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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숙 / 자연스러운 그림

이선영

자연스러운 그림

  

이선영(미술평론가)


  

황현숙의 작품에서 빛이 오는 쪽을 향해 자라는 존재들은 식물을 모델로 한다. 기호화된 상태들은 상형 문자같은 방식으로 의미와 형태를 표현한다. 형태를 이루는 외곽선은 단순하지만 밑층들은 복잡하다. 단순함 속에 복잡함을 담는 것은 기호가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해서 작가는 특정 생명체의 재현이 아닌 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작품 속 식물들은 끝이 뾰족하지 않고 둥글둥글하여 부드러운 느낌이다. 식물 형태 내부에는 리드미컬한 요소가 빼곡히 박혀있다. 이러한 파동과 입자의 조화는 물리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작품마다 색조는 다르지만, 녹색의 경우에는 식물의 기본을 이루는 초록 엽록소와도 같은 모습(가을이 되면 색소의 변화까지 포함하는)이다. 작가는 식물의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그린다. 거기에는 생명체의 모습과 생명의 과정이 동시에 있다. 작품 속에는 가끔 인간이 나타난다. 인간은 자연에서 기원했지만, 다소간 이질적인 모습이다. 인간은 자연의 오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황현숙, 72.×7 90.9.  2020

 


황현숙, 50.0× 90.9.2020



인간의 크기가 식물보다 작아서 식물은 숲처럼 보이지만 그 모델은 풀이다. 잡초는 그 모양보다는 질긴 생명력으로 주목받는다. 잡초가 아니더라도 좀 더 원시적인 형태의 생물체는 훼손과 죽음에 대해 유연하다. 꽃은 며칠 지나지 않아 시들 수 있지만 씨앗은 수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조건이 맞으면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이다. 황현숙의 작품 속 인간처럼 생태계의 밑층에 존재하는 풀보다 더 미소한 존재가 되어야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심미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사회적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처럼 분화한 상태가 아니라, 원초성을 간직한 어린 순을 닮은 식물들은 고사리나 칡넝쿨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꿈틀거리는 덩굴식물의 이미지는 깊은 뿌리를 박고 굳세게 하늘을 향하며 체계적으로 분지하는 기념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변화가능성이 있다. 이 리좀적인 존재는 무엇과도 결합할 수 있다. 


반쯤은 추상화(기호화)된 식물들은 통통하며 둥글둥글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단위구조를 가졌다. 반사적으로 빛을 향하는 부들부들한 생명체 사이사이에 인간 형상이 자리한다. 인간은 식물에 비해 매우 작다. 작가는 예술의 자율성을 발휘하여 자연과 인간의 차이를 극대화시켰다. 인간은 크기가 작을 뿐 아니라 식물만큼이나 미분화 된 모습이다. 눈코입도 머리카락도 없는 인간은 식물처럼 기호화되어 있다. 한 가지 색으로 칠해진 단순한 그들은 식물보다 더 단순하다. 예정된 생명의 지도가 있지만, 마치 태아처럼 앞으로의 변화 또한 중요하다. 작가는 식물이든 인간이든 현실성보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인간은 대개는 하나의 색으로 칠해져 있고, 식물들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인간들은 때로 군집을 이루어 숲 안에 박혀서 뭔가를 도모한다. 노랑, 파랑 등 작품 마다 단색으로 칠해진 인간들은 자연을 지배하지 않는다. 나무숲이기보다는 풀숲 안에 존재하는 인간은 그만큼 미소하며 ‘만물의 영장’이나 ‘만물의 척도’라는 이전시대의 오만한 형이상학적 관념을 떨쳐낸다. 




황현숙,  72.7× 90.9.   2019



황현숙, 90.9×72.7×2   2020



때로 인간은 구체화되어 옷을 입고 얼룩말과 함께 숲을 거니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그것은 자연/정원 속 작가의 대역을 맡고 있는 듯하다. 등장인물을 통해 풍경은 먼발치의 대상을 넘어서 이야기 한다. 얼룩말 등, 동물은 종을 알아볼만하지만, 식물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변형되어 있고 미지의 존재로 변모중이다. 말미잘의 촉수 같은 형태는 하나의 단위가 되어 여러 모양새로 헤쳐 모인다. 중심을 향해 배열되어 있기도 하고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힘을 표현하기도 한다. 미지의 생명체가 오글오글 모여 다층적으로 다가오는 숲은 촉촉하다. 화면은 여러 형태와 색의 층으로 두텁지만, 아름다운 무늬로 덮인 베일처럼 하늘하늘한 기운이 있다. 자연은 물질이자 에너지이다. 황현숙의 그림은 자연처럼 많은 겹이 있음과 동시에 무겁지 않은 미묘함이 있다. 이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 작가는 ‘처음에 색을 정하고 물감을 뿌린 후 건조되면 스케치가 올라가고 원하는 색을 입힌다’고 밝힌다. 


이렇게 여려 겹을 가진 화면은 보는 각도와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무쌍함을 내장한다. 자라고 움직이는 듯한 형태와 화사한 색 점들은 특정 동식물의 외형이 아닌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것들은 풍부하고도 건강해 보인다. 동물 또한 환경에 반응하여 자신의 색소의 분포를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술은 자연처럼 필연과 우연의 결합체이다. 자연으로 친다면 정원에 가깝다. 황현숙의 ‘Garden of spirit’ 전에서 완전한 야생의 자연은 아닌 정원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예술 자체는 자연은 아니지만, 스스로 자라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자연과 비교 된다. 작가는 씨를 뿌리듯 무언가 시작하지만 완성은 기다려야 한다. 반대로 작가는 바람결과 같은 수많은 원천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단지 마무리를 하는 역할을 맡는다. 마침 작가는 섬에서 태어나 유년기의 절반 이상을 자연 속에서 자랐으며, 지금도 산책길과 텃밭에서의 생활이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있기에 이러한 ‘자연스러운’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출전; 구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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