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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욱, 이소정 전 / 예술작품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몫

이선영

예술작품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몫  


이강욱 전 (9.1—9.15, 담갤러리) 

이소정 전 (8.29—9.28, 갤러리 2)

  

이선영(미술평론가)

 


천진한 아이의 그림처럼 어눌한 어법이 특징적인 이강욱 그림과 섬세하고 치밀한 화면구성이 특징인 이소정의 그림은 매우 달라 보인다. 흔히 통용되는 분류법에 의한다면, 서양화를 전공한 이강욱의 작품은 동양화같은, 동양화를 전공한 이소정의 작품은 서양화같은 면모를 보이며, 하나는 구상 다른 하나는 추상이다. 그러나 동서양화의 구분이 모호한 그들의 작품은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들을 수없이 넘나든다. 통상적으로 같이 쓰여지지 않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종이 위에 담백하게 그려진 그들의 작품은 우연성이 가지는 위상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석처럼 같은 소우주와 비교될 수 있는 예술작품은 닫힘과 열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석의 경우에도 땅속 깊숙한 곳에서 캐내진 원석은 각을 맞춰서 정교하게 깍아내야 하고, 외부의 광원이 있어야 비로소 찬란하게 빛이 나는 법이다. 자족적으로 닫혀있는 듯한 소우주는 바깥에 의존하는 것이다. 보석같은 무기물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안과 바깥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의해 자신의 잠재력을 펼쳐나가며 성장하고 생존한다. 



이소정, 통역가 Interpreter, ink, cinnabar red ink and watercolor on paper, 85x85cm, 2019

(이하 사진출전; 갤러리2)



이강욱, 두개의 꽃(모르는 순간) 57x76cm conte, oil pastel, acrylic on paper  2018

(이하 사진출전; 담갤러리)


훌륭한 예술작품에 대한 수많은 미학적 정의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작품과 생명과의 비유는 가장 설득력이 있다. 예술은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그 창조력을 모방하다. 세포막의 역할이 그렇듯이.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경계가 있음과 동시에 바깥과의 소통이 있는 유기체적 존재처럼, 아름다움은 자기만의 자족적인 충만함이 있으면서도 바깥에 열려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자기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타자의 몫을 무시하는 자기중심주의, ‘나는 나다’라는 식의 자기동일성만 고집하다 보면 동어반복에 머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취해진 고독이 지나친 밀폐감을 낳고 자신이 풍긴 기운에 중독된 부류가 적지 않다. 낭만적인 예술가의 신화가 만들어낸 ‘자기만의 개성’과 ‘주장’을 가진 예술가들이 대부분 진정한 개성이나 특이한 주장보다는 자기 연민이나 독선에 깊이 빠져 있다는 점은 현대사회에서 예술가가 처한 주변적 상황을 설명해준다. 물론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자기의 자기 되기를 위협하는 많은 요소가 깔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어적/공격적 태도는 얼마간의 설득력이 있다. 


예술에 대한 기존의 후원제도가 무너지고, 믿을 것이라곤 자기밖에 없었을 때 낭만주의적 예술가상이 생겨났다. 반면 지나치게 열려 있다 보면 무의미에 가까워지며, 가장 나쁘게는 유행에 취약해진다. 그들의 자유로움은 아무것도 진정하게 변화시킬 힘이 없는 임의성에 불과하다. 우연과 필연 사이의 적절한 배분, 그 오묘한 관계 설정에 의해 유의미하면서도 매력적인 작품이 결정될 것이다. 우연은 잘짜여진 맥락에 의해서만 필연으로 고양된다. 이강욱과 이소정의 작품에 뼈대를 이루는 것 중의 하나는 문자나 부호같은 기호들인데, 그것은 수많은 변주를 위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바탕이 된다. 그들의 작품 안에 부는 바람은 최초의 출발을 흔적으로 변형시킨다. 필연이 또 다른 필연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스쳐 지나가는 영감을 예술작품이라는 타자들도 해석에 동참할 수 있는 물적 형태로 고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작업하는 삶이 생활화된 작가만의 몫이다. 이강욱과 이소정의 작품은 관객들로 하여금 상상이든 추리든 어떤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든든한 플랫폼 역할을 한다.    

