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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연, 슈인링 전 / 볼 수 없는 밝은 세계

이선영

볼 수 없는 밝은 세계 

하얀 어둠 전 (5,28—7.3, 스페이스K_과천)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울과 타이베이에서 작업하는 두 여성 작가 양유연과 슈인링(YinLing Hsu)이 함께 한 ‘하얀 어둠(White Darkness)’전은 그 부제처럼 역설적 세계를 보여준다. 미학에서도 무기교의 기교, 무의미의 의미 같은 역설적 대구들이 자주 사용되곤 한다. 그것은 합리주의가 낳은 비합리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의 반영이다. 한 작가는 장지에 다른 작가는 캔버스에 그렸지만, 전시장에 걸린 17점의 작품들은 풍경이든 정물이든 인물이든 썰렁한 분위기가 공통적이다. 역설적 표현을 계속 사용하자면 공허함이 가득하다. 어두운 음모 같은 것이 숨어있을 만큼 비밀스러운 구석은 없다. 작품 속 세계는 전시장의 작품만큼이나 밝게 조명되어 있지만, 보기 힘들다. 즉 읽기 힘들다. 모호함과 애매함이라는 코드로 엮여진 두 작가의 작품이 도상해석학적으로 투명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알 수 없음이 밝혀진다 해도, 당면한 현실이 크게 달라질 것 없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그들의 회화는 실망할 것도 없기에 열망할 것도 없는 냉정한 현실의 단면이다. 



슈인링_Autumn Flow_oil on linen mounted on board_125x100cm_2017(이하 사진자료 출전; 스페이스K)



양유연_표류자_장지에 아크릴릭_210.8x149cm_2016



다소간 실망스러워도 때로는 절망스러워도, 어떠한 은폐도 없이 투명하게 다가오는 현실은 발견의 기쁨을 준다. 이때 허구와 현실은 큰 차이가 없다. 작품 속 대상들은 현실의 잔여물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알맹이가 빠진 식어버린 현실이다. 확실하게 분류될 수 없지만, 삭제될 수도 없는 나머지들이 화면 전면을 차지한다. 이것을 왜 이렇게 그렸는지에 대한 모호함은 시공간의 한 단면이기도 한 회화에 내장되어 있다. 특히 재현적 요소가 있는 작품에서 단면의 위상은 확실하다. 전시된 작품들은 생략된 전후의 맥락을 포함하여 의미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려는 의지가 박약한, 소위 ‘열린 예술작품’이다. 작가이기에 더 민감하게 느꼈을 의미 없는 세계는 작업을 통해 미세하게 변형된다. 어떤 그림이든, 심지어 붓질 하나만 스쳐갔을지라도 그리기 위해 투자되는 심적, 육적, 물적 자원은 엄청나다. 어떤 부류의 작품들은 그러한 열기를 열정적으로 표현하지만, 이 전시의 작품들에 그려진 것들은 그다지 주목되지 않는 색 바랜 대상들로, 대부분 무심하게 선택된 듯하다. 그래도 하얀+어둠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어딘가 낭만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다. 


눈 덮인 풍경이 포근해 보이는 것은 필요 없는 자극이나 근심을 줄지도 모를 잡다함이 하얗게 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도 마찬가지였다. 24시간 밝힐 수 있는 인공 광원과 그에 따른 과로 사회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둠은 꿈과 휴식의 시간대인 밤의 특징이다. 사회가 밤낮없이 돌아가기 시작한 근대, 낭만주의나 상징주의는 밤이 주는 미덕과 매력을 강조했다. ‘하얀 어둠’이라 함은 낮/밤의 변증법이 사라지거나 탈색된 세계를 말한다. ‘하얗게 지새운 밤’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하얀 어둠’은 노동(또는 작업)도 휴식도 아닌 시공간을 상징한다. ‘하얀 어둠’은 ‘백색 소음’처럼 무의미한 잡음으로 가득 찬, 차이없는 세계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작품에서 여전히 인간은 등장하지만, 사물화 되어 있거나 그보다 더 초라하다. 근대 계몽주의 이전의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또한 있지만, 구원에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작품의 수수께끼나 부조리는 의미와 목적과 관련된 신비로움이 아니라, 일상 속의 낯섦인 기괴함이다. 

