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춘자 / 서로에게 속한 존재들

이선영

서로에게 속한 존재들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춘자의 [자라는 땅] 전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차원을 화면 가득 펼쳐 보인다. 기기묘묘한 형태의 생명체들은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서 향기, 소리, 촉감까지 자극한다. 올해에 유난히 비오는 날이 많아서 그런지, 다양한 차원의 생태학적 비전이 스며있는 김춘자의 작품들은 소낙비가 내린 후 깨어나는 대지의 생명체들의 꿈틀거림이 담긴 음악 [Soil Festivity](Vagelis)를 떠오르게 한다. 자연에 대한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픔도 있다. 그 슬픔은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다. 슬픔에 얼룩 진 것처럼 붓터치를 살린 근자의 작품 군에는 세월호 사건은 물론 아동학대나 살해 등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회적 스캔들 또한 포함된다. [뿔](2019) 시리즈에는 깊은 슬픔에 눈알마저 녹아내리며, 화가 난 듯한 뿔 자국이 보인다. 뿔난 존재들은 인간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다. 작품 [Hug](2019)에서 슬퍼하는 존재를 위로하는 것은 자연을 상징하는 푸른 몸체다. 




자라는 땅 2001 162.2x130.3cm oil on canvas







헬로우뮤지움에코미술관 전시전경. 이하 모든 사진 자료 출전은 미술관에 있음.



동물처럼 뾰족한 귀를 가진 인간이 인간 머리를 들고 있는 작품 [Hug](2020)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존재를 보여준다. 약자에 대한 폭력은 생명에 대한 공감과 경이로움을 잃어버린 결과이며, 작가는 이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다. 그림을 시작한 이후부터 계속된 자연과 공명은 인간의 잘못이 큰 재앙이 새삼스럽지 않으며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자연에 뿌리를 둔 김춘자의 작품에는 긍정의 에너지가 더 크다. 모든 것이 발생하고 자라고 사라지는 화면 자체가 대지나 모태적 바탕 같다. 원초적 현실(현실계)로서의 대지 또는 바다는 재현될 수 없고 제시될 뿐이다. 작품 속 다양한 존재들은 인간 문명이 멋대로 파헤치고 잘라내 자기식대로 분류하고 유통시키며 소유한 자연이 아니라, 분리불가능하며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원초성을 향한다. 이러한 자연에는 자신 또한 포함된다. 자연을 느끼고 알아가는 것은 그 자신을 느끼고 알아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자연 그자체도 자신도 아닌 적절한 거리가 요구된다. ‘자라는...’이라는 표현처럼, 그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과정이다. 보이지 않는 자연에 무의식과 꿈. 상상과 광기, 사랑과 죽음 등등의 명칭이 붙어지기도 했지만, 보이지 않는 차원을 보이게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 어렵다. 추상미술이 더 어렵고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은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김춘자는 기록이 아니라 기억과 느낌으로 몸과 마음에 담아 둔 것을 꺼낸다. 실제의 자연과는 조합과 배열이 다를 뿐이다. 작품은 인간과 동식물이 만나는 이종교배의 장이기도 하다. 종을 넘나드는 이 괴물같은 존재들은 기이하면서도 경이롭다. 고정된 범주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는 양면적 평가가 따른다. 이질적 존재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따스한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은 형식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공기를 가득 머금은 듯한 신선함도 있고, 토템처럼 뭔가 든든하게 보이기도 한다. 




Hug 2019 45x45cm oil on canvas



Hug 2020 162.2x 130.3cm oil on canvas



뿔 2019 6F oil on canvas



뿔 2019 10P oil on canvas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은유이다. 김춘자에게 대지는 자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진 쿠퍼에 의하면,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적 동물이 상징하는 것은 변화시키는 힘이다. 진 쿠퍼는 [세계문화 상징 사전]에서, 상상의 동물들은 서로 다른 동물들의 특징이 결합되어,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피조물이 다른 모양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다른 존재 형태의 잠재성, 원초의 혼돈이나 무시무시한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고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본래 인간에게 동물은 대립이 아니라, 어떤 고양된 상태를 상징했다. 변화하는 존재, 바로 그것이 괴물이다. 인간의 상징적 우주 속에서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특정한 요소들이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김춘자의 경우, 예술로 괴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괴물자체가 예술의 본질과 닿아있다. 바슐라르가 말하듯이, 예술의 주된 기능은 인간을 변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춘자의 작품에서 다른 것들의 만남은 동등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심지어 인간이 미생물보다 더 왜소하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가 자연에 끼친 폐해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김춘자의 작품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생물학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한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에 의하면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 전체를 대표하는 생물도, 가장 상징적인 생물도 아니다. 인간은 동물 종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는 곤충류의 대표도 아니고 어떤 특수하거나 전형적인 생명체의 본보기도 아니다. 그는 진화론에 대한 책 [풀 하우스]에서 인류의 탄생은 한순간 우연히 일어난 우주적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의 씨앗이 다시 뿌려져 생명의 나무가 비슷한 조건에서 자라난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임을 강조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거대하고 풍성한 생명의 나무에 엊그제 돋아난 작은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나무가 다시 씨앗으로 뿌려진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띄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의식적 존재인 인간은 우연찮게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을 따름이며, 자연은 언제라도 이러한 우위를 뒤집을 수 있다. 




