas_38.0×45.4cm_2019



현재는 확고하기보다는 사라져 가거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생겨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나무 시리즈에 나타나듯이, 존재보다는 흔적이다. 이름 없고 분류될 수 없는 무명의 것을 철학자들은 타자라고 말한다. 타자는 동일자의 배경을 이루거나 더 나아가 동일자 자체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철학자 벵상 데콩브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모든 현전하는 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부재 하는 것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타자는 확실한 것(동일자)의 재현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서 드러난다. 작품 [밤-결](2019)은 가로 4 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물웅덩이나 연못의 파문처럼 보이는 일렁이는 표면 위로 빛의 입자들이 자유롭게 떠돈다. 화면에 산재한 빛의 입자들은 파문을 일으키는 표면에서 발산되고 있는지 수렴되고 있는지 모호하다.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원초적 혼돈에 속에 춤추는 입자들이다. 그것은 고대 원자론자들이 상상한 ‘햇빛 속에서 떠도는 먼지 알갱이들 같은’(데모크리토스), 만물을 이루었을 근본적 입자들같은 위상을 가진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작가) 빛의 양태는 만물의 근본 입자의 특징일 것이다. 빛을 포함하여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진 물질(에너지)의 양태는 작은 규모의 작품에서도 반복된다. [Black void](2018)에서는 빛의 입자들은 거두어지고 서로 간섭작용을 일으키는 다중심의 파동들이 일렁인다. 명과 암은 비슷한 비중으로 섞여 있는 일렁이는 표면은 마치 다른 차원으로 연결되는 입구같다. 지상의 어디선가에서 취한 단편은 유사(類似) 관계를 통해서 여러 차원으로 확장된다. 좀 뒤로 빠진 시선에 포착된 지상의 풍경이 있는 작품 [Floating point](2018)에서 전선들과 펼침막으로 지저분한 어떤 변두리 풍경은 명암관계만으로 조율된 고요한 풍경으로 변한다. 빗방울 또는 눈송이 같은 빛의 산재는 지상의 중력을 경감시킨다. 작품 [Blind-thinker](2018)에는 낮은 산등성이 사이 난 길 끝, 보이지 않는 소실점으로 모여드는 빛의 궤적이 있다. 대지/바다/하늘을 가르는 여러 개의 수평선이 있는 작품 [mur·mur·ing](2018)에서 밝기만으로 차이가 나는 여러 계들이 감지된다. 




캄캄한 잠_oil on canvas_45.5×53.0cm_2020



멀리서인듯이_oil on canvas_45.5×45.5cm_2020



이유진 갤러리 전시전경



[Shallow signals] 시리즈는 수년간 같은 크기의 정방형 종이에 그린 빛이 배어든 풍경이다. 여기에서 빛은 명증하게 비춰주기 보다는 투영된 대상을 변형시킨다. 직진하는 빛은 건축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직선적 요소를 침해한다. 창과 비유되었던 그림의 위상이 변질되었음을 알려주는 최근의 작품은, 자다 깨서 언뜻 본 차창 밖 풍경같이 미량의 빛으로 드러나는 풍경의 실루엣이 있는 작품 [캄캄한 잠](2020)이다. 안팎의 온도 차에 의해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흔적이 있는 창은 투명하지 않다. 대상의 동일성은 변주의 흐름 속에서 사라진다. 뿌예서 어떤 장면인지는 모르지만, 창틀로 보이는 수직선들이 흐릿한 화면에 축을 잡아주곤 한다. 여러 개가 같이 설치되면서 마치 작은 창같은 모습인데, 그것은 라이프니쯔가 [단자론]에서 말한 단자들처럼 똑같은 모습은 없다. 점이 아닌 선으로 이루어진 방수연의 작품은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며’(들뢰즈) 다양한 세계를 예시한다. 


