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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 / 바람이 만든 조각

이선영

 바람이 만든 조각


  

 이선영(미술평론가)



  

 1. 한국의 비조각; 이승택


2020년 제5회 창원조각비엔날레 주제인 [비조각-가볍거나 유연하거나 (Non-Sculpture; Light or Flexible)]는 한국의 비(非)조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이승택의 주제와 딱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참여 작가 한명을 연구함과 동시에 비엔날레의 중심 주제를 연구하게 된 것은 행운이다. 1932년 함경남도 고원 출신의 이승택은 곧 90세를 앞두고 있는 ‘원로’작가지만, 작품만큼은 아직도 젊다. 그것은 필자만의 인상이 아닌 것이, 2000년대 초반 당시 젊은 실험 미술가들의 산실이었던 쌈지스페이스에서 떠오르는 젊은 작가와 원로 작가를 매칭하는 프로젝트의 첫 번째를 장식한 이가 바로 이승택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신세대 미술가의 대표 주자로 부상했던 이윰과 이승택이 ‘타이틀 매치’라는 부제로 같이 전시되었던 것을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두 ‘조각가’는 당시 쌈지 스페이스 근처 미대 조소과 동문이라는 연결도 있었겠지만, 전시 기획자는 세대 차이가 큰 두 작가를 바람이라는 소재/주제로 묶었다. 



창원조각비엔날레 이승택 특별전 전경


대지에 우뚝 선 기념비적인 조각이 여전히 조각의 대표적인 이미지였던 시대,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는 바람이 세대를 달리했던 두 조각가의 주요 작품 목록이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실험 예술, 특히 조각 분야에서 이승택이 남긴 궤적은 한국 현대조각사의 주요한 대목을 차지한다. 한국 전쟁 후 모든 것이 폐허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있음이 아닌 없음이 작가적 상상력의 기저를 차지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이승택에게는 실험예술, 전위 등등의 칭호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세대로 친다면, 거의 한국 조각계의 시작점에 섰던 그는 누구에게 저항해야 했을까? 그가 작업을 시작하던 때는 정(正)과 반(反)이 한 작가에게서 동시에 있을 수도 있었던 시대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가 공적이거나 사적인 영역에서 의뢰받은 기념조각까지 작품 목록에 넣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천의 맥아더 동상, 남산의 김구 동상, 도산 공원의 안창호 동상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기념 조각상이 이승택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그가 만든 기념조각상은 전국에 적지 않게 흩어져 있다. 


2000년대 초반, 김원방 선생과 함께 홍익대 근처의 자택에 방문했을 때, 그동안 의뢰받아 제작했던 초상 조각들도 지하 작업실에 모아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실험적 작품들 및 작품 구상이 각층의 화장실까지 빼곡하게 점령하고 있는 놀라운 광경도 보았다. 조각가로서 훈련받은 재현의 기술은 사회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자, 재야작가이며 현대미술가로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인체에 바탕 한 기념조각과 ‘비조각’은 반대되는 것을 한 몸에 장착할 수밖에 없던 세대의 산물이다. 비조각은 조각을 포함한다. 조각의 기본형식은 인간이었다. 조각/비조각의 관계에 인간이라는 기준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서 인간은 내용이자 형식이다. 이승택의 목 잘린 자소상이나 불타는 몸체 등, 인체를 바탕으로 한 작품 또한 비 조각이라는 맥락에 놓일 때 메시지는 더 증폭된다. 그의 작품을 전통적인 미술사 서술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고정된 형식이 아니다 보니까 최초의 아이디어는 드로잉(작품이자 시방서)으로 남아있기 일쑤고, 발표 되는 장에 따라 실연(재현이 아님)되는 모습은 가변적이다. 




