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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사람들 전 / 신화에 의한 역사의 갱신(1)

이선영

신화에 의한 역사의 갱신

  

이선영(미술평론가)

  

1. ‘별이 된 사람들’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 특별전으로 열리는 ‘별이 된 사람들’은 전시부제가 시적이이다. 그냥 시도 아니고 서정시다. 전시부제 뿐 아니라 참여 작품의 면면 또한 그러해서, ‘광주 5.18’할 때 우선 떠올려지는 격렬한 저항/ 피 흘리는 희생/ 위대한 선구자 등의 묵직한 관념을 걷어낸다. 전시부제에 포함된 ‘별’은 관객의 시선을 보다 먼 쪽으로 이끈다. 별은 40년이 아니라 수백만 광년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별 빛의 출발점은 제각각이며, 휘어졌다고 가정되는 우주공간에서의 궤적 또한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선구자와 희생자의 숭고함은 이어진다. 광주에서 흘린 피는 닦여졌지만, ‘별이 된 사람들’이란 결국 죽은 사람들, 특히 5.18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를 담는다. 광주에 소재한 대표적인 공공 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5.18을 주제로 한 그간의 전시들에 많이 보이던 코드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광주 한복판이었기에 가능한 발상일 수도 있겠다. 5.18 광주에 대한 묵직한 코드를 생산했던 대표적 미술 사조는 민중미술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미술관에 있음)


 

20대에서 70대까지 걸쳐있는 국내외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에서, 미술계에서 ‘민중미술가’로 분류한 작가는 몇 명 안된다. 40년이 지난 지금 민중미술은 역사화 되었다. 민중미술이 발생하고 전개되던 80년대-90년대만 해도 5.18의 실상에 관련된 다큐멘타리나 영화 등을 남모르게 숨죽여봤던 시절이었으니, 분명한 적대 세력을 설정하고 대결하는 구도가 성립될 수 있었다. 대결구도는 선명성을 요구한다. 지금도 각 당을 대표하는 유치찬란한 색들을 낳은 고정관념이다. 여기에 아련한 별빛이 끼어 들 여지는 없다. ‘별이 된 사람들’ 전은 몇 십 년 전 같았으면 낭만주의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시대를 반영하고 변혁하려 했던 민중미술은 물론, 모더니즘과 더불어 현대미술의 한축을 차지하는 아방가르드,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 번성한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조 또한 역사와 현실을 총체적이든 단편적이든 담아냈다. 계급적 한계 때문에 일부러 외면하지 않는 이상,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인 5.18을 모를 수는 없다. 아직도 정확한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 민간인 학살 주동자의 사과 등은 받아내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사실관계의 윤곽은 대략 밝혀지고 있다. 


5.18은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사람 나이로 치면 불혹(不惑)이다. 이제는 그때의 사실과 진실을 확인하는 문제를 넘어선 또 다른 비전이 필요하다. 진실규명이라는 역사의 기본적인 과제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바는 제한되어 있다. 물론 시와 역사를 구별했던 오랜 미학적 전통에 의해 예술은 보다 보편적인 진실을 담는다고 기대되었지만 말이다. ‘리얼리즘’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앎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로이트가 물신주의를 설명하면서 말한 ‘알고 있다. 그러나...’가 얼마나 많은 기만적인 현실을 낳는가. 아름다움(美)에서 진(眞)과 선(善)이 단절된 현대 예술은 특히 그러하다. 1980년대를 넘어선, 동시대의 작품들도 포괄하려는 전시 주최 측은 ‘당시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집단지성과 이타심을 핵심 주제어로’, ‘분노와 슬픔에서 희망의 시작이 되는 미래지향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아득히 먼 별에 상응하는 미학적 관념은 ‘숭고미’이며, 전시된 작품의 면면을 관통하고 있다. 별에서 발산되는 빛은 시대의 어둠이 할퀸 상처를 치유하는 매개가 된다.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에서 촛불로 계승된 계몽의 서사, 그 매개는 빛이다. 빛은 어둠과 밝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대립 항을 만든다. 




