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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우 / 현현(顯現)을 위한 조형적 전제

이선영

현현(顯現)을 위한 조형적 전제

  

이선영(미술평론가)

  

  

이흥우의 작품은 뭔가 빠글빠글 움직이는 듯한 활동성이 느껴진다. 바탕과 다른 명도와 색상을 가지는 다방향성의 선들이 복잡한 굴곡 면을 가지고 휘어지고 엉켜 있기 때문이다. 이 선들에는 또 다른 띠가 포함되어 있어서 선의 운동성은 더욱 강조된다. 그것은 운동선수의 유니폼에 있는 선같은 시각 효과다. 이 선적 요소는 서로 맞는 짝을 찾기 위해 맹렬하게 운동하는 혼돈의 양상이다. 세계의 시초를 상상할 때 세계를 이루는 물리적 요소만큼이나 그 요소들이 섞이고 충돌하게 하는 힘 또한 중요하다. 이 힘에 의해 물리적 요소들은 수많은 조합이 만들어지고, 그래서 최적화된 배열이 생겨날 수 있다. 그렇게 원시 수프(Primordial Soup)에서 지구 최초의 생명체가 발생했을 것이다. 진화하는 자연은 이러한 실험을 멈춘 적이 없다. 이흥우의 작품은 회화라는 잘 정리된 판에 시각과 평행하게 놓여있는 어떤 대상을 떠오르게 한다. 가령 그의 작품은 고배율로 확대된 DNA 가닥 같은 형태가 상상된다. 




이름 없는 신에게 2



이름 없는 신에게 5



세포 속에 접혀있는 DNA 가닥들은 자기에게 맞는 수용기를 찾아내면 단백질이 합성되고 순차적인 과정을 통해 생명체로 완성될 터이다. 이 생명의 질서를 최초에 누가 입력했는지를 어떻게 가정하는가에 따라 세계관은 달라질 것이다. 최근 작업에 ‘이름 없는 神에게’나 ‘현현(顯現)’이라는 작품 제목을 붙인 작가에게서 종교적 세계관이 느껴진다. 이흥우는 작가 노트에서 ‘삶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사유를 평면에 표현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특정 종교의 유무와 무관하게,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은 그보다 더 무한한 시공간 안에서 어떤 섭리를 느낀다. 물론 고대 원자론자들을 비롯한 유물론자들은 섭리를 부정해왔지만 말이다. 화면 속 구성요소들이 하나둘 들어맞으면 카오스는 코스모스가 될 터이다. 신화나 종교는 태초의 혼돈에서 지금의 질서가 생겨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격렬한 활동성이 작품 전체를 다 차지하지 않는다. 


뒤에 숫자만 다른 [이름 없는 神에게] 시리즈에서 화면은 둘로 나뉘어 있곤 한다. 한 화면은 밝고 다른 화면은 어둡다. 이러한 명암관계 속에서 관객은 빛과 어둠을 직관한다. 빛/어둠은 세계의 질서를 통합되어야 할 이항으로 상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관념이다. 이항대립의 사고 속에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가치 평가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 관계를 해체하려는 움직임 또한 있었다. 작품 [이름 없는 神에게 2]에서 둘로 나뉜 화면 하나는 밝고 하나는 어두운데, 어두운 화면에 지글거리는 선들에는 부분적으로 밝게 칠해져 있다. 마치 특정 암호가 표시된 유전자처럼 어두운 바탕과 선 위에 나타난다. 생명뿐 아니라 시공간의 탄생에 대한 비유도 가능하다. 부분적 밝음이 잠재성을 넘어 현실화 된다면 바로 옆 화면이 되지 않겠는가.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대조어법은 움직임 가운데서 정지를, 정지 가운데서 움직임을 준다. 




이름 없는 신에게 6



어떤 종교는 세계 창조를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는 극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으니만큼, 대조적인 분위기의 두 화면을 가르는 수직선이나 수평선은 혼돈에서 질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밝고 어두운 블루 계열로 나뉜 작품 [이름 없는 神에게 4] 민트 색상평면에는 붉은 선들이 마치 소스를 뿌린 듯이 골고루 도포되어 있다. 둘로 나뉜 화면의 시각적 연결망에 의해 숨겨진 바탕은 드러난다. 보다 자유로운 바탕과 수직 수평을 맞춘 점 형상들이 있는 그 위의 화면은 시간적 공간적 차이짓기를 통한 질서화의—그 반대로 보자면 혼돈으로의—과정을 보여준다. 작품 [이름 없는 神에게 5] 또한 밝고 어두운 색상으로 나뉜 화면, 그리고 감추고 드러내기를 반복하는 복잡하고도 리드미컬한 화면이 공존한다. [이름 없는 신에게] 시리즈에서 수직 수평의 좌표에 맞춰 배열한 춘 점 형상은 완전한 원은 아니다. 마치 비슷한 모양의 조약돌을 모아 놓은 양 통일성 속의 다양성이 있다. 


