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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진 / 여러 겹의 시공간이 쟁여진 사물

이선영

여러 겹의 시공간이 쟁여진 사물

  

이선영(미술평론가)


  

수년간 집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해왔던 조혜진은 최근 작품에서 오래된 집에 한 두 개 정도는 있었을 법한 가구인 자개장을 변주한다. 집밖에서 집안으로의 이동인데, 이전 작품이 그러했듯이 건축적 규모로 펼쳐지는 구조는 안팎의 구별을 무색하게 한다. 단독으로 딱 떨어지는 형태나 형식보다는 장(場)으로 연출된 작품은 관객이 그 내부를 통과함으로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인식하게 한다. 작품 관람에 개입되는 시간성은 조혜진의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속성이다. 작품 속 오래된 집이나 사물들이 타임 캡슐같은 느낌을 주는 점 뿐 아니라, 오래된 지혜를 담은 글들 또한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데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끼어 든 시간적 요소는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에서 그 비중을 점차 높여간다. 조혜진이 선택한 유행지난 오래된 소재들은 역설적으로 현대의 속성을 드러낸다. 삶에 있어서의 현대이든, 미술양식에 있어서의 현대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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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13 실내설치



집은 전통적으로도 인간의 상징이었다. 집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한다. 유럽의 바로크 건축의 얼굴과 한국의 연립주택의 얼굴은 다르게 다가온다. 집에서는 그 인간의 재력 뿐 아니라, 취향과 욕망이 내재해 있다. 집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역사적 유물같은 위상을 가지기도 한다. 집은 산동네든 초고층 빌딩숲이든 어디엔가 위치한다. 즉 맥락을 가진다. 그 경우에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비유를 넘어서 문명비평으로 확장된다. 조혜진의 작품 규모는 꽤 크다. 집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거의 건축적 규모의 설치물이다. 번지수를 떠올리는 제목의 작품 [704-13, 봄]은 거의 집처럼 지어졌다. 작가는 버려진 실내외장재들을 수집하여 문, 창문, 벽 등을 집처럼 구성했다. 그것은 심지어 2층집이기도 하다. 누더기 옷 같이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온 것으로 만든 판잣집은 한국 전쟁 이후에 청계천변에 가득했던 것들보다는 견고하고 운치 있어 보이지만, 그 양상은 비슷하다. 


