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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희 /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선영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선영(미술평론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한 때 한국 사회의 귀감으로 제시되었던 어떤 기업인의 모토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구로 드러났지만,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언뜻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자본 아닌 노동도 국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어 자기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논리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림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등장인물이 상대적으로 작고 나머지 공간을 시원하게 비워놓곤 하는 최선희의 작품에서 일단 세계는 넓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안의 인간들은 할 일이 없는 듯 한 자리에 못 박혀 있다. 그들은 비워진, 또는 지워진 공간 속 어딘가에 좌표화 되어 있을 뿐,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자리가 없다. 또는 지극히 협소하다. 넓은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는 작품에서, 인물이 자리한 양상과 그를 둘러싼 공간을 비교해 볼 때 작품 속 공간(space)과 자리(place)의 차이는 극적으로 다가온다.  




길을 잃다_캔버스에 유화 54*67cm 2017



놓아버린 것_캔버스에 아크릴 92.5*118cm 2018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자리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낯섦 이외에는 의미가 없던 추상적인 공간(abstract space)이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인 자리(concret place)가 된다’(이푸 투안)는 한 인문지리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공간이 친숙해질 때야 비로소 자리가 된다’는 이 책의 논지에 의하면, 최선희의 작품 속 인물들은 자리는 공간에 비해 빈약하다. 작가는 일상을 자세히 관찰하지만, 결국은 하나하나 지워나가는데, 그것은 현대인의 구체적 자리의 소멸에 대한 메시지와 관련된다. 이번 전시는 2015년 개인전 ‘곁에’전(아트 스페이스 너트)에 비해 비워낸 기색이 역력하다. 가장 친숙한 사적 공간인 집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 [집]은 어디인지 불분명한 공간감이 특징적인데, 발처럼 드리워진 다른 톤의 색은 저편의 형광등이 실내의 풍경을 암시한다. 집은 우주처럼 텅 비어있다. 텅 빈 공간은 창살 없는 감옥 같이 인간을 수동화 한다. 


자유로운 듯 강압적인 질서, 그 무의미한 질서를 내면화한 간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데다 죽은 듯 자는 방치된 존재들을 볼 때 동물도 떠오른다. 동물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그것은 타자의 공동운명이다. 얼마 전 신문에 돌고래 쑈 등을 위해 수족관에 갇혀있던 돌고래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다가 죽었다는 기사가 떴다. ‘수족관이라는 인공생태계는 수십 키로 미터가 넘는 돌고래의 행동반경에 비한다면, 인간을 욕조에서 평생 보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견을 비롯해 인간의 만행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최선희의 작품에 암시되는 도시에 사는 소시민의 입지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주체라고 간주된 존재는 돌고래만큼의 자유라도 있는 것일까. 뤽 페리는 [미학적 인간]에서 ‘사회적 질서란 결국 소유권의 배분에 근거하는 표상에 따라서 각각의 행위자들이 계급화시키고 계급화 되어가는, 분류화시키고 분류화된 판단들의 총합에 불과한 것’(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학적 관점을 인용하면서 근대적 주체의 죽음을 주장한다. 




행복에의 의지_캔버스에 유화 62*74cm 2018



의지하는 벽_캔버스에 아크릴 91*116.8cm 2020



근대 이후의 사상에 의하면 주체는 타율적이다. 주체 대신에 부각된 것이 개인이다. 그러나 그 개인은 각종 미디어의 영향권 아래서 진부함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이 문제다. 새로운 미디어는 가상적 이동은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그 건너편의 육체는 더욱 쪼그라들고 고정되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행위자들이 결속을 끊고 서로 만나지 않고 스쳐갈 수 있도록 해준 기술의 역할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힘은 전자화된 신호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자본의 흐름은 그토록 유연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특정 직업에 스스로를 가두어 마비되기 보다는 어떤 가능성의 네트워크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빌 게이츠)이 선호된다. 그러나 그러한 변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네트워크를 자기화 시켜야 하는 과제가 따르며, 이 부분에서 어떤 부류는 상당한 지체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계급의 차이를 더욱 벌린다. 


[액체 근대]는 현대 도시적 삶에서의 분리현상을 묘사한다. 그에 의하면 서로 다른 계층은 살면서 조정과 타협을 거치는 대신 아예 분리시키는 삶을 향해간다. 최선희의 작품에서 경계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편재한다. 넓게 트인 공간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가 매일 산책하는 코스 등 자신에게 친숙한 공간을 추상화시킨다. 거기에도 자리가 발견된다. 작품 [놓인 자리]에서 폐허 같은 장소 저편으로 보이는 빨간 의자는 마치 장난감처럼도 보인다. 자리라고 하기에는 임시적이고 초라하다. 누군가 쓰레기라고 치우면 사라진다. 그러한 자리의 주인들은 근대적 주체가 소유했다고 믿어진 자율성과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관찰에 의하면 주변에 의자가 없지 않은데도 굳이 간이 자기 의자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만의 자리에 대한 소망이리라. 작가는 작품 [놓아버린 것]에서 실내인지 외인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선 하나만을 남기고 배경을 지워버렸다. 