 


이강욱, 자연적 기원으로 되돌려진 기호 


  


이강욱-숲으로 가는길 2019 (담갤러리 전시전경)



이강욱, 거울 호수로 가는 길 57x76cm conte, pastel, acrylic, gouache on paper 2019



이강욱, 바람을 타는 새  57x76cm conte, pastel, acrylic on paper 2019



이강욱, 밤사냥 57x76cm conte, pastel, acrylic on paper 2019



도시에 사는 이강욱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산이나 새는 그가 작업만큼이나 산책을 많이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대개 76×57cm 크기의 판화지나 한지 위에 먹, 콩테, 과슈, 아크릴, 파스텔 같은 여러 재료로 그려진 작품들 몇몇은 똑같은 나무 액자를 해서 전시장의 메인 벽면에 나란히 붙여 걸어 놓았다. 그의 작품에서 무엇인가를 한정 짓는 행위는 열기(풀기)를 위한 닫기(묶기)이다. 역설은 여러 차원에서 작용한다. 작품의 내용이나 기법 자체는 자유롭지만, 형식의 면면은 규칙적인 실행의 결과이다. 그의 산책은 길가의 풀과 나무와 새와 산을 매일 관찰하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걷기 또한 사색의 과정이다. 걷기가 사색을 고무한다는 의학적 연구결과도 있다. 산책은 인간사회를 포함한 자연관찰과 사색이 교차하는 시공이다. 그의 작가노트에서는 탐험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만큼, 바람 쐬기는 크고 작은 자연의 변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준다. 


그것은 공포스러운 빈 종이 앞에 앉아 안 풀리던 작품의 어떤 부분이 풀릴 수도 있는, 요컨대 타자와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그러한 경험은 통풍감이 있는 작품을 낳은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관객 또한 그의 작품에서 산책할 수 있다. 산과 새가 있는 그의 작품에는 여백도 있기에 어떤 도상이 만들어내는 상징의 그물을 벗어나 소요할 수 있다. 그는 공간의 일부를 비워 놓거나 약간의 심심함을 달래려는 듯 점을 듬성듬성 찍어 놓는데, 그 또한 잠재적인 운동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동감은 다정한 연인의 걸음걸이나 눈 쌓인 산의 새 발자국부터 천지에 화산재를 흩뿌리는 강력한 화산 폭발같은 여러 급이 존재한다. 




이강욱, 불과 별 47x66cm conte, pastel, acrylic on paper 2019



이강욱, 붉은 산 38x53cm 종이에 콩테 파스텔 2018



이강욱, 새 31x47cm conte, pastel, acrylic on korean paper 2019



이강욱, 숲에서-두마리 동물 57x76cm conte, pastel, acrylic on paper 2019



이강욱, 흰 가면을 쓴 남자 64.5x103cm conte, oil pastel, acrylic on paper 2018



그가 가는, 또는 그리는 자연은 작은 원인이 예측할 수 없는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변화무쌍한 무대이다. 원근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은 무대보다는 무대막에 더 가깝지만, 여러 차원이 중첩된 막은 환상적이다. 작품 제목에는 그냥 새로 되어 있지만, 익룡처럼 뾰족뾰족한 형태의 날개나, 새의 토템같은 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남미의 우유니 소금사막처럼 실재하면서도 환상적인 지형이 있듯, 산과 별이 있는 작품 또한 환상과 현실이 중첩되어 있다. 제목부터 환상적인 작품 [거울 호수로 가는 길]은 하얀 삼각형 세 개와 그 아래 검은 삼각형 세계가 반영 상을 이루는 산이 있는 풍경으로, 어두운 그림자의 영역에서 별은 더욱 빛난다. 별이나 산 같은 광물질적 세계에 활기를 부여하는 것은 화산활동같은 지구 차원의 운동, 그리고 그 주변을 날고 있는 새이다. 


작품 [바람을 타는 새]에서 거센 물결 위에 솟은 뾰족한 두 개의 산 또는 섬, 그리고 그 사이를 날고 있는 새는 유사한 말단을 가진다. 이 우주 속 존재들은 유사(類似) 관계로 이어져 있다. 작품 [밤 사냥]에서는 그러한 뾰족한 날개가 생존 활동을 위해 바짝 긴장하는 생명체의 상태를 표현한다. 작품이라는 소우주 속의 존재들은 서로를 반사하면서 상호작용한다, 그들 간의 교신이 가능한 것은 소우주 속 구성원들이 존재이자 기호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 물이나 산은 상형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람 인(人) 자가 걸어 다니는 두 발이 되는 작품 [두 개의 꽃(모르는 순간)], [흰 가면을 쓴 남자]는 현대문명이 고정시키는 기호를 자연적 기원으로 돌려 보낸다.