웃음꽃 2014 45.5x33.4cm oil on canvas



김춘자_2005_자라는 땅_158x230cm_oil on canvas



김춘자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보다 더 많이 등장하고 더 다채롭다. 작가는 순전히 상상만으로 그렸다고 믿은 어떤 이미지를 열대 지방에서 발견하고 놀랐다고 말한다. 동서양의 박물지에서 나오는 상상의 동물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또는 그 이상의 원천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진리일 것이다. 인간이 아닌 자연을 기준으로 사고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이다. 자연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선포하고 인간을 중심에 놓은 문명의 논리는 과대평가되었다. 자연은 이제 코드로 재생산되고 있지만, 개발 이익 등, 인간의 단기적인 관심사만을 반영하는 수단일 따름이다.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보이는 존재들을 얼마만큼 결정 짓는지는 COVID19로 알려진 근자의 재앙이 처절하게 증명한다. 작가는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하고 강력한. 인간을 넘어선. 자연의 경고를 무시하면 안된다’고 본다. 


김춘자에게 자연은 활용이 아닌 동행하는 존재이다. 인간중심주의가 배제한 타자로서의 자연은 재현되는 대상이 아니라 변화가 암시되는 잠재태로 나타난다. 작가는 초창기 작품부터 알에서 꼬리만 빠져 나온듯한 올챙이 모양의 꼬물거리는 형태가 자주 나타났다고 말한다.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애벌레나 태아 같은 형상들은 마치 알이나 씨앗 같은 위상을 가진다. 이 잠재적인 것은 무엇으로라도 현실화될 수 있다. 접혀있던 것이 펼쳐지고 그 반대도 가능한 과정이다. 복합적인 존재가 많이 등장하는 김춘자의 작품은 이상적 유기체를 다시 정의한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정의한 ‘기관 없는 몸’을 닮았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은 자연적 유기체의 퇴행이 아니라 좀 더 풍부한 잠재성으로 소급되는 역행을 말한다. ‘기관 없는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더더욱 살아있으며 다수성으로 가득 찬 몸이다’(들뢰즈와 가타리) 




자라는 땅 2018 15F oil on canvas



자라는 땅 2019 20P oil on canvas.



엘리자베츠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가설을 ‘인간의 몸을  타자의 몸과 다른 사물들의 흐름이나 분자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계층화되고 통일되고 조직화되고 위계질서화에 앞서는 것으로서의 몸’을 ‘속도와 강도의 표면으로’대체한다고 해석한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과 비교될 수 있는 있는 것은 성층화 되기 이전의 알이다.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지층형성 이전의 충만한 알, 강렬한 알의 위상을 가지는 꼬물거리는 미지의 생명체가 김춘자의 작품에 편재한다. ‘자라나는 대지’라는 개념은 자연을 재현하기 보다는 생성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재현과 달리 생성은 무엇으로도 될 수 있다. 대지는 몸처럼 자란다. 그러나 이전의 유기체적 몸은 아니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몸을 조직화와 구조화되기 이전으로 소급하는 것은 ‘생산, 순환, 욕망의 강화를 위한 장’, 즉 탈주를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김춘자의 작품 속 기묘한 도상들은 동식물 도감이나 사진 자료가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이를테면 작가가 낳았다고도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실제로 작가는 20대 중반에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느꼈던 태동을 잊지 못한다. 태아는 주체 내의 타자의 예이며, 이러한 타자와 소통해야 하는 예술가에게 전범이 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인류사의 대부분에서 여성은 이러한 중요한 사건을 예술화시킬 기회나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이전 작품 [생](1988)에서는 지하계에 알에서 막 깨어난 애벌레 같은 것들이 오글오글하고, 여러 동식물의 기관들이 조합된 듯한 괴물들이 있다. 1998년의 작품 [생]에서는 여러 존재 합체한 괴물적 형태가 대지의 틈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땅과 밀착된 미지의 존재에는 유방이 달려있어, 자연은 여성적인 느낌이 농후하다. 작품 [무덤 꽃](1989)에서 동물, 식물, 미생물 등이 오글거리는 붉은 몸은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지만, 굳이 성을 붙이자면 여성에 가깝다. 




