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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호/ 삶의 무게를 짊어진 몸

이선영

삶의 무게를 짊어진 몸

이선영(미술평론가)


[망각]이라는 부제로 열리는 박치호의 전시에는 그가 오랫동안 그려왔던 두상, 그리고 몸이 등장한다. 그런데 두상은 두상대로, 몸통은 몸통대로다. 아마도 한 전시 공간에 배치된 몸의 두 부분은 양자의 관계를 묻게 한다. 무엇인가 잊혀졌다함은 이러한 부재와 결핍을 충만하게 채워줄 무언가를 전제한다. 망각과 달리 기억은 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한다. 탈각된 시공의 고리가 연결되어야 기억은 가능하다. 쪼개진 두 개의 단편이 하나가 되어 상징으로 완성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치호의 작품에서 몸과 머리의 만남은 아직은 아니고, 영원히 아닐 것 같은 비극적 정서가 깔려있다. 물론 미술의 전통에는 엄연히 초상화와 누드화, 토르소 등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각각의 시각적 관행 속에서 나름의 완전성을 가진다. 팔이 잘린 채로 발굴된 세계문화유산급의 비너스상은 부서진 모습 그 자체로 원본처럼 각인된다.




floating 2019 천위에 아크릴 53x72.3 mm



floating 2015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그러나 박치호의 작품 속 대부분의 두상이나 몸통은 유기적 전체에서 잘려 나온 이미지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두상을 화면 한가운데 붕 띄워 놓는다. 보다 묵직한 몸통은 신체 일부들이 절단된 상태로 서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머리와 팔이 없는 수동적 상황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자세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눕거나 죽은 모습과 착각될 수 없는 옆모습이 담긴 몸이 그렇다. 두상의 경우 목 부분에서 흘러내리는 물감은 신체의 단면에서 흘러내리는 체액을 떠올리고, 배경이 없는 화면 한가운데 놓인 몸에 붙어있었을 얼굴과 팔은 화면의 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잘려 있다. 화면에 꽉 찬 몸의 경우 프레임은 자연스럽게 몸을 잘라낸다. 팔과 머리를 잃은 몸통, 눈 코 입이 생략된 얼굴은 망각에 대한 충격적 표현이다. 작가는 망각이라는 어스름한 주제에 가장 직접적인 신체 이미지를 겹쳐 놓은 것이다. 작가는 여러 몸 중 특정 몸, 즉 나이 든 여성의 몸을 선택한다.


몸의 다양성을 생각할 때, 선택과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floating] 시리즈에서의 나이 든 여성의 몸통은 이번 전시의 주제인 망각을 대변한다. 무엇이 망각된 것일까? 우선 ‘그녀’는 여성성을 잃었다. 배 부분까지 축 처진 가슴과 여러 겹으로 접힌 뱃살, 두툼해진 상체를 지탱하는 빈약한 다리는 그 나이대의 여성이 이미 중성임을 말한다. 나이 든 남성의 상황도 비슷할 테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더 몸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중성화는 더욱 퇴락한 느낌을 준다. 아멜리아 존스는 [몸]에서, 데카르트 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평인 [제2의 성](시몬 드 보부아르)에서 지적됐듯이, 몸은 여성성으로 규정된다고 말한다. 몸은 (남성적인) 순수한 사고를 통하여 억압되거나 초월되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몸/정신을 구별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이원론의 역사만큼이나 도전받아왔다. 이러한 도전은 몸을 영혼과 구별된 것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로 간주한다.