드로잉을 포함한 최초의 모델이 악보라면, 재연은 ‘라이브’에 해당한다. 공연에 가까운 작업에서 시작과 과정, 결과의 차이는 있다. 따라서 이승택의 개별 작품의 미술사적인 연도를 따지는 서술은 큰 의미가 없고, 그의 주요 작품의 개념과 실연을 관통하는 미학이 중요하다. 이번 발표에서 필자는 해체주의 철학으로 그의 작품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 비(非)조각, 즉 긍정이 아닌 부정의 어법으로 무언가를 규정하는 바의 의미는 결국 해체(deconstruction)라고 보기 때문이다. 조각이 만약 ‘무엇’으로 규정(동일자)된다면, 비조각은 더 많은 무엇(타자)일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은 핵심이나 본질로 간주된 것보다는, 나머지와 주변적인 것들을 전경화 한다. 예술의, 특히 조각의 형식이 해체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조각의 기본인 인간적 형태(Anthropomorphism)의 근본적 변모를 말한다. 바람을 이용한 이승택의 조각-개념들은 그의 비(非) 조각의 정수이다. 그것은 작품/작업을 인간이 아닌 자연에 방점을 옮겼다. 



 2. 이승택의 비물질 조각 ; [바람]을 중심으로


2002년 쌈지스페이스 연례기획 '타이틀 매치' 전(1회)에서 1970년대부터 90년대 발표했던 작품과 함께 제시된 작가노트에는 비교적 소상하게 자신의 작품의 기원과 의미를 밝힌다;  


“늘 기존의 것들을 뒤엎어야 새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반 개념적 사고가 재학시절 나의 의식을 억눌려 왔다. 기실 어림도 없는 망상에 헤매다가 영화관 홍보뉴스에서 공장의 굴뚝 연기와 중동의 유전에서 뿜어대는 불기둥을 보고 작품화한 것이 불, 물, 연기, 안개, 구름, 바람, 화산, 개스 등의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형체 없는 작품’이라는 새로운 미술을 얻게 되면서 비물질(非物質)인 바람을 내 손으로 직접 잡아 볼 수 있게 됐다. 특히 바람은 단순한 바람이라는 요소의 원용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통한 상황의 연출이라는데 매료를 느끼며, 회화도 조각도 아닌 공간을 통해서 보이지 않은 바람을 보게 했다. 더욱이 조각적 양감에서 물적(物的)인 표현으로 다시 물질에서 비물질의 원소적(元素的)인 소재로 한정 공간에서 무한공간으로 무형의 원소를 시각화하는 물리적 수단을 통해 펄럭이는 소리(音)와 시간과 공간 속에 전개되는 움직임(動)으로 조각의 개념을 형태에서 상태(狀態)에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을 현대화하는데 가장 성공한 최초의 바람 작품이라고 자부해 보지만, 시기심으로 꽉 찬 얼간이 기성세대들은 오히려 코웃음만 치고 있다.” 


이승택의 발언 도입부는 화이트 큐브를 넘어서는 그의 실천과 더불어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에서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의 ‘인간 내면에는 무한으로 솟구치고 싶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과 개체라는 비좁은 굴레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하는 열에 들뜬 갈망이 있다’는 말을 인용함으로서 낭만주의의 핵심을 짚은 바 있다. 그러나 작가의 의식과 달리, 그의 작품은 근대적 낭만주의에 한정되지 않는다. 당시 30대의 젊은 작가 이윰과 함께 ‘타이틀 매치’ 전을 했을 때 이미 70세였음을 생각하면. 그가 ‘기성세대’라고 간주한 이들이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다. 거기에는 특정한 유파에 속하지 않은 채 재야 작가로서 살아왔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승택이 실험미술가에게 수여하는 백남준 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제1회 수상을 한 때가 2009년이다, 그 상을 계기로 국제무대에서도 본격적으로 알려졌음을 생각할 때, 한국 미술계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의식은 당연했다. 




형식으로 고정시키기 힘든 이승택의 ‘비물질’, ‘원소적’ 작품은 먼저 드로잉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드로잉이라는 기본적인 성격은 3차원 공간에도 관철된다. 전시장의 벽과 바닥, 천정 등을 활용한 공간 드로잉을 볼 수 있다. 벽에 사물로 그린 작품은 ‘점과 선이 묶어낸 실험적 드로잉’으로 명명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바람] 시리즈 또한 그의 드로잉 작품의 맥락에 따른다면, 천을 이용하여 공간에 드로잉을 한다는 발상이다. 대부분 자료로만 접해지는 작품들은 해안선을 따라 색을 분사하여 그림을 그리는 대지미술이나 거대한 녹색의 물감들이 수직의 폭포처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같은 물감 색 의상을 입은 작가가 퍼포먼스 하는 기록 등, 조각이 놓이는 좌대 뿐 아니라 그림의 틀 또한 벗어나려는 조형의지가 있다. 작품 [바람]은 야외의 나목들에 붉은 천을 감은 것으로, 천이 거의 수평으로 펼쳐져 나부끼는 강풍일 때 작가의 의도에 부응하는 최적화된 풍경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작품은 작가의 의도 외에 자연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하얀 천은 붉은 천과 다른 느낌이다. 


