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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석 / 코드는 가볍고 조각은 무겁다

이선영

코드는 가볍고 조각은 무겁다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림은 3차원을 2차원에 담는 한 형식이다. 현실을 그러한 재현의 방식을 통해 시각의 역사 속에서 차곡차곡 자료를 쌓아왔다. 그것들은 다시 현실에 피드백된다. 이미지는 일종의 데이터가 되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자리한다. 처음 보는데 기시감이 드는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지의 역사 속에서 가다듬어진 미인은 현실 속 미인의 기준이 된다. ‘작은 얼굴에 하얀 피부, 선명한 이목구비’같은 미인의 기준은 지배적인 시각적 코드이다. 이러한 코드화에서 알 수 있듯 코드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적이다. 즉 코드는 권력의 결과이고 다시 권력을 만들어낸다. ‘유색인’이 미인(=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검은 것이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를 비롯한 치열한 문화적 투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긴 머리의 젊고 잘생긴 백인 남성상으로 알려진 예수상이 고고학과 법의학을 바탕으로 복원되었을 때의 모습은 짙은 올리브색 피부의 반쯤은 원시인 같은 농부 모습이어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 


문화적 투쟁이나 과학적 발견은 현실을 다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비교할 수 있는 현실의 몫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이다. 게임이나 영화, 만화, 채팅 등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이 유력한 현실이 된다. 이러한 가상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한다.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박재석의 작품들은 가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을 설명해 준다.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의 작품은 현실을 입체적으로 모사하기보다는 가상을 입체화하는 듯하다. 현실 속의 인물에는 그의 작품 같은 각진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가상 속의 평면적인 존재가 입체화될 때 고려해야될 요소는 많을 것이다.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변주하는 방식을 거꾸로 진행해야 한다. 만화적 표현이 입체화될 때 만화의 단순한 선은 입체물의 외곽선을 검게 두르게 했다. 만화적 인물의 과장된 표정은 입체 위의 한 면에 선으로 그려졌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가 패키지 디자인 형태로 나타날 때 이러한 형식이 자주 쓰인다. 가령 곰돌이 형태대로 오려진 용기 위에 곰돌이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캐릭터가 봉제 인형으로 재생산될 때는 또 다른 방식의 입체화가 필요할 것이다. 상품의 내용물이 평준화되면서 포장 디자인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대중의 짧은 관심에서 최대한 이윤을 끌어내기 위해 하나의 소스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용되는 가운데, 차원의 변주가 이루어진다. 박재석의 경우에는 스테인레스 스틸로 입체를 만들고 우레탄으로 페인트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단번에 파악될 수 있도록 단순화, 추상화되었다. 만화는 사진이나 그림보다도 더 즉각적인 소통을 꾀한다. 이러한 변환의 과정은 어느 정도 만화적 관례에 호소한다. 가령 남녀가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 표현된 작품 [우당탕탕](2016)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에서 화난 얼굴만 삐져나온 모습이 그렇다. 


싸우는 과정의 혼돈을 기호화한 형태는 신체의 표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비중 있게 처리되었다. 인물이 전형화되는 만큼이나 상황도 전형화된다. 가상은 현실보다 더 과장되어야 겨우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만화적 인물은 늘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다. 작품 [angry](2016)에서 화가 나서 발버둥 치며 우는 모습이나 작품 [멘붕](2013)에서 양 눈이 나선형으로 돌아간 채 머리에서 정신이 빠져나가는 상태의 표현이 그러하다. 작품 [잡혀 사는 남자](2016)는 추상적 표현도 등장하는데, 양복 입은 남자가 매니큐어 바른 거대한 손에 잡혀 있는 모습이다. 만화적 과장은 실제 그렇다면 심란할 수 있는 상황에 거리감을 두게 한다. 웃음은 그 결과이다.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에서 분석하였듯이,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은 세심한 융통성과 민첩한 유연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의 어떤 기계적인 경화’(앙리 베르그송)이다. ‘기계적 경화’는 슬랩스틱(Slapstick) 코미디에서 전형적이다. 


