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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경 / 헤테로피아같은 유토피아

이선영

헤테로피아같은 유토피아

  

이선영(미술평론가)


  

액자 없는 그림들이 높이도 제각각 다르게 배치된 김도경의 전시는 설치적인 방식으로 보여진다. 작품 중에는 전시장 모퉁이에 세워 놓은 것도 있고, 연작처럼 세 개를 딱 붙여 놓은 것도 있다. 모서리 저편의 보일락말락 붙여 놓은 작은 작품이나 전시장 바닥에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창문처럼 보인다. 작은 작품은 크기가 작다기 보다는 멀리 있는 창문처럼 보인다. 전시장의 하얀 벽면은 벽이 아니라 여백 같이 융통성 있는 공간이 되었다. 모서리의 선에 가까이 붙어있는 작품은 모서리 안으로 들어가거나 거기에서 나오는 듯한 잠재적 운동감이 있다. 여름에 열린 오픈스튜디오에 전시된 [떠다니는 것들 속에]처럼, 순간의 만남과 어울림을 지향하는 가변성을 보여준다. 김도경의 전시 [hello stranger]는 낯섦을 끌어안으려는 작가의 취향과 지향이 있다. 낯섦은 말 그대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김도경의 작업에서 낯섦은 회피되거나 억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해석을 요구하며 작품에 자리한다. 




전시전경



부분설치



부분설치



이호_2020_캔버스에 혼합재료_25.9x17.9cm



작가는 찰라의 감각을 작품에 수집하지만, 관객으로서는 그 산물의 해석에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작가가 표현하기 위해 했던 행동을 관객 또한 반복한다. 물론 차이를 둔 반복이다. 그것이 작가에게 다시 또 다른 낯섦으로 피드백 될 때, 해석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해서 예술은 당장에 이해되고 소비되는 상품의 운명을 벗어나려 한다. 무겁지는 않지만 겹겹의 층위를 가지는 작품들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전시장 모서리 위쪽에 걸린 작품 [이호]는 관객의 시선에 가닿기에는 좀 높고 작품 크기는 적다. 실제로 보면 그곳에 그림이 있다는 정도만 인지된다. 그것은 작가라는 존재가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여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투명한 소통을 원천적으로 배제한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던 이들처럼, 예술은 의미하지 않고 다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한 경지는 사랑만이 가능하다.  


‘눈에 띄는 것을 수집’하는 방식으로서의 작품은 우연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수수께끼의 정도는 커진다. 겹겹의 시공간이 압축 또는 농축된 회화는 단번에 이해될 수 없지만, 때로 세상은 그것을 원한다. 이해되고 그래서 소비될 수 있는 것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면 자연을 비롯해서 남아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마저도 소통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면 박탈감은 커진다. 아무리 가벼운 소통이 진지한 소통을 대신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작가는 겉으로 봐서는 잘 알 수 없는 현상, 또는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그것은 잘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작가는 ‘나는 내가 경험했던 개인적인 사연들에 대한 회상이나 그것으로 인한 메시지를 생성, 전달하거나 당시 혹은 현재의 감정들을 타인에게 공감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고까지 말한다. 학창 시절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생겨난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인간에게 남겨진 사물을 통해 그 인간의 취향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 비밀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검은색의 인공숲에는_2020_캔버스천에 혼합재료_140x95cm