 


이소정, 미시세계의 우연이 가져온 파장 


  


갤러리2 전시전경



전시전경



전시전경



이소정의 작품에서 내부에 많은 것이 조밀하게 접혀있는 듯한 날카로운 형태의 출발은 희미한 얼룩이다. 구별되는 색과 형태로 이루어진 여러 층의 화면은 얇은 한지를 통과한 붉은 주묵의 흔적으로부터 시작된다.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안료의 흔적은 일종의 씨앗이 되어 작품마다 다르게 자라난다. 일단 형태가 시작되면 이소정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한 일련의 규칙을 통해 펼쳐지지만, 그 시작은 우연인 셈이다. 우연은 임의성도 다양성도 낳는 양날의 칼이다. 우연(무의식)을 필연(의식)으로 고정시키는 기술이 한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을 결정한다. 작가는 예술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 그것도 재발견되는 것임을 겸허히 수용한다. 발견된 단서를 다시 묵으로 덮으면서 생기는 또 하나의 층은 화면의 강약을 조율한다. 


대칭적인 작품의 배열 또한 인상적인데, 전시장에 딱 맞춘 듯한 작품들의 각은 우연적 출발을 견고한 것으로 재구성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드러난다. 정사각형의 작품들이 3x3의 열로 배치된 작품은 마치 꽉 짜여진 하나의 작품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개화, 통역가, 큰 입의 사람, 얼음창고, 무법자, 분홍파도, 복숭아꽃, 진짜 관객, 달팽이...’ 등으로 붙여진 각각의 작품 제목들은 어떤 연결망을 가질지 알 수 없는 임의적 단어들이다. 이러한 임의성을 일소하는 듯한 각을 맞춘 배치는 잘 돌리면 맞춰질 수도 있는 큐브 놀이 같은 면모를 갖춘다. 떨어진 꽃잎들처럼 느슨해 보이는 형상들이 있는 작품들도 줄 세우듯이 모아 놓아 절도를 부여했다. 




이소정, 초연 Premiere, ink and cinnabar red ink on paper, 130x162cm, 2019



이소정, 무법자 Outlaw, ink and cinnabar red ink on paper, 130x162cm, 2019



이소정, 얼음창고 Ice house, ink, cinnabar red ink and watercolor on paper, 85x85cm, 2019



이소정, 복숭아 꽃 Peach blossom, ink, cinnabar red ink, pencil and watercolor on paper, 85x85cm, 2019



이소정, 해시계 Sundial, ink, cinnabar red ink and watercolor on paper, 130x162cm, 2019



이소정, 적운 Cumulus, ink and watercolor on paper, 162x130cm, 2019



이소정, 꽃잎들 Petals, ink, cinnabar red ink and watercolor on paper, 162x130cm, 2019



9개의 작품은 하나의 본에서 나온 것으로, 어떤 것은 꽉 차 있고 어떤 것은 그리다 만 것처럼 텅 비워있고, 그 사이에 일련의 계열이 있다. 그것은 작가가 다양성을 늘려가는 방식이 변주임을 알려준다. 인간이 사용하는 다양한 기호들은 한정된 요소로 최대한 표현할 수 있게 하는데, 이소정의 작품은 기호의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다. 작품 중에는 느낌표, 물음표 같은 문장 부호나 줄 바꿈이나 들여쓰기 같은 교정 부호의 흔적이 발견된다. 대상과 기호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자유연상에 의해 붙여진 듯한 작품 제목들처럼 말이다. 인간은 기호로 소통하지만, 기호는 결정적 의미가 아니라 자유로운 표현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우연성 때문이다. 


‘탐정들(Detectives)’이라는 전시 부제는 조그만 단서들로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으며, 작가는 그 흔적을 추적하여 일련의 형태들로 구축한다. 우연의 의미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게 자리매김 되어 왔으나, 신화와 종교의 시대에는 신의 섭리를 부정하는 불온한 사고로 간주 되었고, 인공적 체계가 개인을 압박하는 현대는 변화와 자유의 계기로 환영받기도 한다. 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등은 원자나 분자적 차원에서의 우연적 요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미 고대의 원자론자들은 원자의 운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우연을 중시했다. 진화에서 돌연변이의 역할이나 관찰행위가 미시적 차원의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대한 현대의 자연과학적 이론/가설은 얼룩에서 시작한 회오리가 어떤 장면으로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그림의 과정 또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출전; 아트인컬처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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