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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매체의 자동화된 실행에 대한 단절

이선영

기존 매체의 자동화된 실행에 대한 단절

  

이선영(미술평론가)


  

특정학과 출신이 아니더라도, 한 작가에게는 언제 어떻게 자기의 조형 언어로 자리잡은지 알 수 없는 모태언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모태언어는 무의식과 몸의 언어까지 활용해야 하는 전면전인 예술에서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하지 않았다면, 미술을 하기 시작한 때 접했던 것을 모태언어라고 치자. 그래서 중견 작가가 오랫동안 가까이했던 매체를 바꾸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만약에 주/객관적인 상황에 의해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성인이 되어 외국어를 배워 유창하게 말해야 하는 것 같은 부담이 따른다. 그렇지만 새로이 습득한 언어에는 새로운 세계가 딸려오기 마련이며, 낯설음과 어색함은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한다. 예술에서는 기법 그자체 보다는 과정과 의도가 중요하다고 해도, 결과물만이 매체 변화의 필연성을 증명해 준다. 어떤 작가가 자신이 늘 상 해오던 것을 뒤로 하고, 다른 매체를 작업에 도입했을 때 새 매체의 기존 용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불리한 게임이다. 


나에게 새로운 매체가 누군가에게는 모태언어일 수 있지 않은가. 새로운 게임 참여자가 구사하는 새로운 용법은 ‘시도’, ‘연습’을 넘어서 ‘실험’이라는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으로 조명받기도 한다. 실험은 대개 확정된 범주와 범주 사이의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아방가르드’의 의미에는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은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경계는 경합하고 있는 매체들 사이뿐 아니라, 시간적인 경계 또한 포함된다. 가령 전자의 고전적인 예는 회화와 사진의 관계에서 발견된다. 사진이 자기만의 문법을 찾아가기 전에 회화의 흉내를 내거나, 현대화된 시각을 회화에 도입하기 위해 사진적 구성이 활용된 경우가 그것이며, 이러한 관계는 포토샵이 일반화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시간적인 경계가 와해 되는 예는 고전적 기법이 재발견되는 경우이다. 지나간 시대의 문화적 코드 또한 새로움의 일환으로 선택될 수 있다. 근대 이후 시간의 가속과 단절은 새로움의 출처를 미래에만 두기보다는 전방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자크 아탈리가 [미로]에서 말했듯이, 직선, 또는 계단으로 비유되는 공간적 위상이 미로처럼 변화된 이래, 진보의 방향성 또한 전방에 국한되지 않는다. 근대의 ‘새로움의 전통(tradition of the new)’(해롤드 로젠버그)에 반기를 든 포스트모더니즘은 ‘태양 아래 새로움은 없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특히 생태학적 가치가 급부상한 현대에는 ‘오래된 미래’(노르베리 호지) 또한 대안적 가치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제 플라스틱보다는 진흙 한 덩어리가 더 깨끗하게 느껴지고, 높이 쌓기보다는 텅 비워놓는 것이 더 쾌적한 시대가 왔다. 대중문화에서 인기 있는 레트로(Retro) 아이템들은 디지털 아카이브가 쌓여가는 만큼 언제든지 호출된다. 리오타르를 포함한 포트스모더니즘 이론가들이 꿈꾸었던, 데이터 뱅크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완벽한 정보게임이 펼쳐진다면 예술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자기 입맛대로 소재와 방법을 취사 선택하는 호사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담론과 권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유토피아는 단번에 디스토피아로 바뀐다. 대중문화 못지않게 예술도 유행을 탄다. 지구촌화는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문화지체(cultural lag) 현상’도 극복하고 동시대성을 간취하게 한다. 유행은 결국 시장의 선택을 말한다. 한국에서 1990년대만 해도 ‘비디오 아트’하면 첨단예술로 다루어지곤 했는데, 이후에 세계 최고 수준의 속도로 깔린 정보고속도로와 스마트폰, 특히 U-Tube 등을 통해 다시 접하는 90년대의 영상은 오래된 그림보다 더 오래된 것 같은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이제는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기기들에 의해 경계는 더욱 가변적이다. 화가가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일상 속에서 체감하는 미디어의 세례는 그림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림의 보조수단으로서의 매체를 넘어서 그림 안에 사진이나 영상 등의 체험이 녹아있다. 외연의 확장이 아니더라도 이미 내파(內波)되어 있는 것이다. 


매체의 새로운 선택이나 확장은 자기작품 속에 이미 잠재해 있던 요소를 현실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의 자료를 위해 사진을 찍어왔던 화가가 아예 사진만으로 전시회를 꾸리거나, 조각을 위해 스케치를 해왔던 조각가가 그림만으로 전시를 하거나 하는 경우이다. 그렇게 해서 사진가가 찍지 못하는 화가의 사진, 화가가 그리지 못하는 조각가의 그림이 있을 수 있다. 그자체가 종합예술인 영화의 경우, 관련학과가 출신이 아닌 감독의 작품이 더 성공적인 예는 많다. ‘새로움의 전통’은 한 언어에의 고정적 안착을 부정적으로 본다. 익숙한 것에만 안주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브랜드화시키고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나름의 경쟁력을 쌓는 것은 경향이 있다. 그 결과는 현대미술이라기 보다는 공예에 가깝다. ‘모든 단단한 것들이 대기 속으로 녹아내리는’(마르크스) 근대의 유동적인 국면에서 공예(디자인)와 미술은 가까워진 시기가 있었으며, 이러한 관행은 표면적인 기법에만 매달리는 모든 장식적 ‘작품’ 속에 현재한다. 