 

역설적 세계의 인간과 사물



양유연의 작품 [표류자](2016)에는 마네킹 하반신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장지에 아크릴로 섬세하게 구현한 창백한 색감은 사물화 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 물건들이 다리 사이에 있는 신체의 모사라면 성 상품화도 생각난다. 유기체의 일부가 파편화된 그것들은 한군데 모여 있지만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지만 인간 같고, 초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20세기 초반 세계의 수도 파리에서 유행에 뒤진 구석구석에서 현대의 무의식을 들춰냈을 때 인간보다는 사물이 더 시적으로 다가왔듯이, 이 마네킹 더미들은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광에 드러나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작품 [착시](2019)는 그것이 진짜 사람인지, 입간판인지, 로봇인지 불확실하다. 




양유연_그늘진 나 자신을_장지에 아크릴릭_210x150cm_2019



양유연_휘광_장지에 아크릴릭_210x150cm_2019



양유연_맑고, 무겁게_장지에 아크릴릭_210×150cm_2019



양유연_시선의 몫_장지에 아크릴릭_210x150cm_2019



작품 [맑고, 무겁게](2019)에서, 섹시하게 흐트러진 듯한 헤어스타일에 한껏 드러난 노출 의상을 걸친 여자 얼굴에는 방금 거두어들인 다정한 표정이 남아있다. 신상으로 무장한 여자들의 주요 무대인 쇼핑몰의 빛은 존재를 비춰줄 뿐 아니라,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 양유연은 자화상 또한 빛과 어둠 사이에 배열했다. 작품 [그늘진 나 자신을](2019)에서 역광을 받는 여성은 염색약 광고 못지않게 머리카락이 섬세하게 재현되어 있다. 반면 얼굴은 달의 뒷면처럼 어둡다. 색을 넘어 빛인 머리칼에 가려진 얼굴은 빛이 안 닿아서이기보다는, 원래 어두웠을 것 같은 침울한 표정이다. 삐져나온 하얀 카라가 어둠의 깊이를 드러내는 지표로 작용한다. 작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어둠에 몰아넣고 그 외의 것을 조명한다. 무거운 커튼이 처진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 뒷모습이 있는 작품 [시선의 몫](2019)은 창밖 또한 안쪽처럼 별 볼 일 없을 것이다. 내면을 주시한다면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안과 밖이 이분법이 아닌, 뫼비우스 띠처럼 연동된다면, 소외를 초월할 시공은 없다. 


작품 [휘광](2019)에서 텅 빈 동공은 오른 편으로 쏠린 두 눈이 무엇을 보기 위한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직시를 회피하는 시선의 낯선 빛은 육안보다 더 지배적인 사진의 흔적이 있다. 그것이 사진이라면 삭제되었을 것이다. 정보사회의 인간은 수없이 삭제된 시간 속에 건져진 몇몇 장면들로 규정된다. 24시간 현대인을 밝히고 있는 인공광원은 인간을 시각의 포로로 만들었다. 인간을 둘러싼 물질적 환경이 더욱 화려하고 편리해진 시대에 인간은 더 초라해진다. 생산의 주체가 되어야 소비의 주체도 될 수 있지만, 점차 소비자로만 규정되는 현대인은 사물화 될 뿐 아니라, 사물보다 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곤 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로서는 전통이라는 카드도 있을 법하지만, 전통사회도 현대사회 못지않은 억압이 있었다. 역사가나 사회학자들은 유기적 전통사회와 파편적 현대사회를 대조하곤 한다. 그러나 전통으로부터 개인의 해방은 더 조밀하게 조직화된 노동/자본의 관계로 재편되기 위한 상대적 자율성일 따름이다. 그러한 명목상의 자율성마저 가차 없이 해체되었음이 소외의 근본적 원인이다.