Blossom 2013 20P oil oncanvas



Three earth 2013_145.5x112.1cm_oil on canvas



꽃밭에서 2016 100F  oil on canvas



세계에 대한 탐구이면서 자신에 대한 탐구이기도 한 김춘자의 작품에서 자연은 여성적 존재이다. 특히 동물 이미지가 그렇다. 자연이라는 보다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동물을 매개로 인류의 상상과 상징 속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여성성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동물은 결국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간단하게 정의한다. 저자는 불어로 인간이란 뜻의 ‘un homme’이 남성의 뜻을 동시에 가진다고 하면서,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여성도 인간이 아니다. [철학자들의 동물원]에 의하면 여성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남성을 위해 창조되었고 남성은 짐승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여성을 명명함으로서 다시한번 여성을 창조한다. 저자는 여성을 ‘결핍된 남성’으로, 중도에 중단된 발전으로 인해 결코 남성의 완벽함에 도달하지 못할 남성의 밑그림으로 만드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을 말하면서, 정신분석학 또한 이러한 전통에 속한다고 본다. 정신분석학도 여성적인 정체성은 부차적이고 부정적인 정체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동물원]은 아이들을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그리고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동물성의 질서를 가리킨다고 보면서, 저명한 철학자의 말은 인용한다; ‘여성들은 오로지 종의 번식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들의 소명은 그 점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여성들은 개체로서보다는 종족으로서 살아간다’(쇼펜하우어) 이러한 생각은 아담은 정신을, 이브는 육신을 표현하고, 육신은 소멸하기 쉬운 것이라는 신화까지 소급된다. [철학자들의 동물원]은 여성이 남성적인 담론, 즉 지배 담론에서 주로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동물적인 존재로 나타난다고 결론 내린다. 저자는 다양한 예를 든다. 악과 유혹의 뱀, 수다 떠는 새들, 번식력 있는 암퇘지, 기사가 올라타는 암말, 남성들을 모방하는 원숭이와 동일시되는 여성은 결정적으로 인간과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전능한 모성을 통해 다시 복권되기도 한다. 그러나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공포의 권력]에서 말하듯이, 위협적이지만 영양을 공급하는 이질성으로서의 모성은 신약을 비롯한 후세의 신학에서 죄 많은 육체로만 각인될 뿐이다.


 


Echo 2008 100P oil on canvas



Green Map-2006 273x215cm_캠버스 천위에 유채



임신한 여성처럼 타자를 받아들이는 육체의 모호한 위치는 지금도 여전하다. 여성은 위대한 모성과 순수하지 못한 몸이라는 두 개의 극단에서 널을 뛴다. 사회의 지배적 담론에서 여성과 자연이 일체화시킬 때의 난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몸, 여성, 자연 등을 도구화,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과 자연의 연대는 여성 스스로에 의해 다시 정의될 수 있다. 여성/예술가는 자연과 자신에게 충실한 가운데 금기시된 어두운 대륙을 탐사한다. 여성이 자연과 가까운 존재임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여성이자 예술가를 통해 이 자연은 눈을 뜨고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생명체를 탄생시킨 축축한 환경을 개체의 체내에서 반복하는 임신의 과정은 뭔가 꼬물거리는 듯한 존재의 원형이다. 김춘자의 작품에도 생물학자들이 원시생명 수프라고 부르는 상태가 나타난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원시 바다와 대기를 구성하고 있던 성분에 화학적 연쇄 반응이 일어나고, 그것에 자기 조직화를 유발하는 물리적 원리가 작용한 결과 생명이 출현했다고 말한다. 


임신한 여성의 뱃속에서는 바닷속 존재부터 시작되는 생명의 과정이 반복된다. 김춘자의 작품에 흐르는 또 다른 자연적 기조는 여행에서의 체험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 강원도 정선에 여행가서 좁쌀 술을 먹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새소리에 잠이 깨 본 달 아래의 이슬 머금은 야생화들에 대한 인상을 말한다. 작가는 자신안의 무엇을 일깨우는 강력한 무언가와 만난 것이다. 그것은 몇 십 년 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신비한 체험으로 남아있다. 자연의 기운이 충전된 봄의 산 속에서 정작 새는 보지 못했지만 새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비경은 사라진 새를 상상하게 했고, 지금도 김춘자의 작품 속에서 서식한다. 작가가 실제로 본 것이 무엇이었든, 어떤 느낌으로 그때 거기에 서 있었는지는 이후의 작품들 속에 스며있다.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는 이러한 원초적 체험은 이후에도 자주 다닌 국내외 여행에서 크고 작은 차원에서 반복되었다. 




