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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채 / 경계 위에서의 게임

이선영

경계 위에서의 게임

  

이선영(미술평론가)


  

미대를 졸업하자마자 같은 지역의 레지던시에 입성한 김민채는 재능 외에 행운을 걸머쥐었지만, 이미 개인전도 한번 치르고 작업량도 상당히 쌓여있는 작가다. 거북이처럼 꾸준히 나아갔다기 보다는 불붙었을 때 해놓은 작품들이 많은 듯하다. 기복은 심하지만 찰랑거리는 감성은 터져 나갈 기회만 노리고 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나고 자란 영역에 있는 젊은이다. 그래서인지 작품마다 정체성과 영역에 대한 자의식이 가득하다. 가령 [가기 싫어]라는 직설적 제목의 작품은 자기 영역을 벗어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김민채가 자기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물리적 공간이기 보다는 작업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업하고 있는 자신이다. 작업은 낯선 상황에 놓인 자신에게 도피처를 제공해주고 바깥과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내게 했다. 물론 앞으로는 작업 때문에 생기는 긴장과 갈등이 더 많을 테지만 말이다. 자신이나 작업은 그토록 소중한 장(場)이지만 그 경계는 튼튼하지 않다. 



Oo0_50x35_김민채



갈퀴갈퀴_2020_70x40cm_김민채



김민채는 자신과 작업에 대한 이미지를 과자 ‘양파링’에서 빌려왔다. ‘종이와 나의 사이는 50cm, 이 중간을 콤파스로 빙 둘러 나오는 원은 내 영역이다’라고 하면서, 협소하지만 아늑한 이곳을 ‘어니언’라고 이름 짓는다. 이 안정적인 패턴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이며, ‘나의 숨 쉴 곳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신의 공간’이다. 그러나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자신의 공간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 내밀한 시공간을 타자들에게 개방한다. 요즘은 SNS 등을 통해 자신이 주인공인 어떤 영역을 연출하는 문화가 대세지만, 그 또한 지속 및 흥행을 위해서는 예술적 마인드가 필요할 것이다. 일상은 반복이지만 예술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몰입을 자아내는 무상의 유희라는 점에서, 예술과도 비교할 수 있는 놀이는 일찍이 인류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놀이는 자유롭게 행해지는 것 같지만, 자체의 규칙이 있으며 그에 충실하다. 


역사가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에서, ‘유희란 마치 --인 것처럼 행해지고, 또 일상생활의 테두리 밖에 놓여 진 것처럼 여겨지는 자유로운 것으로서, 어떤 이익도 얻지 않지만 인간을 완벽하게 몰두하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놀이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행해지며, 여러 규칙에 따르는 일련의 질서 속에서 진행되는 행동이다. 그것은 일상적 세계 한가운데 있는 일시적 세계들이며, 그 자체 속에 목표를 갖고 있는 행위를 완수한다’고 정의 한바 있다. 언어학자 에밀 방브니스트도 비슷하게 ‘유희는 엄격한 한계와 조건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하나의 폐쇄적인 총체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신화나 의식(儀式), 노동과 다른 규칙일 뿐, 규칙은 규칙인 것이다. 그래서 인류학자 로제 카유와는 속임수를 쓰는 이보다 더 치사한 부류가 판 자체를 깨는 자라고 본다. 예술도 판이다. 여기에서 판은 미술계라고 불리워지는 현실적 제도라기보다는, 예술의 길을 선택한 이들이 도 닦듯이 계속 가는 길, 그 길들이 있는 생태계이다. 




