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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예술의 전당 미술관, 올해의 청년 중년 작가 전

이선영

손경숙; 상상이상의 자연

  

장지에 석채로 그려진 손경숙의 작품은 미세한 선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작가가 그리는 자연 그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식물들을 이루는 선들이 마치 어린 동물의 솜털이나 깃털처럼 부드럽고 풍부하다. 모노톤으로 칠해진 색은 선들을 더욱 강조한다. 그 차이가 클 경우 화면에 놓인 대상은 색이 아니라 빛을 발하는 듯하다. 대개 바탕과 대상이 다른 명도 또는 색상의 모노톤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대상처럼 변별력이 있다. 형태를 위해 구체적 색을 포기한 셈이지만, 모노톤의 색감을 통해 보충한다. 작품의 색감에 대해서 작가는 ‘화려하면서도 안정된 색상을 통하여 활력과 자연의 웅장함, 그리고 깊이감과 공간감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손경숙은 자연에 충실하지만 작품 속 풍경에는 계절이 없다. 모노톤의 배경이 많지만, 딱딱한 중성적 배경은 아니다. 진공이 아니라 공기감이 존재한다. 하나의 화면을 채우는 형태와 색은 조형예술 특유의 공간성이 주도적이다. 풍경들은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포착된 장면이다. 지속 보다는 순간이다. 관객들은 작품마다 다른 주도적인 색감을 통해 오월의 초록이나 시월의 단풍, 한겨울의 나목을 느낄 수 있을 따름이다. 



손경숙, 마음속 풍경, 60.5x73cm, 장지에 석채, 2018


물론 여러 작품이 한데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시간이나 계절의 차이를 느낄 수도 있다. 식물이 바람결에 나부낄 때조차도,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 때도 그것은 한 단면에 충실하다. 자연에는 그러한 단면들이 무한하기에 작업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식물에 배치된 동물은 이야기적 요소이다. 동물은 식물보다 더 감정이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가 한 마리가 있는가, 두 마리가 있는가, 그것들은 어떤 관계로 보여지는가가 이야깃거리가 된다. 손경숙의 작품은 실물같은 자세함과 환상성이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주의라는 사조가 따로 있을 만큼 사실과 상상은 대립적이지만, [마음 속 풍경]이라는 작품제목처럼, 사실과 상상을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 작가가 추구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처럼, ‘실제 있는 경치를 사생하여 낸 시와 그림이라는 의미와 실제 있는 경치에 그 정신까지 묘사해 내는 의미’가 있다. 물론 현대의 작가에게 이러한 미학적 관념 내지 세계관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주변의 공원, 산책로, 수목원이나 여행지에서 본 풍경들’에서 재발견된다. 식물의 세부가 살아있어 식물 속에 또다른 식물들이 가득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기술이나 이상은 자연 말고도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자연에서 ‘위로와 휴식을 찾는’ 자신의 작품을 ‘자연찬가’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풀이나 나무, 숲으로 나오는 작품 속 식물은 자세하기는 하지만 무슨 종인지는 알 수 없다. 부분들은 육안이든 사진이든 직접적 관찰이었겠지만 부분들이 조합되는 방식은 상상이다. 자연은 상상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만, 과학 기술을 포함한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인간은 늘 상 자연을 (재)발견할 뿐이다. 예술은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바탕으로 있음직한 것을 상상한다. 손경숙의 작품에서 동질이상의 식물군들은 실제와 상상의 만남을 수월하게 했을 것이다. 수 십 년 간 그려온 자연은 안보고도 그려질 만큼의 자동성을 가지게 했을 것이지만, 자연을 접할 때 환기되는 새로운 감성은 반복 속에 차이를 기입한다. 새들 또한 식물만큼이나 자세하지만 색은 환상적이다. 자연에는 실제 그러한 파격적 배색도 존재할 법하지만, 보고 그린 것은 아니다. 식물도감으로 사용해도 충분할 정확성 묘사나 재현은 아니다. 작가에게 그런 기술이 없다기 보다는 무언가를 정확히 재현해서 관객의 앞에 가져다 놓고 그 대상을 이해하고 의미를 읽고, 더 나아가 가상적 소유를 권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것들은 순수한 심미적 대상들이다.

