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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ri Lee / ‘열병의 덩어리’로서의 회화

이선영

‘열병의 덩어리’로서의 회화

  

이선영(미술평론가)


  

캐리리(Kerri Lee, 이경희)는 그동안의 작품을 드로잉과 회화로 구별했지만, 양자는 크기 외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작가의 작품목록에 [페인팅처럼 드로잉하기 프로젝트](2017-18)가 있었다면, 회화 작품들은 그자체가 ‘드로잉처럼 페인팅하기’로 보이기도 한다. 회화와 드로잉의 경계 와해는 회화의 현대적 측면이다. 그것은 ‘회화적painterly’ 회화같은 동어 반복적 표현을 낳았다. 미술사 서적에는 대가의 드로잉이 많이 실려 있지만, 드로잉이 회화의 밑그림을 벗어난 것은 근대부터다. 가령, 미술에서 근대를 알린 인상주의는 양자의 구분을 적극적으로 해체했다. 대상이 해체되고 그에 따라 색채도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차적인 과정이 이어졌다. 캐리리 작품이 속하는 추상미술은 회화가 지시대상으로부터 멀어져 조형 언어 그 자체를 지시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조형언어는 무엇인가를 반영하는 투명한 수단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존재 그자체로 인정받길 원했다. 






<The Blue Room> 전시전경, 이응노미술관 M2프로젝트룸, 2020



그러한 기대치는 매우 높다. 가령 신적 존재나 순수한 사랑에서나 관철될 수 있는 기대치인 것이다. 회화의 본질로 간주된 시각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결국 시각적 촉각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물성으로 귀결된다. 캐리리는 아크릴과 아크릴 스프레이, 오일 파스텔, 연필을 포함한 다양한 재료를 복합적으로 사용한다. 자유롭게 그려진 것같지만 아크릴 스프레이 같은 재료는 수정불가능 하여, 작가말대로 ‘섬세함과 예민함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며 작업에 집중해야하는 상황을’ 만든다. 캐리리는 몇안되는 색과 재료를 최대한 다양하게 펼쳐나간다. 작가의 게임 규칙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그 내부로 들어가면 다양한 게임의 수가 적용된다. 기쁨과 환희는 물론 슬픔과 고통,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자유로운 유희의 차원에서 풀어 헤쳐진다. 그러나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회화가 르네상스 이후 고단한 재현의 업무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해졌을 때 얻은 자유는 자의성으로 함몰될 위험에 봉착했다.  


이미지를 읽는다는 기존의 공동 규약은 무너지고 미술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대중은 언제나 이것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대상과 의미라는 관점에서 확정적이지 않은 캐리리의 작품 또한 이러한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캐리리는 어릴 적부터 화가를 꿈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소통이라는 과제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걸치적거리는 보편적 코드로부터 벗어나 보다 날렵하고 긴밀하게 자신의 현실과 진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오늘날 같은 스펙터클의 홍수 속에서, 자기 방식대로 그리기 외에 회화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나. 캔버스는 이러한 자유를 실현 또는 실험하기 위한 근본 바탕이 되어 준다. 작품에는 푸르거나 검은 형태와 선들,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자연물들 같은 불확실한 것들이 출몰하지만, 캔버스에 그려진 형상이라는 회화적 전통은 남아있다. 얼굴, 몸, 풍경, 타자와의 여러 관계 등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The Blue Room> 전시전경, 이응노미술관 M2프로젝트룸, 2020



<The Blue Room> - The painter’s studio 설치 이응노미술관 M2 프로젝트룸, 2020

 



동양화처럼 여백이 많은 화면은 개인의 경험과 감성, 그리고 육체적 감각을 받아내는 장이다. 장과 창은 점하나로 큰 차이를 내포한다. 창은 의미를 재현하지만, 장은 의미를 향한 과정을 제시한다. 캐리리의 작품에서 의미는 명확한 기원과 목적이 없고(또는 확정되어 있지 않고) 되어가는 과정과 관련된다. 현대예술은 대놓고 의미를 거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는 순간 형식도 와해된다. 형식이란 늘 어떤 내용의 형식일 뿐, 그자체로 서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의미가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더 큰 맥락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의미의 의미를 구가하는 사조들은 오히려 인간적, 사회적 의미를 담게 된다. 가령 누보레알리즘은 과감하게도 휴머니즘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관념이 보다 흥미로운 많은 것들을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키는 폭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캐리리의 작품에도 인간은 나타나지 않는다. 내면을 위해 외형은 포기되었다. 


