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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미술상 20주년 특별전 / 쌓여가는 시간의 단층들

이선영

쌓여가는 시간의 단층들

  

이선영(미술평론가)


  

I. 들어가며 ; 지금 여기의 미술계에서 회화

    

2000년에 제정되어 매해 수상자를 선정해온 이인성 미술상이 20주년을 맞아 수상 작가 18인으로 전시를 꾸렸다. 이인성(1912-1950) 화백이 짧은 인생 동안 일궈온 회화 부문에 특화된 미술상이지만, 회화 자체가 미술의 기본인 점을 염두에 두면, 역대 수상자들은 시대가 주목 할 만 한 중요한 작가들로 평가된 셈이다. 실제로 20주년 기념 특별전과 함께 열리는, 2019년에 수상하여 올해에 기념 전시를 하고 있는 조덕현(20회)의 작품들을 보면, 회화가 얼마나 확장성을 가지는지 알 수 있다. 이인성 미술상 수상자들의 작품들은 회화로부터 펼쳐지고 다시 회화로 접혀지며 그 사이에 무한한 계열이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수상 당시의 작품과 최근작품을 같이 전시하여, 수상 작가 화력의 건재를 알린다. 한 작가의 작품인가 확인해 볼 정도로 큰 변화를 담은 경우도 있다. 이인성 화백은 ‘서구의 인상주의와 야수파, 표현주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한국적 토속성과 결합시켜 향토적 서정주의를 구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만큼, 이 특별전의 작품들 또한 여러 경향을 가지고 있다.




김홍주, 2020. (이하 모든 사진 출전; 대구미술관)



현재 회화가 중요한 형식으로 취급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거장을 기억하며 매해 중요한 작가, 특히 화가를 주목하는 것은 의미는 남다르다. 해를 더하면서 나이테처럼 두터워질 이 전통은 쏠림 현상이 강한 한국 미술계에 건강한 길항 작용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각자 다양한 내용을 담은 이번 특별전에서의 공통점은 회화라는 것 외에 없기에, 우리는 현재 한국화단을 향해 이인성 미술상 역대 수상자들의 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수 십 년 간 그림을 업으로 삼아온 작가들의 결과물인 회화는 영감이 시작되고, 그 영감이 가장 완벽한 결과로 남겨질 수 있는 중요한 형식임을 알려준다. 회화의 기원이나 역사, 그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최초의 발표작이 소통 및 유통의 과정을 거칠 때 회화의 장점은 보다 분명해 진다. 회화는 굳이 작가가 작품에 따라다니지 않아도 된다.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화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는 것으로 충분하다. 화면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이가 바로 화가이다,


필자는 작가, 정확히는 화가라 할 만한 이들과 만나서 빠지지 않고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요즘처럼 이미지를 만들기 쉬운 세상에서 왜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있냐는 것이다. 왜 사느냐는 질문처럼 황당하면서도 당돌하게 들리겠지만, 거의 100%의 화가가 이 질문에 곤혹스러움과 진지함이 가득한 태도로 변하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다. 현답(賢答)을 기다리는 우문(愚問)처럼, 이 평범한 질문을 처음 접하는 것처럼 그 때부터 주섬주섬 생각하는  작가도 있다. 장구한 미술 역사를 들먹이면서 회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적 이유부터 그냥 좋아서 한다는 싱거운 대답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난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예술은 과학기술과 달리 진보/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선형적인 진화와 무관하다. 그것은 예술의 역사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역사주의는 예술의 역사를 다루는 가장 최악의 비전이다. 그림이라는 형식 다음에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회화든 뭐든 예술에서 낡은 형식이란 없다. 형식이란 매 시기 매 작가에 의해 무한히 다시 해석될 뿐이다. 예술은 끝없는 되돌이표처럼 한 개인으로부터, 그리고 매번 한 작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에, ‘왜 아직도 그림을...’, 또는 ‘왜 나는 그림을...’이라는 질문은 다시 생각하면서 작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예술가들이 가장 잘 알겠지만, 예술에서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림, 또는 화가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엔 미술의 다양한 형식 중에서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 그런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역설적으로 내가 이미지 범람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 소비를 통해서 이윤을 끌어내야 하는 이미지는 그 조건 자체가 가벼움과 무의미다. 무겁고 의미 가득한 것들은 소통/유통의 회로에 진입하기 힘들 뿐 아니라, 들어가서도 굼뜨게 움직인다. 그림은 현대사회에서 힘들게 생산되는 모든 것들에 기대되는 바의 즉시적이고 폭발적인 효과를 낳기 힘들다. 