실내에 설치되기도 하는 이 작품은 일견 집 같지만,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구조를 가진다. 마치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 [메르츠 바우](쿠르트 슈비터스)처럼 그때그때 수집한 것들로 끝없이 덧대어 이어질 수 있을 듯한 개방형 구조다. 대개 합리적인 구조는 장면 하나로도 내부가 어떤 형태일지 예상되지만, 이러한 유형은 어느 부분을 보아도 예측불가하다. 직선형이 아니라 미로적 방식이다. 수집된 창문들의 단면이 벽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창문들은 모두 제각각의 틀을 가졌다. 창문이 세상을 보는 통로라면 다른 시점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다. 건축의 재료가 일괄적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 다른 시기와 장소가 각인된다. 견고해 보이는 건물은 중력에 반응하여 중심을 잡고 있지만, 실은 피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내부는 비워져 있다. 집 내부는 실내라기보다는 공동(空洞)에 가깝다. 거기에는 중심을 잡아주는 어떤 기둥이 부재하고, 어디로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하기 힘든 피막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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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연립주택이 아닌, 주상복합 빌딩 같은 고층 건축 모델을 반영한 작품에서는 그 규모가 작더라도 기둥이 존재한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구조물로 이루어진 작품은 투명한 깊이가 아니라, 불투명한 표면이라는 양상을 가진다. 수집된 오브제들이 상당 부분 차지하는 집들은 초현실주의같은 신비로움과 불투명성을 탑재한다. 이러한 불투명성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성에 기인한다. 그러한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바로 몸이다. 수집의 여정에 투여된 작가의 시공간을 관객 또한 추체험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화석이나 지층, 나이테처럼 켜켜이 쟁여져 있다. 시공간의 추이에 따라 달라지는 지각의 체험은 합리적 구조의 단면이라는 모더니즘적 공간 개념을 전복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대조각사의 흐름]에서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공간개념을 초현실주의를 매개로 설명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깨어있는 꿈과 같은 초현실주의 오브제들은 은유적 의미가 작품의 표면상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고정된 구조적 핵심이 없이 속이 텅 빈 입체라는 느낌을 준다. 초현실주의 작품은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붕괴시키는 마술적 경험을 만들며, 실제(literal) 공간의 짜임 속으로 밀어 넣어진 낯선 실체이다. 그것의 시간은 주어진 원인에 근거하는 논리적인 추론의 시간과는 달리, 예측하지 못한 경험이 느리게 전개되는 과정’(로잘린드 크라우스)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에 의하면 근대조각은 고도로 변형된 형태와 2차원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 열린 구조에 의해서만 단순한 오브제 이상의 조각, 즉 의미에 의해서 형성되고, 의미로 충만한 조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근대조각가들이 예술적 본성과 오브제의 본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는, 실제 시간의 지속적인 흐름으로부터 작품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모더니즘은 작품 내의 모든 관계들이 단일한 명료성의 순간 속에 농축되는 한 순간을 노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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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드 크라우스에 의하면 이러한 명료한 순간성(현재성)에 대한 모델은 바로 회화였다. 회화의 2차원성이 지닌 본성은 3차원적인 예술과는 달리, 보는 이에게 어떤 한 순간에 즉각적이고 통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조혜진은 원래 회화를 전공했다. 오브제를 주요 어법으로 삼은 것은 한정적 ‘예술’을 좀 더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사물은 예술과 달리 작가의 의도로 한정지어 질 수 없는 요소를 가진다. 삶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올해 초에 있었던 [한 겹] 전에서 ‘겹’이라는 키워드는 본질과 핵심이 아닌, 표면과 주변에 대한 관심을 반향 한다. 삶과 예술은 겹에 의해 쌓여있고 한 꺼풀 씩 벗겨지거나 덮여질 따름이다. 양파 껍질처럼 핵심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과정의 흔적은 남는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삶에 의해, 이야기에 의해 중층결정 된다. 심지어는 빛마저도 그러하다. 


조혜진의 작품 속 빛은 명과 암을 나누는 확실성 보다는 산란(散亂)하고 편재 한다. 가령 요즘 작품의 주 소재인 자개가 그렇다. 자개는 수많은 빛을 품고 있는 자연적 오브제이며 완전히 반복될 수 없는 차이를 각인한다. 본질이 드러나는 결정적 단면은 시간의 지연작용에 의해 끝없이 연기된다. 작가가 작품 모델로 삼은 집들은 삶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덧대가며 확장되는 구조를 가진다. 거기에는 빈곤에서 비롯된 생활의 발명품들도 있고 무분별하게 증축, 변형된 모습도 있다. 그것은 그곳 거주자들의 욕망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 [704-13호, 봄] 작업노트에서 ‘2~3층짜리 다세대 주택이 많은 변두리 동네,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동네에서 오래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사정을 알게 된다’고 말하면서, ‘대개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어렵게 자랐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없이 출발했다. 그리 좋은 직장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성실하게 절약하며 돈을 모아 변두리에 집부터 샀다. 아파트에서 편하게 사는 대신 상대적으로 불편하지만 수익을 낼 수 있고, 물가가 싼 동네에서 살며 남편의 수입은 저금을, 받은 월세로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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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70-80대 정도 되는 부모님 세대가 모델인 이러한 삶의 방식은 평생을 일해도 집 한 채 장만할까 말까하는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전설’에 해당하지만, 그 내부에 있었던 작가는 그러한 삶에 내재된 궁색함과 악착같음에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 동네를 떠나 고상한 주민들이 사는 안전한 곳으로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다. 오히려 작가가 됨으로 인해 그러한 삶에 대해 또 다른 거리두기를 통해 보게 되었고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삶의 방식임을 자각한다. 작가가 그들로부터 배운 가장 큰 미덕은 그 스스로가 말하듯이 ‘근면과 인내’이다. 조혜진의 모든 작업에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현실화하기 위한 엄청난 노동의 투입이 발견된다. 그녀는 거의 일하듯이 작업한다. 영감이 떠오르기 위해 한참을 손을 놓고 있거나 타인의 노동력이나 기술을 취하지 않는다. 자개라는 낯선 재료를 다루는 방식도 혼자 터득했다. 


