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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 늦봄 전 / 은유가 아닌 현실의 막장에서 (1부)

이선영

은유가 아닌 현실의 막장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1. 시대적 배경; 1980년 4월 사북에서는 

   

1980년대는 1980년 1월 1일이 아니라 5월 18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해진다. 무고한 시민을 향해 헬기 기총 사격까지 가해진 광주에서의 유혈 참극이 80년대 내내 군부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을 낳으면서 그 시대 전체를 선명하게 특징 지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가 유예된 채 통과해온 그 이후의 시대와 비교한다면, 서로 다른 힘과 힘이 마주친 80년대만큼 역동적인 시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탄압과 저항의 역사를 생각할 때 역동기라는 표현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양극화가 있는 한 발전이라는 관념 또한 얼마나 잔인한가. ‘사북, 늦봄’ 전의 소재가 된 사북민주항쟁은 5.18 광주 약 한 달 전인 4월 21일부터 4일간 강원도 산골 사북에서 일어났다. ‘산골’하면 낭만주의적 분위기까지 풍기지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그곳은 극한의 노동조건이 지배하는 삶의 전쟁터였다. 80년 늦봄, 당시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의 광부들과 그 가족 6000여 명은 최저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노동자를 기만하는 어용노조와 경찰의 부당한 개입에 맞서 일어났다. 최소 4일간 사북에서는 모든 공권력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무정부 상태는 아니었다. 



 1980년 사북항쟁 당시 현장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삭막한 회사 건물과 허술한 안전 캠페인 구조물이 서 있다. (사진; 정선군청 제공)


당시의 사건 전개를 살펴보면, 공권력이 더 우왕좌왕했으며, 광부들은 오히려 더 큰 파국을 피하기 위해 매우 신중했음을 알 수 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사회 도처의 ‘무질서’를 잠재우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시기, 무장한 경찰력에 대항한 광부들의 손에는 돌멩이와 몽둥이 밖에 없었지만, 척박한 삶의 조건에서 직접 발원한 민초의 저항은 어느 분쟁 지역보다 격렬했다. 80년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사북과 광주의 사건을 비교해 볼 때, 양자는 불과 한 달 차이였지만, 4.21 사북은 거의 묻혀 있다시피 한다. 공식 기록으로는 사북의 성난 광부들과 투석전을 벌이다가 경찰 1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국가의 중재에 의해 노측과 사측의 쟁의가 타결된 모양새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사북, 늦봄’ 전은 사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전시로, 실제로는 종결되지 않은 사건의 의미를 예술적 차원에서 제기한다. 예술을 통해 호출된 역사를 삶에 접목하려는 것이다. 물론 예술은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질문의 유효함은 그 자체로 답을 위한 적절한 맥락을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의 70-80년대는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군부가 이끌었다기 보다는, 구조적으로 성장세 였던 자본주의가 전개된 시대였다. 근대의 ‘산업역군’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력 수탈 및 주민의 사생활 감시 등, 회사 측의 전횡에 오랫동안 희생 당해온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한 사북항쟁은 70년대에 이어 80년대도 지속된 자본과 노동 간의 모순이 집약된 사건이다. 사북항쟁은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야기된 필연적 사건이기도 했지만, 시작은 돌발적이었으며, 어떠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도 개입되지 않았고(즉 의식화되지 않았고), 조직화되지 않은 탓에 종결 또한 허무했다. 노조의 요구였던 노동자 대표 직선제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억압과 착취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강했지만, 지속성이나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채 무마된 미완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사건의 주요 가담자들은 비열하게 뒤통수를 친 당국에 의해 개별적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이후에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려운 삶을 이어왔다. 다큐멘타리 [먼지, 사북을 묻다](2002년, 83분)에서의 인터뷰에 의하면 ‘마을을 정전시키고 체포 작전이 펼쳐졌다’, ‘밤마다 붙잡아가서 불안해서 잠을 못 잤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나온다. 