비록 대중 매체의 생리를 간파한 소수의 작가들이 충격적이거나 선정적인 사건을 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때 조차도 그러한 사건의 의미가 충분히 곱씹어지는지는 별개의 일이다. 한편 팝아트는 그러한 조건자체를 순수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중요한 의미를 생산했다. 그림은 코드화된 이미지보다는 밀도와 강도가 있다. 화가는 아무리 홀로 고독하게 작업한다 할지라도 한 장의 화면에 중요한 의미를 접어놓고 누군가에 의해 활짝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것이고 현실화에는 넘어야 될 장벽들이 있다. 회화를 비롯한 현대미술 작품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전단지 같이 소통시키기는 힘들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림이 제대로 소통되려면 화가가 펼친 크고 작은 화면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할 것이다. 대구 출신의 선구적 화가로부터 출발하여 매해 수상자를 내면서 그자체로 한국 현대 회화사를 다시 쓰고 있는 이인성 미술상 관련 전시도 그러한 맥락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러 이미지 중의 하나로 떠내려갈 위험이 있는 회화가 그러한 거목에서 분지하는 또 다른 나무 같은 존재로 보여 지는 귀한 기회다. 20년 동안의 수상자들의 작품들을 한데 놓고 보면서, 이인성 화백과의 형식적 내용적 영향 관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대의 선지자로서의 회화라는 너른 자리를 마련하는데 계기가 되었을 따름이다. 이인성은 기본이 기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에 결정적 맥락이 제공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회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 대한 의미추구는 이러한 예술적 맥락 속에서 생겨나고 증폭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우세 종’(프레드릭 제임슨)인 대중문화가 아니라, 순수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와도 회화는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자인 영상과 마주친다. 영상기기의 발전은 매 장면 하나하나가 그림 같은 영상을 낳기도 한다. 요즘 세대들은 같은 SNS라도 글자가 많은 것을 회피하고 이미지로만, 특히 동영상으로만 소통한다는 분석도 있다. 


현대미술의 무대 또한 영상이나 영상 설치 작품이 대세다. 그런데 그것이 소통되는 방식은 그림보다 불완전하다.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충족시켜줄 완벽한 세팅 속의 작품 안에 들어설 수 있는 관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고, 결국은 인터넷이나 잡지 등을 통한 비평적 추체험이다. 그림도 실제로 보는 것이 더 좋지만, 그것이 가지는 시간의 단면은 영상/설치 작품보다 더 완전하게 최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특별전은 ‘위대한 서사’라는 전시제목도 붙었지만, 서사의 가능성에 있어 영상은 회화보다 더 압도적이다. 영상은 말이나 문자처럼 시간의 흐름을 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두 장의 사진으로만 남는 추체험의 경우는 다르다. 영상/설치작품이라도 충분한 비평적 담론의 지원을 받으면 그러한 단편성은 극복되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은 발표되는 작품만큼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것이 현대적인 것이다’라는 분위기로 소비될 따름이다. 하지만 그림은 그러한 대부분의 불완전한 담론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림 또한 한 장의 사진처럼 시공간의 절편으로서의 불완전한 상황을 면제받지는 못하지만,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는 안정된 표면을 제공한다. 이번 이인성 미술상 20주년 전의 작품들처럼 그러한 노력에 답해주는 그림도 많이 있다. 그림을 사진으로만 봐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림을 보러갈 수 있게끔 동기를 부여하는 한 장(또는 몇 장)의 작품사진은 중요한 인터페이스로 작동할 수 있다. 영상/설치작품의 경우, 실제 전시공간에서도 몇 분 이상이 되면 그것을 끝까지 보는 관객은 많지 않다. 그런 무신경한 관객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지만, 회화 또한 다른 스펙터클과 경쟁하고 있는 상황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전시 자체가 공적 영역에서 평가를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특별전에서 18명의 역대 수상자들의 작품은 인간과 사회, 자연과 추상을 아우르며, 원초부터 숭고에 이르는 광폭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이후, 개별 작품의 분석에서 필자의 분류는 서술의 편의성을 위한 것이며, 전시에 걸린 몇 작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자의적일 수 있음을 밝힌다.

