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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을 견뎌낸 봄

이선영

긴 겨울을 견뎌낸 봄

  

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며


1919년에 일어난 독립운동인 삼일절과 3.18일 세계 여성의 날이 있는 3월에 열리는 기획전   <그날을 봄>은 ‘독립’의 의미를 민족적 차원은 물론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 가장 잘 알려진 여성독립운동가는 조덕현의 작품에도 나타나는 유관순이지만 그 외에 수많은 무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참정권 확보를 위해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국제적 여성 운동이다. 한국에서도 1920년 일제강점기부터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모두가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주의 미술이 시작되었으며 진보가 큰 화두였던 1980년대에 다시 활성화되었다. 20세기가 개막될 무렵, 결국은 세계 대전으로 폭발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제국주의의 폐해는 여성에게도 크게 다가왔다. 전쟁은 남성만큼이나 여성을 착취한다. 


전통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또는 더욱 심하게 전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현대는 가부장제라는 지배의 또 다른 면모였다. 제1 전시실을 대표하는 부제인 ‘기억을 넘어’는 몇몇 선지자적 여성들의 행적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현재화하려 한다. 예술작품이란 그 자체가 생생한 현재화의 주요 방식이다. 제2 전시실의 ‘여성을 넘어’는 남성/여성의 이항대립을 넘어서 여성이라는 타자적 시각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지향한다. 여성성은 반쪽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권력적 담론인 이항대립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가혹한 겨울을 이기고 시작된 봄에 3.1절과 세계여성의 날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여성이 참여했던 국내외 독립운동의 여러 차원을 건드린다. 일제강점기 동안에 일어났던 성과 노동력을 비롯한 전면적 착취는 이후 해방의 국면과 비약적인 경제적 발전 이후에는 사라진 것일까. 지배는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계속되며, 여성은 지배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타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대안의 주체로 부각 될 수 있다. 


전시부제에 있듯이, ‘--너머’라는 화법은 첨예한 여성주의 이슈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회화, 오브제, 사진,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은 동서고금의 여러 문화적 코드를 호출하여 여성성이라는 근본적인 가치의 여러 국면을 제시할 따름이다. 이러한 시도에서 남성적 생산주의에서 주변화되었던 여성의 장식문화(김영숙), 현대성에 의해 폐기 처분된 고전적 의례의 차원(정명조, 도로시 엠 윤)이 복구된다.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포함된 이 전시의 두 남성 작가(조덕현, 송영욱)의 작품은 광범위한 여성의 문화적 역량이 사건화되는 순간을 다룬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독립운동이나 탈주같은 특정 사건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설치와 초상의 형식이 결합 되곤 하는 조덕현의 작품에서 유관순은 여성 열사의 대표적 상징이지만, 부재의 흔적인 사진에서 발산되는 아우라와 코드화될 수 없는 이질적 국면이 드러난다. 겹겹으로 경계를 뚫고 날아가는 나비 떼들이 있는 송영욱의 작품에서 돌파는 동물 변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김영숙 ; 장식을 매개로 한 전통과 현대의 대화


부조처럼 오목볼록 튀어나오는 김영숙의 작품은 색색의 천을 소재로 하여 손바느질로 완성된 추상적 작품이다. 작품명에 [조각보]도 있을 만큼, 작가는 그 원형을 분명히 밝힌다. 여성 중심의 규방 문화에서 발견되는 전통 조각보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감은 널리 알려져 왔지만, 현대적인 방식으로 변주한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사실은 전통 조각보 그자체가 현대적 미감을 포함한다. 꼴라주라는 기본적인 방법 또한 그렇다. 꼴라주 기법으로 이루어진 작품 [Time and space]는 꼴라주의 대상 자체가 바로 시간과 공간임을 말한다. 여성에게 친숙했던 손바느질은 일괄적으로 규정되는 생산의 방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규칙이 적용될 수 있는 소우주를 만들어 나간다. 미술사적으로 꼴라주는 서구미술의 근간인 재현주의를 무너뜨린 중요한 형식으로 평가되었지만, 동서를 막론한 공예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현대미술이 추구했던 전대미문의 새로움은 오래된 타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많다. 



김영숙, 2017 봄 80×65×3.5cm Silk+Felt


공예에는 작업의 방식에 추상성이 내재해있는데, 현대미술은 그러한 잠재력을 현실화시키고, 쓰임을 넘어선 미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공예에도 상징이 있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인간이 몸 담그고 사는 상징적 우주 또한 변모하기에, 이전의 의미가 지금도 살아있기는 힘들다. 지금의 감각으로 기존의 상징을 재구조화하는 것, 거기에 전통과 현대의 관계가 있다. 김영숙의 새로운 방식은 평면적인 전통 조각보의 표면을 좀 더 관객의 눈앞으로 생생하게 끌어당기는 것이다. 가운데를 뾰족하게 올려세워 바느질한 서로 다른 색의 표면들은 섬세함과 힘, 리듬과 악센트가 공존한다. 벽에 걸리곤 하는 작품 표면은 작가가 고안한 규칙에 의해 재단되고 바느질되어 살짝 들어 올려져 질감과 촉감이 두드러지고, 여기에 조형적 단위를 채우는 천의 색과 무늬가 가세한다. 수직, 수평, 마름모, 사선, 구불구불한 선 등이 자유롭게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기법이 부재한 현대미술과 원형의 보존(재현)에 급급한 전통공예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만든다.  



