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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유토피아를 위한 지침서

이선영

유토피아를 위한 지침서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소연은 글자와 이미지들이 새겨진 천들이 걸어 놓고, 탁자와 바닥에도 그와 연관된 오브제들이 설치했다. 신작이지만 재료들은 오래된 것이다. 작가가 다루는 주제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한쪽 벽면에서는 얼마 전 목욕탕에서 있었던 퍼포먼스가 영상으로 흘러나온다. 퍼포먼스 속의 의상이나 오브제은 퍼포먼스의 도구이자 설치작품이 될 수 있다. 전시된 것들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형태나 의미가 아니라, 행위와 관련되어 의미가 파생되는 것들이다. 작가에 의해서 선택, 변형된 오브제에는 잠재적 행동이 있으며, 퍼포먼스는 의미의 매개가 되었던 대상을 낳는다. 행위는 얼마 전의 전시부터 작가의 탄생 및 유년기에 이르는 광폭의 시간성을 포함한다. 김소연의 작품에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존재하는 과도적 시공간에 존재할법한 대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심리학자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있는 이 잠재적 공간이 주체를 직접적인 현실과 맞닿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전시장 전경



입체적인 타자



입체적인 타자



심리학은 쓰라린 현실원리와 달콤한 쾌락원리를 구별하는데, 이러한 과도적이고 잠재적인 시공간을 통해 아이는 현실의 비중이 좀 더 높아지는 미래를 준비한다. 유년기가 자율성을 가지게 되고 점차 길이도 길어진 것은 인류 문화사에서 그리 길지 않다. 그 이전에 시대에는 귀족 등 소수의 특권계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작은 어른으로서 취급받았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변화에서 해방과 억압을 동시에 본다. 길어진 유년기 동안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체화하게 되고 그것은 사회의 재생산, 즉 보수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과도적 시공간은 큰 폭으로 늘어난다. 지금도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바로 현실에 투입된다. 그 아이들은 학교 대신에 일터로 가고, 초산 연령도 낮으며 그래서 악순환은 반복된다. 적어도 중진국 이상의 국가들에서는 전 생애에 걸쳐 아이를 위해 따로 잡아둔 시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김소연의 작품은 바로 그러한 시기를 채웠던 대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개는 장난감 등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어른이 돼서는 예술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키덜트라는 부류들도 있지만 말이다. 예술은 어른이 돼서도 놀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치유와 해방의 역할을 수행한다. 놀이나 예술에 있어서의 몰입은 그자체의 즐거움 이외에는 목적이 없다. 목적이 설정되는 순간 놀이는 현실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잠재적 시공간은 기만과 회피라는 역할도 수행한다. 놀이나 예술이 현실 그자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설사 작가가 리얼리즘을 추구한다고 해도 말이다. 전시장 한쪽에 하얀 의상을 입은 작가의 퍼포먼스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전시장 천정이나 벽, 바닥에는 배냇저고리나 수건 등등이 설치작품의 형식으로 변주되며, 장난감 샹들리에나 사탕 모양의 풍선 등,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하다. 전시 전에 스튜디오에 들렀을 때, 작가는 색색의 구슬들을 같이 꿰기를 청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입체적인 타자



입체적인 타자



구슬꿰어 관계맺기 



구슬꿰어 관계맺기 



구슬꿰어 관계맺기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은 예술작업에도 정확하게 해당된다. 특히 김소연의 경우에는 함께 구슬을 꿰면서 하는 상대와의 대화가 중요한데, 그것은 무엇인가 줄줄이 연결시키는 작업에 내재된 서사적 요소를 말한다. 작업은 놀이처럼 진행되며, 작품 또한 같이 노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작가 스스로도 재미있게 놀지 못하는 것을 같이 놀자고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는 현대예술의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온 터였다. 김소연이 만지작거리는 소재들은 따스하고 아늑해 보이지만, 그것들이 엮여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기대기 좋은 하얀 쿠션에는 배꼽 모양의 형태로부터 뻗어 나오는 붉은 실이 탯줄처럼 보이고 풍선에 둥 떠 있는 유토피아의 뒷면에는 디스토피아가 새겨져 있다. 풍선은 바람이 빠지기 마련이다. 그 앞의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유토피아를 위한 지침서]를 ‘미술가의 고민이 담긴’, ‘자아를 찾는 성장소설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영상작품에서 몸에 유희적으로 새겨 넣은 문신들은 박박 지워져야 할 오명으로 나타나고, 같이 놀아야할 관객들은 작가의 낯선 행동들을 주시한다. 작품 [미술가의 고민]에서는 몸에 새겨진 문신들이 보인다. 몸의 여러 군데에 이곳저곳 낙서하듯이 새겨진 문신에는 만화부터 명화의 한 장면 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패션의 아이템이기도 한 문신은 이전처럼 살을 파고드는 시술이 아니라, 마치 판박이 같은 방식으로 쉽게 새겨진고 지울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김소연의 작품에서 문신은 잘 지워지지 않는 몸에 새겨진 무엇을 상징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뇌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기억일 수도 있다. 몸에 자행되는 폭력이나 고문 등에는 그 흔적이 남는다. ‘문명이 광기를 양산 한다’는 프로이트의 생각을 따른다면, 트라우마라는 개념은 심리학을 넘어 일상어가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영상으로 나오는 목욕탕에서의 퍼포먼스에서 작가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을 박박 지우려 한다. 







