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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선, 손상기 전 / 시간을 다루는 미술의 기술과 마술

이선영

시간을 다루는 미술의 기술과 마술

서용선 전 (10. 10-12. 8,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손상기 전 (10.18-11.10, GS칼텍스 예울마루 장도전시관)


이선영(미술평론가)



비슷한 시기 남한의 남쪽 끝과 북쪽 끝 지역에서 열린 두 개인전에는 미시적이면서 거시적인 서사가 있다. 모더니즘 이후 그림에서 서사는 그림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억압되거나 배제된 요소였지만, 이 두 전시의 작품에서 서사는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지상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대정신-손상기의 글과 그림’ 전, ‘통증, 징후, 증세-서용선의 역사 그리기’ 전은 전시부제 부터 서사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운다. 손상기의 경우에는 문학이, 서용선의 경우에는 역사적 서사에 방점이 찍혀있다. 문학과 역사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그렇듯이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손상기의 경우 불구의 화가라는 이중의 고통을 안은 개인의 실존적 상황이 처절하게 그려지는 가운데, 고독과 소외를 안겨준 사회적 배경이 암시되어 있다. 특히 1980년대 도시 빈민으로 살다간 이력이 어두운 작품들 속에 편재한다. 


서용선의 경우 한국의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을 다루는 가운데, 무심하게 희생된 개인의 익명적 삶이 선명한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문학은 예술이고 역사는 이제 실증적 과학에 속하지만, 예술적 환상의 무게를 주는 것은 리얼리티이다. 역사에서 사회적 사실들이 서술 될 때 상상력은 필수이다. 특히 역사의 경우 남아있는 빈약한 흔적들로 그 시대를 재구성해야 하는데, 증거와 증거 사이의 빈 부분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실증주의를 추구하는 역사적 서사는 최대한의 투명성을 추구하지만, 서사 자체에 내재한 언어적 불투명성의 문제가 있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이러한 불투명성을 오히려 긍정적 요소로 활용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합리성은 비합리성의 일례라고 한다면, 투명성 또한 불투명성의 일례가 아니겠는가. 


인간이 몸을 가진 유한한 존재인 이상, 욕망과 무관한 투명한 언어는 불가능하다. 과학과 예술적 서사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두 화가가 실존적, 역사적 이야기를 그림에 담는 방식에는 회화라는 공간적인 형식과 서사라는 시간적 요소의 조율이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에 공간적 차원이 많이 개입되어 있듯이, 의미읽기가 요구되는 회화에는 시간을 다루는 기술과 마술이 필수적이다. 손상기는 1949년생, 서용선은 1951년생으로 손상기가 1988년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나이도 비슷하다. 물론 생몰연도가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두 작가는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을 전후로 탄생한 이들로, 그들의 작품에는 특히 한국 전쟁의 피폐함과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남도의 작은 어촌 출신의 손상기에게 장애를 남긴 구루병의 원인 중 하나는 영양부족이며, 제때 적절하게 치료받지 못한 이유 또한 전후의 혼란과 가난 때문이었다. 서용선은 전쟁 통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와 묘지가 만원 있었던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이번 전시작품에 강력하게 흐르는 한국 전쟁을 말한다. 물론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다고 비슷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세속적 기준으로 본다면 ‘꼽추화가’--또는 ‘요절한 천재화가’로 칭송되기도 함--와 전직 교수였던 작가의 위상은 크게 다르다. 서용선의 경우 개인적 소외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지식인적인 거리감이 있다. 손상기의 경우 전형적인 근대의 ‘저주받은 예술가’상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 전쟁 이후 최고의 경제적 성장기를 구가했던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이 반영되어 있다. 


역사 속의 주체, 그리고 개인에 스며든 역사


서용선은 화이트큐브의 높고 넓은 벽면들을 가득 채우는 대작들과 드로잉들을 적절히 섞은 100여점의 작품들로 멀게는 한국전쟁, 가까이는 얼마 전의 탄핵정국 풍경을 표현했다. 그림의 소품, 또는 그림의 구조를 추상화한 듯한 금속 입체 작품들 5점도 전시장과 복도, 카페 등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서용선은 그동안 단종의 죽음, 임진왜란, 동학 농민 전쟁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특히 이번 전시의 한국 전쟁이나 세월호 사건, 촛불 혁명같은 사건은 온 국민들이 영향을 받았던 사회적 파장이 큰 근래의 사건들이다. 촛불시위로 이어진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국면이라는 역사적 상황은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미디어 화된 현실과 연동된 최초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그보다 더한 정권도 그렇게 심판할 수 없었던 민초들의 승리는 상당 부분 자신들의 과오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지배층의 오판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에 관련된 자료도 많다. 광범위하게 시민화 된 혁명이어서 참여도 열려있었다. 그런데 한국 전쟁이나 분단처럼 몇 십 년 전의 사건들은 어떠한가. 불과 몇십년 전 사건이래도 자료가 많은 것은 아니다. 주변 열강들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끼어있었던 우리의 근대사 자체가 잊고 싶었던 역사였던 데다가, 앞만 보고 달려왔던 맹목의 시간 속에서 역사는 차분하게 기억되지 않았던 탓이다. 이러한 역사적 왜곡 내지 망각은 사사건건 좌우로 쩍쩍 갈라지는 병리적 행태를 낳았다. 한국전쟁의 경우 전쟁 희생자가 하도 많아서 운동장 한쪽에 뼈들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수업을 했던 구체적인 기억이 작가에게 남아있다. 