정명조 ; 가상에 의한 유혹의 전략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었지만 뒷모습만 보이고 있는 여인들에 대해 정확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몸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에 의해 그 여인들이 젊고 아름다울 것을 예감한다. 이러한 생물학적인 미의 기준 외에, 전통의례에 충실했을 의상을 갖춰 입은 여인은 당시의 미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시켰을 것이다. 목이 꺽어질 만큼 잔뜩 올라간 가채나 장식물, 얼굴은 물론 몸매를 가리는 의상은 그 당시에도 일상적 생활을 위한 복장은 아니었으리라. 작가는 생활을 위한 기능이 아닌, 또 다른 가치체계가 반영된 의례적 복장이 주는 매혹되었고, 그러한 매력을 정교한 유화의 기법으로 재현함으로서 관객에게도 그 매혹을 전염시키려 한다. 그림은 원래 말이 없는데, 어두운 공간 속 얼굴 없는 여인이 서 있는 정명조의 작품에서 침묵은 더욱 극대화된다. 여인들은 망부석처럼 서 있지만, 만약 그녀가 얼굴을 살짝 돌리거나 한두 걸음 움직인다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 같다. 



정명조, THe Paradox of Beauty #13-05, 181.8x227.3cm,Oil on Canvas,2013


여성은 고요하지만 긴장감 가득한 공간에 안치되어 있다.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무관했을 전통은 그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과 긍정은 함께 있다. 질곡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부정만을 동력으로 삼을 수 없다. [The Paradox of Beauty]라는 제목은 아름다움의 양면을 표현한다.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이미지 사이에서 차이를 가늠할 수 있도록 조율된 추상적 공간, 즉 수집 상자 같은 공간에 고정된 진귀한 나비처럼 안치된 여인들의 모습에서 잔인함과 미가 공존한다. 생물학적 적령기의 여성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는 자연미 이상의 것을 강조한다. 정교하게 재현된 비단의 질감이나 색감, 금박무늬, 머리의 장식 등은 관례에 따른 어떤 모습은 자연적 존재를 상징적 존재로 변화시킨다. 어떤 부류에게 아름다움은 자연이 아닌 문화이다. 물론 문화도 자연에 바탕하지만,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자연에서 허구로의 변환 속에서 극대화되는 작품 속 여성들은 가상에 의한 유혹의 전략으로서의 장식’(장 보드리야르)의 총아이다.

 


도로시 엠 윤; 혼성의 풍경

 

도로시 엠 윤(윤미연)의 작품 속 여성들은 한껏 꾸미고 나와 도발적이거나 나른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합된 코드들은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이질적이다. 동양의 고궁 안에 로코코 스타일로 꾸민 동양 여자가 서 있는 식이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기괴하고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감도는 여인들이다. 사진인데 동양화처럼 낙관을 표현하거나 ‘--관음’으로 붙여지는 제목 또한 혼성을 가속화 한다. ‘--관음’의 경우, 굳이 한자 표기를 하지 않아서 보고 보이는 것에 익숙한 현대적 소통방식을 동시에 표현한다. 그러나 그 또한 상상만은 아닌 것이, 지금도 한국의 관광지에는 한복을 국적 불명의 드레스로 고쳐 입고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 사람도 한국의 민속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만큼 단절의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혼성은 일반적 소비패턴이 되어버렸다. 도로시 엠 윤의 작품은 동서양의 고풍스러운 코드들이 동원되지만 코드를 소비하는 방식은 현대적이다.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사진이라는 양식 자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역할을 해왔다. 



도로시 엠 윤, No.5 유희 관음 You Hee, 2011, Digital C printing+Diasec,100x150 (cm)


이제 사진은 SNS에 올리기 위해 하는 일상적 촬영부터 예술까지, 작품 [유희관음]처럼 유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작품 속 인물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제는 남성 또한 보고 보이는 소비/소통의 그물망에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작가가 선택하는 문화적 코드가 고풍스럽다는 것에서 찾아진다. 부르주아 혁명이 이루어지기 전야, 노을풍경처럼 무르익었던 귀족문화의 말미에 자리한 로코코 양식은 예쁘지만 경박스러우며, 특히 여성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바로크의 장중함이나 신고전주의의 절제가 남성적이라면 말이다. 생산력이 미미한 시대 여성은 주체이기보다는 상징적 교환의 대상으로 간주됐다. 근대의 단순한 양식에 대조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절충주의는 유사 이래 별별 것을 다 호출하였고, 그중에서도 장식적이거나 여분의 것, 유희적이거나 의례적인 것 등, 아름다움을 넘어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알레고리를 복귀시켰다. 근대 기능주의나 모더니즘에서 순수주의가 아닌 남성을 보는 평자들은. 이제 혼종의 문화에 중심에 여성을 세운다.