양유연_겉면_장지에 채색_145.5x112cm_2012



양유연_텅 빈, 새벽_장지에 아크릴릭_91x73cm_2010



양유연_다락_장지에 아크릴릭_65x80cm_2014



양유연_착시_장지에 아크릴릭_150x210cm_2019




슈인링의 작품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작은 인형이나 신체의 단편들이 대역을 맡는다. 이러한 선택은 어떤 의미로 귀결될 인간적 이야기에 대한 부담을 줄여준다. 자연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자연물은 실내/외 장식물의 일부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마른 식물들 뒤로 남자 발 하나가 내려오는 장면에서, 관객은 서정적 상상부터 매저키즘적인 환상까지 다양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궁금증을 야기해서 더 자세히 보게 하려는 작가의 전략이다. 현대의 생태계를 가득 채우는 수많은 상품의 목록 속에서 현대인의 눈은 무감각해졌기에 현대예술 또한 갈수록 스펙터클을 닮아갔다. 웬만하면 눈에 띄지 않는 현실 속에서 어떤 작가들은 스펙터클과 반대의 전략을 쓰기도 한다.


 슈인링은 스펙터클의 뜨거움이 아니라 일상의 차가움을 선택한다. 창가 근처에 나란히 도열한 사물들을 보여주는 작품은 누군가에게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사물의 배열로 다가온다. 작가는 오히려 커튼 주름의 세로줄 무늬에 내재된 추상적 아름다움을 자세히 묘사한다. 벌레 먹고 누렇게 뜬 떨어지기 직전의 잎 새들을 꽃으로 간주한 작품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고풍스러운 알레고리의 현대적 버전이다. 슈인링의 많은 작품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 시스템의 일부로 소모될 뿐인 현대적 삶 자체에 죽음이 있다. 인간이 부분적 역할로 고정되는 만큼 삶의 에너지는 상품/사물에 스며들고 인간이 축소되는 만큼 사물/상품은 커진다. 




슈인링_A Hot Afternoon_oil on canvas_130x162cm_2014-2015



슈인링_Apocalyptic Yellow Flowers_oil on linen mounted on board_200x250cm_2017



슈인링_Can’t See Anything. Let’s Walk With Closed Eyes._oil on linen_120x150cm_2018-2020



슈인링_Keep It Normal, And Then Dance_oil on linen_110x160cm_2020


슈인링_Death Is Temporarily Out Of Stock_oil on linen_160x110cm_2020



슈인링_Emotions Territory_oil on canvas_285x183cm_2014-2015



슈인링_Unfamiliar Flower_oil on linen mounted on board_100x100cm_2017



현대 또한 원시시대처럼 물활론적이며, 신화는 복귀한다. 역사보다 신화를 애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더라도 신화는 인간 삶에서 떠난 적이 없다. 더 이상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시대에서 더욱 그렇다. 작품 [Autumn Flow](2017)는 복잡한 굴곡 면을 가지는 추상적 바탕에 나비들이 모여 있는 모습인데, 비슷한 색감의 천 내부 나비 무늬들이 살아서 나온 듯하다. 그려진 것이 살아 움직이는 차원은 스카프 디자이너라면 또는 화가라면 이르고 싶은 경지가 아닐까. 열린 문 사이에 놓인 식물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인형들은 갖가지 사물과 상품으로 가득 찬 현대적 환경이 축소시킨 인간을 비유한다. 인체, 식물, 이젤 등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여려 겹으로 배열되어 있을 뿐,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는 [Unfamiliar Flower](2017)에서, 작가는 시각적 구성과 서사를 연결시키는 관례를 해체한다. 


커튼 아래로 반인반수의 존재가 보이는 작품 [A Hot Afternoon](2014-2015)에서 하체가 지네인 사람은 카프카적인 변신의 와중에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극적인 장면을 중심에 놓지 않고 상황을 가리는 듯 보여주는 커튼의 자잘한 무늬 묘사에 집중한다. 작품 [Emotions Territory](2014-2015)에서 나무 장식 장 안에 모인 기이한 수집품들에서 사물과 인체의 일부가 결합되어 있다. 사물의 인간화와 인간의 물화는 같은 과정의 두 측면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코드, 즉 자본의 지배 아래 배열한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현대 사회, 즉 사랑, 죽음, 신성함 등, 본래 ‘교환될 수 없는 것’(바타유, 보드리야르)들을 은폐한, 표피적으로만 균질적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균질성이 평등은 아니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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