그것은 최초의 기하학적 원의 엔트로피가 커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면 물질과 생명은 해체될 것이다. 이흥우의 작품은 동질성을 교란하는 이질적인 요소를 심어 놓음으로서 잠재적인 운동감을 주고, 그것은 보는 이의 상상력에 따라 다양한 서사로 읽혀질 수 있다. [이름 없는 신에게] 시리즈는 극적 요소의 대비 및 공존은 조화로움과 동시에 긴장감을 준다. 작은 원 속에서 드러나는 밝은 선들이 있는 작품 [이름 없는 神에게 6]에서 화면 분할은 좌우가 아닌 위아래이다. 보색대비가 있는 강렬한 화면이지만, 수평선은 수직선보다는 평온한 느낌이다. 수평선은 직립하는 존재에게 휴식과 평온을(그 끝은 죽음이겠으나) 준다. 추상화는 구체적 이야기가 없는 대신에 조형적 요소 자체에 내재한 의미를 최대한 활용한다. 우리는 수직, 수평, 삼원색 등등에 대한 초기 추상화가들(칸딘스키, 몬드리안 등)의 분석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름 없는 신에게 7



지시대상으로 부터 분리된 조형 언어에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자칫 형식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더 나쁘게는 이러한 형식이 반복되고 다듬어져 장식화되는 것이다. 추상화에는 지시대상은 없지만 의미는 있어야 하는, 아니 지시대상이 없기에 더욱 의미가 있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래서인지 초창기 추상부터 종교적 세계관은 가까이 있었다. 상(像)을 거부하는 성상파괴주의부터 신지학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신비적인 전통들이 있었다. 작품 [이름 없는 神에게 7]은 화면 왼편 어두운 화면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밝은색이 오른 화면에서는 가득히 펼쳐진다. 왼쪽 화면이 어둠 속에 빛이 산재해 있다면, 이와 대조되는 화면에는 빛 속에 어둠이 침입 또는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빛과 어둠은 서로에게 존재를 의지하면서 명멸한다. [현현(顯現)] 시리즈는 [이름 없는 신에게] 시리즈와는 달리, 화면이 분할되어 있지는 않으며, 자유롭게 춤을 추는 듯한 선의 띠들이 전면을 차지한다, 


현현은 재현과 비교될 것이다. 재현이 있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면, 현현은 불현듯 깨달음을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연성으로 인해 현현은 재현보다 더 주관적인 현상으로 간주된다. 재현이 동일성의 원리에 충실하다면, 현현은 타자를 전제한다.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이질적인 것, 즉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이더라도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종교라면 경전에 충실한 이 아니라 신비로운 체험이다. 지시대상이 사라지면서 조형 요소의 자유로운 조합이 화면을 차지한 이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마술적 과정은 중요해졌다. 그 반대의 경향, 즉 무질서해 보이는 것들이 하나의 질서로 두루 꿰이는 것 같은 절대적 타자에 대한 직관 또한 신비적이다. 만물에서 신성한 하나의 느낌을 고양하는 근대의 낭만주의에서 종교와 예술의 관계를 어느 때보다도 내재적이었다. 이흥우의 작품은 어떤 힘에 의해 탄생한 최초의 존재가 시공간을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세계를 구성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현현 5



현현7



[현현] 시리즈는 수직 수평에 맞춰 열 지어 있는 점조차도 그 자리에서 요동친다. 허공 속에 자리하는 원자들 또한 궤도를 유지하면서 유동한다. 그러면서 변화를 준비한다. 평면적으로 칠해진 화면 가장자리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형상들 또한 흥미롭다. 그것은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회화에서 미지의 것이 생성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작품을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장(場)이며, 모래성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아이처럼, 만다라를 그린 후 다시 쓸어버리는 승려처럼 화가는 매번 그러한 시작의 장을 마련한다. 예술 고유의 특징으로 상찬되기도 하는 ‘시작의 자유’(모리스 블랑쇼)란 거의 신적 창조에 버금갈 만한 사건이다. 시작의 자유는 선적으로 흐르는 불가역적인 시간만 객관적으로 보는 현실에 역행한다. 일상에서 이와 비견될 만한 것은 놀이이다. [놀이하는 아이, 예술의 신-니체](권터 볼파르트)라는 책 제목처럼, 철학자들은 예술 행위에 신성함과 놀이를 결합시키곤 했다. 


신성함이든 놀이든 모두 정해진 시공간과 규칙을 따르는 의례의 차원을 고수한다. [현현(顯現) 7]에서 구멍 속에 보이는 밝은 부분들은 상단의 선들과의 관계 속에서 읽혀진다. 점이 성장하여 선이 되는 것같은 모습이다. 그것의 내부는 같은 질의 내용물을 가지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작품 [현현(顯現) 7]은 평면 위에 밝은색 띠를 포함한 선들이 활기차게 점유한다. 작품 [현현(顯現) 4]는 명도가 낮은 바탕을 가진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대조의 정도가 덜하지만, 점이 성장하여 선이 되거나, 동질성 내부의 이질성, 정적인 요소와 동적인 요소 등이 공존하는 경향은 비슷하다. 이질적 요소가 담긴 날렵한 형태들이 공간을 자유분방하게 운동하는 듯한 이흥우의 작품은 형태를 남겨놓고 칠한 결과물로 보여진다. 현현, 즉 무엇인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명과 암, 형태 속의 색채 등은 동질성 속에서 이질성이 탄생, 또는 현현을 위한 조형적 전제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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