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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범 / 창조와 파괴가 일어나는 일상의 무대

이선영

창조와 파괴가 일어나는 일상의 무대

  

이선영(미술평론가)


  

90년대에 인기 있었던 홍콩 멜로 영화 [중경삼림]에는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 열쇄를 우연히 입수한 여주인공이 실연의 상처를 앓고 있는 남자의 집에 몰래 들락거리면서, 이전 여자의 흔적을 하나씩 자기 것으로 교체하는 과정이 나온다. 집주인도 모르게 집 안이 조금씩 변한다는 것은 이 귀여운 침입자의 꿈—배경음악으로 사용된 크랜베리의 [dreams]와 어울리는--이 투사된 새로운 인간관계가 펼쳐질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집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의 표시나 경제적 소유 관념을 넘어서, 내밀한 영역까지 이른다. 집은 공적 영역에서 유통되는 상품이나 기능적 대상이기 이전에, 사적 영역을 대표하는 것이고, 하이데거나 바슐라르같은 철학자들에게는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고양되기도 했다. 집은 인간이고 자아이며, 작가에게는 작품이다. 한용범의 최근 작품은 심리적인 것부터 육체적인 것, 사회적인 것부터 경제적인 것에 이르는 다차원적 위상을 가지는 집에 대해 사유하고 꿈꾼다. 




전시전경


얼마 전까지 공장이었던 장소에 설치된 한용범의 작품들은 집속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품 [Gradation]에는 작은 집들을 가지처럼 내고 있으며 또 다른 집들이 놓여 있는 공전 궤도의 중심이 되는 만큼, 집속의 집이라는 비유는 계속 확장될 수 있다. 그는 ‘집은 생활의 배경이자 정신적 바탕으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하면서, ‘집이 우리들에게 주는 상대적인 성취감과 좌절감, 행복과 우울 등,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고 싶다’고 말한다. 예고 재학시절부터 도예작업을 좋아했던 그는 고3때 도자비엔날레에 구경 가서 그릇이 아닌 본격적인 세라믹 아트를 접하고, 인간의 삶을 담는 총체적인 용기(用器)로서의 도자예술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인간관계를 포함한 일상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작업을 해오다 근 몇 년 사이에 집으로 관심이 옮아왔다. 작년의 개인전 [home of the day]는 일상이라는 광범위한 범주를 집으로 집약했다. 


한용범에게 집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삶을 담아내는데 최적의 주제이며, 흙은 최적의 소재였다. 작품 [Gradation]은 2미터 가까이 되는 큰 집이 주축을 이룬다. 나무재질이지만 세라믹 같이 처리돼 있다. 정사면체의 몸통 네 면에서 구름 모양의 선반이 나오고 그 위에 작은 집들이 한 채씩 얹혀있다. 집 몸통의 수직축에 계층 사회를 반영했다. 상층은 밀집되어 있고 아파트 형 건물을 비롯해서, 번듯한 집이 많다. 하층은 주로 작고 초라한 집들이 드문드문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을 축으로 둥근 궤도가 둘러싸고 그 위에도 집들이 얹혀있다. 금속으로 만든 레일 위의 집은 색이 있다. 푸른 지붕, 붉은 지붕 등, 아기자기한 동화 속 집 같다. 그것은 마치 회전식 중국 식탁처럼 고를 수 있는 메뉴처럼 배열되어 있어 (고가의)상품이기도 한 집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돌고 도는 구조는 일정 주기로 집을 옮겨야 하는 무주택자의 소비패턴이 내재한다. 




Gradation, 석기질 점토, 나무, 60x60x190cm,2020



Gradation, 석기질 점토, 나무, 60x60x190cm,2020



상품처럼 평평하게 배열된 예쁜 집들이 돈의 리얼리즘을 감추는 가상적 현실이라면, 중심축은 이와 대조적이다. 즉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계층적 현실을 대변한다. 현실에 가까운 중심축은 궤도 위의 상품/집과 달리, 흙이라는 원초적 재질과 색감을 살렸다. 작품 [잠기다] 또한 계층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인간 자체가 땅(地)을 딛고 천상(天)을 사유할 수 있는 삼계(三界)에 걸친 존재다. 또는 이도저도 아닌 채 그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다. 화이트와 골드로 처리된 얼굴 윗부분과 어둡게 처리된 지하의 세계 사이에 얼굴이 있다. 눈감고 물에 잠겨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얼굴은 빛나는 동네는 꿈꾸지만 자신의 토대는 그렇지 않다. 금색 수면에 비친 반사광은 하계의 어둠을 더욱 강조한다. 하계는 어둡고 칙칙하며 그곳의 건물 층고는 낮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전시 공간의 창틀에 걸쳐 놓음으로서, 상/하의 구별을 재차 반복한다. 