조정태, 별이 된 사람들, 2020, 캔버스에 오일, 194x1173cm



쉴라 고우다Sheela Gowda, Darkroom다크룸-광주, 2020(concept 2006), 내부전경



칠흑 같은 밤이 선사 시대 인간에게 주었을 공포감은 대규모 정전사고가 나야 체감될 수 있을 따름이다. 빛과 어둠이라는 근본적인 구별에서 다양한 대립 항이 파생되었다. 이원론은 모든 상징주의, 그리고 형이상학의 바탕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이러한 빛의 형이상학이라는 전통을 따라가면서, 진리는 존재에 비춰지는 빛이라고 정리한다. 그에 의하면 빛이 충만할 때 빛은 진리가 충현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명약관화한 명백함을 창조한다. 그러한 빛의 원천은 태양이다. 진리를 포함한 동일성에 대한 사유나 상상은 인간이 관찰한 천체 현상과 관련된다. 로렌초 키에자는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인에게 자연, 즉 천체들이 하늘에서 규칙적인 천구의 궤도를 따르는 듯 보였고, ‘항상 동일한 자리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참조했다. 이러한 전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자연학과 형이상학 모두의 궁극적 보증자)이라는 철학적 체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신은 왕으로, 세계화가 가속도가 붙은 1980년대 변방의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불법적 독재자에게도 권력의 상징으로 투사될 수 있었다. [주체성과 타자성]에 의하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과학의 위기는 지구와 하늘의 관계의 역전에서 기원한다. 그것은 갈릴레이의 물리학이 야기한 혁명인데, 이제 우리는 ‘천체들이 동일한 자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라깡) ‘포스트 민중미술’을 포함한 여러 ‘post-’ 국면의 공통점은 중심 집중적인 동일성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세계화는 중심의 힘을 제국주의적으로 확장했지만, 바로 그 그물망을 통해 역발상 또한 퍼져나간다. 80년 광주(그와 비슷하게는 89년 천안문 사태)의 세계사적 의미는 철학적으로 논구—‘5.18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김상봉 교수의 논문을 참조—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보다 넓은 타자의 지평이다. 미학적으로도 숭고는 바깥을 전제한다. 천체는 여전히 진리의 상징이 돼주지만, 주체(신, 왕, 독재자 등)에 타자화 된 이들에게는 다른 의미의 기준이 된다. 절대적 중심으로 간주된 태양도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 중의 하나라는 혁명적 의식은 주체와 타자 간의 비대칭적 관계망을 흔들었다.    

 


2. 미학적 배경; 숭고


별이 된 사람들’ 전은 일상의 시간은 물론, 역사와 자연의 시간대를 넘어서 천체의 시간 지평까지를 아우르면서 불가피하게 숭고미와 연결된다. 5.18 자체가 군부독재의 가공할만한 폭력에서 발단되었을 뿐 아니라, 시민의 저항 또한 인간의 행동 및 심리에 있어 이해타산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경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숭고는 ‘절대적으로 큰 것’(칸트)이다. 절대적으로 큰 악에 대항한 절대적으로 큰 선은 신화적일 수 있지만, 신화는 일상과 역사를 관통하여  편재한다. 전시된 작품들 또한 그날의 사건을 낱낱이 재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숭고와 마찬가지로 제시될 수 있을 따름이다. 장 뤽 낭시가 편집한 [숭고에 대하여]는 많은 미학자들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이 전시의 기저에 깔린 숭고미를 이해하는데 참조점(이하 이번 장에서 인용된 미학자들의 논문들은 모두 이 책에 포함됨)이 될 것이다. 장 뤽 낭시는 [숭고에 대하여]에서 재현은 적합성과 의미를 매개로 구성되지만, 제시는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과 그 사건의 섬광에 관여한다고 말한다. 숭고는 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안두진, 마콤에서 벌어진 은밀한 파티, 2020