floating 2015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floating 2015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니이체는 ‘영혼이란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면서,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고 가축 떼이자 목자’라고 말한 바 있다. 몸의 복권에 대한 담론은 예술가적 철학자의 강력한 주장 이후, 몸을 굴리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술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여성이 여성이 아닌 때도 여성은 삶에 대한 자신이 책임을 수행해왔다. 여성은 오랜 세월 공적 부문에서 소외되어 왔지만, 사적 부문은 평생을 걸쳐 지속된다. 특히 어머니 역할이 그렇다. 삶의 토대이지만 그 자체로는 유령화된 이 존재들은 작품을 통해 불러 세워졌다. 여러 작품 속 비슷한 몸매를 가진, 팔과 머리 없는 여자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전형적 대상이다. 또한 그녀들에게는 정확한 이름이 없다. 이름은 망각되었다. 세상은 그녀들을 김XX, 이OO가 아니라 누구 엄마, 아줌마, 할머니 등으로 통칭할 따름이다. 그러나 작품 속 여성들은 유령들이 아니라, 작가의 고향마을 수산 시장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이들이다.


작품의 메시지를 위해 머리와 팔을 생략했을 뿐 리얼리즘에 충실한 존재다. 온전한 재현이 가져다줄 기법적이고도 상징적인 충만함은 대상을 재인식하는 것 외에 더 나아가기 힘들다. 작가는 의미를 향한 운동을 위해 결핍을 선택했다. 관객은 무엇에 대한 망각임을 묻게 된다. 그의 작품은 여성의 삶의 주기 속에서의 망각뿐 아니라, 여수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국가폭력 사태인인 여순사건을 포함한다. 눈코입 없는 초상들은 깊은 슬픔에 그 신체 기관들이 떠내려 간 듯하다. 또는 풍화에 닳아버린 돌조각 같은 모습니다. 작가는 전쟁을 포함한 대량적인 인간 살육의 장에서 여성, 특히 어머니의 고통들이 망각되었음을 암시한다. 한국의 여성/어머니들은 생활력이 강하지만, 작가의 관찰에 의하면 바닷가의 여자들은 더욱 그렇다. 대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아온 그녀들의 평생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여성의 몸이 출산과 육아, 그리고 평생 지속되는 과도한 노동에 의해 왜곡되는 과정이다.




oblivion 2020 천위네 아크릴 530x410mm



oblivion 2020 천위네 아크릴 530x723mm



젊고 아름다운 신체의 기본 조건이 반듯한 대칭성을 갖췄다면, 그가 자주 본 시장 할머니들의 몸은 기울어져 있다. 삶의 무게가 이상적인 축을 흐트러트린 것이다. 인간의 직립은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보다는 신을 향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대칭축의 흐트러짐은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하게 한다.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인 머리와 팔의 부재는 명확한 지표가 되지만, 박치호가 주목한 인간 중심축의 흐트러짐은 미묘하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신체적 균형이란 신체의 왼쪽과 오른쪽의 크기가 같음을 나타낸다. 균형을 건강을 나타내는 지표만이 아니라 매력을 끄는 특징이라고 평가된다. 샌더 길먼은 [성형수술의 문화사]에서, 신체의 균형이 성장할 때 기생생물이나 다른 습격에 대한 저항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한다. 신체의 아름다움, 특히 균형은 개인의 신체가 정정하고 건강을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에 견딜 수 있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다. 낸시 에트코프는 [미의 과학]에서 오염물질이나 기생충, 영양불량, 질병에의 노출 등 많은 이유로 완벽한 얼굴이 균형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얼굴의 비대칭 정도는 더 심해진다. 그에 의하면 비대칭적인 동물의 경우 생존율과 성장률이 낮으며 번식력도 감소한다. 이러한 생물학적 기준에 의하면, 박치호의 작품 속 기울어진 존재는 면역, 생존, 번식력 등이 떨어지는 퇴행적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성은 삶을 이끌어간다. 박치호가 관찰한 어촌의 여자들, 가령 해녀들은 늙어서도 물질을 한다. 그의 작업실에는 해녀가 입었던 옷을 주워서 콜라주한 작품이 있는데, 몸과 밀착된 잠수복은 그녀들의 몸을 떠올린다. 그러나 바닷물에 떠밀려온 이러한 간접적 피부조차 팔 부분이 잘려 있다. 어촌의 여성들은 주변화된 삶에 절망하여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곤 하는 남자들의 몫까지 책임지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며, 그 흔적은 온전히 몸에 남겨진다.




