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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 채움을 통한 비움

이선영

채움을 통한 비움

  

이선영(미술평론가)


  

조창환의 작품들은 양손으로 건져 올리면 길쭉한 섬유질이 한아름 잡힐 것 같은 높은 밀도가 특징이다. 한 올로 만들어진 붓으로 물감을 찍어 만든 화면은 살아있는 듯한 동감이 가득하다. 추상적 색선의 움직임은 유연하면서도 치열하다. 그의 작품은 배경과 형상의 구별을 없앰으로써 큰 면을 잘라낸 듯한 잠재적 확장성을 가진다. 이러한 확장성은 착각에 빠트리는 묘사의 세계를 벗어남으로써 평면화 된 현대미술과 함께한다. 현대 회화는 창문의 비유를 벗어던진 이래, 무엇인가를 담기 보다는 하나의 물체, 또 다른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자율성을 향한 현대 미술의 해법은 현대사회를 가득 채우는 인공물, 특히 구조적 대상들로 해소되었다. 때문에 하이데거를 비롯한 철학자와 미학자들은 예술과 사물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화폭 내의 이미지가 캔버스 틀을 규정하는 변형캔버스 등의 방식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다. 




BREATH acrylic on canvas 31×37×2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10×110. 2020



이 경향은 초기 추상미술을 지배했던 종교나 신비주의(신지학 등)같은 관념적 경향을 배격했던 일부 작가(가령, 프랭크 스텔라)들의 소망이 실현된 것이기도 했지만, 그 결과는 회화가 무엇인가를 담아낼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형식 실험으로 축소시킨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작가에게는 그림이 세상의 재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의미를 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이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인 조창환에게도 그러했다. 이 자아는 숨으로 이루어졌는데, 무수히 찍혀진 필획 하나하나는 허공에 사라질 숨들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의 작품은 무엇인가를 담았지만, 동시에 그려진 표면이라는 현대회화의 패러다임도 존재한다. 그는 화면의 가장자리나 작품의 배열을 통해 화면 밖으로 연장되는 듯한 열린 공간을 연출한다. 작가는 화면의 밀도와 열려있는 작품을 동시에 원하는 것이다. 화이트 큐브는 작품을 담는 단순한 네거티브 공간이지만, 밀도감 있는 표면들 사이에서 또 다른 형태와 의미로 나타날 수 있다. 직사각형, 때로는 정사각형의 캔버스 프레임은 명확한 한정을 통해 그 바깥을 가리킨다. 