   

 

II, 전시 작품의 경향

   

1. 재현과 추상 ; 황영성, 이상국, 이강소, 최병소, 이태호, 이영륭

    

추상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로부터의 추상이기에 재현적 요소가 남아 있다. 팔순의 화가 황영성(5회, 2004년)의 최근 작품 [가족 이야기](2005)는 얼굴, 집, 숫자, 물고기 등 약간 알아볼 수도 있는 형태들이 같은 크기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노란 색감 때문에 마치 다양한 모양으로 빗은 수제 쿠키 같은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바탕에 깔고 그 전체를 가르는 또 하나의 추상적 선이 이야기와 조형적 요소를 아우르려는 작가의 생각을 알려준다. 가족 이야기는 그만큼 다양하고 아기자기 하지만, 그것은 멀리서 본 무늬 화 된 형태들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찌그러진 것도 있고 잘린 것도 있다. 이전 작품 [소의 침묵](1985) 또한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 소에서 추상된 선들이 빼곡히 자리한다. 어두운 형태의 덩어리 중간을 가로지르는 면에 인간 또한 배열된다. 장날에 그동안 길렀던 소를 파는 사람 같은 토속적인 분위기가 세련된 추상적 어법으로 압축되어 있다. 이상국(12회, 2011년)이 나무판에 유채로 그린 [나무 4327-Y I](1994)는 노랑바탕에 다양한 색선으로 나무의 실루엣을 만든다. 색선은 여러 색의 복합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자연의 다양성과 생동감을 더한다. 최근 작품 [백련사 나무 III](2011)는 붉은 바탕에 다양한 색선으로 채워진 굵은 나무기둥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힘찬 색선들은 붓글씨처럼, 기호로 이루어져 있을 자연을 표현한다. 작가는 오래된 사찰과 함께 한 나무 안에 새겨진 영겁의 시간과 공간에 예술적 겹을 추가한다. 



황영성, 소의침묵, 1985 



이상국 나무 4327-Y II, 나무판에 유채, 162x130cm, 1994



이강소, 섬에서-02012(A), From an lsland-02012(A), Oil on Canvas, 162x130.3cm, 2002



최병소, Untitled - 0180621, 2018, ballpoint pen and pencil on paper, 210x164x1cm, 우손갤러리



이태호, 물-결2018-3, 150X215cm, 종이,먹,연필, 2018



이영륭, 무위자연(無爲自然) 20B Untouched being 20B, 2018, Acrylic on Canvas, 90.9x72.7cm



이강소(3회, 2002년)의 작품 [섬에서-02012(A)](2002)는 유화지만 공간을 대하는 방식은 여백이 많아 동양화를 떠올린다. 아래에 작은 집의 형태가 암시되어 화면은 광대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 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필획은 마치 자연을 화면 삼아서 휘두른 붓질 같다. 붓질은 자연의 거대한 호흡, 또는 바람을 닮았다. 회화는 개념미술과 퍼포먼스를 아우른 그의 광폭의 행보를 압축하는 또 다른 유력한 형식이다. 최병소(11회, 2010)는 작품 [Untitled– 0180621](2018)에서 종이 위에 볼펜과 펜슬로 화면이 찢어질 때까지 뒤덮은 화면을 보여준다. 힘주어 그은 필기구의 궤적은 반사면을 남긴다. 그것이 만드는 물성은 오래된 벽이나 수면 등을 떠오르게 한다. 캔버스가 아닌 신문지 등에 작업한 그의 작품은 수행에 가까운 행위를 통해 그림과 먼 재료를 그림 그자체로 돌아오게 만든다. 이태호(16회, 2015)는 작품 [상8209](1982)에서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를 흑백 필름 사진처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교하게 그려진 유화다. 빈 의자 다음 자리의 있는 남자는 곧 사라질 듯한 네거티브 이미지로 나타난다. 사진/회화, 네거티브/포지티브, 그리고 시간의 차이를 암시하는 공간적 차이 등 여러 겹으로 중첩된 차이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최근작 [물-결2018-3](2018)은 종이에 먹과 연필로 바다의 표면을 한가득 그린다. 그것은 재현인가 추상인가. 이영륭(4회, 2003년)의 최근작 [무위자연(無爲自然)](2018)은 푸르른 색조를 바탕으로 역동적으로 구성된 화면이다. 광대한 자연의 상징인 하늘과 바다는 서로를 비추는 반영 상으로 푸르름을 가지고 있고, 그 내부에 변화무쌍한 운동이 내재한다. 그에게 자연은 자신이기도 하다. 화가에게 풍경이란 늘 내면 풍경이고 그 역도 진실이다. 이전 작품 [諧調 78-2]는 작가에게 자연이란 푸른 색조의 다양한 계열임을 알려준다. 이 작품에서 푸른 색조는 서로 다른 방향의 촉감을 가진다. 작가는 부채 살처럼 펼쳐지고 접혀지는 주름으로서의 세계를 색으로 변환시킨다. 