자연을 캔버스로 천을 물감으로 간주하는 작품은 시시각각 다른 면모를 보이는 과정적 작품이지만, 개념미술의 중요한 수단인 사진에 의해 기록되어 선구자적인 작품들에 대한 증거로 남았다. 바람 시리즈, 즉 [바람] 퍼포먼스는 마치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거대한 붓에 의해 공간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자 면)같은 모습이다. 대형 천이 탁 트인 공간에 그리는 변화무쌍한 필획은 그때그때의 바람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그의 시도들은 1980년대 중요한 소그룹 운동인 대성리의 [바깥미술]이나, 공주의 야투(자연 미술)의 흐름과도 같이 간다. 1991년 여름, 필자가 공주에서 열린 자연미술 전을 구경하러 갔을 때, 얇은 반짝이 끈으로 야외의 공간을 둘러친 이승택의 작품을 본 기억이 있다. 간단한 작품이었지만, 햇빛에 반사된 끈은 끈이라는 물질성을 벗어나 바람이 불면 발사되는 광선들처럼 다가왔다. 열린 공간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를 벗어난 사물을 이용하여 드로잉 한다는 기본 개념은 여러 시기에 여러 장소에서 구현되었지만, 그는 특정 그룹의 일원은 되지 않았다. 




천 조각이 흩날리는 그의 작품은 천에 글을 써서 바람에 날리는 티벳의 민속적 전통, 성황당이나 신목(神木)에 묶인 천들, 가까이는 가을 운동회의 만국기, 심지어는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까지도 떠오르는 열린 예술작품이다. 2002년 쌈지스페이스에서 본 작품들은 동시에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씨앗처럼 접혀져 있다가 펼쳐지곤 한다. ‘잠재성이 현실화’(질 들뢰즈)되는 것이다. 붉은 천이 휘날리는 [바람] 작품은 사진과 더불어 실내에서도 설치하기도 했다. 결연한 표정의 자소상이 함께 하는 전시장은 그의 ‘인체조각’과 실험 작품과의 관련성을 가늠하게 한다. 동체를 불태우는 광경이 있는 작품 [분신하는 현대조각]은 1980-90년대 남한을 관통했던 어두운 군부독재 시절의 분신 정국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승택이 해왔던 작품 맥락에서 보자면, 정치색 보다는 그가 다루어왔던 무형의 조각 재료 중 하나인 불로 인체가 해체되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질적 상상력’(바슐라르)은 여러 자연 현상에 적용될 수 있다. 편재하는 공기와 관련된 바람은 불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규모를 더 키울 수 있다. 바람은 풍선에 담겨서 드로잉과 퍼포먼스 등으로 실행되었다. 


지구모양의 거대한 풍선에 매달린 인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북경에서 거대한 지구 모양 풍선을 가지고 퍼포먼스 하는 [지구놀이]를 낳았다. 묵직한 재료를 사용한 건축적 규모의 큰 작품에도 ‘바람 같은’ 태도는 이어진다. 미술사조에서 조각을 해체하고자 한 (포스트) 미니멀리즘 작품들이 준건축적 규모와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기존 조각이 작품과 마주하는 관객을 전제한다면 새로운 ‘조각’은 장이 된 작품 내부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올림픽 공원에 있는 이승택의 [기와를 입은 대지]는 기와지붕이라는 건축적 요소를 활용했지만, 대지 위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바위처럼 박힌 듯한 모습이다. 지상에 부분적으로 드러난 듯한 유기적 골격은 미지의 척추동물 화석 일부가 발굴되는 과정 같다. 이 작품을 구상한 [드로잉]을 보면, ‘집’은 왕릉(왕의 무덤) 같기도 하다. 올림픽 공원 내의 열주들 위에 탈을 얹은 그의 작품 또한 지상에 우뚝 선 인체라는 조각의 패러다임을 유지하고 있지만, 얼굴은 탈이다. 가면은 진실보다는 가상과 연관되어 해석된다. 야외의 기념비로 구현되기 위해 견고한 재료를 사용했지만, 전통에 대한 해석 또한 ‘가볍거나 유연하거나’이다.     