김민채 가리기 2019 종이에 먹 70x100



김민채 또 2018 100x70



‘현실성’이라는 기준은 놀이나 예술을 잉여나 장식으로 주변화 시키곤 한다. 그러나 놀이꾼/예술가는 그럴 때마다 삶을 영위하는 또 다른 방식을 강조한다. ‘삶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이 일시적인 세계’(로제 카유와) 또한 규칙이 필요하다. 물론 미술이라는 큰 규칙 아래 세부적 규칙은 작가 자신이 만든다. 이 놀이/예술의 장에서 개인은 규정되지 않고 규정한다. 물론 여기서도 사회의 패러다임이 변하듯이 규칙도 조금씩 변화하고,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게임의 수가 시도되기도 한다. 놀이 뿐 아니라 사회의 어느 영역도 규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규칙은 자연의 법칙과 비견될 수 있는 인간 사회, 더 나아가 ‘문명의 조건’(로제 카유와)이며,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작가의 주요 놀이 도구는 종이와 먹이다. 놀이는 어떤 시공간을 가정하고 기구와 규칙이 있다. 여기에 원이라는 자아의 상징이 가세한다. 게임은 원의 안팎에서 일어난다. 닫혀있음으로서 열린 유희의 역설적 의미가 예술적 자아에도 해당된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원, 타원, 나선형으로 둘둘 말린 선 등은 이 기본 도형의 변주이다. 거의 종교적 울림마저 있는 무게 있는 기하학적 도상인 원에 즐겨 먹는 스낵을 떠올린 것은 젊은이 특유의 가벼움이라기 보다는 취향과 습관의 중요성을 말한다. 좋아하는 과자를 먹듯이 작업에 몰입할 수만 있어도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가. 작업하겠다고 준비 운동만 하다가 시작도 못하는 마음만 작가인 이들도 허다한데 말이다. 하지만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자아의 상징으로서의 원은 조그만 충격에도 부스러기가 될 수 있다. 예술적 자아는 출발점이 아니라 도달점이라고 볼 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만큼 자유롭다. 그리고 그만큼 막막하다. 인류의 상상력에서 원이 자아의 상징으로 간주되어온 이유는 그것의 완전함 때문이다. 우주 또한 이러한 상징과 중첩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합일’ 같은 종교적, 형이상학적 관념에서 보이듯이, 나와 우주를 하나로 간주할 수 있는 이상적 형태가 원이다. 




김민채, 감추기 2019 종이에 먹70x100



맞닥드리기_100x70_2019_김민채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형태는 완전하다고 해서 닫혀있는 것은 아니다. 김민채의 경우 원은 원근법적으로 배치되어 타원으로 보이기도 하고, 울타리가 파손되어 있기도 하며, 양 끝이 풀린 채 구불구불한 형태로 있기도 한다. 꼬불이 형태는 원보다 더 자주 등장한다. 작가 말로는 최근 작품의 98% 정도에 등장한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것이 풀린 듯한 이 형태는 다시금 완전함을 지향하는 잠재적 운동성을 낳는다. 작가가 설정한 마법의 원 바깥은 낯설고 무섭기도 하지만 젊은이로서는 알을 깨는 도전이 필요하기에, 작품에는 그토록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은 주로 경계에서 일어난다. 확고한 경계선이 없는 화면은 다소간 산만해 보이기도 한다. 호방하게 풀어낸 속도감 있는 붓질은 유화가 아니라 종이에 먹을 쓰는 형식과 밀접하다. 김민채는 서양화과를 다녔지만, 보다 ‘편하게 다가오는’ 먹을 선택했다. 요즘은 색도 간간히 나오지만, 다양한 농담으로 채워진 화면은 먹에 잠재된 색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먹과 어울리는 재료라고 믿어지는 한지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먹도 마찬가지지만, 재료 자체에 깔려있는 미학적 관념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미 선점되어 있는 관념들은 스스로 필연성을 느낄 때 연구하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망치면 그냥 버릴지언정 수정하지 않는 점은 동양화를 닮았다. 형상과 추상적 필획이 같이 나오는 작품들의 완성의 기준은 더 쏟아 넣을 것이 없을 때다. 그 사이사이에 연필로 보일 듯 말 듯한 낙서같은 이미지들이 있고.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자리하기도 한다. 한지 대신에 쓰는 판화지는 규격화되어 있다. 2019년의 작품들에 100x70cm 크기가 많은 것은 생산된 종이 크기와 관련된다. 그렇지만 자아의 경계와 그 안팎에서의 놀이에 몰입하는 김민채는 그러한 규격 또한 자유와 실험이 행해지는 정해진 시공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큰 작업을 할 때는 수채화지를 사용한다. 신나게 휘두르는 분위기의 작품들은 관념이 재현되는 손끝이 아니라 감성이 실행되는 몸을 전제한다. 