  

2. 몸과 사회 사이의 인간 ; 이건용, 안창홍, 홍순명, 최민화

   

회화가 서사와 관련을 가진다면, 그것을 이끄는 것은 인간이다. 그림 속 인간은 몸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며 행동한다. 이건용(8회, 2007년)의 작품 [신체드로잉 85-2](1985)는 유화임과 동시에 행위의 궤적들이다. 어두운 인체 형상 바깥으로 뻗어 나온 드로잉의 궤적들은 후광 같다. 그것은 동시에 한 인간에서 나오는 기(氣)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은 기계로 복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시대의 특징인 아우라를 담고 있다. 인간형상 안에는 퍼포먼스 장면이 담긴 자료 사진이 있어서 그림과의 인과 관계를 알려준다. 1970년대 다양한 현대미술 활동을 펼쳤던 이건용에게 회화는 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최근작에서는 코로나 기간 동안에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는데, 택배 박스 등을 분해해서 그 위에 그린 그림들은 인간의 몸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그림’이 나올 수 있는지 알려준다. 안창홍(10회, 2009)의 최근작 [아리랑2017-1](2017)은 사진 위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으로, 탄생 초기에 회화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매체인 사진을 포함한다. 그림 잘 그리는 작가로 알려진 그가 굳이 사진 이미지를 활용한 것은 부재의 흔적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물감의 바탕에 깔린 오래된 흑백 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그 위로 마치 확대된 사진의 망 입자처럼 색 점을 찍었다. 어두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밝은 색으로 먼저 찍고 그 위에 찍었다. 팝아트 작품처럼 깔끔하지 않고 붓으로 자유롭게 찍은 궤적이 드러난다. 그려졌다기 보다는 물감에 의해 오염된 듯한 얼룩진 화면은 모든 사진에 내재한 시간의 흐름, 즉 죽음을 말한다. 작품 [베드 카우치 8](2009)은 그림이지만 사진적 시점이 특징이다. 그림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린 화실 바닥을 배경으로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여성 누드의 적나라한 포즈는 모노톤이어도 그 선정성이 약화되지 않는다. 작가는 누드화에 내재해 있는 본래의 시각적 욕망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이건용, 신체드로잉 85-2 Body Drawing 85-2, 1985, Oil on Canvas, 200x227cm



안창홍, 아리랑2017-1 Arirang2017-1, Acrylic on Potograpy, 139x203cm, 2017



홍순명, 흔한 믿음, 익숙한 오해 - 2015, 130 x 162 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채,  2020



최민화, 파쇼에 누워Ⅰ Lying on FascioⅠ, 1992, Oil on Canvas, 136x206cm



홍순명(17회, 2016년)의 작품 [다이아몬드 포레버-세실로드](2017)는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착취의 흔적인 노상광산 가운데 서있는 동상을 보여준다. 통상적인 동상과 달리 분홍빛이다. 조작과 거짓의 가능성이 있는 기념비는 인터넷을 비롯해 다양한 원천을 가지는 정보들로부터 시작하는 자신의 작업 과정과 유사하다. 회화는 진정성의 상징이라는 믿음은 사라지고, 불확실한 정보의 구름은 가려지지 않으며, 심지어 더욱 강조된다. 작품 [흔한 믿음, 익숙한 오해](2020)에서 친근한 유대를 알리는 두 남자의 이미지는 낡은 사진의 분위기를 더 낡게 표현한다. 그 유대가 어떠했든지 간에 시간의 시험을 이겨낼 수 없음을 암시한다. 날조 또는 수수께끼에 쌓인 그의 작품은 관객들로 하여금 추리적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최민화(18회, 2017년)의 작품 [파쇼에 누워Ⅰ](1992)는 파쇼와 쇼파의 말장난이 보이는 제목으로, 시대를 풍자한다. 시대를 보는 창이기도 한 그의 작품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들은 나를 깔고 지나가라는 식으로 대로에 스크럼을 짜고 누워있다. 실제의 피도 흘리기도 했던 투쟁의 현장, 붉은 색이 치열한 현실이라면 분홍은 아련한 낭만이다. 하지만 낭만이라고 거짓은 아니며, 거짓의 몫이 커져 가는 세상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모노톤의 색은 최루탄이든 민주주의의 열정이든 무엇인가 가득했던 한 시대를 증언한다. 도깨비들을 그린 작품들은 한국성에 대한 자의식이 엿보이며, 그림으로 수많은 시도를 해온 작품 세계의 단면에 불과하다.