oblivion 2020 천위네 아크릴 530x455mm



이때 그 흔적은 상처일 수 있다. 트라우마는 기억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망각은 치유일까? 망각은 치유이기보다는 억압이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원초적 상처를 말한다. 멀게는 유기체에게 완전한 만족을 공급해 주었던 모태로부터의 단절, 어머니 젖가슴으로부터의 유리 등이 트라우마의 원형이다. 프로이트는 젖가슴의 상실을 최초의 상실로 본다. 아름다움의 생물학적 기반을 연구한 학자 프란세트 팍토는 [미인]에서, 젖가슴의 상실은 주체성을 획득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모든 상실을 대변하는 하나의 모델이라고 본다. 볼록한 유방이 사라진 늙은 여성은 그것을 바라보는 남성에게도 상실감을 준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원초적 상처를 내장한다. 그러나 그 먼 기억은 잊혀진다.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와 유사한 상처가 반복된다. 누군가에게는 심리적 상흔뿐 아니라 육체가 절단되는 상흔을 준다. 작가가 유년시절을 보낸 가난한 어촌 마을에서 그러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어부인 아버지 일손을 돕기 위해 고깃배에 탔다가 팔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동네 친구와 형들을 기억한다. 시원하고 초월적인 수평선이 있는 바다는 삶의 기원이자 종말이지만, 섬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 바다는 구체적으로 사람이다. 1994년 첫 개인전 [노좆바다] 전 때, 노 저을 때 필요한 기구인 배의 부속을 마치 인간같이 표현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바다는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낳기도 한다. 얼마 전 전 국민에게 충격과 상처를 주었던 세월호 사건은 그에게 그리 낯선 사건도 아니다. 바다에 삶이 편재한다면 죽음도 편재한다. 더 기나긴 삶의 주기 속에서 큰 상처조차 둥글려진다. 바닷가의 유리 파편과 돌 같은 이러한 형태에 대해 작가는 ‘바닷물에 얻어맞아서 그런 형태가 나온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망각과 치유는 같은 과정이다. 누군가에게는 기억이 치유 과정일 수도 있다. 그는 ‘상처가 기억으로 저장된다’고 말한다. 그가 몸을 집중적으로 그리는 이유는 기억된 상처가 몸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인간은 기억/망각하는 존재다.




floating 2015 천위에 아크릴 980X1300mm



Floating 2016 천위에 아크릴 1930x2590mm



박치호의 작품 속 여성의 몸은 애초에는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가 어두운 바위나 나뭇 껍질처럼 거칠어졌음을, 봉긋했을 가슴은 촛농처럼 녹아 묵직한 삶의 중력에 반응한다.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수전 보르도)라는 제목의 책도 있을 정도로, 몸은 날아오르는 투명한 정신을 방해하는 물질성으로 규정한 관념의 역사가 있다. 그 몸통들은 ‘삶의 무게’라는 표현의 화신(化身) 같다. 그가 그런 할머니들을 누드모델로 세운 것은 아니지만, 화가로서의 투시력과 ‘대상’과의 교감이 실감 나는 이 몸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여성도 개인도 아닌 이 대상은 포로처럼 관객 앞에 세워져 있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24시간 소비자의 눈을 공략하는 이상적인 몸들에 비한다면 이 기우뚱하고 불완전한 몸은 큰 스케일의 작품에서 기념비적인 위상을 가진다. 볼품없는 몸을 화면 가득히 담은 그의 작품은 추를 미로 승화하는 예술 특유의 과정일까? 작가가 남성이기 때문에, 추든 미든 여성의 대상화라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물론 그는 자신의 몸도 그린다. 큰 수술을 한 후에 몸에 대한 자의식은 더욱 커져 있다. 아름답지만 한도 많은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 그에게 망각은 자연과 역사, 개인과 집단 모두에 해당된다. 트라우마처럼 망각은 인생 초창기부터 시작된다. 남성이 개인/주체가 되기 위해 떠나야 하는 모체라는 서사는 정신분석학에도 서술되어 있다. 남성은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않으면 상징계로 일컬어지는 지배적 사회에 속할 수 없다. 남성은 일찍이 지배적 가치를 대변하는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반면 여성은 모체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채 상상계에 머문다고 치부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여성은 어른이 되지 못하는 존재다. 또는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의 가설 속 심리극에서 남성에게 어머니는 잊혀진, 또는 잊혀져야 하는 대지이다. 작가의 고향을 염두에 둔다면 바다라는 비유도 적절할 것이다. 대지나 바다는 정신분석학자들이 상징화할 수 없는 원초적 현실의 비유로 자주 쓰인다.


