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좌혜선 / 이중의 소외를 밝히는 빛 또는 예술

이선영

이중의 소외를 밝히는 빛 또는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좌혜선의 작품에는 집과 집밖 풍경, 그리고 인간같은 친숙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친숙한만큼이나 낯설다. 그 어디에서도 안식처를 찾을 수 없는 이방인의 시점이 두드러진다. 문명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대 가장자리에서 방치되어 있는 인간들은 안팎에서의 동시적 소외라에 맞딱뜨린다. 소외란 현대인의 운명 같은 상황이며, 예술가는 일찍이 그러한 상황을 증언해 왔다. 단지 자신에 대해 말했을 따름인데 곧장 시대를 말한 것과 같은 때가 있었다. 어떤 시스템이라도 굳어지기 전까지는 활기차다. 근대 초기가 그러했다. 지금은 근대에 확립된 규칙이 더욱 강화되어가는 시기이다. 근대의 한계가 명확해질수록 전통을 비롯한 대안이 모색된다. 지금의 결핍은 다른 어떤 시기의 충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국화를 전공한 좌혜선은 전통과 현대의 관계를 고민했을 것이다. 장지에 목탄, 분채 채색을 주로 하는 형식이지만 전통적 한국화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은 전통과 현대의 관계가 내용으로도 나타난다. 




냉장고, 여자#2  116cm x 91cm 장지에 분채채색 2010



돈 슬레이터는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전통적 유기주의(organicism)를 현대와 대립시킨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유기주의는 전체성, 자연성, 통일성을 함축하는 반면, 근대는 소외와 기계주의, 그리고 사회적 분리를 낳는다. 돈 슬레이터에 의하면, 유기적 공동체에 바탕하고 있는 전통은 모든 사람이 서로의 사회적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세계 내에서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장소이며, 자연 환경과 한해의 리듬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경험으로부터 질서정연하게 패턴화된 생활 예술, 삶의 방식을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유기주의는 기술적인 노동 분화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적 발전이나 진보는 직선적이어서 회귀란 없다. [소비문화와 현대성]은 근대의 핵심을 경제적 합리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근대가 가속화시키는 양극화 사회에서 합리성은 왜곡된다. 좌혜선이 직면한 한국사회의는 완전히 쿨 한 기계적 사회도 아니다. 그 어중간한 시점과 지점에서 소외는 더욱 증폭된다. 


작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딸, 누나, 언니, 아내, 선생 등등의 무게를 지고 있다. 좌혜선의 작품들에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제주를 떠나와 학업과 작업과 생계를 위한 여러 일들로 지치는 대도시와 그 인근에서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집안의 맏이로 두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그 또래 작가로서는 흔치 않았던 삶이 현실에 대한 의식을 보다 선명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고난은 필연이 되어 작품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많은 작품들은 명과 암이 확연히 갈린다. 그것은 여백 위에 먹으로 그리는 모태언어가 반영된 탓이리라. 여백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제 현대사회에 내재한 깊은 어둠이다. 좌혜선의 작품들은 어둠 속에서 꺼낸 이야기이다. 작가의 무의식에서 길어낸 것부터 뉴스에 종종 나오는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다층적으로 깔려있다. 하지만 그 모두를 총괄하며 의식하는 어떤 존재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가다. 작업을 통해 다른 이들도 같이 겪는 고난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작가다. 




담배피우는사람들 130x194cm 장지에 분채채색 2015



작업은 소외를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다. 작가는 작업을 지속하는 가운데 끝없이 탈주로를 모색한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을 와중에도 작업량이 상당한 것은, 작가가 직면한 상황이 작업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려준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고난과 그에 관련된 작품이 서로 짝패를 이룬다. 너무 바빠서 작업을 게을리 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그  바쁨이 작업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는 부류도 있는데, 좌혜선은 후자에 해당된다. 작가는 씨름 선수처럼 자신을 쓰러뜨리려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게임한다. 이번 전시에도 나오지만, 작가는 2010년 첫 개인전부터 생계와 인간의 관계에 주목했다. 예술은 도피와 초월의 장이 아니라 직시와 응전의 장이 되었다. [끼니] 라는 부제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부엌에 있는 여성을 통해 생존을 위한 활동을 그린다. 작품 [냉장고, 여자#2](2010)는 냉장고를 열고 오늘은 무엇을 해먹을까하는 듯이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이다. 


작가가 모델이었을 이 장면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인간의 모습 치곤 그다지 활기차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많은 국민들이 배를 곯았던 시대가 몇 십 년 안 되는데, 냉장고에 무엇인가 가득한데도 그 앞의 인간은 심란하다. 인간은 가짜 풍요로 끝없이 배고프다. 그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돈 버는 일도 힘들었을 테지만, 해먹는 것도 일이다. 작가는 냉장고 불빛 아래 여성을 그냥 세워 놓은 것 하나로 그녀가 처한 공적/ 사적 영역에서의 이중의 고통을 드러낸다. 냉장고 및 그 안의 모든 식품들은 상품, 즉 시스템의 산물이기도 하다. 시스템이 강할수록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첫 개인전 이후의 발표 작품에서도 집 안에 있는 사람, 특히 여자의 모습을 자주 그렸는데, 창밖으로 빛이 가득 들어오는 집조차도 안식처가 아닌 또 다른 낯선 무대로 다가온다. 퇴근해도 계속되는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없는, 티도 안 나는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이기에 우울하다.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여성에게 가정은 또 다른 공적영역인 것이다. 