내면이 너무 안/팎을 구분하는 이원론으로 들린다면, 내면과 외면이 수시로 요동치는 ‘뫼비우스 띠 같은’(엘리자베스 그로츠) 것이라 해두자. 그것은 현실이든 육체든 모두에 해당된다. 지시대상으로부터 멀어진 그림은 완성의 기준이 모호하고 산만해 보인다. 작가 말대로 작품에는 ‘무분별하게 생성된 선명한 획(stroke)과 선(line)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재현이 아닌 생성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동일자로의 환원이 아닌, 타자로의 확산이라는 현대미술의 흐름이 있다. 작품 제목의 일부로 많이 등장하는 ‘열병’은 확산의 징후다. 작가가 현대인의 징후로 진단하는 완전함에의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열병을 낳는다. 인간은 ‘열병의 덩어리’가 된 것이다. 드로잉 작품들 중 [열병의 덩어리] 시리즈는 명확한 형태가 없는 가운데 칠해진 물감이 머물러서 생긴 얼룩과 강하게 그은 선과 면이 공존한다. 얼룩들은 물리적 원인이나 강한 감정에 의해 툭 터지고 흘러내리곤 한다. 




Night swimming no.9-10 91x91cm Mixed media on canvas 2019-2020



Detail cut - 어제의 파랑 no.3 86x58cm Mixed media on Acrylic panel 2020



우연과 필연의 결합체인 화면 속 얼룩과 흔적은 반복적으로 찍히지만 완전한 반복은 없다. 반복은 차이의 출현을 위한 의식(儀式)에 해당된다. ‘덩어리’란 고르지 않은 밀도와 강도를 말하며, 균형을 위한 잠재적 운동을 낳는다. 열병은 감정의 다양한 측면을 완전히 지배적이 된 하나의 색조로 덮어 버리기도 한다. 작품은 그자체가 예측 불허의 기상도(氣象圖)다. 먹구름은 언제든지 몰려올 수 있다. 바닥없는 심연으로 다 쏟아내고 나면 잠시 개일 수도 있지만, 끝없는 욕망은 곧 고일 곳을 찾아내고 넘실거린다. 회화가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자체가 욕망’(바르트)이다. 욕망은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한 과정이다. 그러나 회화라는 정지된 매체로 과정을 표현하기는 까다로운 문제다. 캐리리는 과거와 미래 양쪽을 자기에게로 당긴 현재 속에서 그 과정들을 잠정적으로 고정시킨다. 그것은 잘 찍혀진 한 장의 사진처럼 절정의 상황에서 순간 멈춤 한 것일까.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시리즈에서는 매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작업의 본질을 암시한다. 추상 회화이기에 요구되는 이러한 결단은 광기를 부른다. 자크 데리다는 예술 뿐 아니라, 법같이 엄격한 분야조차도 결단의 영역이 있음을 주장한다. [당신이 알지 못했던 것들] 시리즈에는 당신이라는 타자가 호명된다. 작품의 구성요소 또한 더 복잡해진다. 여러 가지가 상호작용한다. 선과 형태, 덩어리와 가루, 그리고 이질적 요소들이 가까이 있거나 떨어져 있을 때의 은유적 상황이 조형요소의 역학관계로 나타난다. 특히 많은 작품에서 발견되는 푸른색 얼룩들은 멜랑콜리한 느낌을 준다. 이런 저런 선들이 휘젓곤하는 화면들, 특히 형태를 관통하는 선들은 주체한테 일어난 사건들을 극화한다. 아르토가 잔혹극 이론에서 주장했듯, 배우의 대사가 아닌 힘 그자체가 출몰한다. 힘의 작동은 강력하여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 같은 형태들이 마치 각질처럼 흩어져 있다. 








어제의 파랑 no.4, 5, 6     24x17.5cm Mixed media on Acrylic panel 2020


작품에는 작가를 휘저었던 사건들이 반영된다. ‘사건’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시리즈의 제목들을 살펴보면, [우발적인 사건], [예측할 수 없는 사건], [미래 사건] 등이 있다. 푸른색과 검정색의 필획들이 만나 여러 사건을 은유하는 캐리리의 작품은 여러 화면으로 펼쳐졌을 때 잠재적인 시간성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암시한다. 시원하게 휘두른 필획들은 파국적 사건일 수도 있다. 사건에는 여진도 남는다. 주요한 형상들 주변에 이를 반향 하는 또 다른 작은 형상들은 나비효과처럼 이어질 사건들의 파장을 표현한다. 검정은 선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무정형의 푸른 색조의 덩어리와 밀고 당기는 관계를 가진다. 덩어리진 채 수동적으로 떠있는 것과 운동성을 가진 필획이 공존하는 작품에서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추상회화에서 작품제목은 중요하다. 그림이 문장으로 정리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의미의 방향타는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담을 지기 싫어하는 화가들은 쿨 하게 [무제]라는 중성적 제목을 붙이곤 한다.  