미술가의 고민



그것은 왜 애써 지워져야 할까. 피부 안쪽에 시술되는 문신은 몸의 경계를 위반하는 불경스러운 것이다. 인류학은 순수/오염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몸을 든다. 누구나 가진 보편적인 실체인 몸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가늠대가 된다. 작가는 문신을 ‘미술가로서의 고민’으로 간주한다. 작가는 그 고민을 씻고 싶었을 것이다. 목욕탕이라는 대안의 공간에서의 퍼포먼스는 미술관을 넘어선 일상적 소통을 위한 뜻밖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문신, 즉 고민을 지우려는 작가의 반복적인 행위에도 흔적은 선명하다. 미술이 가지는 고민은 삶 그자체에 내재한 고민만큼이나 해법이 쉽지 않다. 미술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결정체라면 인생에 있어 모든 미해결 문제 또한 그대로 남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과정은 해법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예술 특유의 거리두기는 그러한 해법을 앞당긴다. 


그와 별개로 문신은 범죄자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목욕탕은 물론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대도 갈 수 없었던 일종의 낙인이기도 했다. 순수함을 갈구하던 근대 시기에는 장식 혐오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예술에서 불순한 것들을 다 제거하기를 꿈꾸었다. 그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끌었다. 문신을 비롯한 장식적 요소는 다시 예술의 몸통이 되었고, 유희나 소통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주요 어법이 되었다. 자품 [자신을 찾아라]에서 붉은 색 탯줄을 들고 서있는 여자는 기괴한 느낌을 준다. 제거되지 않은 탯줄은 문신만큼이나 몸의 경계를 위협하는 금기의 요소이다. 배꼽 부분에서 나오는 붉은 탯줄은 하얀 의상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순수의 상징인 하얀 의상은 경계를 넘는 선 때문에 오염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아이였지만, 김소연은 그 자신이 가임기의 젊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을 통해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론 작가는 작품을 낳는 자이기도 하다. 






미술가의 고민



미술가의 고민



욕망의 항아리



끊어진 탯줄은 탄생을 의미하지만, 채 제거되지 않음은 탄생의 불완전성을 암시한다. 아이를 몰래 낳고 버렸다는 음습한 범죄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탯줄도 제거되지 않은...’ 아이의 사연이다. 탯줄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면, 주요 부위에서 나오는 긴 탯줄은 원활한 소통의 조건인 접속에 대한 기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타자와의 온전한 연결은 아직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몸의 언어를 잘 구사하는 김소연의 작품에서 유토피아라는 주제는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에덴동산을 비롯해서 모든 유토피아에 대한 전설과 신화에는 성(性)을 알게 되는, 즉 여자 또는 남자로서의 자신의 몸을 인식하는 성인기에 유토피아로부터 쫒겨났다는 이야기가 보편적이다. 이제 벗은 몸은 부끄러워지는 것이며, 남자는 노동을 하고 여자는 아이를 키우는 노고를 떠맡는다. 신화를 개인에게 대입해 보자면, 아이가 부모 또는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잠재적 시공간의 시기를 떠난 시점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시점이다. 어른은 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제 주는 존재,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산하는 존재다. 


그것이 바로 현실의 영역이다. 괴리는 도처에서 존재한다. 작품 [욕망의 항아리]에서 작가는 매달린 종이풍선에다가 신도시 이미지를 새겼다. 풍선 자체가 부풀려진 것이기에 비전과 전망은 비현실적이다. 그 뒤는 디스토피아이다. 풍선 아래 탁자에 배열된 탯줄이 나오는 하얀 쿠션은 제거되지 않은 탯줄처럼 확실한 경계를 나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표현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다른 누군가의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어릴 적 사용했던 커튼이나 바닥에 깔린 사탕 모양의 풍선들은 분열된 상황을 수습하기에는 너무 취약해 보인다. 예술 또한 놀이처럼 현실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할 수 있는 것이란 별로 없다. 작품 [입체적인 타자]에 등장하는 천들은 염색과 박음질 등 여러 처리가 되어있는데 뭔가 깔끔하지 못하고 손때가 묻어있다. ‘utopia’라는 단어가 써진 천 또한 그렇다. 다른 작품에서 천들은 마치 이불보 말리는 것처럼 빨래 줄에 널려 있기도 한데, 빨래 줄은 미술관 아닌 현실영역에서 있어왔던 오래된 설치미술이기도 하다. 




욕망의 항아리



욕망의 항아리



자신을 찾아라



자신을 찾아라



사용 중인, 작동중인 표면은 유토피아로부터 떠났지만 또 다른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예술적 여정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천위에 이미지와 글자들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그 중 ‘with’라는 단어와 아이의 손 같은 이미지가 뚜렷하다. 복락원을 위한 여정에서 타자와 함께 하기는 중요하다. 작품 [구슬 꿰어 관계 맺기]에는 관객과 함께 만든 구슬 샹들리에로, 예술을 매개로한 소통은 관심과 사랑이 필수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토피아를 위한 지침서_부제; 현실에 존재한 ‘이상적인 사회’를 찾습니다]에서 작가는 ‘미술은 특정 소수만을 위한 언어가 아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였다’고 주장한다. 즉 김소연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바벨탑 이전의 사회, 즉 보편적인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시대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광고를 비롯한 대중 소비문화이지 예술은 아니다. 유토피아를 다시 찾는 여정에 타자와의 소통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는 작가에게 예술이란 것이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은 미지수다. 

 

출전; 레트로봉황 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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