Floating 2014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Oblivion 2016 천위네 아크릴 530x410mm



박치호에게 그림은 이러한 현실을 실재화하는 유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현실계(실재계)는 쉽게 재현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 또한 여성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린 몸은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원형은 무엇이었는지 불투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어둑한 몸은 거대한 그림을 통해서 전시장의 조명을 한껏 받지만 어둠 속에 잠긴 대상들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몸은 오랫동안 어둠의 대륙이었다. 임상의학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셀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데카르트에게는 해부학을 통한 관찰이, 말브랑슈에게는 현미경을 통한 관찰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었다고 본다. 그들의 목적은 인간의 몸을 보다 투명하게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임상의학의 탄생으로 기본적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대상이 명쾌한 의학적 시선 안에서 포착되었다. 의학사에서 최초로 모든 사물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는 순간이 왔다는 것이다. 이후, 몸은 알고 지배하려는 시선에 의해 관통되어왔다.


[임상의학의 탄생]은 계몽정신의 막강한 힘이 특권적인 지식이 가지고 있던 어둠의 왕국에 새로운 시선의 왕국을 세워 놓았다고 평가한다. 몸뿐 아니라 ‘정신’도 같은 운명을 따른다. 샌더 길먼은 [성형수술의 문화사]에서 기능성 자기공명 영상(fMRI)을 이용한 뇌 스캐닝의 과정을 서술한다. 뇌가 스캔 되는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뇌가 활동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남몰래 품은 어떤 마음은 환한 부분으로 활성화되어 보여 질 수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처음에는 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것이었다가 점차 모든 인간은 환자라는 현실로 전이되고, 지식-권력-기술-자본의 연결망을 통해 인간을 안팎으로 조명할 것이다. 몸에 관한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성 상품화 및 생체공학의 시대에, 거의 가공되지 않은 바윗돌처럼 우직하게 드러나는 몸은, 몸만큼이나 불투명한 회화와 어울린다. 재현 주의를 벗어난 이후 현대미술의 언어는 불투명해졌다, 그것은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시대처럼 대상을 관객의 면전에 오롯이 가져다 놓는 투명한 수단이 아니다.




Oblivion2020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Oblivion2020 천위네 아크릴 53x45.5mm



몸 또한 투명함이라는 기준이 관철될 수 있다. 가령 건강할 때 몸은 투명하다. 즉 의식되지 않는다. 인간은 백인이라는 암묵적 기준은 흑인종이나 황인종을 ‘유색’ 인종으로 분류한다.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으면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워진다. 몸이 의식될 때는 몸이 아플 때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심장을 그린 작품들이 있는데, 건강한 사람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평생을 말없이 박동하는 그 기관을 의식하지 않는다. 작품 속 몸이나 얼굴은 아픈 심장과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이다. 작품 속 여성의 몸이 환자의 몸은 아니지만 왜곡이라는 점, 그것이 삶의 고통이 새겨진 상처라는 점이다. 몸에 새겨진 이야기는 망각되었으며 이제 작가는 관객 앞에 서있는 몸과 얼굴을 통해 무엇이 망각되었는지를 묻는다. 그가 붓만큼이나 많이 사용하는 페인트 롤러는 지우고 덮는 망각의 과정을 실행한다. 재현과 실행은 다르다. 망각을 재현하기 위해서 화가로서는 붓이 더 적합할 것이다.