 


이지수; 조각 잇기

 

종이나 캔버스에 그려졌으나 대개는 액자를 하지 않고 캔버스의 프레임도 제거된 채로 전시장벽에 걸려지곤 하는 이지수의 작품들은 날것의 느낌이 남아있다. 회화지만 드로잉을 베이스로 한다. 화면 가득히 글자만으로 채운 작품들도 보여지듯, 그리기 보다는 쓰기에 가깝다. 작가는 ‘주로 나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고 하지만, 작품이 자신의 일상을 일거수일수족으로 재현하는 그림일기는 아니다. 수많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전시는 확실한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작가는 나를 작업들과 거듭된 해석을 통해 도달해야할 미지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지수가 중시하는 기억 또한 모년모일의 세부적 내용이 아니라, 몸과 마음 어딘가에 각인된 것이다. 기억은 어떤 지각을 통해 활성화되며 잠재적 상태를 넘어 작품으로 현실화된다. 화면의 가장자리가 나풀나풀 드러난 것들은 단순한 그림 걸기를 넘은 설치작품이 된다. 전시장 바닥을 포함한 벽면의 여러 부분을 종횡으로 활용하는 작품들은 단어들이 모여 만든 문장처럼 말한다. 단면이 노출되어 있기에 오히려 잠재적 연결망을 이루는 문장의 구성 요소로서의 작품이다. 각각은 자족적이기 보다 계열체를 이룬다. 화면에 글자만 가득한 경우에도 문장을 이루지 않는다. 



이지수, 오픈 스튜디오


글자를 쓰다가 손 글자의 형태에 매료된 듯 파편적 단어로 남아있는 글자들은 어떤 보충을 요구한다. 의미를 괄호 친 채 형태만을 주시할 때 글자도 심미적 대상으로 다가온다. ‘숲’이라는 단어를 이어 붙여 만든 작품이 그렇다. 작가는 평소에 말하기의 어려움 때문에 미술작품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품 역시 형식과 내용의 괴리를 피할 수는 없다. 그 괴리가 영원히 메꿔질 수 없다면 그 틈을 더욱 벌려 유희의 시공간으로 삼는 것도 방법이다. 이지수의 작품들은 그자체로 충만한 기원과 목적이 아닌, 계열체로 열려 있는 흔적들이다. 그것은 지속적 보충을 요구한다. 문장 뿐 아니라 신체도 부분적으로 그려져 있다. 한 화면에서 두 손만 있거나 다른 화면에서 안겨있는 강아지만 보이는 식이다. 인간의 실루엣이 온전히 드러나며 어떤 상황이 연출되어 있는 경우에도 눈 코 입 없이 단순화된 인간의 실루엣만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기호이며, 또 다른 기호와의 연결망을 기다린다. 작가는 실타래 등을 그려넣거나 화면 밖으로 실을 드리워 그러한 복잡한 연결망을 암시하곤 한다. 관객들은 설치적인 방식으로 배치된 이미지의 단위들을 조합하여 작가가 의도치 않은 어떤 시각적 문장을 만들 수도 있다. 의미는 충만한 기의가 아니라, 기표들의 간격과 틈에서 생겨난다. 


이 틈에서 무의식과 욕망, 꿈이 드러난다. 작가는 그것을 숲과 비교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런 나의 세계를 숲으로 명명했고, 나의 숲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원이나 농경지와도 다른 숲은 원초적인 영역이며 매혹과 두려움이 동시에 있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숲의 근본적인 양면성을 말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숲은 ‘매혹적이면서도 불쾌한, 성스러우면서도 속된, 경탄할 만하면서도 야만적인’ 곳이다. 숲은 풍경이라는 단어로 마찬가지만 여러 이질적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곳이다. 숲은 정원이나 경작지 처럼 명확한 의도와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구성된 것과도 다르다. 작가는 국내외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문명에서 혼란을 격을 때 숲으로 숨지만, 그곳 또한 안전하지 않다. 작가는 그 숲에서 헤맨다. 작가는 ‘숲 아래에 존재하는 나만의 세계’를 작업으로 옮기고자 했다. 작가는 가장 사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잠을 주목했다. 그렇지만 잠은 깨어나지 않으면 죽음의 영역과 겹쳐질 수 있다. 예술은 단순한 꿈이 아니다. 꿈이라는 무의식의 영역을 의식화하는 작업이다. 홀로 헤매었던 꿈의 숲에서 빠져나와 그 꿈을 이야기하는 이가 바로 작가다.