나는 그린이다 2019 30F oil on canvas



자라는 땅 2017 140x140cm oil on canvas



자라는 땅 1999 20F oil on canvas



얼마 전에 다녀왔던 스위스나 발리같은 이국적 장소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앞의 산 속 꽃과 잎들과도 매번 새롭게 조우한다. 작업이 작가를 변모시켰고, 그 결과 보다 빈번한 자연과의 인상적 만남이 가능했을 것이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본 자의 역량이며 표현 또한 그러하다. 준비된 자만이 변모할 수 있다. 몸에 저장된 기억은 매일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퍼내야 고이는 것이 예술의 샘이다. 많이 퍼내서 마르는 것이 아니라, 퍼내지 않기에 말라버리는 것이 작업이다. 김춘자에게 작업은 생명과 나를 발견하려는 여정이다. 여행에서의 인상을 온몸에 담아와 그림으로 다시 발아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하루 10시간 가까이 작업에 몰입하는 삶이 아니라면 여행에서의 경험 또한 소비나 휴식이라는 기능만 남긴 채 다 떠내려갈 것이다. 작가의 심신을 갱신시켰던 체험은 작업으로 반복된다. 자연과의 접속을 계속 유지함으로서 작가는 작업 내부에 자리하게 한다. 


물론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틸 바스티안은 [가공된 신화, 인간]에서 자연의 무목적성과 인간문명을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전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자연에서는 부분적으로 우연에 의해 조성된 조건, 예측이 전혀 불가능한 조건 하에서 선별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선별이 미래를 예견하며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사고의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다. 틸 바스티안은 진화 인류학 분야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자기 자신과 같은 목적 지향적 행위자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든다. 그렇게 인간은 문화를 창출했다. 인류학자들에게 새로운 문화 창출은 호모사피엔스의 독자적인 영역이다. [가공된 신화, 인간]에서는 동물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한다. 미래를 내다보며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실제로 경험하는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는 가상 세계를 상정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성과였으나 그 대가로 갖가지 두려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자라는 땅 2011 10F oil on acrylic canvas



자라는땅-53.0x45.5cm_2012 acrylic on canvas



바라보는산_1991 116.8x91.0cm_oil on canvas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의 대가로, 인간은 당황스러움과 불안함에 시달린다. 황량한 세상에서 정처 없이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그것이다. 그것은 예술이 원초적 자연을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이유가 된다. 두 번째 차이점은 자연이 인간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틸 바스티안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유기체가 꼭 필요한 반면, 다른 유기체들은 언제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명한 관계를 역전시키려는 인간의 무모함이 재앙을 낳는다. 김춘자는 자연의 순리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의 부제와 같은 [자라는 땅] 시리즈에서 ‘자라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땅이다. 김춘자의 대표적인 작품 속 자연은 부드럽고 따스하고 신기하며 경이롭다. 이러한 다채로운 자연은 유화의 유연성에 담긴다. 특히 공기의 느낌이 있는 발색 법은 이것이 유화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독특하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수많은 방법이 생겨나 그림의 위치는 상대화되었지만, 김춘자에게 그리기는 숨쉬기만큼이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 되었다. 작업은 숙제도 노동도 여가선용도 아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화가라고 불러준다. [자라는 땅] 시리즈는 20년 넘게 진행 중인 것으로, 김춘자의 작품 경향을 압축한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2005년의 작품은 뿌리까지 드러낸 식물의 상승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여러 색과 모양의 잎은 마치 배경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하다. 물인지 뭍인지 알 수 없는 푸른 배경에 떠 있는 환상의 새를 그린 2001년의 작품은 비몽사몽간에 듣기만 하고 보지 못했기에 더욱 환상적으로 표현된다. 동양의 환상적인 새 봉황처럼 그자체가 여러 동물의 복합체다. 2011년의 작품은 다양한 동식물이 정물화처럼 한데 모여 있다. 아크릴로 그린 2012년 작품은 종과 종, 유기체의 단편들이 화려한 색감 속에 한데 엉겨있지만 혼란스럽지는 않다. 