작가는 롤러의 자국에서 또 다른 피부를 본다. ‘화면에 문질러보니까 톤이 살을 입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살은 붓으로 재현되기보다는 물감 층으로 덧입혀지면서 구축된다. 그것은 그가 그리는 두상이 얼굴을 재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두상은 대패로 간 듯이 평면적이다. 작가는 관객에게 얼굴을 대면시키면서 동시에 감춘다. 보이기와 감추기가 함께한다. 니콜 아브릴은 [얼굴의 역사]에서 얼굴은 겉으로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며 감추고 싶은 비밀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얼굴은 내가 세상에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가면이라고 본다. 박치호가 그린 얼굴 아닌 얼굴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가 염두에 두는 표현 불가능한 것은 고통과 죽음이다. 현대인이 애써 보려 하지 않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술은 지배적 문화가 망각하는 것을 떠맡는다. 예술은 자연과 역사, 종교 등과 가까워진다. 그 모두는 타자화된 것들이다.




Oblivion 2020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floating 2015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두상들은 망각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입체감이 사라진 현실 속의 얼굴 또한 대변한다. 지워진 것이든 피상적인 것이든 비슷한 결과물을 낳는다. 그가 그린 두상은 단지 생김새를 가늠할 눈코입이 없다는 문제가 아니라, 붓이 지나간 흔적들로 구축/해체되는 상이다. 망각은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부터 고려된다. 롤러는 형태를 지우면서 그린다. 붓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붓질의 흔적조차도 망각으로 덮어버린다. 작가는 캔버스 올이 보이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캔버스 올이 보이지 않게 밑바탕 처리를 할 때, 그는 돌가루 등을 입힌다. 돌가루 외에 흙, 커피가루, 심지어는 그물망 등을 깔아 재질감을 만든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부조같은 느낌도 있다. 그 위에 페인트 롤러로 아크릴 물감을 묻혀서 그리면 롤러 자국이 살결처럼 찍힌다. 화면 한가운데 던져진 모호한 덩어리를 두상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미묘한 얼굴선들은 특정 지시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화면을 횡단하는 선들에서 찾아진 것이다.


전능한 시각이 한 번에 찾아낸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더듬어서 발견한 선들이다. 그것은 일획에 한정 지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지난한 시간적 과정과 관련된다. 명도의 차이는 시간성을 암시한다. 빛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두상을 그린 드로잉 작품 중에서, 배경의 톤을 반전시킨 것, 즉 밝은 얼굴에 어두운 배경/ 어두운 얼굴에 밝은 배경의 작품은 나란히 배치한 작품은 나타남 또는 사라짐에 깔려 있는 시간성을 보여준다. 약간 외편을 향하는 두상 드로잉인 [floating]에는 내부에 빛을 품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먼지 쌓여있던 기계가 갑자기 작동하는 듯한 모습은 목 아래에 피처럼 떨어지는 물감과 더불어 생사를 갈랐던 사건들에 대한 기억/망각의 과정을 한 화면으로 압축한다. 배경이 없거나 형상과 큰 차이가 없는 어두운 배경은 바탕으로부터 솟아나거나 가라앉을 형태를 암시한다. 망각에서 건져진 기억은 구체화된다. 어둠 속에 잠긴 형태가 미광을 반사하면서 꺼내지는 것은 조각적 단단함을 획득한다. 이때 얼굴과 팔은 잘린 것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꺼내지지 않은 상태이다.