 


민예은 ; 모순(矛盾)의 조화


민예은의 작품에는 가구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기능과 장식을 겸비한 안정감 있는 가구의 특성은 변질된 상태다. 작품 소재들은 온라인 오프라인 벼룩시장에서의 구입 등을 통해 수집한 것들이다. 가구 뿐 아니라 탈이나 종이학 같은 소재, 만다라, 천체, 빛 등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들이 다수 등장하는 작품들은 고풍스럽다. 이러한 고풍스러움은 나날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게 얼마 전의 새로움도 뒤로 밀어내는 시간의 가속화 때문이다. 오래된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모순(矛盾)이 조화라는 점에서 역설이다. ‘예측할 수 없는 투명함’(2019) 전 같은 전시부제는 그러한 역설적 사고의 단면이다. 가구는 대규모 설치의 방식과 연관되어 환경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가구로 만든 집이 있을 정도다. 아파트나 고층빌딩 같은 주거 양식이 보편화됨으로서 내장형 가구들이 갖춰지고, 실제 가구들은 골동품 같은 취급을 받으며, 물론 그래서 각별하게 사랑받기도 하기에, 민예은의 작품 속 가구들은 낯설다. 낯섦을 통해 예술적으로 작동하는 사물들이 예술적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경우다. 가구와 집의 조합은 우리의 삶에서 만큼이나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집과 가구는 무엇인가를 담아낸다. 



민예은,가구오두막 모형, 2012


새로움의 신화가 생겨났을 무렵, 토탈 디자인의 개념으로 건축가들이 가구 디자인도 많이 했다. 유리와 강철, 콘크리트 등 당시 신소재와 신기술로 구축되고 있는 근대시대에 이전시대의 유물들을 안치시켜 놓을 수 없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근대 건축가들은 오래된 장식을 청소해야할 병적인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그러나 근대 디자이너/건축가 등이 만든 가구들 또한 유물의 반열에 올랐다. 민예은은 모더니즘과 전혀 다른 방식이다. 새로움이 아니라 오래된 것, 기원을 알 수 없는 것, 전혀 다르게 활용하기 등이 선호된다. 더구나 단편으로 등장하는 수수께끼같은 것들은 모든 것이 유기적 관계로 질서화 되어야 하는 근대적 총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에는 어디선가 떠내어진 것 같은 모서리들이 날카로움을 유지한 채 병렬, 공존한다. 그 바깥은 집 내부의 단편을 지지하는 각목과 MDF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잘 마감되지 않은 외부는 또 다른 내부처럼, 작가가 원한 방식대로 안팎의 경계를 해체시킨다. 이러한 연극적 무대 안/팎을 소요하게 되는 관객은 순간적 시각을 넘어선 지속적 지각이 활성화된다. [라비하마하마hyun 추추 happyj33](2019)같은 작품 제목 또한 단편의 조합이 가지는 모호함을 그대로 남겨두며,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단편들은 간격이 떨어져 있지만, 이러한 간격을 통해 연결망을 이룬다. 분리는 연결을 위한 조건이다. 


헌 가구를 모아 아예 집을 지은 [가구 오두막](2013)은 단편들이 조합도 꽤나 견고함을 알려준다. [고나라만다라](2018)는 손때 묻은 사연 많은 사물들은 인류의 오래된 상상 및 상징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물도 잘 잘라 배열하면 작품 [단일슬릿](2019)처럼 기하 추상작품같기도 하다. 농촌에서 수거한 검은 비닐을 뭉쳐서 강화유리 안에 압축시킨 작품 [삭](2019)은 쓰레기로 만든 우주다. 우주 자체가 먼지로부터 생겨났으니 비약은 아니다. 사물은 투명하지 않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재현하지 않는다. 사물은 단지 제시될 뿐이다. 그것은 작품 [빛이 있으라](2017)의 제목처럼 아름다움을 넘어선 숭고를 말한다. 몰입과 현존의 체험을 자아내는 사물의 시간은 확장성을 가져 태초까지 소급된다. 세계화 시대의 공간적 확장성은 전혀 다른 공간의 사물들을 만나게 하는데, 아프리카와 한국의 유물을 활용한 작품 [탈의 외출](2012)이 그렇다. 브론즈로 머리를, 종이로 몸체를 만들어 조합한 [학](2011) 등, 많은 조합이 역설적인데 그것은 작가가 세계를 보는 관점으로 다가온다.