_캔버스에 유화 92*74cm 2018



보통사람_캔버스에 유화 116.8*91cm 2020



땅은 물론 하늘이나 바다조차도 좌표화 되어 촘촘한 레이다 망에 걸쳐있는 현대사회에서 자기 자리는 추상적이다. 그 안에 있었을 인간이 ‘놓아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추상적 공간 속에서 구체적 개인이 잡을 수 있는 것을 정해져 있고, 그것이 정해져 있는 한 높은 경쟁률을 가진다. 현대사회는 자신들이 사는 곳을 사막으로 만들어 놓고 높은 물 값을 매긴다. 이러한 사회의 생산과 소비는 물신적 체계와 밀접하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공간이 항상 사회적 권력을 담는 그릇이라면 공간 재조직은 언제나 사회적 권력이 표현되는 틀을 재조직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지구상의 다양한 공동체를 상호경쟁의 악다구니로 몰고 가는 공간의 수축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공간은 연결되어 있기에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집중된 자본주의는 가장 발달한 부문의 경우 방향을 완전히 구색을 갖춘 시간 블록들을 판매하는 쪽으로 향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은 상품생산을 통한 사회생활의 재생산과정이다. 자본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성장을 이루고 새로운 욕망을 창조하며 인간의 노동과 희망의 가능성을 착취하며 생활속도를 가속화시킨다. 사회적 힘은 자연력과 마찬가지로 구성원들을 이리저리 쓸어낸다. 달빛이 비추는 여름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마르지 않는 밤]은 시원한 녹색이기 보다는 녹조로 탁한 물 같은 녹색을 떠올리는데, 더위에 지쳐 바깥에 나온 한 남자의 뒷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이 장면의 목격자 또한 땀이 마르지 않는 밤을 견디기 위해 밖으로 나온 참이다. 둥근 감시거울 안의 초소와 인간이 있는 왜곡된 채 안치된 작품 [자기 그림자]에는 감시망을 의식하며 스스로 조절하는 사회의 비전이 담겨있다. 최선희의 작품은 넓은 공간 속 작은 인간이 특징적이며 그것은 거대 구조와 미소한 인간의 대조로 이어진다. 구조의 힘이 커져 갈수록 왜소해 지는 인간의 상황을 반영한다. 




_캔버스에 유화 33*42cm 2020



솟아오른다_캔버스에 유화 73.5*93cm 2020



마르지 않는 밤_캔버스에 유화 90*90cm 2018



하늘과 바다 또는 땅이 구별되지 않는 장대한 광경 앞에 선 인간이 있는 작품 [너의 말은]은 칠흙 같은 공간 가장 자리에 심연을 바라보는 낭만주의 풍경화 같은 작품이다. 그가 직면한 세계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앎을 통한 지배도 불가능하다. 인간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배우같은 존재라면, 무대는 사실주의적 세세함을 버리고 암시만 한다. 그렇지만 완전한 추상화도 아닌 작품들은 제목 등을 통해 말한다. 원경에서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하는 사람이 보이는 작품 [싹]은 대략 쓱쓱 칠해 표현한 전경에도 불구하고 밭일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작품 속 인간의 노동은 하찮은 소일거리 취급을 받을 것이다. 작품 [노숙자의 찬송가]는 기차역 같은데서 노숙자를 위한 급식할 때의 모습이 연상 된다. 종교단체에서의 봉사활동이라서 찬송가나 기도를 해야 식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쉽지만, 굶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작가는 누추한 상황이 드러날 주변의 모든 것을 삭제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서 혹독한 상황에 내던져진 지상의 존재를 보편적으로 표현한다. 상황은 이성과 비교되는 개념이다. 이성이 명분과 당위만 앞세우는 유아돈존 적인 논리를 가진다면, 상황논리를 상대적이다. 현대 사상가들은 이성보다 상황을 더 주목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의 저자 62세에 권총자살을 택한 1968년 혁명의 주인공 기 드보르의 죽음을 추모하며, 부록을 쓴 저자 조슈아 글렌은 [한 상황주의자의 죽음]에서 기 드보르가 광고, 매체 이벤트, 오락, 그리고 의사소통 기술의 무한정한 분출에 둘러싸인 현대인을 비판하며 필사적으로 매개되지 않는 현실을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존재는 항상 도처에서 수동적인 소비를 고무하도록, 따라서 우리의 삶으로부터 직접적인 경험, 정서, 그리고 관계를 박탈하도록 디자인된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놀이_캔버스에 유화 90*72.7cm 2020