변두리 동네에서 조차 버려진 사물로 구성된 작품들은 ‘이런 것도 재미있다’든가 아니면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비판한다’든가 하는 양자택일적 관점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중성적으로 보여주는 편이다. 재미의 가벼움도 의미의 무거움도 아닌, 그 사이에서의 유희이다. 조혜진의 작품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내부자의 관점이 있는데다 작업의 밀도가 높아서 설득력을 가진다. 그것은 조혜진이라는 작가가 한국의 주요 레지던시와 지원제도의 혜택을 받은 이유일 것이다. 의미와 재미, 노동과 유희, 필연과 우연 등이 종횡으로 짜여 있는 작품들에서 관객은 거기에서 (재)발견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작품 [봄]은 산 언덕배기에 설치한 집 모양의 구조물로, 언뜻 정말 집같은 느낌도 줄 정도로 그럴듯하다. 집을 이루는 면들이 다 다른 집처럼 생긴 복합적 구조다. 건축에 대한 근대적 이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건축 부문에서 가장 강력한 선언문이 터져 나온 것은 근대의 투명한 구조들이 삶을 추방했음을 인식하고, 삶의 이질성들을 싸안으려는 시도가 가시적 성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디가 건물의 정면인지, 입구가 어딘지, 무슨 용도를 가진 건물인지 알 수 없는 미로를 모델로 하는 탈 근대적 건축 유형이다. 건물을 이루는 벽돌에 서랍장 손잡이가 달려있어 안팎의 구별도 사라진다. 건물 내부는 바깥의 구조가 결국 가설무대 같은 것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동공을 남긴다. 작가는 그곳에다 여러 곳에서 수집된 화분 등을 모아 놓기도 한다. 왜 있는지 모를 계단도 있다. 화분은 무엇인가를 담는다는 기능에 있어서는 집과도 같다. 계단의 경우 상승의 욕구를 보여주는 상징일 수도 있지만, 그곳이 궁극적으로 닿는 곳은 어디일까는 불확실하다. 버려진 화분들은 뿌리 뽑힌 채 전전하는 도시의 ‘유목민’들을 떠올린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구조적 힘에 의해 떠 밀려가는 삶이 편재한다. 분단에 반 토막 나고 산악지대가 많은 남한은 좁은 땅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거의 상시적으로 토목공사를 해야 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돌고 도는 유목이 일상화 되었다. 


이동하기 위해 버려져야 하는 것은 많았다. 의미가 고일 틈이 없이 없었다. 몇 대를 물려 써도 좋았을 자개장 같은 고색창연한 물건은 왜 버려졌겠는가. 단지 유행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혜진의 작품에는 저런 것이 왜 버려졌지하는 의문이 드는 진기한 것들이 종종 발견되며, 전통적 재료인 자개로 드로잉을 하거나 글을 새기거나 하는 형식 또한 버려진 것을 다시 주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재활용은 오래된 사물이나 기법에 한정되지 않는다. 10여년 전에 발표된 작품에는 패트 필름을 이용한 산동네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제 한국의 도시에서는 이전의 난지도 같은 곳은 없지만(또는 다른 장소로 이동했지만), 제3 세계의 취약계층은 선진국에서 수입한 산 더미같은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작업으로 생계를 잇기도 한다. 재활용기를 주워서 잘라 산동네를 이루는 작은 집들을 만들어 메달은 설치작품 [변두리]는 보이지 않는 지형을 전제로 한다. 