자연과의 연관이 좀 더 강했던 이전 작품들에는 배경과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형상이 있었지만, 지금 작품은 확장된 자아에 모든 것을 담으려 한다. 배경이 있었던 작품에는 빈 바탕 위에 얹혀 진 형상의 경계면이 울퉁불퉁한 층들로 나타난다. 자연을 닮은 유기적 형태가 바탕으로 퍼지는 듯한 순간들은 색선이 겹쳐지면서 형성되는 화면의 구조를 암시한다. 어떤 계에 던져진 덩어리는 충분한 시간이 지난다면, 설탕 덩어리 입자가 물에 골고루 퍼지는 듯한 평형 상태를 이룰 것이다. 만약 그 덩어리가 무기물이 아니라 유기물이라면 주변과의 완벽한 평형은 죽음이다. 생물과 무생물이 구별되지 않는 이 상태는 유기체가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환경과 하나가 된 것을 말한다. 조창환의 작품에서 화면 가득한 선들은 완전한 반복은 없지만, 작업하는 방식에는 반복적 요소가 있다. 배경/형태의 관계가 사라진 반복적 붓질은 죽음을 떠올리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활기찬 또는 명상적 평면은 일상의 사물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그것은 반복적 행위가 죽음이 아닌 무엇이 될 수 있는 단계를 말한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반복, 즉 동일한 어떤 것을 다시 경험하려는 것은 쾌락의 한 요소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반복이 쾌락보다 더 원시적이고 본능적이다. 프로이트의 가설에서 반복은 죽음과 쾌락이라는 얼핏 상반되어 보이는 관념의 매개가 된다. 그러나 살아있음이란 환경(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짐을 말한다. 한 순간의 고정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두드러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조창환의 작품들은 10겹 안팎의 많은 층들이 쌓여 부침(浮沈)의 과정을 드러낸다.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이 교차되는 방식을 통해 이전보다 더 많은 겹이 느껴지게 했다. 명확한 대상이 없는 추상회화에서 어느 지(시)점이 완성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작가는 분명한 기준을 가진다. 무조건 많이 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층이 살아있어야 한다. 화면은 밀도감이 있으면서도 숨 쉴 수 있어야 한다. 화면에 쌓이는 것은 둔탁한 지방층이 아니라, 한 올 한 올 활성화되어 있는 근육 세포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작업은 머릿속 상상이나 손끝의 행위가 아니라 온 몸의 세포가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산책을 즐겨하는 그에게 그리기는 숨쉬기나 걷기와 거의 같은 과정이다. 매일의 걷기를 통해 만난 바람, 색깔, 온도 등이 작품에 반영된다. 조창환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자연적 감각 또한 매우 중요하다. 미술사가 노버트 린튼은 추상미술과 자연의 대조적 관계를 강조한다. 노버트 린튼에 의하면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 초기 추상 화가들은 모두 신지학(神智學)적 사상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미술을 형태와 색채를 통한 감각의 소통으로 생각했는데, 이러한 신비 사상의 이면에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불안, 녹색세계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창환의 추상적 작품들은 ‘우연히 나타나는 자연의 외관을 초월해야 해야 한다’(노버트 린튼)는 점을 초기 추상 화가들과 공유한다. 그는 자연의 외관 대신에 자연의 과정을 표현할 따름이다.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자연에 존재하는 두툼한 실재감은 생산되고 곧 쓰레기가 되는 인공물과 달리 늘 새로운 감흥을 준다. 오래된 사물은 자연과 같은 반열에 놓인다. 작가는 그러한 실재감을 자연적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무수한 붓질과 그 사이의 간격들로 표현한다. ‘똑’과 ‘딱’하는 두 소리 사이에 시간의 경과가 있듯, 어떤 생명체가 살아있음의 증거, 즉 들숨/날숨 사이에도 시간이 있다. 살아있음의 증거인 숨은 실시간으로 체현된다. 조창환에게 작품은 무엇보다도 몸의 흔적이다. 몸은 숨부터 춤까지 다양한 강도와 양상으로 나타난다. 숨에 충실한 작품은 숨쉬기와도 같은 꾸준한 실행, 즉 참선과도 같은 수행이다. 작가는 숨과 자아를 일치시키는 산스크리트 어 ‘아트만(ātman)’의 예를 든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을 궁극적인 실재로 본다. 오래된 경전 [베단타]에는 ‘모든 존재 속에 숨어있는 것은 아트만, 즉 정신, 자아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오르피즘 등, 유심론적 경향이 강한 추상미술 일파가 가진 미적 관념과 조응한다. 


철학의 강력한 전통이자 이후에 과학이 계승함으로서 더 강력해진,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의하면, 모든 존재와 나와의 관계는 조화로울 수 없다. 한편 나를 잊음으로써 나를 찾는다는 역설적 해결책은 동서고금의 종교, 특히 신비주의적 경향에 널리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신비적/종교적 상태가 망망대해를 마주한 주체의 의식으로 보았다. 작가가 작업을 통해 체험하는 것은 주/객체가 합일되는 몰입이다. 주/객체가 하나 되는 체험은 다시금 죽음과 열락을 결합시킨다. 생활인에게는 일상으로부터의 거리나 단절이 바로 죽음이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그러한 ‘죽음’이 없이 또 다른 ‘삶’, 즉 작품을 만들기 힘들다. 예술에서 ‘창조’라는 관념은 쉽게 떼어낼 수 없다. 종교는 초월적인 면이 강하지만, 조창환의 작업은 매우 구체적이다. 미술의 언어 자체가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관념화되어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은 별로 없다. 관념화는 철학이나 종교로 해소되기 때문이다.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종교에서는 성상 파괴적 경향도 존재하지만, 초월적인 것일수록 생생한 표현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작가에게는 종교의 예술화가 아니라, 예술로부터 종교적인 것으로 확장(또는 고양)되는 과정이 대신한다. 숨이든 흥이든 몸의 산물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과정을 작품을 통해 의식화한다. 그림이 아니었으면 유의미한 형태로 남아있지 않을 무엇인가를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 사이에 있는 생명은 무엇보다도 시간적이다. 특정 시공간에 대상을 고정시키는 재현주의는 시체의 표현에 가장 적합할 따름이다. 시시콜콜한 사실주의는 임상의학적 시선을 공유한다. 그것은 곧 사진 및 다른 매체에 의해 대체된다. 정물의 정밀한 재현에 ‘죽음을 기억하라’는 알레고리가 담겨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조창환의 작품 속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의 시간이다. 불가역적인 시간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간이다. 


