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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보림 / 타자들과 함께하기

이선영

타자들과 함께하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지인의 얼굴을 프린트한 일종의 가면을 쓴 작가가 영상 속에서 행동하고, 전시장에도 그 인형들을 설치해 놓는다. 나란히 앉혀 놓았는데 작품이라기에는 대강 만든 듯한 모습이다. 그것들은 영상 속 행위 안에서도 아무렇게나 다루어진다. 가면의 얼굴을 제공한 이는 우연찮게 그 이름이 ‘정화’였는데, 그것은 지배적 상징구조에 의해 승인받아야 하는 타자들의 의무 사항이기도 하다. 백보림은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호명하면서 정화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정신분석학자들라면 승화라고 표현하고 싶을,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정화나 승화 같은 관념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부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의식은 의식이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초자아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아나 초자아는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거울에 비춰진 규칙이 정한다. 특히 그들이 지배적 집단에 속해 있지 않은 타자일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문턱은 매우 많고 높다. 




전시전경



영상





백보림의 작품에서 똑같은 얼굴을 한 인형들은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이미 정화되어 있는 셈이다. 인사이더들은 이미 정화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그들은 아웃사이더를 정화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정화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백보림은 자신을 포함한 많은 타자들을 호명하면서 주체이자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의 작품에 가면이 필요한 이유다. 얼굴 형태의 가면 말고도 두건형태의 가면, 물건 포장용 부직포를 이용한 가면 등 여러 종류다. 가면은 가짜지만, 가짜들도 세분화되어 각자의 역할을 맡는다. 어떤 형태이든 그것이 벗겨지는 순간은 생략된다. 그것들은 양파껍질 벗기기처럼 가상에 가상을 거듭할 뿐, 진실은 영원히 유보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자기 안에 타자를 불러들이는 가면의 심리학 속에서 작가는 스스로가 속해있는 여성이나 작가, 그리고 그보다도 더 열악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주목했다. 


백보림이 레지던시로 입주해 있는 지역은 결혼이주여성이 많이 산다. 입주 작가로 있으면서 작가는 이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오픈 스튜디오 중에는 관련 센터의 담당자가 와서 이주 여성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타자들은 언제나 무리화 되어 있으며 개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백보림의 행위 예술과 설치 작품에 복제된 얼굴로 나오는 인간들이 그러한 상황을 말한다. 작품 [정화-되고 싶은 정화]는 같은 얼굴을 한 솜 인형들이 여성에게 전형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다. 부드럽고 따스한 옷차림부터 여학생 복장까지 여러 종류지만, 모두 여성에게 권유되는 덕목들이다. 이분법적 사고에 의하면, 남성은 이 여성 이미지와는 반대로 강하고 차갑고 또 주관이 확실한 주체여야 할 것이다. 인형의 손발은 그냥 뭉툭하다. 그들은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의 특징을 두루 장착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사회의 구성원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또 복제자의 역할을 맡는다. 




정화-되고 싶은 정화 1,2,3_패브릭에 솜



정화-되고 싶은 정화 1,2,3_패브릭에 솜



정화-되고 싶은 정화 1,2,3_패브릭에 솜



같은 얼굴을 한 인형들을 창조한 이 또한 같은 얼굴이다. 거기에는 복제하고 복제되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 있다. 작품 [핑크의 사회적 의미 탐색기]는 갖가지 모양의 유리잔들을 세팅한 테이블 위에 망치 영상이 등장하여 뭔가 깨지는 듯한 상황으로 연출되었다. 어둑한 조명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반투명 용기(容器)들은 인간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약하다. 또한 컵들은 그릇을 주로 만지는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자 일 것이다. 대체로 여성이 그 역할을 맡아왔다. 작품 제목 속 ‘핑크’는 여성을 표현하는 사회의 상투적 관념을 말한다. 여자 아이는 핑크빛 장난감과 의상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핑크는 연약하고 부드럽고 따스하고 달콤하다. 푸른색과는 반대에 위치하며, 비슷한 계열인 붉은 색과도 다르다. 그러한 가치는 사랑받아야 마땅한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작품에 망치와 유리 파편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릇과 망치에서 여성/남성의 상징이 보이는 것은 부수적 효과일 것이다. 폭력을 남성에게만 전가하는 것도 이분법적인 사고다. 작품 [기형적 쉼터]는 클레이로 만든 기물들이다. 결혼이주여성들과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다루었던 매체인 클레이는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빚게 된다. 놀이처럼 진행되는 행위는 마음속에서 꼬물대며 일어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손으로 오물조물 만든 것들은 정확히 무엇인지 분류하기 힘들다. 촛대를 비롯해서 무엇인가를 담는 형태를 바탕으로 하지만, 종을 알 수 없는 여러 동물 모양도 보인다. 이 작품의 중요한 지점은 분류하기 힘든 다양한 것들을 그리드 형식으로 하나하나 나열해 놓은 것이다. 나열된 그 무엇도 어느 하나에 강조점이 있지 않다. 가장 빼어난 것을 향한 체계가 아니라 각자 생긴 대로 평등하게 각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이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는 방식이다.  