겨울나기_1992 162.2x130.3cm_ oil on canvas



비밀 1994 oil on canvas 194.0x130.3cm



꼬부라진봄_1995  162.2X130.3cm_ oil on canvas



1999년 작품에서는 마치 피자 모양의 대지 위에 꼬물거리는 생명체들이 보인다. 김춘자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이러한 미시적 존재는 삶과 죽음을 순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틸 바스티안은 생명현상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 즉 죽음이 찾아오면 부패균이 유리의 주검을 무기물 상태로 되돌려 놓음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위한 공간을 창출한다고 말한다. 미생물은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지구의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박테리아가 대표적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화석 기록상 최초의 생물 형태는 원핵생물, 즉 박테리아라고 말한다. 저자는 [풀 하우스]에서 지구 생명의 역사 절반 이상은 박테리아 혼자만의 무대였고, 생명은 박테리아를 여전히 같은 위치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박테리아는 태초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저자는 처음 20억년 동안, 생명 역사의 절반이 지날 때 까지도 지구의 생명나무는 박테리아만으로 구성되었다고 지적한다. 


가장 극단적인 조건에서 사는 박테리아는 죽은 생물의 주요 분해자로서, 생태계 내부의 근본적인 에너지 순환을 성립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담당한다. 저자에 의하면 지구상에는 다른 생물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다. 게다가 박테리아는 생명의 역사 전반부를 홀로 지켰고 다른 생물이 등장한 후에도 다양성을 끊임없이 증가시켰다. 저자는 박테리아가 지하에 사는 것들까지 합치면 다른 모든 생물을 합친 것보다 더 무겁다고 보면서. 박테리아는 그 중요성과 영향력에서 언제나 생명의 중심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김춘자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고물고물 활동하는 미시적 생명체를 우주의 보편적인 생명 형태로 간주한다. 지구의 주인공처럼 작품의 주인공도 인간이 아니다. 2017년의 작품에는 미지의 생명체가 푸른 바탕 전면에 걸쳐 추상적으로 배치된다. 2018년 작품에는 인간과 동물간의 우호적인 관계가 식물을 배경으로 표현된다. 




참고_1988_생_360x135cm_캔버스천에 유채



참고_1989_바라보기와노래부르기_300x135cm_캔버스천에 유채



참고_1989_무덤꽃_180x135cm_캔버스천에 유채



참고 1998 `생` 360x 135cm oil on canvas



김춘자의 작품에서 자연의 단편이 복합된 방식은 마치 각각을 단어로 삼아 문장을 만드는 방식이다. 작품 [Blossom](2013)은 사람 눈을 가진 양이 손으로 양의 귀를 가진 인간의 머리를 안고. 인간 머리에서는 꽃다발이 나와 있는 모습이다. 여러 존재 또는 상황의 조합에서 스케일은 자유롭게 조절된다. 작품 [Echo](2008)에서 붉게 물든 나무들은 마치 붉은 꽃잎이나 열매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식물들 내부에 있는 동물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에 달라지는, 자체의 맥락을 가졌다. 작품 [Green Map](2006)에서 다양한 것이 공존하는 숲 한가운데에 가름마 같은 길이 나있다. 작품 [나는 그린이다](2019)에서는 숲과 하나 된 얼굴이 보인다. 작품 [Three earth](2013)에서 식물은 동물의 귀로, 동물의 귀는 인간의 얼굴로, 인간의 등에는 꽃이 히는 식으로 존재의 연쇄를 보여준다. 명암이 대조되는 두 얼굴이 있는 작품 [꽃밭에서](2016)는 고양이와 인간이 합체하며 식물도 배경으로 참여한다. 


식물, 특히 초롱 모양의 꽃들은 김춘자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태한다. 작품 [꼬부라진 봄](1995)에서 물속의 인어공주 같은 존재의 머리는 꽃이며 초롱 모양의 다른 꽃들과 교감한다. 작품 [비밀](1994)에서 초롱모양의 꽃을 쓴 여인은 자기를 둘러싼 동식물은 물론 달과 교감한다. 한쪽으로 쏠린 팽이 버섯같은 식물이 있는 [웃음꽃](2014)은 꽃술이 웃는 모양이다. 신체 기관 중 눈은 이질적 존재들을 연결시켜주는 매개고리이다. 작품 [겨울나기](1992)에서 쩍쩍 갈라진 땅의 질감을 가진 거대한 새의 눈은 존재가 처한 어려움을 설득력있게 표현한다. 동물의 경우 뿐 아니라 대지 또한 눈, 특히 사람의 눈을 가진다. 작품 [바라보는 산](1991)은 눈을 가진 대지가 새와 나무와 소통한다.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바라보기와 노래부르기](1989)에서 대지에서 싹을 틔우는 미지의 존재에 사람의 눈이 달린 것은 익숙함과 낯섦을 뒤섞는 김춘자의 방식이다.

 

출전; 헬로우뮤지움에코미술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