산더미같은 뼈들이 있던 자리는 이제 아파트촌이 들어섰다. 역사가 예술적 소재로 인기가 많았던 이유 중하나는 우리 역사에 도약과 빈칸이 많아서다. 역사는 80년대는 진보라는 맥락에서, 90년대는 포스트 모던적 회고로, 2000년대 이후는 아카이브 스타일의 전시를 통해서 꾸준히 생산/소비되어왔다. 전쟁 통의 혼란은 물론이고, 밀실에서의 정치적 거래나 국가 권력이 동원된 야만스러운 학살극은 기록매체가 귀하던 시절 얼마 안 되는 희미한 자료로 남아있었던 시대가 다뤄진다. 은폐든 왜곡이든 망각 때문이든, 그 시절은 조선시대 못지않은 거리감이 있다. 강대국들 간의 협정 장면 같은 기록사진을 참고한 작품들은 설명이 요구되는 역사적 단면이다. 강렬한 색감의 추상적 배경이 많은 작품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한 장면의 재현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서사를 회화적 장치로 보충한다.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룬 작품 [노근리]처럼 400×990cm 크기의 대작이 있는가 하면, 손바닥만한 드로잉도 많다. 역사적 사건들이 모두 이어져 있듯이, 대작과 소품은 서로 연동되면서 서사를 이어간다. 역사 속 개인들은 작품 [전황]에 나타나 있듯이 수동적이다. 이 작품에서 뻣뻣하게 서있는 북과 남의 병사들은 이 마치 장기판의 말 같지만 제국의 장군은 역사적 사건을 지배한다. 작품 [포츠담 회담]에서 붉은 테이블에 한 장씩 있는 문서는 한반도를 피자조각처럼 나눠먹는 듯하다. 광화문에서의 촛불시위를 소재로 한 최근의 역사를 다룬 [2016년 12월]에서는 대작이지만 부분적으로 드로잉처럼 미완성같은 표현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화법은 그 역사가 아직 미완임을 암시한다.


손상기 작고 31주기를 기념하는 작품들에는 자필 메모를 비롯한 풍부한 기록물이 함께 한다. 전시의 한 기록물에는 ‘나는 언제나 글을 쓰고 난 후에 그림을 그린다. 내가 느낀 감정과 추상을 정직하고 설득력 있게 기록하여 이미지의 집약을 꾀한다고나 할까...’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그림 일기같은 삽화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소양이 강했던 작가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보다 더 육체적 에너지가 요구되는 그림이 작가의 주요 언어가 된 상황을 알려줄 따름이다. 작품 위에 써있기도 한 메모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다. 두툼한 재료로 뭉개진 인간의 초상을 표현한 장 포트리에의 인질 시리즈는 전후의 실존적 상황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것은 추상미술이 물질 및 육체와 관련된 서사가 아직 남아 있었던 시대와 지역의 산물로, 손상기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손상기의 작품은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는 구상 회화지만, 작품 여기저기에 남겨 놓은 스크래치 등은 형식에서 파생될 수 있는 내용 또한 겨냥한다. 어떤 평자는 그것을 상처받은 삶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이력과 관련을 가진다. 전시 작품은 고향과 도시 풍경부터, 때 이른 죽음을 암시하는 은유적 대상이 있는 작품까지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과 연관된 작품들이 많다. 특히 서른 무렵에 서울로 올라와 작업을 하면서 이전에 지역 화단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향토적 서정주의 풍의 작품으로부터 벗어나 근대도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스타일로 변모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 


고향 여수에서 상경하여 서울 아현동 산동네에 자리 잡고 작업하면서 접했던 80년대 서울의 풍경은 암울하다. 빛과 그림자가 명확했던 시절, 그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의 풍경에는 도시로 진입하는 장벽들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작품 [공작도시-서울](1980)에는 육교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과 각종 장애물들이 뿌연 풍경의 와중에도 눈에 띄며, 작품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1984)에도 높은 담과 철조망 보인다. 그러한 장치들은 이방인에게 닫혀있는 도시의 단면을 말한다. 죽기 전 10여년 동안 머무르며 작업했던 장소를 작가는 ‘공작도시’라고 칭했으며, 마치 영화를 찍는 듯한 시리즈 작업을 통해 보이지 않는 권력 아래의 삶을 이야기 했다. 그는 철저히 개인으로서 어두운 시대에 반응했다. 앞서 인용한 작가노트는 ‘단 혼자만의 고독한 노동이며 천형을 입은 천재의 고통인 것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장애, 가난, 고독에 얽힌 그의 생애는 요절과 함께 신화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그가 직면한 상황은 사실이었고, 작가의 자의식적인 태도를 강화했을 것이다. 자본주의 성장의 시대와 걸맞지 않은 독재의 시대, 이 반동적 역사를 극복하려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장애와 성격, 그리고 연고가 없던 탓에 당시에 활발하게 전개된 진보적 미술 운동과의 교류도 충분치 않았던 듯하다. ‘지상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대정신’이라는 부제에서 ‘지상’, ‘운명’같은 비역사적 범주가 눈에 띈다. 근대의 역사는 명(明)과 함께할 때 진보였지만, 암(暗)과 함께 할 때 ‘깨어 나야할 악몽’(제임스 조이스)이었다. 그러나 손상기의 작품은 악몽 또한 현실임을 알려준다.


출전; 아트인컬처 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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