 


김근배; 떠남 속의 머무름, 머무름 속의 떠남

 

김근배의 작품에는 나무와 길이 자주 나타난다. 대지에 깊이 뿌리 내리는 나무는 정주를 뜻하는 대표적 상징이며, 길은 이동을 상징한다. 하나는 수직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적이다. 나무자체는 이동을 하지 못하며, 동물이나 바람 등을 통해 퍼져 나간다. 인류학적 상상계에서 나무-정주의 이미지는 매우 강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불확실한 ‘뿌리 뽑힌 자’같은 표현이 있을 정도다. 각자 제자리에서 주어진대로 자신의 역할이 있었던 전통의 시대가 지나가자, 근대의 뿌리 뽑힌 자는 소외와 자유를 동시에 의미하게 되었다. 김근배의 작품애서 양복 입은 사람은 여행자를 상징한다. 그의 작품에는 정주와 이주가 한데 묶여있다. 길을 떠나는데 나무가 보이고 나무 아래서 쉬고 하는 수준이 아니라, 작가는 나무 자체에서 길을 본다. [여정] 시리즈에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하얀 코끼리가 들고 가는 나무, 노젓는 사람이 탄 작은 배에서 자라난 나무들은 매우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낙하산 타고 공중에서 유영하는 사람처럼 나무에 메달린 사람은 수직적 이동 또한 암시한다. 작가는 포말을 가르고 나아가는 배 뒤켠에 나무형태를 붙임으로서 나무가 이동과 관련됨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김근배, 대장정, 2020, 대리석,동,153x146x28


작가는 끝없이 갈라지는 나무의 분지 체계 속에서 선택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삶을 본다. 작가가 그러한 여정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 또한 끝없이 갈라지는 지점에서의 선택이다. 형식 또한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브론즈 채색, 밀랍 주조, 대리석 조각 등 여러 방식을 섞어 표현한다. 코끼리나 수도자 같은 영험한 이미지 또한 제자리에서 떠나는 여행을 표현한다. 그러나 자연이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대상들은 굴뚝에서 연기 나는 공장이나 높은 곳으로 짐을 이동하는 힘겨운 상황등과 결합되곤 한다. 길은 철도로 자주 나타난다. 실제의 철도와 금속(김근배의 경우에는 청동)이라는 재료의 동질성이 있다. 철도가 기계적 구조를 가진다면, 작가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대상을 조립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길은 시점과 종점을 가지는 선적 이동이 아니다. 희열과 공포를 동시에 자아낼 수 있는 이러 저리 꼬인 길이다. 뫼비우스 띠처럼 안팎의 구별도 모호하다. [대장정] 시리즈에서 여러 길의 상황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난감도 연상시키는 형태들은 그 여행이 시간여행이기도 함을 알려준다. 작은 조각상들을 길로 가정된 장소에 줄지어 놓은 것들은 일종의 병목현상을 표현한다. 


좌대 역할도 하는 높은 교각 위에 걸린 돌고 도는 길 위에 여러 이동수단의 빼곡히 나열된 모습은 모두가 지름길을 원하지만, 같은 길을 통과하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는, 현대적 일상에서 흔히 겪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길 위에 놓인 것들 가령 사람 건물 자동차 등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자동차, 집, 의자, 계단 등이 놓여 있곤 한데 그것들 간의 스케일 차이는 무시된다. 각각은 다소간 정적인 매체인 대리석과 관련하여 정지된 느낌을 주지만, 배치의 방식을 통해 강제된 정지, 또는 지연된 이동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꽉 막힌 길에서 또 다른 길을 떠나지 않는가. 가령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보거나, 음식 등을 먹으면서 말이다. 막힐 때는 돌아가야 하지만 돌아갈 길 조차 여의치 않을 때 현대인은 제자리에서 떠나는 여행을 한다. 대리석과 유리 등으로 만든 가방이 등장하는 [여정] 시리즈에서는 가방 안에서 유영하는 삶이나 자동차 등, 여행 관련 이미지가 담겨진다. 샐러리맨의 서류 가방처럼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것은 여행 가방이기 보다는 여행자를 꿈꾸는 정주민의 희망을 담는다. 그 안에는 길 위에서의 다양한 모습이 접혀져 있다. 김근배에게는 예술 그자체가 그러한 여행이며 작가는 여행가 또는 여행 안내자이다.

 

출전; (재)천안문화재단, 천안예술의전당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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