각 예술이 가졌던 매체의 특수성이 강조되는 것은 예술의 자율성,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 같은, 근대에 성립된 미학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각각의 예술이 합법적인 경계 안에 안전하게 있는 자족성’(그린버그)을 강조한다. 그렇게 하면 그린버그가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에서 한 말대로, ‘한 예술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린버그적인 모더니즘은 매체를 강조하기 위해 주제를 포기해야 하는 논리적 난점을 낳았다. 주제를 명확히 표현/재현하는 매체의 투명성은 지양되고 매체의 불투명성(opacity)이 강조되었다. 매체는 현실을 투명하게 전달하지 않는다. 소통의 투명성은 주체의 통일성만큼이나 환상이다. 현대예술은 매체나 소통의 투명성에 대한 이전의 고전주의나 리얼리즘의 확신을 의심한다. 그것은 미디어가 메시지를 위한 단순한 수단이기보다는 그자체로도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정당한 평가이다. 뻔한 내용에 매몰되기보다는 아예 내용을 괄호치는 것이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언어의 강등--반영의 수단으로서의 투명함--의 마지막 보상은 순수예술(모더니즘)의 출현이라고 본다. 이것은 고유의 존재 양식이 ‘예술적인’ 특이한 언어의 고립화를 의미한다. 푸코에 의하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물이라는 확고한 재현의 참조대상의 사라짐은 근대예술의 궤적이 된다. 근대예술은 예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이익을 낳는 유용성으로 환원하는 지배적 가치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은 시장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현실 참여적 지향도 거부하게 한다. 문예사조사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논쟁, 즉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미학적 경쟁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항대립이다. 매체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은 모든 것이 분화하는 시대에 설득력 있었지만, 형식주의라는 위험이 따른다. 물감이라는 매체의 절대적 순수성은 색감과 질감에 대한 감수성을 높였지만, 그것은 재료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기능주의 디자인이나 공예의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미술/공예의 위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예는 기능적 목적이 있기에, 오랜 기간의 기술연마와 관련된 장인적 세련됨은 해당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공예는 산업과 연관되어 장인의 기술이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단계로 진입할 수도 있다. 기술은 선택된 지배적 어법을 보다 강력하게 하기에, 새로운 기준의 선점을 위한 무한한 경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어떤 기법, 기술, 소재, 개념 등을 복제하는 재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발했기에 이러한 자동화된 실행과 거리가 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면 즉각 도전받아야 마땅하다. 소격 효과, 낯설게 하기 등은 현대 미학을 특징짓는 주요 개념들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랫동안, 또는 광범위하게 통용된 어법을 탈구시킨다. 미술의 역사가 ‘양식의 내전(內戰)’으로 간주 된 이래, 그 주기가 너무 빨라져서 무엇이 정(正)인지 반(反)인지 합(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혼란스럽고 난해하다는 인상이 생겨났다. 


보다 빠른 국면의 전환을 위해 도입된 ‘개념’ 또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한 시대를 장기간 주도하는 대표적인 양식은 없다. 지배적 양식에 대한 반동도 큰 힘을 받지 못한다. 현대미술은 특히 기법적 측면에서 대중들의 불신을 야기했다. 큰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 개인의 차원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과도기를 강조하는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내면화시킨 작가는 진도를 나가듯이 또는 무분별한 소비처럼 새로운 매체들을 섭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에서 형식으로의 이동은 내용에서 내용으로의 이동과 큰 차이가 없다. 후자는 소재주의로 비난받지 않는가. 내용에서 형식, 형식에서 내용으로의 이동이 진정한 변화를 낳는다. 현실과 진실에 모두 뿌리 내리고 있는 예술은 보이는 것과 아닌 것 모두에 촉을 세운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 푼크툼(punctum)이라는 낯선 용어를 써가며 개념화한, 기존의 코드로 포착할 수 없는 미묘한 부분이 있다. 


어느 날 불현듯 눈에 들어온 현진실을 기존의 방식을 통해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작가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선다. 작가가 새로이 본 것을 더이상 포착할 수 없는 형식은 포기해야 한다. 말과 사물의 공간 속에서 수많은 실험과 유희가 일어난다. 새로이 선택된 매체는 상징적 질서에 의해 이미 선점되어 있는 세계의 틈새에서 말과 사물 간의 자동적 연결을 끊어내고, ‘다른 것(defferent)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오게’(프랑시스 퐁주) 할 것이다. 자동화된 연속적 실행에 대한 단절은 예술뿐 아니라 ‘과학혁명의 구조’(토머스 쿤)에서도 주장된다.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은 점진적 진보가 아닌 단절적 파열의 지점을 강조한다.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르면,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도전받고 폐기되는 것은 그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기존의 논리는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메시지는 선택된 매체의 유효기간이 있음을 함축한다. 


새로운 법이 창설되고 새로운 종이 창발되듯이 예술 또한 변모한다. 변화의 국면에서 비약이나 도약이라고 할만한 단절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단절을 통한 새로운 연결에 매체의 갱신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 형식은 단순히 형식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형식 자체에 포함된 내용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기존에 작가가 다루어 왔던 내용의 방점은 조금, 또는 획기적으로 이동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언어, 수, 화폐]에서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의 대화에는 도약과 비약이 따른다고 본다. 특히 예술은 가장 많은 도약을 요구한다. 타자와의 대화는 동일성에 차이를 깃들게 한다. 매체의 변환 내지 확장은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일한 지점으로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새로이 선택된 매체 또한 기존의 매체처럼 익숙해질 수 있는데, 누군가는 매너리즘, 또는 관성이라고 비판할 만한 자동화된 실행을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러한 순간을 자주 경험하는 작가는 영원히 배워야 하는 운명에 직면한다. 


출전; 월간미술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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