기믹2_2020_캔버스천에 혼합재료_140x143.5cm



우리는무엇을1_2020_판넬에 혼합재료_116.8x91.0cm



우리는무엇을2_2020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x91.0cm



작가는 ‘개인의 취향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나는 각개의 세계를 건설하며 잠시나마 분리된 현실에 행복감을’ 느낀다. 그것은 일종의 대안의 세계로, 현실과 관계는 있지만 현실은 아닌 시공간이다. 예술자체가 그러한 대안의 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와 비슷한 것은 놀이 정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가 현세적일수록 현실과 환상의 거리는 좁혀질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스튜디움과 푼크툼을 구별했듯이, 개인을 찔러오는 것을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남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은 주변적 부분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씨앗으로 또 다른 세계를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경험도 다른 결과물을 내는 것은 흔하다. 유행하는 상품에 환호하는 사람조차도 자기만의 환상이 있으며, 시장은 그러한 환상을 이용하여 돈을 번다. 그러한 환상 없이 필요한 것만 소비된다면 자본주의는 망하고 말 것이다. 강도와 밀도는 다르지만 각 개인의 취향의 세계에 대한 작가의 주목은 예술의 본질과 닿아있다. 


‘내 취향이다’라고 했을 때의 기준 상실 또한 포함된다. 취향이라는데 무슨 말이 필요 있겠는가. 하지만 ‘예술이 취향이다’라는 관념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미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근대미학자들이 예술은 취미의 문제라고 규정한 이후, 소통이 더욱 어려워진 터이다. 김도경의 경우 이러한 취향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 작품의 과정이 이끈다. 작가는 그때그때의 시공간의 상황을 작품에 수집해서 보존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지나가버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술이 아니면 사라지는 것들을 예술을 통해 붙잡아 두고 싶은 것이다. 대중들의 취미생활에 사진이 굳게 자리 잡은 것도 이러한 원초적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버려진 화단 속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의 형태, 아파트 주차 단지에 정차된 폐차 딱지가 잔뜩 붙여진 노래방 홍보 차량....찰나 속 개인을 사로잡는 요소들은 분명 각자마다 다르며, 그것은 주체의 감각과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집중하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하는 매력적인 요소들을 한 화면에 쌓아 때마다의 환상 속 세계를 공상하고 시각화 한다’고 말한다. 




26파시오_2020_캔버스에 혼합재료_90.9x72.7cm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_2020_디지털드로잉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2_2020_디지털드로잉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3_2020_디지털드로잉



아름다운 풍경이나 정물, 인물들로 고정될 수 없는 이유는 작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단편은 하나의 면으로 수집되며, 그러한 면들이 여러 개가 잠재적으로 중첩된 것, 즉 쌓이는 것이 작품으로 나타난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던 요소들은 투명한 단면의 겹침을 통해 갑자기 만나기도 한다.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그렇게 수집된 요소들 간의 상호관계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수집 품목은 현수막이나 숫자들, 심지어는 레트로 봉황 레지던시에서 진행한 ‘W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매매 여성들에 관련된 활동에서 영감 받은 성매매 기구들 까지 다양하다. 화면의 이질적 요소는 회화적 외양을 가지면서도 디지털 프린트, 때로는 사물의 표면에 직접 대고 문지른 듯한 탁본형식의 평면이 함께 한다. 소재 뿐 아니라 형식 또한 수집의 대상이 되어 부딪힘과 어울림을 꾀한다. 어떤 방식이든 수집물 자체가 마치 사진처럼 어떤 시공간의 절편이다. 


그것들은 단편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잠재적 연결망을 이룬다. 완결된 형태는 자족적이지만 단편은 다른 단편을 부른다. 이번 전시를 평면 작품이되, 설치적으로 운용한 것은 작품과 작품 사이도 그렇게 만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평면은 그때그때의 관심사를 수집한 결과물을 담는 유연한 그릇이다. 김도경은 평면작품을 주로 하지만, 그와 더불어 설치와 영상도 함께 해왔다. 평면에는 디지털 드로잉도 포함된다. 작가는 그 차이에 대해, 회화는 자신의 감각을 담기에 적당하고 설치와 영상은 사회적 이슈 및 현실과 자신의 관계를 다루기 적당하다고 말한다. 풍경은 여러 이질적 요소를 싸안는 자연스러운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 인공성이 자연성을 대부분 잠식해 가는 현대적 풍경은 도처에 갑작스런 난입이 벌어진다. 그러한 난입은 폭력적이기도 하고 카타르시스를 야기하기도 한다. 초현실주의는 도시라는 배경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것을 흡수하고 내뱉는 도시자체가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4_2020_디지털드로잉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5_2020_디지털드로잉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6_2020_디지털드로잉