산책 116x80cm  장지에 분채채색 2015



그렇다면 임금노동의 장인 공적영역은 어떠한가. 작품 [담배 피우는 사람들](2015)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잠시 쉬는 중일까, 하염없이 일거리를 기다리는 중일까. 어두워서 두 개의 연기만이 두 명의 인간이 있음을 말한다. 사적 영역에서의 심란함이나 칙칙함에 상응하는 공적영역의 단면이다. 냉장고 앞의 벗은 여자보다 더 익명화된 남자들은 일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 등으로 물화되곤 하는 인간의 고단한 모습이 배어있다. 연극무대의 배우처럼 상황의 말하는 장면에는 냉장고 불빛보다 더 강력한 문의 불빛이 특징적이다. 주변의 어둠 때문에 더욱 빛나는 저 문은 어둠 속 인간들의 온전한 출구가 될 수 있을까. 두 작품은 시간차를 두고 제작된 것이지만, 작가가 줄곧 견지해온 관심사에 의해 연결된다. 공적영역에서의 소외는 사적영역에서의 소외와 연동된다. 올해 오픈스페이스 배에서 열린 개인전 부제는 [971 855...500]이다. 이 수수께끼같은 숫자는 한해 산재 사망자 수다. 


2018년 971명, 2019년 855명이고, 2022년 정부가 목표로 하는 500명이라는 의미다. 2020년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난리 통에 죽은 이가 500명 조금 넘은 것을 생각하면, 약 없는 전염병보다 더 섬뜩한 상황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가 더 진보한다면 왜 이러한 죽음의 숫자는 더 늘어나는가. 근대사상가가 이미 말했던 ‘시간은 돈’(벤저민 프랭클린)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시간(돈)을 아끼기 위해서 노동자를 위험에 빠트리고, 소비자는 좀 더 자유로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소외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함께 생각되는 것이기에, 결국은 같은 자원을 가지고 경쟁하는 셈이다. 똑같은 장소와 시간 안에 사람들을 몰아 놓는 경쟁은 생산력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권력의 힘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권력을 두 가지 형식으로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potestas’는 타자를 지배하는 사회적 힘이며, ‘potentia’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적 권력에 대응하는 타자의 권력이다. 




위험한 곳#1 130x194cm 장지에 목탄, 분채채색 2020



습한곳 130x194cm 장지에 목탄, 분채채색 2020



네그리에 의하면 누군가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삶의 시간을 조직화하고 한계를 설정한다. ‘삶 전체를 감싸는 자본주의’(네그리)에서 권력은 미묘하게 작동한다. 좌혜선의 작품에서 안과 바깥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연동되는 이중의 소외는 이러한 권력의 편재를 배경으로 한다. 불가피한 것도 아니고, 단지 비용 때문에 안전장치 없이 일하는 이들이 직면하는 죽음에 대해 작가는 희생자들의 값싼 몸값을 형해가 되어 나풀거리는 몸으로 말한다. 바깥 풍경은 어떠한 사연을 가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환경 속에 푹 묻을 수 있어서인지 잔잔해 보인다. 특히 잘 정비된 도심 풍경이 그러하다. 작품 [산책](2015)은 빌딩과 가로수, 안전 바가 설치된 보도 등 반듯반듯한 도시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산책자를 보여준다. 작가는 소설가 김훈의 칼럼을 인용하면서 그런 빌딩을 짓기 위해 안전 지지대도 없이 작업하다가 떨어져 죽은 노동자가 한해 수 백 명이라고 말한다. 


모든 상품들이 그렇듯이 여기에도 노동에서의 소외는 지워져 있다. 인공적 발광체이자 자연의 빛 또한 공격적으로 반사하는 건물과 보도는 인간에게 가야할 길을 정해준다. 빌딩의 반사면에 의해 우툴두툴한 실루엣이 드러나는 나무는 직선적이고 평평화 된 문명과 대조 항을 이룬다. 자연광이든 인공광이든 삶의 무대는 우울하다. 2015년 2회 개인전에서는 밖으로 나가서 인물 풍경 그렸다. 2018년 3회 개인전에서는 규모를 키워서 100호짜리 풍경 15개를 옆으로 죽 이어서 도시의 스펙터클과 대조되는 어둑한 스펙터클을 만들기도 했다. 기만적으로 선전되는 행복의 가상에 대항해 현실적 불행을 전면에 내세웠다. 대개 변두리 풍경 속 그들은 대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목탄을 활용해 어둠이 더욱 짙은 이번 전시의 작품 [위험한 곳] 시리즈도 변두리 풍경이다. 작품 [위험한 곳#1](2020)에서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가로등은 어둠을 밝히기 보다는 어둠의 강력함을 증거 한다. 그것은 그곳에 있는 것들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곳#2 72x53cm 장지에 목탄, 분채채색 2020