페트병을 오려서 만든 투명한 집은 대개 1-2층 높이의 작은 집들이며, 매달린 높이가 다른 것은 그 아래 있었을 산을 암시한다. 재개발로 점차 사라져간 산동네 풍경을 유령의 마을로 연출한다. 대개 산동네는 자연의 굴곡 면을 따라 형성되어 있지만, 재개발은 산 자체도 없애버리는 대규모 토목공사인 경우가 많다. 자연 대신에 인간이 정한 규칙에 의해 계급이 설정되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작가가 변두리 작업을 시작한 계기 중 하나는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수직적인 시각에 대한 고백과 반성’이다. 그런 점에서 산동네는 아파트와 비교된다. 산동네는 부정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삶이 깔려있다. 작가는 어머니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해왔지만, 어느덧 어머니가 살던 철거지역을 부지런히 다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곳에 살 수 밖에 없는 자와 탐사하는 자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만, 인간이 시공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닌 만큼, 자기가 속한 상징적 우주와 대화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1960년대 상경하여 살았던 어머니의 지난 시간이 새겨진 산동네는 딸에 의해 부재의 흔적으로 작품화되었다. 어둑한 조명 속에서 패트 필름으로 만들어진 작은 집들은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경계 위에 붕 떠있는 것처럼 벽돌 실물크기로 벽돌집과 길을 만들었다. 그곳은 지금도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길을 모델로 했다. 작품 [변두리]는 집이나 골목길이 벽돌모양의 기하학적 구조로 추상화되었다. 페트 필름이라는 반투명 재료는 어둑한 공간에서 실제같은 그림자를 낳는다. 관객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페트병 블록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옷은 허연 유령의 느낌을 준다. 몸이라는 알맹이가 빠져 나간 듯한 모습이지만, 몸을 비유하기에 충분하다. 주변과 표면에 천착하면서 우회적으로 수수께끼에 접근하는 작가의 태도에 의한다면, 몸 또한 이런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진실은 한 겹 표면 안팎에 존재한다. 거기에는 어둑하고 무서운 골목길에 살았을 부모세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있다. 투명 산동네 집들에 어울리는 실물크기의 인체들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무엇인가를 증언하고 있다. 




한겹(수원아이파크 미술관 설치전경)


한겹


한겹


한겹



이 희미한 유령들은 사라진 산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몇 십 년 째 한 동네에서 살면서 동네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는 작가에게는 원래의 주민보다 더 열악한 위치에 있는 타자들을 상징한다. 작가가 졸업한 근처 초등학교에 지금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과 중국 교포들의 자녀들이 100%를 차지하고 있는 현재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들 또한 현대가 추동하는 흐름에 따라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몇 십 년 전에 도시로 상경하여 산동네 살이부터 시작한 부모 세대처럼 말이다. 그들은 주변부 속의 또 다른 주변부를 차지한다. 이러한 층층의 권력관계 때문에 권력은 유지되고 확장된다. 거시권력과 미시권력은 상보적이다. 주변인들은 대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 지배질서의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이 존재감을 나타내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몸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는 고단한 노동과 몸을 관리할 틈이 없는 가난한 자의 구부정한 신체를 반영하는 투명 껍데기들은 주변인에게도 주변인 취급을 당하는 이중적 타자의 몸체를 나타낸다. 


