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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순, 장지아 전 / 몸을 관통하는 미시적이며 거시적 권력

이선영

몸을 관통하는 미시적이며 거시적 권력

임흥순 전 (2019.12.05—2020.1.30. 더 페이지 갤러리)

장지아 전 (2020년 1.15—2.15, 두산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나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한 경계는 얼마나 견고할까. 변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요즘,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에 대한 감각은 보다 예민해졌다. 바이러스는 인간에 대해 타자지만, 타인들은 그 매개체가 된다는 점에서 고도의 경계태세를 야기한다. 면역반응과 관련된 생물학적 차원부터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심리적 차원까지, 경계들은 편재한다. 자신을 자신에게 하는, 즉 동일성의 경계가 너무 열려 있거나 닫혀 있다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그것은 근대 이후 계속된 개인주의가 더 이상 각자의 자유가 모두의 자유가 될 수 있는 이상주의적 상황을 벗어나 서로 침해할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과도 닿아있다. 서로의 관계가 조밀해질수록 연속반응은 가속화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이러한 밀집의 상황 속에서 생산력을 키우지만, 그만큼 위험도 따른다. 여기에서 경계는 자연스럽기 보다는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다. 겉보기의 질서 속에 무정부상태를 감추고 있는 지배적 체제 속에서 예술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예술은 한 인간의 자유가 다른 이의 자유와 상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예술은 똑같은 기준을 놓고 벌이는 경쟁 또는 전쟁이 아니라, 그저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다름에 대한 욕망 또한 무한한 희생을 요구한다. 


영상, 설치, 사진 등 다양한 양식을 아우르고 있는 장지아와 임흥순의 작품은 하나는 사랑을, 다른 하나는 증오를 다룬다는 점에서 달라 보이지만, 둘은 애증의 관계처럼 엮여 있다. 두 전시는 사적 영역부터 공적 영역에 이르는,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사건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 사건들은 크건 작건 간에 선정적이다. 장지아의 작품은 내밀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체액의 흐름이, 임흥순은 독재정권이 자신의 체제를 유지 확장하는 과정에서 뿌려진 민중의 피가 깔려있다.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어떤 이데아를 가졌든 간에 최종적 심급은 결국 몸에 관련됨을 그들의 작품은 보여준다. 특히 몸을 관통하는 권력이 두드러진다. 장지아의 작품에서 ‘성애는 힘의 관계를 맺기 위한 특별히 강력한 통행로’(미셀 푸코)이며, 임흥순의 작품에서 독재자의 전횡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부제처럼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 있다. 몸이 그 경계를 파열하는 열락과 죽음의 상황은 타자를 호명한다. 타자로 간주되어 왔던 몸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탐구 대상으로 전면화 된다.

  


편재하는 권력의 요청에 좌지우지되는 몸

  

장지아 전의 작품 선정은 작가가 주도하거나 관여한 것은 아니다. 이 전시는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의 일환으로 3인의 공동 큐레이터가 기획한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정동affect(박수지), 서사(박지형), 컬트미학(천미림)으로 읽어본 전시로, 전시 작품 선정과 담론제시에 있어서 하나의 대상을 여러 각도로 찍은 사진들처럼 탐구적이며 분석적인 관심이 녹아있다. 작품은 세부분으로 나뉘어있다기 보다는, 같은 대상을 세가지 방식으로 읽는다. 물론 해석 방식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유기체보다는 기관없는 몸체를 닮은 장지아의 작품은 그만큼 들어가는 구멍과 나가는 구멍이 많은 유연성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당 작가로서는 내 것이지만 내 것같지 않은 당혹스러움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이래도 자식이 나는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어떤 작품들은 인간으로 치면 성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탔다면 자식도 작품도 타자일 수 밖에 없다. 학생티를 막 벗은 자신이 나오는 예전의 작품들에 대해 작가는 쑥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있는 그대로 작품을 내어주었다. 미숙했을지도 모르지만 풋풋했던 시절의 작품을 가감 없이 내보인 것이다. 


알려진 작가가 된 지금, 이전에 발표한 작품을 덧칠하고 수정하고 꾸미는 것에 대한 유혹이 있었겠지만, 그 작품들 또한 많은 이가 공유한 객관적 역사임을 인정한다. 기획자들은 작가가 비망록처럼 간직해온 작은 드로잉들에서 [노려본들 어쩔 것이냐!]라는 전시 부제를 택했다. 그것은 2013년부터 자기 치유와 성찰의 일환으로 지속하고 있는 [red drawing] 시리즈 중 하나이며, 종이에 붉은 잉크로 쓰여진 일기처럼 단상처럼 비망록처럼 다가온다. 앞차의 녹슨 얼룩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에 대한 단상을 드로잉 더미에서 발견된 것이다. 전업 작가 생활을 지속해오면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만만치 않게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심리적 압박과 위기의식이 녹아있는 교묘한 형태(gestalt)는 무의식의 타자적 속성을 드러낸다. 타자의 시선에 존재하는 괴리감이 표현된 이 작품은 장지아의 다른 작품들처럼 심각한 가운데 유머가 있다. 프로이트 시대와 달리, 무의식은 더이상 심층부에 있기 보다는 뫼비우스 띠처럼 의식과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무의식은 더 이상 심연에 숨어있는 원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접하는 사물, 특히 기계들 속에 편재하며 몸과 예기치 못한 연결망을 형성한다. 