이러한 단자적 세계는 ‘보편적 정신의 교의를 부정’(들뢰즈)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가진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가 ‘일자는 다양체를 포괄하고 다양체는 일자를 계열의 방식으로 전개하는 한에서의 통일성’을 보인다고 말한다. 방수연의 작품에서도 빛이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 [멀리서인 듯이](2020)는 올해 초 오픈한 전시에 출품된 올해의 작품이다. 수년간의 작품들이 함께 출품된 전시에서 작지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작품은 [Shallow signals] 시리즈처럼 정방형이다. 작지만 우주적인 분위기가 있는 이 작품은 뾰족한 산의 실루엣 위에서 빛을 받는 둥근 형태가 마치 성운 사이에 있는 별같은 모습이다. 파문이 있는 크고 작은 작품 사이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은 다른 장소의 다른 상황을 표현했지만, 관객으로서는 파문이 이는 장면들과 같은 맥락에서 읽게 된다. 동심원, 또는 소용돌이 모양의 파문과 별이 빛나는 밤 사이에 우주 발생과 진화(변화)가 있다. 














액체, 또는 기체 상태의 기저 물질은 소용돌이치며 서서히 고체로 굳어진다.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세계의 형성은 고립된 사건, 순간적인 작용이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의 형성은 끊임이 없으며 따라서 연속적인 형성이다. 창조는 어느 날 시작되었지만 결코 끝나지 않을 것’(미셀 세르)이다. 고정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는 과학철학에서 난류나 구름처럼 불분명한 것들이 입지를 되찾는다. 확고한 존재의 재현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방수연의 작품에서 지상에 우뚝 선 대표적인 존재인 나무조차 희박한 공기 속에서 녹아드는 듯한 형태를 가진다. 작가는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공간 속에 자리한 대상이 아니라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 사라지는 것들이다’고 하면서, ‘내가 바라보는 장면은 나와 맞닿을 수 없는 거리를 갖고 있으며 현실은 결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여러 경로로 개입한 요소들로 다르게 변해간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는 시리즈 작품이 여럿 발표되었다. 작품 [Tree1](2013)에서 줄기가 가느다란 나무는 그 자체가 흔들림의 궤적같다. 나무는 바람이 불거나 관자의 이동 시점뿐 아니라 조금씩 움직일 것이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는 식물의 존재는 생명의 흐름을 관장하는 매개체이다. 죽은 상태가 아니라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식물은 없는 것이다. 작품 [tree3](2013)는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만큼 흐릿하다. 실루엣으로 표현된 나무 시리즈는 형태인지 그림자인지 불확실하다. 그래도 나무의 수직적 실루엣은 나무와 사람의 유사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 [Tree 5](2014)에서 모노톤인 다른 작품과 달리 여명 또는 해질녘을 배경으로 하는 듯한 붉은 공기가 느껴진다. 작품 [Tree 9](2014)는 수평선이 아래로 잡혀 있어 크지 않은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기념비적이다.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우뚝 선 나무의 위상보다는 끝없이 흔들리는 존재를 표현한다. 




동그란 잔상_oil on canvas_17.9×25.8cm_2020



푸른빛_oil on canvas_22.0×27.3cm_2020



바람의 선 _oil on canvas_116.5×90.7cm_2019



바다와 하늘이 있는 풍경은 그것이 속한 우주의 모습이 중첩된다. 작품 [창백한 점](2019)은 수평선 근처의 작은 부표에서 나오는/또는 반사되는 빛이 둥근 잔상을 이룬다. 가느다란 수평선을 긋는 빛은 구별할 수 없는 바다와 하늘 사이에 차이를 부여한다. 구름의 불규칙한 선과 빛의 직선성이 대조되는 작품 [동그란 잔상](2020)은 여러 겹의 구름층을 뚫고 빛나는 빛을 표현한 것으로, 어두운 부분에 태양의 원래 형태였을 둥근 실루엣을 잔상으로 남긴다. 작품 [푸른빛](2020)은 구름층 사이를 뚫고 나오는 중심부의 빛이 마치 자신의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폭발하는 거대한 별의 모습 같다. 잔여물들은 또 다른 생성의 재료가 될 것이다. 작품 [바람의 선](2019)에서 창공에 흩어진 구름 떼들은 파도가 밀고 밀리면서 생겨난 포말이 뒤덮인 바다 표면과 겹쳐진다. 구름은 흐름 속에 있는 형태를 대변하며, 고정되지 않는다. 방수연의 작품 속에 암시된 세계는 구름의 가장자리처럼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출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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