아직 그곳에 있다_캔버스에 아크릴 162.2*112.1cm 2018



여행자_캔버스에 유화 54*47cm 2020



[한 상황주의자의 죽음]에 의하면 한때 우리는 삶을 살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시청한다. 기 드보르에게 있어 매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기 드보르에 따르면 스펙타클은 대화를 허용치 않을뿐더러 바로 ‘대화의 대립물’이다. 그것은 ‘기존질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하는 자신에 관한 담화’이다. 같은 책의 또 다른 저자 피터 마샬은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에서 상황주의자들의 탈출구는 먼 시간 저편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상적 삶을 재창안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형시키는 것과 사회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일은 동일한 일이다.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의 삶이 부각되었고 혁명이 아닌 일상이 다시 중요시되었다. 주변적 삶은 비루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이 되었다. 최선희의 작품은 뜨거운 역사 대신에 차가운 일상을 주목한다. 


현대인은 소외되었다고 말해진다. 화가 또한 그렇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볼 때 소외된 사람들과 주변인들은 유령취급을 받는다. 작품 [더듬는 길]이나 [솟아오른다]는 희끄무레한 유령같은 모습이다. [더듬는 길]에서 인간은 희미하지만 하늘의 푸르름은 선명하다. [솟아오른다]에서도 죽기 살기로 매달린 인간의 모습과 달리 달빛은 화사하다. 벼랑 끝 실존과 무관해 보이는 자연은 현대인의 운명을 더욱 가혹하게 만든다. 거의 배경에 묻혀 있다시피 한 인물이 희미하게 보이는 작품 [보통사람]에서 사람은 위의 에어컨 같은 물건 보다 더 존재감이 없다. 창처럼 보이기도 하는 에어컨은 배경에 갇힌 인간의 탈주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선희의 작품에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구멍이나 통로에 해당된다. 그것들은 열리지 않는 문이나 길 없는 풍경 등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탈주로 역할을 할 것이다. 작품 [놀이]는 집 주변의 어린이집 펜스를 보여주는데, 펜스를 밀어 넘어뜨릴 기세로 빽빽한 수풀이나 망가진 채 버려진 장난감 인형들이 걸쳐있는 모습은 경계의 허술함도 나타낸다. 




자기 그림자_캔버스에 유화 71*71cm 2020



너의 말은_캔버스에 유화 101*101cm 2020



자연의 맹렬한 생명력이나 인간 행동의 무질서한 측면 등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합리적 질서의 한시성을 알려줄 것이다. 경계는 여기와 저기 뿐 아니라 현재와 과거 또는 미래, 생과 사를 포함한다. 작품 [여행자]는 지인의 때 이른 죽음을 계기로 그린 작품으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나누는 불규칙적인 선은 산의 실루엣이자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한 풍경이다. 작품 [잠든 사람]에서 공간을 비스듬하게 가르는 선 근처에서 자는 사람은 여러 경계에 걸쳐있다. 그 선은 실내와 실외, 또는 양지와 음지를 가르는 선인지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그곳이 잠자기 적절한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깊이 잠 들었다면 정신은 현실이 아닌 곳에 있다. 꿈은 왕자를 거지로 거지를 왕자로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개방되어 있는 공적인 공간에서 가장 사적인 세계에 빠져 있는 어떤 상황이다. 초등학교 때 이동식 목마를 타고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그대로 멈춰진 작품 [행복에의 의지]는 아른 거리듯 밝게 표현된 붉은 색조의 형태가 깨져 버릴 수도 있다는 염려를 자아낸다. 


작품 [의지하는 벽]에서 문고리 없는 벽은 절망감을 준다. 잠긴 채 열 수 없는 문이 붙은 벽은 오래된 모습이다. 좌절감을 주지만 계속 두들겨볼 수밖에 없었던 문은 열려봐야 또 다른 벽이나 (잘 열리지 않는)문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유사 이래 오래된 진실이었다. 근린공원으로 재개발된 개천가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 아래에 배치된 사람들을 보여주는 작품 [아직 그곳에 있다]에서 개천 위에 솟은 교각은 마치 무대장치처럼 그 안의 사람들을 주목하게 한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각각 자기만의 시간에 잠겨 있다. 비슷한 곳에서 비슷하게 하루를 보내는 그들은 ‘무위의 공동체’(장 뤽 낭시)를 이룬다. 그들은 최선희의 작품 속 포자들처럼 흩어짐 가운데 가치를 가진다. 현대사회에서 근대시대의 민중이나 민족같은 정치적 공통체가 가능할까를 회의하는 철학자 장 뤽 낭시는 산종(종자가 갖는 증식성)과 분산화(불모의 파편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더듬는 길_캔버스에 유화 22*28cm 2018