수직적 형태의 작품은 철거지역에서 수집한 간유리와 철제 대문을 사용해 도심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재현한 것이다. 간유리가 열악한 환경의 주거지대에서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사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면, 주상복합 아파트에 전형적인 투명한 통유리는 부유한 입주민의 조망권과 일조량을 최대한 확보한다. 간유리와 통유리는 상반되는 두 거주형태를 대변하는 재료다. 작가는 간유리로 주상복합 아파트의 창을 만들고, 철 대문을 잘라 건물의 벽을 만들어 부유한 주거단지를 표현한다. 어디선가 뚝 떨어져 홀연히 자리한 듯한 멋진 고층건물은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근대 기능주의 이데올로기의 화신인 고층 아파트는 기술의 산물이지 전통의 산물은 아니다. 전통은 자연과 어울렸지만 기술은 자연으로부터 배워 자연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역사를 밟아왔다. 부를 생산한 것은 부유층만의 일은 아니다. 노동이 자본을 낳기보다는 자본이 자본을 낳는 사회에서 실제의 위상을 드러낸다. 




한겹


한겹



작가는 그 아래에 물을 깔아 부를 상징하는 견고한 구조물에 환영의 공간을 도입한다. 간유리와 철제로 만들어진 주상복합 형태의 작품 또한 페트병 산동네 만큼이나 유령같다. 주상복합 건물 형태의 작품 재료들 또한 재활용이지만, 스텐레스 스틸로 짠 골조와 안팎의 조명이 갖춰진 이 작품은 좀 더 일률적인 계획과 조정에 의해 만들어진 합리적 구조에 속한다. 아랫면의 반사면은 끝없이 복제되며 확장되는 양식 또한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부는 빈곤보다도 더 일률적일 수 있다. 부나 빈곤은 모두 체계의 산물이지만, 체계의 정점에 놓인 부는 보다 ‘순수’하게 체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체계의 밑바닥에 위치한 이들은 그러한 물신적 구조를 자기화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조혜진이 수년간 쏘다닌 재개발지들은 다양한 삶의 발명품들로 가득한 나름의 보물 섬 같은 곳이다. 최근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자개 또한 그곳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올해 초 보안여관에서의 개인전 [한 겹]과 수원시립 미술관의 기획전 [내 나니 여자라]에서 선보인 자개소재의 작품은 버려진 자개장을 수집하여 표면의 이면에 자신만의 자개 작품으로 구현했다. 익명의 장인에 의해 완성된 자개장식에 비해 기술적으로는 어눌할 수 밖에 없지만 이제 버려진 사물은 예술로 거듭난다. 자개장이 장식의 기능도 있었다고 볼 때 병풍 형식으로 세워 놓거나 하는 식의 변주를 보여준다. 자개장 장식에 빠지지 않는 꽃문양을 작가의 버전으로 각색하고 그 위에 삶의 지혜라 할 만 한 수집하고 변형된 문장들을 새겨 넣는다. 생각의 수집은 이제 카톡 메시지 같은 인터넷 공간이다. 오브제도 중고나라 같은 인터텟 싸이트에서 구입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정보를 오래된 사물과 만나게 한다. 그런데 카톡 메시지 또한 새로운 기계 즉 스마트 폰을 수단으로 할 뿐, 오래된 생각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작가가 어머니의 카톡에서 수집 변형한 문장들을 보면 처세술을 비롯한 삶의 기술은 여전하다. 








한겹



궁상맞으면서도 속물적인 어머니 세대와 단절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공감이 가기도 한다. 생존이라는 화두를 전면에 놓는다면 삶에서는 격세유전적으로 반복되는 질긴 논리가 있는 것이다. 작가는 ‘부모세대의 영향아래 자란 나는 그들이 내게 강요했던 삶의 방식에 대한 거부감, 순박함과 속물 사이를 오가는 이중적인 태도에 경멸을 느끼는 한편 인내와 노력으로 살아온 인생에 대해 연민과 존경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루기 힘든 물질적 재료에 일일이 새기는 수고로움은 관철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개라는 자연재료는 처음에 실험했던 홀로그램같은 얄팍한 합성 재료와도 다르다. 레이저 커팅 같이 이제는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기술도 하나하나 손으로 작업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한 문장들은 상당히 길어서 관객은 길처럼 연출된 통로를 서서히 걸으면서 생각의 길을 함께 한다. 자개로 새겨진 이 문장들은 말 그대로 삶의 현실과 진실이 담긴 빛나는 어록들이다. 