루이 마랭이 [푸생의 그림 속 바벨탑에 관하여]에서 말하듯이, 숭고는 ‘보게 해 주는 대신 눈을 멀게 하는 빛, 듣게 해주는 대신에 귀를 멀게 하는 소리’와 같다. 장 뤽 낭시는 예술에 대한 사유의 핵은 숭고이며 미는 단지 그것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숭고는 ‘그것 없이는 미가 미일 수 없을 어떤 것, 또는 그것 없이는 미가 한낱 미에 그칠 뿐인 어떤 것’(칸트)을 대변한다. 숭고는 미에 부차적으로 덧붙여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키고 빛나게 하기 위해 있다. [숭고에 대하여]에서는 ‘우리를 매혹하는,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심지어 미조차도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결여하게 될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부왈로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가공할 만한 폭력에 대한 역사들 또한 ‘저 스스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을 드러내는’(칸트) 과제를 요구한다. 미가 형태라면 숭고는 그 형태가 가능하기 위한 바탕이다. 


자콥 로고진스키는 [세계의 선물]에서 플라톤의 코라, 즉 형태가 없는 모든 형태의 모태와 숭고를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숭고의 감정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언제나 공간적 바탕 위, 공간의 무변광대함’ 앞에서이다. 요컨대 숭고는 ‘일정한 넓이의 추상적 공간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공간의 순수형태’, ‘현상들에 선행하는 야생적 공간’을 발견하게 해준다. 숭고가 자아내는 감성 또한 미와는 다르다. 리오타르는 [숭고와 관심]에서 숭고는 관념과 형태의 불행한 만남으로부터 배태된 자식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숭고에는 걷잡을 수 없이 풀려나와 휩쓸려 올라가는 폭력과 활기가 있다. 리오타르는 맹렬한 감정, 또는 감정의 폭력인 숭고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성의 만족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질서의 전복, 불경죄 또는 신성 모독. 숭고에는 모독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다. 형태나 경계가 확실한 미와 달리 숭고는 바깥으로 열려 있다. 




임옥상_ 광장에,서II, 2019



‘열림에서 오는 순수한 정동(affect)’(엘리안 에스쿠바)이 숭고이다. 자유 또한 ‘근본적으로 열려있는 것’(들뢰즈)이다. 미와 숭고는 미학에서 뿐 아니라, 시간의 차원도 다르다. 자콥 로고진스키에 의하면 아름다운 형태는 현재의 은총 속에서 자신과의 유희를 즐기면서, 일순간에 자신을 제공한다고 본다. 반면 숭고는 일체의 제시와 유한한 지속을 뛰어넘는 무정형-무제한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과거의 무한함은 숭고하지만, 얼굴을 알 수 없는 미래의 무한은 더욱 숭고하다. 지난 40년 동안 많은 작가들이 그와 관련된 재현적 작업을 해왔고 그로 이해 핍박받기도 했으며,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역사의 짐을 내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광주 지역에서조차 5.18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사실규명이라는 법적, 과학적 작업은 병행된다. 하지만 예술의 경우 보다 광대한 지평으로 5.18을 배치할 필요가 있으며, 이 전시는 이러한 요구를 담고자 한다. 


정치적 행위와 예술의 관계에 있어 자유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 자콥 로고진스키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연구하면서, 그 책이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자유의 영역으로 이행하도록 해주는 심연 위에 놓인 다리를 탐색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지 않는 새로운 시작, 즉 자유는 숭고의 뛰어난 예이며, 5.18을 비롯한 모든 자유를 향한 인간의 몸짓을 설명해 준다. 이때 자연의 역사는 ‘자유가 행동을 개시하여 스스로를 펼치기 시작하는 무대’(장 푸랑수아 쿠르틴)가 된다. 장 뤽 낭시는 ‘시작의 가능성 그것이 바로 자유’라고 보면서, 자유는 뛰어나게 숭고한 관념이라고 평가한다. 국민들에게 위임받지 못한 독재정권의 폭력은 결코 늘 상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는 자연과 같은 것인가. 그것이 만약에 자연의 힘이라면 이에 대항하는 것은 자유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추구에 대한 대가는 크다. 5.18 민주항쟁 뿐 아니라 예술적 작업 자체 또한 자유의 역설을 공유한다.(2편에서 계속 됨) 


출전; 광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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