놓인 자리_캔버스에 유화 117*91cm 2020



잠든 사람_종이에 과슈 117*77cm 2020



장 뤽 낭시가 편집한 공동체에 관련된 책의 한 필자의 주장처럼, ‘떼거리의 삶이란 분명 서열화 되어 있으며 하나의 존재나 또 다른 존재에 대한 복종에는 단수성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 획일성이 있기’(블랑쇼) 때문이다. 장 뤽 낭시는 복수적 단수, 즉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주장한다. 그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실존이 어떻게 타인과 함께 하는 실존인 공-실존인가’를 밝힌다. 익명적 존재들은 이전시대의 신성화된 민중이나 민족을 대신한다. 이러한 존재에게는 ‘정적이고 움직이지 않은 어떤 현전, 장소 없는(유토피아) 전체 공간을 잠시 점유하는 어떤 현전’(블랑쇼)이 있다. 작가가 산책을 하고 온 두 어 시간이나 지난 후에도 천변의 의자에 앉아있는 이들은 갈 곳도 마땅치 않고 할 일도 별로 없는 도시 소시민의 모습이다. 소소한 일상적 삶에 주목하는 작가에게 ‘도시 풍경에서 목격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한쪽에서는 과로로 쓰러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위고(無爲苦)에 고통 받는 양극화시대에 그런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게 돼있다. 


여러 모로 미국이라는 선진국을 모범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국은 얼마 전에 미국의 대통령 선거 기간 와중에 발표된 한 충격적인 통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 뉴스에 의하면, 하위 50%의 국민이 차지하는 미국의 부는 1.5%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 나라가 유지되는 이유는 다른 국가를 착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찾아다닌 것도 아닌데, 평범한 산책길에 보이는 삶의 단면이 포착된 최선희의 그림들은 주변의 중심성을 알려준다. 작가의 눈에 들어온 구석진 풍경은 현대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은 너무 작아서 그 표정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작가가 주목한 풍경 전체가 하나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그램 질로크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에 대해 썼듯이, 작가는 ‘도시의 관상학자’라고 할만하다. 저자에 의하면 벤야민은 현대 유럽 문화의 대도시들을 유쾌함과 희망의 출처이자 혐오감과 절망의 원천으로 분석한 바 있다. 




화분1[다시 돌아온다]_캔버스에 유화 42*34cm 2020



화분2[다시 돌아온다]_캔버스에 유화 47*40cm 2020



화분3[다시 돌아온다]_캔버스에 유화 90.9*72.3cm 2020



저자는 도시는 ‘생존투쟁과 계급투쟁의 경기장’(벤야민)이며, ‘살기도 힘들지만 떠나기도 힘든 곳’(브레히트)이라고 인용했는데, 놀랍게도 그러한 관점은 백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생생한 울림을 가진다. 시간과 공간을 자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삶은 왜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은 세계 유일한 질서가 된 자본과 시장 자체가 불균형과 모순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워진 배경은 그들이 물위에 떠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만남이나 소통은 없다. 여기에서도 자리의 불확실함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엽서 크기만 한 종이에 그린 드로잉들이 일련의 이야기처럼 펼쳐지는 [일수 전단지]에는 쓰러진 사람, 문을 열려고 노력하는 듯한 인간 실루엣, 붉은 얼룩 등이 행복한 결말은 아닌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죽은 화분이나 쓰레기 봉투 같은 소재들 또한 중성적 대상이 아니라, 다른 풍경화처럼 작가의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작품 [길을 잃다]에서 희끄무레한 배경에서 등장하는 유령같은 형태는 유령같은 사람들을 표현한 다른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유령은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경계를 떠도는 존재다. 인간의 실루엣이 연상되는 쓰레기 봉지는 장기를 담은 자루에 불과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다. [화분 1, 2, 3] 시리즈는 쏟아진 내용물이 지저분한 실체가 화분임을 암시하는데, 식물의 이름이 있었던 상표만 하얗게 남아 있다. 형태가 불분명한 대상은 인간적 질서의 투사인 명명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다가 그 마저도 희미해지고, 죽음을 만회하려는 듯 마지막 힘을 다해 붉은 포자를 공중에 뿌린다는 서사를 이룬다. 도시에서 연말 보도블럭 갈아치우듯이 수시로 일어나는 일종의 정원술은 작가로 하여금 풀 비린내 나는 현장을 자주 목격하게 했다. 작가는 식물이 죽는 순간에 포자를 뿌린다는 의미심장한 사실을 말한다. 가끔 절대 사람이 저런 곳에다가 나무를 심지 않았을 것 같은 장소에 나무가 자라고, 심지어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탓에 크고 멋지게 자란 것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흩어진 포자들이 자리를 잡은 경우이다. 작가는 인간의 규칙보다 더 보편적인 자연의 법칙을 통해 작게나마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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