floating 2016 천위네 아크릴 980X1300mm



floating 2015 생활정보지위에 먹 53x39



본래의 피부색과 거리가 있는 어둑한 형태에서 돌조각이나 브론즈 같은 조상(彫像)이 보이기도 한다. 박치호는 회화의 장점이 색을 포기하다시피 한다. 굳이 색이 있다면 블랙 계열에 가까운데, 작가는 이에 대해 ‘원래 동양화과 출신이어서 검정이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색을 품고 있는 블랙, 또는 먹색은 조각이나 흑백 사진처럼 대상의 내용에 더 집중하게 한다. 어두운 색감은 밀랍 봉인한 듯한 망각을 표현한다. 작가는 ‘디테일 없는 묵묵한 형태 속에 더 풍부한 감정들이 깃들기를’ 바란다. ‘지워졌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최소한의 형식에 최대한의 내용을 담는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미니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형식적으로 회화가 미니멀리즘에 속하기는 힘들지만, 그는 입체작업도 병행해왔다. 박치호의 작업실에는 회화의 도구 이외에 소조나 목조를 위한 세트가 갖춰져 있다. 붓질의 흔적이 감추진 그림에는 조각이 내재 있고, 거칠게 패어진 선들이 만드는 목조 두상은 회화적 처리가 선명하다.


그의 그림 속 몸체가 잘린 몸이 아니라 ‘토르소’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작품에는 돌이나 흙으로 빚은 원시적 여성상이 보이기도 한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생존을 가능하게 해줄 에너지를 자체 내장한 아름다운 여성상이다. 같은 여성적 굴곡이 사라진 둥그스름한 몸매는 조약돌처럼 닳아 있다. 조각적일 때조차도 형태는 찾아진다. 재료 속에서 형상을 미리 보고 그것을 꺼냈던 조각가들처럼 말이다. 이러한 부침(浮沈) 속에 기억과 망각이 교차한다. 그것은 회화라는 정지된 매체에서 시간, 즉 서사를 새겨 넣는 그의 방식이다. 생활 정보지 위에 직접 몸을 그린 작품 [floating](2015)에는 아예 모년 모월 모일이 나타난다. 모든 망각과 기억은 결국 시간을 매개로 한다. 대개 오래된 것이 망각되지만, 프루스트가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잘 표현했듯이, 기억은 시간의 순서를 거슬러 불현듯 발생하곤 한다. 레이첼 허즈는 [욕망을 부르는 향기]에서 먼저 회상이 일어난 사연에서 가장 즉각적이고 중심적인 경험은 순수한 감정이고, 기억의 내용은 나중에야 채워진다고 본다.




floating 2015 천위네 아크릴 1620 X1300mm



고뇌 1997 천위네 아크릴 900X530mm



기억의 시간은 명확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성을 가지는 선형적 과정이 아니다. 그에게 망각과 기억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동되는 유동적 과정으로, 몸 또한 그렇게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된다. 평평해진 가슴살 또한 몸이 변모하는 표현하는 것이다. 작품 제목이기도 한 [floating]은 고정된 단단함을 잃어버린 실재의 여러 국면을 포괄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가지기 어려운 시대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박치호의 작품 속 몸은 그것이 기원했던 현실적 소재를 염두에 둘 때 하염없이 무거워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변적인 실재의 국면이다. 시대의 상징에 충실한, 요컨대 원과 사각형에 딱 맞는 비트루비우스(vitruvius) 적 인체와 달리 삶은 여러 방식으로 몸을 빚어낼 것이다. 특히 플라톤 철학에 바탕 한 고전주의 미학의 기준은 엄격했다.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의 역사]에서 균형 잡힌 건강한 육체, 즉 재구성된 육체의 이미지인 누드는 기원전 5세기에 그리이스인들이 창안한 예술형식이라고 본다.