그러나 상/하의 이분법을 벗어난다면, 식물의 뿌리처럼 아래로 내려가는 겹겹의 층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 중세의 화가들이 지옥과 닮은 현실을 참고해서 관념적인 천상보다 더 실감나게 묘사했듯이 말이다. 부조 작품 [Home 4]도 머리와 몸, 또는 상상과 현실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상하의 위상학을 대조하기 위한 상층부에 구름을 배치했다. 그의 작품에서 상층부가 꿈의 영역에 해당되니 만큼, 구름 이미지는 피어오르는 몽상, 반대로 구름처럼 허무한—우리 속담에 ‘뜬구름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상태를 암시한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 인간이 존재한다. 작품 [dream]은 거품이 가득한 카푸치노 컵 안에 달콤한 머시멜로처럼 얼굴을 얹혀 놓았다. 눈감은 얼굴은 머리 위의 집을 상상의 세계에 위치시킨다. 보색으로 처리된 동화 속 예쁜 집 굴뚝에서는 카푸치노 거품과 같은 하얀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집은 지상에 굳건히 뿌리내리기 보다는 머릿속 상상처럼 가치치기로 증식하는 중이다. 




dream,자기질 점토, 석기질 점토, 40x40x80cm,2019



잠기다,석기질점토,40x36x100cm,2020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빨리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신랄한 격언도 있지만, 평범한 다수에게 자기 집이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철학자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이란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자, 하나의 우주라고 찬미한다. 거주되는 일체의 공간을 집으로 간주하는 이 철학자는 집이 몽상하는 이를 보호해주고 집은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꿈꾸게 해준다고 말한다.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슐라르는 집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우연적인 것을 제거해주며. 집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슐라르에게 집은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공간 뿐 아니라 불, 물, 공기 등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 범주를 연구한 이 ‘물질적 상상력’의 철학자에게 집은 공간을 대표할 만큼 중요했다. 그렇지만 그의 기준에 의한다면 집 없이 떠도는 많은 현대인은 ‘산산이 흩어진 존재’가 되는 셈이다.


바슐라르는 실낙원을 연상시키는 논리로 인간은 자신의 요람이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집에서 추방되었고, 실존주의자들의 어투를 빌어 ‘세계에 내던져진’ 상황을 말한다. 이 세계는 모태와도 같은 원초적 충족성이 특징인 집과 달리 적대적이다. 그렇지만 안과 밖 사이에 선명한 이 경계는 현대사회에서 점차 모호해진다. 반면 유리 천정은 더욱 확실해진다. 21세기에 사는 작가인 한용범에게 바슐라르 풍의 안팎의 구별은 다소간 낯설다. 자신이 태어난 집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나. 현대인은 대부분 병원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그렇지만 바슐라르가 말한 집의 상징성은 유효하다. 특히 공간적 차원이 그렇다.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수많은 벌 집 같은 구멍들 속에 공간은 시간을 압축해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집에는 그러한 구석들이 많이 존재한다. 집을 하나의 단위처럼 활용하면서 여러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한용범의 작품에서 공간 관계는 중요하다. 크고 작은, 연결되거나 단절된 공간에는 꿈과 무의식, 그리고 기억이 쟁여져 있다.