 (사진 정선군청 제공)


진정한 공포는 ‘광부들의 난동’(당시 신문의 어조) 이후에 찾아왔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사북지서 전면에는 멸공통일이라는 표어가 크게 붙어있다. 그때의 공장이나 경찰서 등이 담긴 흑백사진들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기시감이 있다. 병원, 학교, 군대 등이 비슷한 구조의 관리 시스템 아래 작동된 결과일 것이다. 사북항쟁의 경우 회사나 경찰과 유착된 어용노조, 광부 옷차림으로 프락치 노릇을 하다 교통사고 내고 도주한 경찰이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사북항쟁특위는 2019년 회견문에서 ‘사북항쟁은 그 시작부터 경찰의 부당한 개입에 의해 촉발됐다’고 밝혔다. 반공, 멸공 등을 내세운 당국으로서는 ‘평화로운’ 산촌 마을에서 소요를 일으킨 노동자들이 ‘빨갱이’로 밝혀졌으면 완벽한 시나리오였을 텐데, 마른 행주짜듯 쥐어짜도 아닌 사실이 사실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태가 일단락된 후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단은 노사정 합의를 어기고, 광부와 그 가족들을 하나둘 잡아가서 고문하고 빨갱이임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합의를 어기고, 무려 140명이 개별적으로 끌려가 성고문을 포함한 각종 고문기술에 의해 곤욕을 치뤘다. 


‘보안’ 사항이라서 가족에게도 말 못할 고문을 당한 광부의 아내들은 ‘차라리 총 한방 맞고 죽기를 바랬다’는 회고가 나올 만큼, 민간인을 상대로 한 공적 기관의 강도 높은 불법 행위는 개인 뿐 아니라 마을 공동체도 파괴했다. 어용노조에 맞서 노동자의 대표로 노조 직선제를 외친 이원갑씨는 ‘군에서는 광부이 이 같은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면서 불순분자가 개입돼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사돈의 팔촌까지 신원조사를 하고 동네에 우리가 빨갱이라고 소문을 다 냈어요.’라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복역 후에도 빨갱이라는 낙인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불법적 체포, 감금, 고문 등 극히 80년대적인 국가의 폭력이 여기서도 반복되었다. 광산업은 90년대부터 사양길을 걷고 2000년대 초반에는 폐광되는 곳이 속출했지만,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에너지원의 근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사북 탄광은 노동자가 3000명이 넘는 국내 최대의 민영 광산으로, ‘정부는 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해 석탄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석탄산업 육성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취임 초에 사북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0년 4월에 일어난 사북항쟁은 노동자 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참여한 것이 특징이다. 



 4월인데도 따스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북의 풍경. 지서 앞의 집회에 모인 사람들인데 동네 강아지도 함께 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금도 마을 초입에는 당시 정선군청이 세운 ‘대통령 오신 우리 마을’이라는 기념비석이 땟국물 줄줄 흐른 모습으로 볼썽 사납게 박혀있다. 사실 사북항쟁은 5.18 광주보다 인명 피해가 더 클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들이 적지 않았지만, 4일간 사북에서 공권력을 무력화시켰던 노동자들의 자치 활동이 빛을 발했던 독특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건이 다 끝나고 나서야 신군부의 검열을 받아들인 주요 일간지에서 묘사한 대로 무정부 상태에서 미쳐 날뛴 폭도들이 아니었다. ‘막장’이 은유가 아닌 현실인 광부들의 실존은 그 자체가 위태로웠다. 한 달 후 광주에서처럼 공수부대 투입까지 준비했던 군사 정권과 탄약고와 무기고를 점거한 수 천 명의 광부들이 맞붙을 수도 있었다. 광주의 시민과도 다르게, 사북의 노동자는 막장에서 노동하고, 우리 같은 거처에서 살면서 수없이 겪어온 죽음의 일상화를 통해 공멸의 순간을 막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동인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혁명은 배반되었고, 이후 국가 기관의 실망스러운 유화책으로 40년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 버렸다. 