찰리 채플린의 익살스러운 연기로 가장 잘 알려진 슬랩스틱 코미디는 무성영화라는 형식을 바탕으로 한다. 공장에서 나사만 돌리던 노동자 찰리 채플린은 자유시간에도 그러한 행동을 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소리 없는 영상이 즉각적인 웃음을 유발할 수 있으려면 과장된 액션을 취해야 한다. 멀리서 보려면 색과 형태가 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인가를 단순화하는 만화적 표현에서 자주 발견된다. 만화 자체가 복잡미묘한 유기체의 형태와 상황을 단순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화적 과장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똑같이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는데, 그것은 베르그송이 주목한 기계적 반복의 결과이다. 박재석의 작품이 가상적 코드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또 다른 특징은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 되는 일명 ‘외계어’ 제목의 작품들에서 다수 발견된다. [멘붕]이나 토라진 남자를 표현한 작품 [흥칫뿡](2016), 고양이를 쓰다듬는 소녀를 표현한 [쓰담쓰담](2016) 등이 그러하다. 


어떤 상황을 표현하고 제목을 붙이는 경우와 제목으로부터 시작된 작품의 방점은 다르다. 후자의 경우 말과 대상의 거리는 최소화된다. 한글 캘리그래피의 대중화로 형태와 의미가 절묘하게 결합 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것은 입력된 코드가 바로 3차원적으로 재현되는 3D 프린터일 것이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분석했듯이, 시뮬라크르는 대상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한다. 박재석의 경우에는 그 또래라면 쉽게 알아들을 만한 단어가 등장한다. 의성어와 외국어, 줄임말 등이 섞여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단어들은 급속히 유포되었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오래 살아남는 단어들도 있다. ‘왕따’ 같은 단어가 그것이다. 만화에서 황당한 상황을 표현하는 의성어인 ‘헐!’이라는 단어도 현실 속에서 많이 들려오곤 한다. 가장 이상하게 조합된 단어조차도 그 수명을 좌우하는 것은 상황과의 관련이다. 매일 매 순간 소통하는 듯한데 고독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왕따는 몇몇 운없는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왕따로 만들어야 하는 역공이 펼쳐지기도 한다. ‘헐!’은 그만큼 황당한 경우가 많아서일 것이다. 요즘 인기가 많은 ‘펭수’의 반쯤 홀린 듯한 표정이 딱 그 의성어와 어울린다. 표준어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경향에 비판적이지만, 순수주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 변형되고 사라진다. 다만 그 주기가 눈에 띌 정도로 짧아졌을 따름이다. 현실에서 출발했든, 가상에서 출발했든 물질적 재료를 사용하는 조각에서, 인터넷에 유통되는 주기에 발맞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코드는 가볍고 조각은 무겁다. 그래서 놀 때와 작업할 때의 모드는 다르기 마련이지만, 점점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모니터 앞에 하루종일 앉아있다고 할 때 그는 같은 자세와 방식으로 일하고 놀며, 생산하고 소비한다. 만화가 3차원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작업을 하는 박재석에게 놀이와 작업의 문턱은 어느 세대보다 낮아졌음을 실감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심각한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또래의 중요한 사건인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에서는 거리감을 두기 힘들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거리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작품 [The love](2016)에서 부끄럽게 다가가는 두 남녀의 표현은 다른 작품들 보다 사실적이다. 줄무늬 옷 남자는 다른 작품에서도 나오는 것을 봐서 작가의 분신처럼 활동한다. 작품 [shall we dance](2017)에서는 청춘남녀가 춤추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부끄러운 얼굴을 표현하는 붉은 기운이 작품 [The love]와 연속적이다. 두 작품은 만화의 연속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연결망을 보여준다. 만화의 단순한 형태를 입체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불연속적인 지점들은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알려준다. 가상/현실에서 가상의 몫은 더욱 커져간다. 태어나자마자 스마튼폰을 잡았던 세대는 자신의 하루일과를 SNS에 또박또박 업로드한다. 이러한 세대에게 예술 또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동기가 작용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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