잠기다,석기질점토,40x36x100cm,2020(부분)



Home 4,석기질 점토, 42x10x60cm,2020



가령 집과 더불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둥근 구조는 어릴 적 놀이공원에서의 추억이 반영된 것이다. 이번에 실험적으로 제작된 나무 집은 마치 서랍 장같은 모습으로도 보이는데. 여러 형태와 상태의 집이 놓인 작은 턱들은 서랍을 열었을 때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대개 서랍 속에 담겨있는 것은 현실의 잔여물이다. 축소된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서랍들에는 사용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것들이 모여 있곤 한다. 이 분류하기 힘든 사물들에는 물건 주인의 꿈과 무의식이 포함된다. 작품 [Gradation]에 나타나 있듯, 한용범의 작품에서 꿈과 무의식은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을 가진다. 둥근 궤도 위의 집들은 더 하지만, 공간에 놓여 있는 것은 가변적이다. 좋게 말하면 자유롭고, 나쁘게 보면 ‘집에 뿌리가 없는 것’(바슐라르)이다. 한용범의 작품 속 집은 기억과 추억이 고여 있을 틈이 없이 이동해야 하며 그럴수록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할만한 것들도 불확실해진다. 


집은 이제 인간이기 보다는 ‘기계’(르 코르뷔제)가 된다. 물론 집은 기계와 비유한 건축가 르꼬르뷔제는 기계라는 말 앞에 ‘근대적 삶을 위한’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붙였지만, 근대적 삶또한 확연히 갈라지고 있는 계층적 질서에 의해 다르게 다가온다. 그간 풍자적 작품에 몰두해왔던 한용범의 경우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가깝지 않을까. 최근 작품에서 집은 형태 뿐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 놓임으로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정치권은 늘 부동산 대책을 세우면서 ‘집은 사는 것(buy)이 아니라 사는 곳(live)’이라는 캠페인을 벌이지만, 한반도의 반은 다른 체제로 갈려있고, 국토의 상당부분이 산이며 수도권에 인구의 반 이상이 몰려 사는 자본주의 국가 한국에서 자본은 만성적인 공간 부족을 무대로 도박을 벌인다. (재)개발 공화국인 근대국가에서 괴테의 파우스트같은 ‘창조와 파괴의 결합’은 집을 매개로 가장 번성한다. 




Gradation, 석기질 점토, 나무, 60x60x190cm,2020(부분)



마샬 버만은 [현대성의 경험]에서 현대문화의 영웅으로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든다. 버만에 의하면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끝없는 성장과 결부시키는 역동적 과정이다. 여기에서는 자아의 파괴까지도 자아의 발전에서는 불가결한 요소다. 이것이 파우스트와 악마와의 관계에 대한 의미다. 한용범의 작품에는 빛을 받는 발전의 세계와 어둠이 대조된다. 어둠은 발전의 뿌리를 이룬다. 그것은 근대의 영웅 파우스트처럼 음침하고 두려운 에너지에 의해서 발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은 빛에 나머지 반은 어둠에 잠겨있는 작품 속 몽중인(夢中人)은 마샬 버만이 예로든 파우스트처럼, ‘파괴자와 창조자의 합성인, 즉 우리시대에는 개발자라고 부르게 된 암울하고도 애매모호한 인물’의 양면성을 가진다. 그러나 파우스트적 인물에게 악역만을 맡길 수 없다. 현대예술 또한 ‘창조적 파괴’(니이체)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창조적 파괴가 모더니티의 필수조건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비는 자본이 쉴 새 없이 사회를 변형시키는 역동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조직 양식임을 확인한다. 현대사회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성장을 이루며, 새로운 욕망과 소요를 창조하고 인간의 노동과 희망을 착취하며 삶의 속도를 가속화시킨다. 그렇지만 자본은 과잉축적의 문제를 낳는다.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는 항상 투기에 기초한다. 하비는 자본주의가 가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자본주의의 환각적인 기구와 물신주의와 반영체계가 뒤따른다고 비판한다. 한국사회에서 과잉축적-투기-물신주의라는 인과 고리를 주택 시장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아직 집이 없는 한용범은 그가 원하는 집을 갖기 위해 여태까지보다 더 많은 파괴와 창조를 요구받을 것이다. 이전의 풍자적 작품과 달리, 이제는 비판하는 대상과 비판자를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풍자에 전제된 유쾌한 거리감은 스스로를 상징하는 인물상과 결합한 집들에서 점차 사라져 간다.  

 

출전; 클래이아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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