그리이스인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신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누드에 완벽성을 주었다. ‘예술은 자연이 완결 짓지 못한 것을 완성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믿음을 가진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신성한 기하학에 꼭 맞는 인간을 표현하였다. 종교적 관념까지 포함하는 고대의 몸에 대한 기준이 현대에 와서 과학기술을 통해 부활하고 있다. 그것은 인조인간 같은 선남선녀들을 제조할 것이다. 코드가 아닌 실제의 몸은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살아온 인생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몸이다. 상업적 이익의 회로에 유통시키려는 힘은 아름다운 몸매라는 하나의 주형에 끼워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면, 박치호가 만든 몸은 자연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유동적 현실 속에서 정신/육체를 구별하는 이원론 또한 사라진다. 화면 속 몸통을 여성으로, 정신을 담고 있는 두상을 남성으로 특정 지을 이유도 사라진다. 그림의 리얼리티를 잡아주는 인간형상을 기본으로 하지만, 거기에는 변모(metamorphosis)가 잠재해 있다.




Drawing 2019 종이위에 수채 300x420mm



floating 2018 천위에 아크릴 910x1160mm



그의 초기 작품인 [변색동물](1997) 시리즈에는 한 몸체에 다양한 종의 동물을 결합시켰다. 당시에는 20대 청년 작가가 보았던 사회적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발언과 관련된 표현이었지만, 인간에게는 이러한 괴물 같은 양상이 내재해 있다. 인간의 정체성이 출발점이 아니라 획득되어야 하는 지고한 목표라면 변모가 퇴행일 수는 없다. 드로잉은 이러한 변모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이다. 그는 평소에 드로잉을 많이 한다. 작업이란 시작이 어려운데 드로잉은 그러한 부담을 덜어준다. 부담 없이 실행하는 실험 속에서 큰 회화로 옮겨지는 것이 있지만, 드로잉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참조했듯이 먼 연결고리가 있을 따름이다. 드로잉을 100개 한다면 그중 하나가 회화로 다시 그려진다. 여기저기 흩어진 그의 드로잉 북에는 두상만 500개 넘게 그려져 있다. 그가 두상에 집착하는 것은 두상이 ‘생각의 저장고’이자 ‘영혼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사고와 영혼 등은 얼굴 중 눈빛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의 두상에는 눈코입이 없으니 ‘영혼의 창’은 가려져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어두운색으로 겹쳐 칠해진 두상은 그 안에 감춰진 것들이 많음을 짐작하게 한다. 눈코입 같은 구멍들이 사라진 이 저장고는 밀봉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감춰진 이 덩어리가 얼굴임을 암시하기 위한 노력은 컸다. 차라리 눈 코 입을 그려 넣는 것이 더 편할 정도로 말이다. 복면을 쓴 채로 무언극을 하는 듯한 두상들은 조금씩 방향이 다르고 성도 다르다. 얼굴과 배경 톤의 변화를 거의 주지 않은 화면은 침묵에 감싸인 존재를 더욱 묵직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60호 크기의 캔버스 10개에 얼굴을 하나씩 그려 넣고 간격 없이 한 벽에 붙인다. 멀리서 보면 하얀 종이에 구멍이 난 듯한 얼굴이 그려진 작은 드로잉은 망각에 대한 설득력 있는 표현이다. 그것은 잉크가 번지거나 바탕이 훼손되어 지워진 문장을 떠올린다.