  

3. 숭고함 ; 정종미, 홍경택, 공성훈, 김차섭

    

예술작품은 뭔가 고귀한 것을 담아야 한다는 기대치가 있다. 예술은 예술이기 이전에 신화였고 종교였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대중문화는 더더욱 신화와 종교의 후예이다. 신화와 종교가 약화되면서 그러한 요소는 문화 예술에 더욱 깊이 스며들었다. 정종미(13회, 2012년)는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열반](2020)에서 곱게 물들인 모시와 한지 등을 꼴라주한 패널들을 조합했는데, 그것은 조각보가 그렇듯이 한국적인 기하추상이다. 이 추상화를 단위구조로 하여 가변적으로 설치되는 이 작품은 가운데에 예배드려야 할 상이 있는 신전처럼 연출된 중심 집중적 구조를 가진다. 안쪽에서 문을 열고 홀연히 등장한 듯한 성스러운 상은 여성-신이다. 그 앞에 원형으로 배열된 꽃들은 이 열반상에게 바치는 헌사를 나타낸다. 평면을 설치로 확장한 이 작품에는 이인성 미술상이 출발한지 10년이 넘어서야 겨우 한명 포함된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엿보인다. 홍경택(14회, 2013)의 작품 [반추 2](2013)는 연필이 화면 가득 펼쳐지던 초창기 작품을 기억하는 내게, 연필 대신에 골프채가 자리함으로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소재는 달라졌지만, 평범한 사물에 내재한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풀어헤치는 어법은 지속된다. 초신성 폭발같은 형태로 배열된 골프채들은 모든 물건, 또는 상품, 또는 예술에 필요한 신비스러운 물신적 구조를 표현한다. 최근 작품 [BTS](2019)는 그가 그동안 해왔던 ‘펑케스트라’ 연작으로, 대중문화와의 적극적인 접속을 시도한다. 한국을 넘어 세계를 제패한 아이돌 그룹의 초상은 만다라 같은 화면의 중심에 배치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들의 음악이나 무대 분위기처럼 화려하다. 




정종미,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열반, 2020, 가변설치



홍경택,BTS 250x250cm acrylic & oil  on linen 2019



공성훈 파도, oil on Canvas, 227z3X181.8cm-, 2019



김차섭 Pi's Window_2012_Acrylic and Chinese ink on canvas_47.



공성훈(19회, 2018)의 [파도](2019)는 누가 보든 안보든 지구의 탄생 이래 수없이 반복되었던 무심한 상황을 환기시킨다. 해안가의 바위와 물이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그 모습을 인간사에 견준다면 수많은 투쟁일 것이다.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규칙을 교차시키는 공성훈의 작품은 순리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순리는 작가 또한 열심이었던 비판과 투쟁보다 더 큰 범주다. 그러한 자연 속의 인간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하지만 작가는 자연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만큼 인간 또한 그렇게 나타난다. 작품 [흰머리와 연기](2014)는 바람 때문에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 하얀 털 덩어리로서의 머리가 두드러진다. 그가 피워 무는 담배는 마치 향불처럼 인간을 하얗게 태운다. 김차섭(9회, 2008년)의 작품은 수학 기호인 파이를 제목 안에 넣어 수수께끼 같은 작품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예술가 또한 수학자처럼 자연에 내재한 신비를 풀고자 함을 의미한다. [Pi's Window](2012)는 먹과 아크릴을 함께 쓴 선택처럼, 동서양의 감성이 동시에 나타난다. 가로로 길게 펼쳐지는 자갈밭은 누군가에게는 고난의 상징 등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억겁의 시간동안 둥글게 다듬어진 자갈들을 비추는 또는 편재하는 빛은 현실의 무게를 삭감한다. 유화 작품 [7.2cm Pi](2008)에서 찻잔을 든 손과 뒤에 어스름하게 보이는 고양이의 실루엣은 이 장면이  평화로운 일상의 단면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믿어지는 부분을 생략하고 화면 중심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미지는 ‘초월을 꿈꾸는’ 작가의 세계처럼 신비롭게 다가온다.  