당시에 항쟁했던 이들은 이제 팔순을 넘어 고문 후유증, 무엇보다도 그 사건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이해의 부족에 고통 받고 있다. 다큐멘타리 [먼지, 사북을 묻다] 중에는 성고문 후유증으로 병치레를 하고 1984년 이후 무당이 된 주민 김부년 씨가 등장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상처를 승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사북, 늦봄’ 전은 사북사태에서 사북민주항쟁, 조금 더 ‘의식화’된 표현으로는 ‘사북광산노동자 대투쟁’으로도 정의될 수 있는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흐릿해질 역사적 기억을 예술로 끌어낸다. 대부분 흑백 자료사진으로 남아있는 그때의 사북은 4월 하순인데도 따스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작업을 멈추고 모여 있는 광부들 사이사이에 동네 강아지나 어린 아이를 업은 엄마들 모습이 보이는 것은 지역공동체가 함께 따스하게 맞이했어야 할 그날의 봄을 예시한다. 사북 사건이 언론을 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건이 마무리된 4월 24일에야 계엄사의 보도지침을 통과한 보도가 나갔다. 



 사건의 빌미를 준 어용노조 지부장의 부인이 성난 군중에 붙잡혀서 기둥에 묶여 있는 모습. 



 4일간의 사북 항쟁이 끝나자 신군부 세력의 보도지침에 의해 일제히 일간지에 실린 ‘사북사태’의 면모. 신문은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광부들과 묶인 노조지부장 부인을 부각시켰다. (자료 제공; 당시 동원탄좌 선산부로 근무하던 박노연 씨 제공)


그러나 검열의 결과물은 집단, 유혈, 난동, 무법 등의 선정적인 단어가 헤드라인으로 뽑혀 나왔고, 주요 신문 사설의 논조 또한 비슷했다; ‘이 무슨 무법 세상인가-난동사건을 우려하고 개탄한다’(서울신문) ‘일부 광부들은 술에 취해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수고 몽둥이와 곡괭이를 휘두르며 난동을 벌였지만...’(경향신문) ‘평화로웠던 광산촌이 광부들의 난동으로 하루아침에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주민들이 문을 걸어 잠근 가운데 술 냄새를 풍기며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광부들만 오가는 죽음의 거리였다’(조선일보). 2020년 ‘사북민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가 발족되어 그간에 다소간 형식적으로 치러온 사북항쟁 기념을 위한 여러 차원의 실천에 들어갔다. 이번 전시도 그러한 실천에 포함된다. 기획자이자 작가인 최승선은 고향 정선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 전시의 작품 면면은 예술가 또한 노동자나 지식인, 정치가들 못지않게, 일 당 백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춘천과 서울에서 연이어 열리는 ‘사북, 늦봄’ 전은 사북항쟁동지회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2. 사북, 늦봄의 작가들

 

이수형; 현재 남아있는 잔해들

이수형의 작품에는 사북항쟁 이후 현재 남아있는 흔적들이 나타난다. 작품 [익숙한 풍경]은 공중에서 살포되는 낙하산들 아래 의자가 매달려 있다. 의자는 공적인 자리에 대한 상징이다. 사북항쟁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보상(?)으로 만들어진 공기업인 강원랜드에 지역민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낙하산 인사’들이 개입됨으로서 항쟁과 항쟁 이후에도 거듭 소외되고 있는 지역민의 상황을 은유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이미지를 차용한 폭력적인 공습은 관객들로서는 계엄당국에 의해 계획된 진압 작전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사북 근처에서 대기하던 공수부대는 한 달 후 광주로 가서 결국 피를 뿌렸다. 공습하듯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들은 토대가 아니라 상층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람/자리들을 말한다. 즉 사북항쟁을 야기 했던 어용 노조위원장. 그리고 항쟁 후 얻어낸 공기업의 자리 또한 마찬가지다. 2019년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가 개최한 '기억을 말한다-사북항쟁' 토크콘서트는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감춰진 진실을 말한다.