짐승의 피로 직접 쓴 사랑의 시가 내걸린 [song of love](2015)처럼 처절하면서도 아름답다. 글자의 빈 구멍을 통해 그림자로서만 비치는 숨은 글자는 영원하지 않음만이 영원한 역설을 담았다. 뭔가 가득 쓰고 나서 세로줄로 죽죽 지워버린 것도 있는데, 여기에는 자신을 마구 쏟아놓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감시와 조절 또한 발견된다. 필자도 처음 보는 이 드로잉들을 전시작품으로 꺼내 놓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거기에는 기획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정동과 서사가 있다. 자유로운 드로잉들이 작업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때, 컬트 영화적인 영상의 시나리오 같은 면모도 있다. 장지아의 잘 알려진 작품들 속에서 해석적 단초가 되는 자료가 작품의 반열에 올라와 같이 전시된 것은 기획의 묘미다. 그밖의 다른 작품들은 사랑이라고 할 만한 코드가 발견된다. 생식기나 눈코입 등에서 흘러나오는 체액들, 피부의 표면에 새겨진 문신같은 흔적들은 타자와 마주한 몸의 경계에서 일어난 사건의 흔적들이다. 장지아의 작품에서 몸을 관통하는 권력은 열락으로부터 고통, 죽음에 이르는 강렬한 정서를 분출시키며, 의미는 이 정서가 타자에게 전염되는 강도와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임흥순의 개인전 [GHOST GUIDE]는 설치와 영상이 대화적 관계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이력이 보태진 지금은 보다 확장성을 가진다. 기록과 작품, 영상과 설치가 함께 하는 이 전시는 다양한 형식들이 구색맞추기 식으로 동원된 것은 아니다. 전시된 작품 속의 대상들은 부재하는 존재를 강하게 상기시키며, 영상 속에서는 시간과 서사라는 맥락 속에 배치된다. 그가 이 전시에서 키워드로 삼은 유령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도는 경계 위의 존재다. 그들이 저세상으로 확실하게 가지 못한 이유는 그 전모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아 아직도 복원 중인 역사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유령을 기억하는 사람들 또한 완전한 이승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간은 역사적 비극의 시간에 묶여있다. 작가는 이렇게 묶여있는 시간을 예술적 서사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진혼(鎭魂)’(공연평론가 목정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임흥순은 작업 초기부터 역사의 그림자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왔다. 그것은 원래 역사가의 과업일지 모르지만, 성장을 위해 망각을 택한 한국의 근대사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나름의 비옥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역사적 물증과 물증 사이의 단층들은 ‘과학적’ 실증주의가 완벽히 수행할 수 없는 빈 칸이 있는 것이다. 전시장에 초입의 작품 [친애하는 지구에게]는 남미의 독재정권에 의해 실종된 이들의 흔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중국 식당의 회전 테이블을 연상시키는 좌대 가운데는 이불보를 쓴 조상이 서 있는데, 그것은 뒤에서 보면 빗자루로 얼기설기 세워 놓은 실체 없는 유령이다. 그 가장자리에는 폭력과 고문의 흔적과 관련된 장소에서 수집한 파편들이 해석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70년대 남미에서 일어난 사건은 80년대 한국에서도 일어났고, 작가는 지구 곳곳에서 발생했던 비극의 공통점을 흑백 사진부터 총천연색 가상현실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시한다. 다음 전시장의 작품 [고스트가이드]는 스크린 역할을 하는 얇은 구조들이 드리워져 있고 여기에 영상들이 투사된다. 이 구조들은 어디선가 뜯겨져 나온 듯 그 가장자리가 불규칙적이다. 벽에 기대 놓은 판들 역시 그 위에 투사되는 영상을 입체파 화면처럼 갈라놓거나 뜻밖의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연속성에의 환상을 주는 영화의 문법에 상응하는 설치미술의 어법이다. 몽타주든 꼴라주든 재현주의에 내재된 연속성에의 환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그 사건들은 재현될 수 없는 은폐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시간이라는 빗자루는 계속 움직인다. 빛에 의해 덧입혀진 복합적 이미지는 어두운 폐허를 하나씩 하나씩, 또는 동시에 밝혀준다. 관객은 전시 공간 안의 여러 스크린을 순차적으로 보기 힘들다. 전체 공간 속에서 이전에 무엇인가 있었고, 사라지고 있지만 기억해야 할 장소와 사물, 사람들을 파편적으로 지각한다. 중성적이지 않은 스크린은 지나간 역사를 구조화, 또는 해체하는 중이다. 물건들이 담긴 반투명 박스가 조명을 받아 벽에 실루엣이 투사된다. 사물은 움직이는 영상과 동급의 이미지가 되어 상호작용한다. 마지막 방에서 거울처럼 마주보고 상영되는 작품 [좋은 빛, 좋은 공기]는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근대사가 배경이다. 양국의 독재자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과 남은 자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흡사하다. 관객은 전시장 양끝에서 나오는 광주 관련 영상과 아르헨티나 관련 영상을 관객은 번갈아 보면서 복화술처럼 대사가 두 상황에 맞아 떨어짐에 놀란다. 마주 본 거울처럼 펼쳐지는 두 역사는 어둡고 슬픈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빛’이라는 의미의 광주, ‘좋은 공기’라는 의미를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자연이 나타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해맑은 자연은 그 아래에 깔려있을 역사와 기억을 더욱 어둡게 한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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