중층적인 화면은 저 공간의 시간과 이 공간의 시간을 연결한다. 지속적 갱신을 통한 현상의 유지는 우리 몸에서 매순간 일어나며 평생 지속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과정의 연속을 말한다. 탄생의 순간을 알리는 최초의 숨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 사이에 수많은 들숨과 날숨, 흡입과 배출이 이루어진다. 환경과 최소한의 소비적 관계를 가지는 죽음에 가까운 단계는 종교학과 정신분석학에서 니르바나와 비교된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정신생활 전반의 지배적인 경향은 자극 때문에 생긴 내적 긴장을 줄이거나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혹은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열반원칙이라고 말한다. 쾌락원칙보다 더 강렬한 열반원칙은 쾌락에 죽음을 더한 것이다. 매번 한 작품에 열과 성을 쏟아 넣는 작가는 작품이 완성된 후 상징적으로 죽는다. 그리고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 상징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작업은 생물학적인 탄생과 죽음을 넘어서 영겁의 생과 죽음을 반복한다.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BREATH acrylic on canvas 162×130. 2020



직사각형 화면을 배경 없이 가득 채우는 검정색 작품들에서 숨구멍은 밤하늘의 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검은 평면에 하얀 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검은 선들이 계속 쌓여 허공을 채운 나머지가 하얀 점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비워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조창환은 채움을 통해 비운다. 단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차이의 연속이 중요하다. 다른 톤의 작품에서 ‘숨구멍’은 검은 톤의 작품에 비해 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작품에서 숨구멍은 잠재해 있다. 숨구멍은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정들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점처럼 보이지만, 점이 가지는 엄격한 기하학적 공리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점과 점을 잇는 것이 선이 아니라, 무수한 선들의 만남이 점이 된다. 점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 행위에 의한 차이로 생성/소멸된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조창환의 작품은 그림 단면이 높든 아니든 간에 입체감이 있다. 추상, 즉 평면이지만 손을 넣으면 쑥 들어갈 것 같은 저 멀리 보이는 층들이 보인다. 


재현적 요소가 없는 그의 작품에는 손으로 만져지는 듯한 촉각적 시각성이 있고 그것은 추상적 원근감을 만든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도 그렇게 추상적 원근감을 만들었지만, 조창환의 경우 물감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한 올로 이루어진 붓으로 찍은 흔적들이 중첩된 것이다. 그의 작업은 선으로 나타나는 찍기의 연속이다. 화가의 손에 완전히 제어되는 그리기와 우연적 요소가 많이 개입되는 뿌리기 사이에서, 양자가 결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블랙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여러 색의 다층적 배열에 의해 화면 위에서 직접 혼합되기에, 볼 때 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그것은 엄청난 저장 능력과 속도를 가진 디지털 기반의 이미지들의 범람에 대해, 하나의 면을 가지는 정지된 매체인 회화의 특징을 살리는 자의식적 선택이기도 하다. 회화는 주어진 코드와 달리, 작가가 정한 일련의 구성요소에 무수한 시간성이 덧입혀져 새로운 실재로 이루어진다. 작가의 숨은 자신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요소임과 동시에 자신의 전부인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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