슬픔이 파도처럼 2010 천위에 아크릴 1120x1450mm



Floating 2016 하드보드지위에 아크릴 780X1080mm



2020년에 그려진 [oblivion] 시리즈에서는 얼굴의 실루엣만 간직한 채 내부를 굵은 획들로 채웠다. 굵은 선들이 속도감 있게 횡단하는 얼굴은 망각을 가능하게 했던 힘, 동시에 망각을 걷어내고 다시 기억하려는 힘의 흐름을 보여준다. 갑자기 불이 켜진 듯 빛이 보이는 얼굴도 있다. 특히 명도가 높은 배경을 가진 작품들은 이 ‘저장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어떤 것은 얼굴 실루엣이 잔잔한 빛으로 감싸인 것도 있다. 이러한 후광효과는 이 얼굴 없는 존재의 분위기(aura)를 잡아준다. 그러나 얼굴 형상과 명도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초상들은 풀어보아야 할 보따리처럼 묻혀있다. 눈코입이 없음으로 해서 선, 색감, 명도, 붓질 등 모든 조형적 요소들이 존재의 표현에 가담한다. 가령 중첩되어 얼룩진 물감으로 채워진 얼굴은 우울한 느낌을 준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감 또한 존재를 녹여낸 결과이다. 몸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은 민감해서 실루엣만으로도 남성인지 여성인지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얼굴을 비워놓은 것은 그 얼굴을 바라보는 자를 거울처럼 비추기 위해서다. 평평하게 처리된 어떤 얼굴은 빈 거울같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이나 몸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재현의 기원에 놓인 그림자나 거울에 대한 비유가 깔려있다. 특히 실루엣이 강조된 검은 초상들은 그림자 같은 느낌을 준다. 재현의 기원에 그림자를 놓는 가설은 실루엣 이미지로 출발한 초상이 부재하는 인간에 대한 것임을 말한다. 재현에 대한 그림자 기원의 가설은 죽었거나 망각된 존재를 다시 현재화하는 것이 이미지임을 말한다. 그림자가 아닌 거울의 경우, 부재 대신에 분열이 강조된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말하듯이, 거울에 비춰진 통합된 상은 자아의 상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미지는 현실을 절묘하게 흉내 내려 할수록 가상성을 더 드러낸다. 이미지의 역사에 사진이 등장했을 때 주목된 점은, 그것이 부재와 죽음을 증거하는 생생한 매체라는 점이었다.




작업실에서



아멜리아 존스는 [몸]에서 후기 르네상스 미술에서 초상화가 부분적으로 데스마스크의 전통으로부터 나왔다고 지적한다. 즉 그것은 사라진 주체의 죽은 얼굴의 보다 더 명백하게 지표적인 각인이다. 바르트가 지적했던 사진의 존재했음이라는 특징은 시간의 흐름의 냉혹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했음을 기록하는 사진은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의 필멸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난다. 박치호의 [망각] 전은 우리가 애써 잊고 사는 것들을 망각이라고 다시 강조한다. 거울의 비유는 입체작품에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두상을 거칠게 목 조각으로 새긴 입체 작품은 조상이 놓인 좌대 아래에 검은 기름을 담아서 조상과 관객이 반사될 수 있도록 설치한다. 망각에 대한 보다 생경한 표현방식은 배경을 기하학적 무늬로 채운 작품들이다. 시장에서 사온 싸구려 천이나 테이프 등이 콜라주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런 무늬를 직접 그려 넣은 초상들인 [floating]으로 붙여진 시리즈는 꽃무늬든 땡땡이 무늬든 줄무늬든 모든 무늬는 평면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구체적인 제목이 붙은 이전 작품 [슬픔이 파도처럼](2010)을 보면 증명사진 같은 남자 얼굴이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나고, 배경은 스트라이프 무늬로 채워져 있는데, 그것은 해당 인물이 겪은 충격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효과가 있다. 일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이 강력하게 머리를 타격하는 화려하고 선명한 무늬들은 어두컴컴한 배경만큼이나 무엇인가를 삭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축을 따라가는 망각보다는 강제 종료에 해당한다. 결정화된 단면처럼 시간성보다는 공간성이 강조된 그것들은 아련한 기억보다는 지각에 호소한다. 코드의 산물인 현대의 스펙터클 또한 강렬한 현재적 지각을 위해 기억을 억제한다. 자본의 순환 주기가 빨라야 한다는 보다 거시적인 경제학의 결과물이다. 망각은 레테의 강 같은 신화적 차원부터 ‘정신분열증적인 현대 문화’(프레드릭 제임슨)에 현전한다. 망각이라는 주제를 위해 가장 직접적인 몸과 얼굴을 불러낸 박치호의 작품이 향수나 감상, 또는 역사적 의미를 넘어 지금 여기의 삶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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