 

4. 원초로의 회귀 ; 김홍주, 김구림, 김지원, 김종학 

  

시각성을 넘어서 몸과 더욱 밀접한 현대회화는 물감을 체액과도 비교될 수 있는 원초적 물질로 다룬다. 이러한 질척거리는 물질은 비천과 숭고의 경계를 넘나들며 메지시를 던진다. 김홍주(6회, 2005년)의 작품 [무제](1992)는 전시장 바닥에 깔아 놓은 배치가 작품 내용과 어울린다. 쓰러져 있는 사람 위에 상처처럼 난자된 이미지들은 여기저기 싸놓은 똥을 연상시키는데, 그 또한 바닥에 놓이는 형식과 어울린다. 매우 신랄한 작품이지만 예술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생산물이 자기가 먹은 것을 배설하는 것이란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배설, 또는 창조는 쉽지 않다. 세필로 그리는 김홍주의 작품은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그의 최근작은 일견 누른 잎을 그린 것 같은데, 실루엣만 잎이고 그 내부에 옆맥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대신에 그 내부에서 온 힘을 줘서 바깥으로 내보내는 원초적 생리 현상이 유추된다.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은 경계를 파열하면서 나와야 하는 고통을 알려준다. 김구림(7회, 2006년)의 작품 [음양 20-S.44](2020)은 캔버스 위에 디지털 프린트와 아크릴, 꼴라주 등 복잡다단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는 1950년대 말부터 실험예술을 해왔던 이력과도 연관된다. 칼집에서 칼을 꺼내는 손이 화면 가득히 보이는 화면 저편에 해골 또한 그려져 있다. 성적 결합의 함의를 가지는 칼/칼집의 은유는 죽음과의 연결 또한 선명하다. 체액이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어지러운 바탕 또한 그러하다. 음양 또는 여성과 남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이미지는 대결의 국면이 더 강력하다. 작품 [음양 20-S.45](2020)에서 긴장감 가득한 미남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물감들은 음양에 내재한 평화와 조화 같은 통상적 관념을 전복시킨다.  




김홍주, 무제 Untitled, 1992, Acrylic on Canvas, 63x31cm



kimkulim. 음양 20-S.44 Acrylic and Collage on Digital Print Canvas, 193.90 x 130.3cm. 2020



김지원2- 맨드라미  Maendrami 2019  oil on linen 91x73cm



김종학, Untitled, Acrylic on Canvas, 162x195cm, 2018, 조현화랑



김지원이 오랫동안 그려온 꽃 [맨드라미](2019)는 꽃에서 기대 되는 바의 아름다움을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변형시킨다. 전자가 온전하게 창조된 생명을 재현하는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라면, 후자는 자연과는 구별되는 그렇지만 자연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쟁취하려는 화가의 욕망에 의해 창조된 산물이다. 원래 맨드라미는 전형적인 의미의 꽃과 달리 다소간 징그럽다. 김지원의 작품은 맨드라미의 부분일수도 있고 그로부터 출발했지만, 그림의 논리로 화면 가득히 추상적으로 채워진 맨드라미다. 이때 맨드라미는 그림, 아니 그리기를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맨드라미 연작들은 뿌려진 피 같은 붉은 얼룩의 형해로 남은 것부터 촉각적 붓질로 완전히 와해된 상태에 이른다. 여기에서는 특정 자연물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한 색감의 조화만이 감지된다. 마지막으로 김종학(2회, 2001년)은 이인성 미술상이 20주년 까지 오기에 가장 먼저 선택된 작가다. 이름 모를 꽃들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상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백화만발(百花滿發)할 화단의 미래를 알려주는 듯하다. 작품 [Untitled](2018)에서 화면 가득히 그려진 다양한 꽃들은 진달래나 개나리 호박꽃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이다. 그의 작품은 꽃이자 꽃무늬인, 재현이자 추상인 회화다. 색 또한 유치찬란하다. 작가의 관념이나 작품의 개념을 위해 화려한 색이 기피되는 통상적 선택에 비한다면 빨강, 노랑 등 온갖 예쁜 색들은 다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아이가 그린 듯한 천진함이 있다. 이처럼 그림을 배우지도 알지도 못했을 시점으로 자신을 리셋하는 것은 늘 새롭게 출발하고픈 화가의 욕망을 반영한다. 

  

출전; 대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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