[the stacks] 시리즈에는 다른 질을 가진 것들이 퇴적물처럼 한 지역 안에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잡은 것들] 시리즈는 미끄러운 비누처럼 잡기 힘든 어떤 형태를 암시한다. 검은 선과 화이트를 머금은 블루 덩어리의 대화가 있는 듯한 [침묵의 대화]는 대화가 각자를 변모시키는 과정이다. 캐리리의 여러 작품에서 검정과 푸른 형태의 상호관계가 대화처럼 펼쳐지곤 한다. 구별되는 조형 요소들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서로의 형태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모는 유희이자 상징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변모하면서 모든 것을 변모시키는 작업’(모리스 블랑쇼)이 바로 예술임을 알려준다. 작가가 선택한 몇 가지 조형 요소들은 여러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단위처럼 활용된다. 이 단위들은 그자체가 아니라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화 된다. 블루는 블루에 내재된 어떤 상징의 중심이 아니라, 근처에서 상호작용하는 블랙과 다른 무엇일 따름이다. 블랙 또한 마찬가지로 규정된다. 실체가 아닌 관계, 본질이 아닌 맥락이 중요한 것이다. 




어제의 파랑 no.1-3 86x58cm Mixed media on Acrylic panel 2020



푸른 시간 162.2x97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페인터의 사막 no.1-5 6x10x22cm Mixed media on brick 2020




블루와 블랙은 밀도와 강도로 이야기한다. 가령 블랙은 블루보다 더 슬퍼서 아예 무감각해진 단계가 아닐까. 최근 작품에 색 선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형태는 차이적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형태나 색의 단면같은 단편들은 또 다른 조형언어로 가세한다. [밤 수영] 시리즈에서는 블루의 비중이 높아진다. 화면은 여러 층의 형태들이 겹쳐진 채 추상적 원근감을 형성하고  물의 느낌을 주는 구불거리는 푸른 층들은 지시대상과의 희미한 연결망을 보여준다. 캐리리의 작품은 추상적인 원근감과 촉각성이 있다. 미술사에서의 추상이 극단화시키려고 한 무중력적 시공에 회화를 매달아 놓지 않는다. 재현은 아니지만 무언가와 닮았다. 미묘한 톤으로 갈래지어진 푸른 형태들에서 여러 겹의 층이 느껴지는 [닮은 꼴] 시리즈에서는 자연의 두께에 상응한 실재감이 있다. 구상이 아닌 작품에서 닮았다함은 무엇과 무엇이 닮았다는 것일까. 그것은 실재의 위상에 관련된 문제다.


가상현실의 위력이 현실을 모조리 덮어버릴 곧 도래할 미래에, 회화는 몸과 더불어 실재에 대한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추상미술은 회화를 코드로 환원시킬 염려를 낳는다.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작품군의 예를 들면서, 코드로 환원되어 가는 추상회화의 난점을 비판한다. 지시대상이 부재한데 코드마저 없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자연으로부터 추상된 수직/수평선과 삼원색은 일종의 코드로 작동한다. 물론 그 반대 유형, 소위 ‘뜨거운 추상’이라 알려진 비정형적 방식에도 작가별 코드는 있다. 누군가는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혼란을 느끼겠지만, 그의 작품 또한 몬드리안만큼이나 엄밀하다. 이러한 상극의 공통점은 유사(類似) 종교적 관념의 영향이라는 미술사적 해석이 있다. 들뢰즈는 ‘코드와 혼란을 동시에 피해야’하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코드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서 육감적으로 생산’되는 것, ‘애당초의 닮음도 없고 미리 전제된 코드도 없는’ 회화를 기대한다. 




페인터의 사막 no.1-5 6x10x22cm Mixed media on brick 2020



<The Blue Room> - The painter’s studio 설치 이응노미술관 M2 프로젝트룸, 2020

 



들뢰즈는 ‘구상적이지도 않고 코드화되지도 않은’ 이 방식을 ‘미학적 유사’라고 이름 붙이며, 회화는 훌륭한 ‘유사적 언어’라고 규정한다. 이때 색채와 형태에 의한 변조가 중요한데, 이는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틀로서’(들뢰즈) 작용한다. 캐리리의 최근 작품에는 색을 쌓아서 만든 형태가 다른 형태와 상호작용한다. 차이가 있는 두 개의 질이 만났을 때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난다. 물론 차이의 연쇄망은 곳곳에서 끊어져 가루로 남기도 하고 휘발되기도 한다. 명확하게 특정할 수 없는 형태와 색조는 꿈과 무의식, 사랑과 죽음같이 모호한 영역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미술사에서 이와 유사한 조형적 어법으로 자동기술법이 있다. ‘자동기술법은 욕망에 몸을 맡기는 말’(모리스 블랑쇼)이다. 캐리리가 주목하는 인간의 본성인 불완전성은 완전을 향한 여정에서 열병을 낳는다. 그러나 예술가의 작업 또한 이러한 ‘열병의 덩어리(the lump of fever)’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출전; 이응노미술관(아트랩대전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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