 

3. 비평적 시도; 이승택의 ‘형체 없는 작품’에 대한 철학적 해석 


이승택은 ‘형체 없는 작품’을 주장하고 실천했다. 이 부정적 서술은 ‘비(非)조각’이라는 비슷한 개념을 이해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조각적 형체의 근간은 인체였다. 구상조각은 물론 현대미술이 추상화라는 대세를 따를 때도 보이지 않은 기준이 된 것이 인체였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신적 질서가 구현된 신인동성동형론(Anthropomorphism)으로 누드나 건축의 기본이 되었다. 조각이 서 있는 보편적인 기둥식(monolithic) 방식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그와 비슷한 자연물은 나무이다. 세계수라는 상징이 있듯이, 나무는 그자체가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고 하늘과 연결되는 통로였다. 이는 샤머니즘을 비롯한 인류의 수많은 전승에 선명하다. 극적인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십자가 또한 강력한 전통이다. 이승택의 [바람] 시리즈에서 생목(生木)에 두른 붉은, 또는 하얀 천들은 바람과 결합하여 수직에 반하는 수평적 흐름을 만든다. 나무에 의지하지 않을 때는 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수 십 미터 길이의 천이 열린 공간 속에서 시시각각 움직이는 획을 만들 때, 인간은 작은 지지대에 불과하다. 불을 이용한 작품 [분신하는 현대조각]에서 태워버려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현대의 사상 또한 인간은 언어나 구조로 해소시켰다. 장 삐아제는 [구조주의]에서 인간적 주체에 의존하는 인간중심의 인식론을 근본부터 수정한 것은 구조중심의 인식론이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탈중심화의 전략이며, 전통적 주체는 사라지고 구조의 구성과정 속에 존재할 뿐이라고 본다.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유기체도 구조이고 유전자도 구조이지만, 생체공학의 시대에 결정적 구조는 미시적 차원이 되었다. 미술 또한 환영이 아닌 실제의 공간 속에서 물자체가 추구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현대미술의 주도권을 회화에서 조각으로 넘겨준다. 캔버스 또한 변형되기 시작했다. 물론 전통적 의미의 조각은 아니다. 회화든 조각이든 물자체는 개념으로 ‘환원 또는 확장’(이일)되었다. 현대예술에서 인간은 ‘중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부유하고,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실체화될 수 없는 미시물리학의 소립자와 같은 불확정적인 존재’(로브그리예)가 된다. 


케네시 베이커는 [미니멀리즘]에서 현대 소설(누보로망)에서의 탈인간주의와 기존조각의 모든 관계적 구성을 해체한 미니멀리즘 간의 미학적 조응을 지적한 바 있다. 이승택의 [바람] 시리즈는 자연물을 포함한 기성 오브제(천)의 사용, 일정한 단위 구조의 탈 중심적 배치 등을 활용하고 궁극적으로는 장(場)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과 연결시킬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열린 예술작품]에서 장(場)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에서 차용해온 용어로, 이 개념은 원인과 결과가 엄격하게 일직선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수정한다고 해석한다. 움베르트 에코에 의하면 장에서는 다양한 힘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여 사건이 벌어지며, 가능한 여러 사건이 조합된다. 이리하여 구조자체가 철저하게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승택의 ‘형체 없는 작품’은 미니멀리즘처럼 연극적 장 안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몸의 지각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에서 상황으로 변화하는’(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과 함께 한다. 