기형적 쉼터 1-65_clay



기형적 쉼터 1-65_clay



작품 [핑크의 사회적 의미 탐색기 2_빵과 생크림]은 충격적인 비주얼의 케잌이다. 컬러가 아니라 흑백이다. 무엇인가 축하한다는 멘트가 아니라, ‘씨X년’이라는 욕이 새겨져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미의식이나 사회의식의 각성을 위해 여러 방식으로 충격요법이 사용되었지만, 일상에서 먹는 음식과 관련된 충격요법은 영원히 적응하기 힘들다. 그 작품은 욕에 담겨있는 성적인 의미 뿐 아니라, 먹는 것과 성적 행위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 한쪽 먹었다기 보다는 한 귀퉁이가 망가진 채 있는 모습도 꼴불견이다. 사진을 찍는 와중에 찌그러진 모습이라고 하며, 상당 시간이 지났음에도 상하지 않는, 푸르딩딩한 색으로 장식된 케잌은 독성을 함유한 듯 불길하다. 색채의 심리학에서 푸른색은 생기의 반대쪽에 있다. 음식에다가 은은한 조명이 아니라, 탁상용 조명을 장치한 것도 먹는 것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다. 조명된 이 기괴한 음식은 다양한 상념을 낳는다. 


그 뒤쪽에 깨지는 유리컵들, 가면을 쓴 채 정체불명의 것들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 영상이 나오는 또 다른 작품들과 연동되어 읽혀진다. 영상작품 [댄스 트레인저]는 4개의 화면이 동시에 움직인다(그러나 똑같은 시점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전하는 오늘의 뉴스’로 시작하는 작품은 눈구멍만 나있는 가면을 쓴 인물이 사랑에 대한 설(說)을 펼친다. ‘사랑만이 나의 구원자’라고 외치는 하얀 가면과 복장을 한 ‘나’는 사랑을 삶의 이유라고 선언한다. 그렇지만 그의 행동은 가학피학적이다. 자기 목을 조르고 자기 빰을 박수치듯이 때린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동작을 하기도 한다. 인물 배경으로 계속 띄워지고 있는 하트표시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더욱 강조한다. 그 옆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은 사촌언니 얼굴을 복사하여 만든 가면을 쓴 인물들이 ‘정화’를 시도한다. 인형 형태로 앉아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같은 가면을 쓴 인물은 ‘저희는 이미 정화되었답니다~’를 외친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가면을 벗지만 얼굴을 안 나타난다. 




핑크의 사회적 의미 탐색기_싱글채널비디오와 혼합매체



핑크의 사회적 의미 탐색기_싱글채널비디오와 혼합매체



뒷배경은 폭죽들은 이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는 노래를 부르는 가면 쓴 여자들의 배경은 달리는 열차의 통로다.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배경은 세상이 ‘요지경’이 된 원인을 암시한다. 막춤을 추는 인물들은 포장재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것은 요지경으로 보일만큼 폭주하는 현대사회의 주된 매개가 바로 상품임을 알려준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은 이러한 빠른 흐름 속에서 떠돈다. 도시의 화려한 야경과 조명을 떠올리는 번쩍번쩍하는 배경과 놀이기구, 해파리 떠다니는 심해 등이 배경이다. 노래 가사 중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는 대목은 생산과 소비의 광란을 추동하는 욕망의 끝없음, 즉 실체 없음을 암시한다. 의사들이 입는 녹색 의상과 가면을 쓴 인물은 입만 남겨 놓고 이상한 음식을 먹는 장면은 가장 기괴하다. 전체적으로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들과 영상의 관련을 생각해볼 때, 쌍욕이 써있었던 푸르딩딩한 케잌을 먹고 있는 것이 유추된다.


전시장에 설치된 케잌은 깨림직하긴 했어도 케잌으로서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 영상은 장식된 케잌을 먹기 위해서 케잌은 망가져야 함을 알려준다. 변형은 불가피하다. 섭식에 관련된 이러한 작품은 먹고 먹히는 생태계에서 인간은 얼마나 자율성을 확보했는지를 묻게 한다. 영상 속 인물들은 대개 여성이다. 그 ‘여성’들은 사랑에 목숨 걸고, 끝없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정화’되려 노력하고, 요지경 속에 헤매는 소비자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찝찝한 음식을 스스로 먹고 있는 맹목적인 존재다. 강제로 떠먹임을 당하지 않는 부분 또한 불길하다. 강제가 아닌 수긍이다. 타인의 감시가 아닌 자기 조절이다. 핑크빗 가상도 실제로 먹는 시점이 되면 그 창백한 본색을 드러낸다. 백보림은 이번 레지던시에서 [w 프로젝트]를 통해 여성연구를 진행했다. 작품 제목으로도 포함된 ‘핑크의 사회적 의미’는 편견을 다룬다. 작가는 ‘편견에서 파생된 또 다른 편견이 사회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 작품에서 다루게 되면서 핑크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한다.




핑크의 사회적 의미 탐색기2_빵과 생크림



핑크의 사회적 의미 탐색기2_빵과 생크림



핑크의 사회적 의미 탐색기2_빵과 생크림



그것들은 레지던시 근처의 김해 지역의 결혼이주여성을 염두에 둔 작업이다. 작가는 그들이 사랑이 아니라 차별 속에 살고 있음을 발견했다. 김해는 경기도 안산 다음으로  많은 이주여성이 사는 곳이다. 이 지역에는 공장도 많고 외곽 시골에서는 농사도 많이 짓기에, 이주지역여성은 안팎으로 많은 노동 뿐 아니라 편견에도 시달린다. 그들은 가정폭력에도 노출되어 있다. 코로나 때문에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작가는 외국인센터에서 인터뷰도 많이 진행했다. 백보림의 작품에서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이미지들은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이 그러함을 암시한다. 이주여성들과 함께 했던 소통과 치유 프로그램의 결과물인 장난스러운 클래이 조각들은 ‘갈겨쓴 일기’같은 면모를 가진다. 그런 일기는 당장에 타자들이 직면한 사회적 현실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과정 중에 꼭 필요한 (무)의식적 단계이다. 있는 그대로를 자타가 인정하는 과정 말이다.   

  

출전; 레트로봉황 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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