‘4월 24일에 합의가 있을 당시에 (혹시 있을 합의 결렬을 위해) 총 500여 명의 공수부대와 기총소사 헬기가 원주에서 출동 준비가 돼 있었다. 또 광부들이 끝까지 지킨 화약고에 사북 전체를 날려버릴 정도의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다’(임채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고 설명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6000여 톤의 다이너마이트는 터지지 않았다. 미완의 혁명에서 지금 남아있는 것은 녹슨 잔해들 뿐이다. 작품 [were]에는 한 때 기능을 가졌던 기계가 유적처럼 남아있다. 작품 [culture culture]에서 중공업 기계는 기계취급을 당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서는 거의 배경이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채워져야 할 맥락으로 비워놓은 것이다. 작품 [zerosum]은 광산과 관련된 녹슨 기구들과 생명이 대비된다. 작품 [truth]에서 화면의 대부분을 덮은 잿빛은 밝혀져야 할 진실을 말하며, 작품 [justice]에서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은 아직 끝나지 않은 항쟁에 가장 필요한 존재이다.

  

전태원; 트라우마의 장소에 대한 기억

전태원의 작품 [복원(復元)-사북 I]은 광부들의 발자국이 마치 화석같다. 그것은 노동의 흔적일까 아니면 투쟁의 흔적일까. 80년 4월 사북 광부들에게 생산과 투쟁은 다르지 않았다. 노동과 투쟁은 민중적 실천의 두 가지 양상이다. 80년대 사북의 광부였던 전효덕은 당시 광부 월급이 쌀 3가마니 가격이었다고 증언한다. 현재의 ‘시민’은 당시의 ‘광부’를 회고하지만, 그 때를 회고하는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 세력과 달리 여전히 초라하다. 같은 사건을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르게 기억한다. 아니, 가해자는 아예 그 ‘대수롭지 않은’ 사건은 안중에도 없거나 이제 와서 그걸 말해서 뭐하냐는 식이다. 피해자는 그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가해자는 공산당의 인민재판으로 기억한다. 잡혀가 고문 받고 여전히 그에 대한 기억이 온몸에 새겨진 광부들이 생존해 있는데, 당시의 경찰 간부는 ‘고문에 대해선 보고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보다 높은 생산력을 위해 발명된 컨베이어벨트는 조금의 노동력도 낭비되지 않기 위한 시스템이었지만, 누군가의 합리적 질서는 누군가의 고통이며, 그 질서가 다른 곳으로부터 강요될 때 더욱 그러했다. 


어지러운 발자국들은 자본이나 기계의 질서가 아닌 인간, 특히 생산의 최전선에 선자들의 질서를 관철하기 위한 집단적 소요를 나타낸다. 그러나 판은 번번이 깨졌으며, 각각의 실천들에는 불연속성이 선명했다. 유적지와도 같은 이곳은 트라우마의 장소이기도 하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트라우마는 오랜 기간 동안 터질 수 있는 기억의 폭발물’이라는 하이너 뮐러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전태원의 작품은 폭력이 시작된 장소와 기억의 단서를 제시한다. 작품 [흐르는 빛 19-012]은 인공광원이 비치는 검은 물을 보여준다. 그것은 흐르는 물을 포함해 모든 것이 검었던 광산촌의 풍경일수도 있다. 하지만 몇 십 년 전 역사를 호출하는 이 전시의 주제와 관련해서 볼 때, 마치 수몰지처럼 수면 아래에 묻힌 풍경을 덮는, 고요한 만큼이나 잔인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 검은 물을 비춰주는 몇 줄기 인공 광원들은 그날의 진실을 밝혀줄 수 있을까.   

  

박화연; 지상으로 뚫고 나온 저항의 목소리

박화연은 광주에서 자랐으며 강원도로 이사한 후 이 지역에서도 5.18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진상 규명과 치유, 보상에 대한 이슈는 두 지역에서 공통적이다. 영상작품 [Voice]에서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휘날리는 하얀 깃발은 또 다른 작품 제목처럼 [저항의 시작]을 상징한다. 깃발에는 사북항쟁 관련 싯귀들에서 발췌한 낱말이나 문장들이 새겨져 있다.  설치와 영상작품에서 깃발들은 깃발이 가져야할 눈에 띄는 요소가 없고 땅 위에 그냥 꽂혀있다. 묻혀있는 역사적 진실과 관련된 전시 주제와 관련시켜 보면, 깃발은 땅 속에서 작업하는 광부들의 외침들이 땅위로 솟아오른 느낌이다. 4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진상규명이 명확치 않았다는 점에서 외침은 현재적이다. 각목에 글자가 인쇄된 하얀 기에 ‘동지들’, ‘쓸쓸히 죽어가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등등은 당시 상황을 전한다. 단어 두개를 겹쳐져 읽을 수 없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우발적으로 벌어졌으며 미완으로 끝난 봉기와 관련된다. 