현대철학은 인간중심주의를 비롯한 기존의 형이상학을 해체했다. 반(反)조각이라는 미학적 패러다임은 현대사상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현대의 사상과 예술 모두에서 인간, 주체라는 단단한 자기 동일성은 ‘차이와 반복으로 운동하는 세계’(데리다)로 해체되었다. 사회학자들도 철학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불가능한 교환]에서 모든 타자성을 포기한 주체는 스스로 무너지며 자폐증에 빠져든다고 비판하면서, 완전한 주체에 의해, 타자 없는 주체에 의해 실현된 유토피아는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그 예를 현대사회에서 찾는데, 그에 의하면 체계의 합리화는 체계를 해체시킨다. 시스템은 외부로부터의 공격 없이 내파되는 것이다. 이승택이 가시화하는 바람은 동일성을 대체하는 차이적 관계를 대변한다. 나무에 매달리거나 작가가 들고 있는 천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공기 또한 마찬가지다. 천과 공기는 ‘자연적이고 고유하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데리다)가 중요하다. ‘형체 없는 작품’의 재료들은 공기의 운동에 대한 지표 역할을 할 뿐이다. 


바람은 압력과 온도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고 진행되는 자연 현상이며, 모든 기후적 현상이 그러하듯 완전한 예측이 힘들다. 이승택의 [바람]은 ‘차연이라는 운동을 특징으로 하는 무한한 놀이의 장’(데리다)으로 현시된다. 이때 해체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해체주의는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서 비판받았지만,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서 결국은 기존의 질서에 흡수되는 허무주의나 무정무주의’(프레드릭 제임슨)와도 다르다. 마이클 라이언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데리다에게 해체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평가한다. 마이클 라이언에 의하면 데리다에게 좋은 사회란 ‘위계질서 없이 차이를 보존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민족주의, 인종주의, 성차별, 그리고 계급주의의 근원이 전복된다. 이때 차이는 닫힘이 아닌 열림이다. 그러나 해체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이승택이 없애려던 ‘형체’는 이미 해체되어 있다. 마이클 라이언은 실증주의의 예를 든다. 




그에 의하면 실증주의는 직접적인 사실적 지식에 기초한다고 믿어지지만, ‘명확하고 직접적이며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중개--시간적으로는 타자가 되기, 공간적으로는 타자들과의 관계--의 그물 속에 걸려있다’(데리다). 즉 ‘직접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직접성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차이화, 연기, 그리고 언제나 그 외의 어떤 것, 또는 타자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타자되기 등의 운동과 관련되어 파생된다’(마이클 라이언)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이승택의 [바람]을 해석해 보자면 ‘공간적이고 객관적인 외재성은 시간화로서의 차이(차이화) 없이는 나타나지 않을 것’(데리다)이다. 요컨대 이승택의 ‘형체 없는 작품’은 ‘실체가 아닌 차이적 관계’의 결과물이다. ‘반조각’이자 ‘형체 없는 작품’인 [바람]은 해체와 차이(또는 차연)의 관계가 극명하다. 또한 압력과 온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이 작품들은 실내 전시나 아카이브 등을 통해 개념적으로 나타나는데, 개념미술에 포함되는 단어들이 그러하듯, 한 단어는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요컨대 텍스트는 ‘차이적인 그물망, 즉 끝없이 자기가 아닌 어떤 것, 다른 차이적 흔적들과 참조관계를 맺는 흔적들의 직조물이다’(데리다) 차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해체적 요소는 이승택의 작품에 내재한 계열성(seriality)이다. 계열성은 ‘기호의 체계는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그 요소들의 충만함에 의해 구성되지는 않는다’(데리다)는 말에 암시되어 있는데, 계열성을 내재한 작품은 단 한번의 결정적인 나타남이 아니라, 차이들의 연속적 나타남이라는 시간성이 중요하다. [바람]을 비롯한 이승택의 ‘형태 없는 작품’은 ‘차이의 역동적인 운동과정’, 즉 ‘열려있는 작용이며 무한한 운동을 의미’(마이클 라이언)한다. [해체론과 변증법]에 의하면 ‘차이는 이항대립에서처럼 고정된 두 항목 간의 대립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열체 내부에서 보다 넓은 연관체계를 이루면서 운동하는 과정’이다. 해체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끝없는 운동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적 실천과 함께한다. 속도감과 가변성을 가지는 이승택의 [바람] 시리즈는 예술에 대한 닫힌 개념을 열어 제치는 운동 그자체로 다가온다.

 

출전; 제5회 창원조각비엔날레 국내 학술 컨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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