웬만한 집에서 하나쯤은 있었던 자개장은 이제는 거의 사라졌고, 요즘 작품의 재료 또한 버려진 것을 주은 것이다. 가장 흔했던 것이 가장 희귀해지는 고고학의 역설을 담고 있는 자개장은 작가가 만든 부분만큼이나 흥미롭다. 거기에는 전통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민초들의 무의식이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쪼개진 두 쪽의 파편처럼 단단했던 상징적 우주는 점차 균열이 가해지는데, 작가는 이 균열을 더 벌려 놓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게임을 펼친다. 기존의 텍스트 위에 다시 쓰는 텍스트는 기존의 것을 완전히 말소하지 않고 그 흔적을 남겨두며 흔적들로부터 시작한다. 자개장 위에 쓰는 텍스트/이미지는 하얀 종이나 캔버스 위에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술된다. 그것은 타자와의 대화이지 주체의 독백이 아니다. 작가에 의하면 화조도나 십장생 등이 새겨진 자개장 이미지에는 기복, 풍요, 오래 사는, 모두가 꿈꾸는 것이 새겨져 있다. 




한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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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구가 아니라 일종의 부적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판단이다. 부자는 물론 부자를 흉내 내고 싶었던 집에도 있었던 자개장은 이제 희귀한 것들이 되었다. 자개장 서랍 하나를 뺀 듯한 검은 사각형 안에 자개로 어록을 새겨 넣은 작품들을 미니멀하게 죽 배열한 작품들은 읽는 재미도 준다. 초현실주의와 미니멀리즘은 사물을 매개로 연결된다. 그 중 하나인 ‘위에 비교하면 족하지 못하나 아래에 비교하면 남음이 있다’는 계층적 사고이자 욕망을 다스리는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주어진 삶을 살아라, 거기에 사소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이 있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순간들을 많이 경험하다 보면 무기력함과 통속성이 적절히 안배된 절충적 사고방식이 생겨난다. 한편 어두운 바탕에 자개로 새겨진 글들은 순간순간 명멸하는 정보들과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치 반석 위에 새겨진 문장 같은 존재감이 있다. 바위 위에 새겨진 ‘바르게 살자’같은 구호처럼 말이다.


카톡으로 왔다갔다하는 정보들이지만 소시민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다. 작품 [한 겹]은 수집한 자개농 문짝 윗면에 자개 붙임, 자개 위에 드로잉이다. 얽히고 설킨 전선들만큼이나 복잡하고 낡은 골목길, 마치 기념사진 찍듯이 도열한 사람들이, 이미 사라진 아니면 곧 사라질 유물같은 장소와 사람들이 보인다. 작가는 그것들에 찬란한 빛을 부여했다. 자연의 시간을 오롯이 품고 있는 자개를 가늘게 오려서 자개농 문짝에 일종의 드로잉을 한 셈이다. GPS같은 첨단 기계에 정보화된 형태로 포착된 거리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한다. 이미 개막되고 있는 AI 시대는 과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대상까지 정보화하면서 현실을 식민화할 것이다. 보다 동질적이면서 보다 계급적 구조가 확실한 그러한 질서로의 재편에 가속도가 붙어가는 즈음, 오래된 사물이나 거리, 집, 사람들, 자연 등은 다시금 귀하게 보고 간직해야할 것으로 거듭난다. 조혜진의 예술은 오래된 사물을 그렇게 되살린다. 수집한 자개농 문짝 윗면에 자개를 붙여 소나무를 형상화한 작품은 ‘사물의 편’(프랑시스 퐁주)과 자연은 한편임을 말한다.

  

출전; 남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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