캔버스 천에 혼합재료로 그려진 작품 [기믹2]에서 화면 상단의 분홍빛은 마치 석양처럼, 화면 아래의 검은 둥근 덩어리는 그 앞의 사람처럼 보인다. 공간에 떠도는 단편들은 풍경을 보는 자의 상념일 것이다. 김도경의 작품은 마치 퇴적층처럼 쌓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지털 드로잉 작품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 시리즈는 중층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2]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단편들이 검은 우주 속을 떠돈다. 그것들은 만나기도 한다. 수평으로 나뉘어진 화면이 있는 작품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3]에서 번지는 원은 사라지는 것일까 생성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돈다. 작품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4]가 밝은 아랫부분으로 내려오려는 듯한 어두운 화면을 보여준다면, 작품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5]에서 회색빛 평면은 돌리면 열리는 문같은 추상적 원근법이 적용된다. 이편에서는 나풀거리는 것이, 저편에서는 동그란 것이 마주치기 직전이다. 


작품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6]에서 정확한 외곽선이 없는 번지는 선들은 자연 풍경이 연상되지만, 그 위에 보색으로 맞붙은 기하학적 형태가 떠있다. 하얀 바탕에 검은 형태가 있는 작품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7]는 화면의 가장자리가 형태를 잘라낸다. 화면 왼편에서는 동그란 형태가 얼굴을 디밀고, 저편에서 이편으로 형태가 이동하는 느낌이다. 이번 전시에서 쌓여짐이 있는 작품이 가장 많았다면 덮기와 문지르기도 화면의 다양성에 가세한다. 캔버스 천에 혼합재료로 그려진 작품 [검은색의 인공 숲에는]에서 검은 색은 푸른색을 점차 덮어 간더. 지우기 또는 덮기는 다른 층위의 것들을 더욱 파편화한다. 판넬에 혼합재료로 그려진 작품 [우리는 무엇을1]에서는 검은 것이 밝은 것을 뒤덮는 모습인데, 화면 위쪽은 뭔가 폭발하는 듯한 형태도 보인다. 미완성 문장의 제목처럼 장면은 어떤 의미로 완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2]에서 어두운 물감이 뒤덮은 화면 안쪽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섬처럼 존재하는 단편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쌓여진 이미지들 속에7_2020_디지털드로잉



이상과 (김)향기_2018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x91.0cm



수집에 전제되는 단편화는 추상적 화면을 이끈다. 작품 [이상과 (김)향기]에서는 사물의 표면을 문지른 형태가 밝은 바탕 위로 떠돌고, 작품 [26파시오]는 화면 일부를 사물의 표면에 대고 두드리거나 문지른 듯한 흔적이 있다. 그려진 것보다 문질러진 것은 보다 직접적인 흔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지금 부재하지만 한 때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수집품을 가득 놓은 진열장이 있을지 모르지만, 김도경에게는 그 장이 바로 작품이다. 새로운 시공간을 점하는 삶이 계속되는 한 수집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직접 수집이든 간접 수집이든 장은 포화된다. 그래서 수집에 전제되는 감각이나 기억은 응축된다. 쌓기와 덮기를 비롯한 변모는 필수적이다. 김도경은 자신의 ‘취향들로 범벅이 된 공간’을 ‘유토피아’로 간주한다. 이질적인 단편들이 모여서 작가가 조우했던 특정 시공간을 기념비화 시키는 작업은 헤테로피아적 면모가 있다. 작가에게는 그 이질적 시공간이 바로 유토피아인 것이다.   

 

출전; 레트로봉황 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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