 


조덕현 ; 잠재된 아우라의 현실화

 

근대사 속의 여성들 사진을 소재로 한 조덕현의 작품들은 당시에는 귀했던 사진을 현대의 작품으로 전면화한다. 공식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남아있는 작고 흐릿한 사진을 출발로 하지만 최종 작품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나 설치이다. 흑백으로 남은 유명 또는 무명의 여인들은 장지나 광목에 연필, 목탄, 흑연 등 흑백사진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재료로 구현된다. 이러한 차원의 이동에서 최초의 이미지 자체는 큰 변형이 없지만, 현대의 스펙터클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에도 새로운 볼거리가 될만한 대상으로 변모한다. 작가는 초상사진, 특히 지금은 희귀해진 사진의 아우라를 회화뿐 아니라 연극적 장치를 통해 증폭시킨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같은 복제 매체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사라지게 한다고 했지만, 망자의 초상사진에는 아우라가 남아있다. 망자가 아니더라도 사진의 대상은 여기에 없다. 이전작품인 [노라노 컬렉션]처럼 오래된 사진관이나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작품 [레이디 로더미어]처럼 작품 속 여성의 의상이 현실 공간까지 연장되는 방식이다. 



(참고작품) 조덕현, [레이디 로더미어]


때로는 백 년 안팎의 근대사를 넘어서 고고학적인 차원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비교적 최근 작품인 [전주곡]에서는 신여성이자 예술가인 나혜석의 일생을 마치 흑백영화의 스틸 컷처럼 여러 화면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한 장의 사진에 내재 된 시공간의 단면을 확장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서사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유관순 열사의 초상이 담긴 작품은 근대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념한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기념 우표 발행이나 초상화 전시 등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곤 했다. 그러나 현대 미술작품 속에서 호명된 인물은 전기적 정보의 증거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유관순 열사는 근대 제국주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 기표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만, 남아있는 한 두 장의 사진은 수많은 가닥으로 짜여질 미지의 서사에 대한 최소한의 참조점이 될 뿐이다. 현대미술에서의 독립은 참조대상으로부터의 자율화 또한 포함한다.

   


송영욱 ; 의례를 통과하는 변신술  

 

한지로 떠낸 문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한 송영욱의 작품은 순차적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처럼 보인다. 공간만 더 허락된다면 끝없이 이어질 듯한 문들은 굳게 닫힌 모양새다. 종이로 만들어졌다든가 중력에 반하여 둥 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관문 또한 포함한다. 닫힌 문은 열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한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이 과제가 끝이 없을 것임을 예시한다. 동서고금의 인류학적 사례에서 보이듯이 통과의례는 인간사의 보편적인 의식으로 존재해 왔지만, 비약적으로 늘어난 생산력의 결과를 분배함에 있어 보다 체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관문은 더욱 많다. 전통과 현대의 차이는 생산력의 혁명과 그러한 혁명을 가능하게 하고 지속 확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유무라고 할 때, 작품 속 문들은 함정처럼 늘어선 시스템을 상징한다. 그것이 근대적 소외를 낳았다.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또 다른 속박을 위한 해방일 따름이었다. 여성 또한 이러한 역설적 여정을 따른다. 시스템은 그 원리를 내재화한 이에게 열쇄들을 줄 것을 약속하지만, 단선적인 과정의 최종 목적지는 불확실하다. 



송영욱, stranger


송영욱의 작품에서 문은 열리기보다는 파괴된다. 문 또는 벽들은 도미노처럼 부드럽고 예견되는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작품 속 부수어진 문들은 죽으면 끝나는 게임을 포기, 또는 파기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는 상황을 표현한다. 갇혀 있다가 날아가는 나비들은 순간적인 개방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사람이 드나드는 실제 크기의 문을 통과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관문들은 사람을 위한다기보다는 사람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스템의 선전과 달리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관문의 연속은 도약과 비약을 요구한다. 인간적인 기준이나 가치가 의심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에, 변태하는 곤충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카프카의 [변신]은 감옥같은 현대사회를 탈주하는 동물변신의 상상력을 제시하기도 했다. 송영욱의 작품 속 나비는 하강보다는 상승과 연관된 변신을 암시한다. 호접지몽의 설화나 나비 효과같은 과학적 가설은 나비에 내재된 환상성과 예측불가능한 기적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출전; 천안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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