춤추는 보따리_100x70_2020_김민채



나-나_100x70_2020_김민채



자아가 원형상의 변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발 같은 신체 이미지도 출몰한다. 작품 [갈퀴갈퀴](2020)에서는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발 하나가 보인다. 발은 자기 신체의 일부로, 부분으로 전체를 비유하는 어법이다. 이러한 물렁한 유기체와 대조되는 딱딱한 돌이나 돌탑 등도 일기 같은 서사에 합세하는 요소이다. 인물은 해골부터 인체기호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이끈다. 원근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보이는 둥근 울타리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다. 난데없는 발은 그 말단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경계가 와해되는 위험한 순간을 나타낸다. 물론 이러한 와해는 열락의 순간일 수 있다. 기쁨과 슬픔이 같은 표정과 생리적 과정을 낳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품 [무제](2019)에서는 복잡한 형상들 위로 선명한 타원형이 자리한다. 화면이 위를 자르고 있지만 자아의 상징은 화면을 지배한다. 작품 [처음과 끝을 물어](2020)에서는 구체적으로 원이 나오지는 않지만 제목자체가 원을 연상시킨다. 


작품 [춤추는 보따리](2020)에서는 원이 입체화, 사물화 되면 보따리가 될 수도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꼬불꼬불한 선과 인체 기호가 함께 등장하는 흥겨운 화면에서는 터트리기의 연속이다. 김민채의 작품에서 자아의 상징인 원은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타자도 원이며 그 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절대자아가 꿈꿔지기도 했지만, 자아는 상대적이다. 타자 또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작품은 여러 자아가 만났을 때 생겨나는, 또는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추후의 서술이다. 김민채에게 작품은 타인은 잘 읽어내기 힘든 비망록, 또는 일기 같은 것이 된다. 2020년의 작가노트에는 ‘당장 와 닿고 느낀 것을 담아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비망록이나 일기는 과거를 점검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 같지만, 대개는 지금여기를 쏟아내는 것이 주요 역할이다. 그것은 순간순간 변하는 자아를 기록한다. 작품 [우리 집에 어찌 왔니](2020)는 타자와의 만남을 보여준다. 




김민채 여행길 2019 종이에 먹 60x90



탭댄스가능_110x60_2020_김민채



기호화된 인간 형태가 기와지붕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여기에서 타자를 맞아들이는 집은 자아의 확장된 형태다. 두 개의 원이 교차하는 작품 [탭댄스 가능](2020)은 춤추듯이 타자와 조우하는 모습이 경쾌하다. 그밖에 [맞닥드리기](2018), [가리기](2019), [감추기](2019), [저울질](2020), [중심은 어디인가](2020), [움직이기 싫어](2019) 등은 그 제목만으로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주체의 상황을 심리극처럼 보여준다. 타자와의 관계는 복잡해서 화면은 여러 층이 공존한다. 작품 [지레](2018)는 여러 농담의 먹이 중력감이 있는 도상과 부유하는 추상적 형상이 상호작용한다. 작품제목 [또](2018)처럼 도상과 도상이, 흔적과 흔적들은 ‘또’로 연결되는 느슨한 연결망을 가진다, 복잡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붓질은 미끄러질 듯 경쾌하다. 작품 [presto](2018)는 ‘성급하고 빠르게’라는 음악적 용어를 조형적 리듬에 실었다. 작품 [여행길-1](2019)에서 풀어진 용수철같이 그어진 산의 능선이 여행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외향적 성격이라고 자평하지만, 정작 작업을 할 때는 우울하다고 한다. 누군가는 화면을 지배하는 먹의 검은색에서 멜랑콜리를 느낄 수도 있다. 자아를 분석하는 장이기도 한 화면에는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가며 작동하는데, 그것은 자아 자체가 결코 동질적이지 않음을 증거 한다. 자가가 비유한 ‘양파링’은 결코 그자체로 온전한 원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자기를 위해 부서질 수밖에 없다. 김민채의 작품에 뭔가 쏟아지고 터지고 섞이는 변화무쌍한 분위기가 많은 것은 조화로운 자아, 즉 원이 시점이 아니라 종점에 있는 미지의 것임을 말한다. 즉 김민채의 작품은 완성된 자아가 아니라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여정이다. 뭔가 터져 나오는 듯한 이미지가 가득한 작품 [안전지대7](2018)는 자기만의 영역이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나를 두 번 반복한 [나-나](2020)는 나라는 확고한 경계가 터져 그 자연물을 사방에 퍼트린다. 나에 도달하려는 과정은 끝없는 파열과 미끄러짐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에 죽음이나 망각이 작가의 뇌리에 어른거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출전; 북구예술창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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