구술 증언 아카이빙 작업  [메아리가 되어]는 사북항쟁의 주역이자 피해자이며 ‘사북사태’를 ‘사북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지난 몇 십 년 간 애써 온 인물들이 등장한다. 광부들의 옷이 박물관 오브제처럼 배열된 공간에서 진행된, 팔순 노인이 된 당시 주인공 이원갑 씨의 육성 인터뷰는 어떤 기록보다도 생생하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취조실에서 밤낮 없이 비명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우리는 살아서 지옥을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이원갑 씨는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사북항쟁동지회’의 회장으로 있는 그는 고초를 겪은 동료들과 그 가족의 복권을 추진하고 있다. 2008년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북항쟁에 대해 `국가는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해 사과하라'고 권고했지만, 아직 뚜렷한 결과가 없다. 이원갑 씨는 2019 서강대에서 열린 사북항쟁 토크콘서트에서 ‘학생, 지식인들과 달리 광부들은 민주화운동의 기억에서도 차별받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작가의 기록 작업은 기억도 투쟁임을 알려준다. 

  

황재형; 광부이자 예술가

황재형의 작품 [도시락]은 제작연도가 이 전시의 어느 작품보다 사북항쟁이 일어났던 시기와 가깝다. 사북항쟁 1년 후 만들어진 이 작품은 전시된 상태의 크기가 220×160×43㎝나 되는 대형 도시락이다. 산업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는 주체였지만, 정작 이 주체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할 도시락은 단무지와 깍두기, 석탄가루가 가득 덮인 찬밥이 전부였다. ‘광부화가’의 작품이니만큼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여진다. 석탄 모양으로 된 밥알은 두 가지 에너지원을 중첩시킨다. 그의 작품은 밥과 석탄의 실재를 전면화한다. 자본이라는 코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실재는 억압받고 은폐되곤 한다. 작품 [麥秋(맥추)]는 머리카락을 붙여 만든 초상화다. 어둠속에서 화면 밖을 바라보는 남자는 석탄 모양의 밥알처럼, 몸(에서 떨어져 나온)의 일부로 ‘그려졌다’ 이 꼴라주 작업은 실제와 (그림이라는) 환영을 중첩시킨다. 10년 넘게 제작해온 작품 [톱을 간다]에도 머리카락이 포함되어 있다. 뚫지 않으면 나갈 수 없었던 광부의 생존 조건은 창작의 조건과 같다. 


그것은 황재형에게 광부가 단지 소재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탄광에서의 체험을 소설로 표현한 조지 오웰의 예도 있지만, 몸과 실재와 맞부딪히는 막장은 예술이 한갓된 환영이기를 넘어 실재이기를 바라는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편 도구를 가는 번뜩이는 이 작품은 노동자들의 도구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계를 다루는 손은 기계에 갈려질 수도 있는 사투하는 삶의 표현이다. 황재형의 90년대 작품 [吾人]은 ‘30-40도를 오르내리는 고온과 습기, 지압이라는 지옥에 가까운 환경’ 속에서 노동하는 광부가 땀을 훔쳐내며 관객을 바라본다. 검게 변한 얼굴의 반짝이는 눈은 그가 짐승이나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임을 알려준다. 작품 [바람, 그 너머]는 눈보라 또는 눈 쌓인 골목에 반사된 환한 빛을 표현한다. 그 어떤 것이든 눈을 찌르는 듯한 밝음은 어두운 탄광촌을 환하게 비춰준다. 빛은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까. 노동과 자본 간의 근본적 모순은 해결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사북의 항쟁은 작품 속 기상현상 만큼이나 예측될 수 없었다. 

(2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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