전경은 차도 다닐 수 있을 만큼 탄탄한 아스팔트길인데 거의 지워버리다 시피해서 어둠 속에 잠겨있어, 발을 디딜 수나 있는 곳인지 모호하다. 작업실 가는 길은 버스에서 내리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는 시골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 타인이 있어도 없어도 무섭다. 시골 길에 대한 낭만도 위축되는 위험사회이다. 그것은 촘촘할수록 도미노처럼 확대되는 위험이 도처에 산재함을 알려준다. 작품 [습한 곳](2020)은 아래로 쑥 빠져 들어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전면화했다. 화면 아래의 소용돌이는 구심력이 세서 시선 또한 빨아들인다. 주변 환경이 생략되어 있고 바닥이 보이지 않아, 장면은 어떤 풍경의 일부라기보다는 블랙홀이나 심연과 같은 상황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어떤 실체, 그 보이지 않는 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위험은 가장 편안해야 하는 사적 영역에도 있다. 이전 작품에서 창문으로 빛이 드는 집안의 풍경을 마치 어둠 속에 떠있는 섬같이 그렸다면, 최근의 실내풍경은 더욱 밝다. 


인스타그램이나 광고에 가까운 이미지를 자신의 삶으로 취하려는 욕망으로 빛나는 그런 화사함이다. 작품 [위험한 곳#2](2020)에서 장면은 큰 통유리를 통해 시야가 확 트인 고급 아파트의 실내를 보여준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과 면의 구획들은 현대적이지만, 장면에 내재된 폭력은 오래된 것이다. 창 안의 사람과 드리워진 그림자는 바깥의 화사함과 대조된다. 존재는 왜곡되고 얼룩져있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창밖의 수평선이 전경의 쓰러진 존재의 현기증을 암시할 따름이다. 백주대낮, 대명천지에 벌어지는 은밀한 폭력의 현장이다. 가정폭력에 대한 기사를 보고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사회가 겉으로의 평온한 질서 이면에 도사린 타자에 대한 폭력을 그린다. 폭력을 행하는 자 또한 폭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폭력의 연쇄 고리는 이어진다. 좌혜선은 2018년 3번째 개인전 [가장 보통의 이야기]에서 그림에 넣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서사를 텍스트를 통해 보충했다. ‘1인칭 시점의 소설’이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에 바탕 한 픽션이다. 잔잔한 손 글씨들과 언뜻 평이해 보이는 죽 이어지는 풍경은 그 안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충격으로 전환된다. 




monster dancing#1 162x130cm 장지에 목탄,분채 채색2019



monster dancing#2 130x162cm 장지에 목탄, 분채채색 2020



15점의 그림에는 15인의 사연이 담겨있다. 멀리서 본 풍경과 내적인 이야기는 그 거리와 차원의 상이한 만큼이나 괴리감과 이질감을 자아낸다. 몬스터 댄싱 시리즈는 안팎의 소외가 중층 결정 된 모습이다. 작품 [monster dancing#1](2019)은 검은 사각형 속에서 여러 자세로 몸부림치다가 형해로 남은 모습이다. 어디선가 비춰지는 조명이 몸의 경계선이 해체된 유기체들을 물질화한다. 죽음이 연상되지만 굳은 시체가 아니라 숨이 아직 붙어있을 때의 자세가 남아있다. 작가는 바탕을 검게 처리해서 어떤 장소와 시간과 상황에서 결과된 것인지를 생략한다. 몬스터란 프랑켄슈타인처럼 이것저것의 단편이 모인 이질적 실체를 말한다. 질서를 잡기위해 혼돈 속에서 제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신화 도입부같은 모습이다. 동시에 그것은 왜곡된 현대인의 모습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을 악몽의 현대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정체성으로 간주할 정도니 말이다. 


좌혜선의 작품에서도 현대는 원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작품 [monster dancing#2](2020)에서 형해 화 된 몸은 정확하지 않지만 한명 이상인 것은 확실하다. 숨은그림찾기처럼 살펴보면, 상대를 찌르려는 제세와 자기 보호적인 자세가 얽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깊은 어둠 속에서 드러내는 사건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통이다. 몸의 일부를 이어 만든 괴물은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어긋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얽히고섥혀 허우적대고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다. 출산 이후의 여성의 몸부터 산재로 죽어가는 몸 등이 포함된다. 인간은 해체되어 흐르고 있지만 방향성이 없다. 대부분 바탕을 검게 처리하는 작품들에는 탈주로도 보이지 않는다. 변신은 탈주의 조건이지만 살아서 나가는가 죽어서 나가는가가 문제다. 죽어가거나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형상들이 뒤얽힌 장면들은 특히 몸에 가해지는 권력에 민감하다. 그것은 좌혜선의 주로 하고 있는 회화가 물질과 육체가 만나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출전; 제주현대미술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