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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부남 /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선영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제목이자 모든 작품의 제목인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적이자 사회적 사고는 손부남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화두였다. 그는 충북 진천의 한 마을에 직접 설계한 작업실에 십 수 년 전에 뿌리를 내린 후 이를 더욱 직접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작은 전시실을 포함한 현대적 작업실과 절의 헌 목재를 재활용하여 만든 사랑채는 ‘흐르는 물줄기, 쏟아지는 햇살, 유년의 골목길 풍경, 생명과 상생의 내밀함이 가득한 새와 꽃과 나무....주위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고 창작의 소재로’ 삼는다는 작가의 지향에 꼭 맞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본격적인 정보화시대가 개막되자 이 고색창연한 사고는 새롭게 맥락화 된다. A.L. 바라바시는 [링크]에서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보르헤스)는 사고를 인용하면서, 이 그물망적(Web-based) 시각을 인터넷과 비유한다. 그에 의하면 인터넷은 순전히 인간이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나 생태계와 보다 가깝다. 




손부남 전시 전경(모든 사진의 출전은 청주시립미술관)



또한 바라바시는 우리가 수학을 창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있음을 예시하면서, 진리는 그것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도 저기 어딘가에 이미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바라바시는 이 문제에 대해 ‘수학적 진리는 절대적 진리들의 목록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재발견하는 것’(에르되스)이라고 인용한다. 만물의 연결에 대한 사유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것은 종교적 사유와 밀접하다. 물론 손부남의 작품이 종교적 사유와 닿는다는 것이지 그가 종교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로 인해 악다구니 같은 경쟁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지구촌적 사고의 장점을 설파하는 사회학자 애드가 모랭은 [지구는 우리의 조국]에서 종교의 의미를 그 최소한의 의미로, 즉 다시 잇다(re-lier)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만물의 이어짐에 대한 동서고금의 사유는 한쪽 방향으로만 가는 단선적 논리가 아니라 양쪽 방향으로 가는 역설(paradox)을 가진다. 


역설은 양날의 칼이다. 하지만 연결망에 내재된 전일(全一)적 사고는 모순조차도 필연이고 화해의 지점임을 믿는다. 모순과 갈등이 순리에 따라 다시 맥락화 되기 위해서는 광폭의 시간성이 전제된다. 손부남의 작품은 현대적이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시간의 주기는 근현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원시 시대까지 닿아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을 보면 그가 추구하는 상생(相生)은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미지의 지점에 존재한다. 매번 다시 시작되는 작품은 그 자체가 그 과정을 위한 도전이다. 그것은 그의 삶과 작품이 말해준다. 손부남이 고 3때 갑자기 미술로 전향하기 전까지 검도 유단자였음을 생각하면, 칼이 붓이 되고 지구촌 평화가 지구촌 재난이 되고, 그러다가 새옹지마가 되고 하는 세태들은 크게 이상하지 않다. 청주지역 작가 뿐 아니라 현대미술가라면 누구나 도전하고 싶은 천고 10미터가 넘는 반듯한 화이트 큐브를 비운 듯이 채운,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되는 전시를 연 작가가 암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던 아슬아슬한 건강 상태에 있었다는 점도 이상하지 않다. 




손부남_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있다_ 2020_mixed media on poly wood_732×980cm



안정적인 교직을 7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단한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한 것이나, 1983년 사실주의 풍의 인물화로 첫 개인전 이후, 긴 암중모색 끝에 10년이 넘어서 요즘 스타일의 단초가 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고, 그 이후에 2019년까지 25회의 개인전을 계속 열어온 것도 역설적 사고로 이해할만하다. 그의 작업 이력은 변모를 위한 과감한 단절과 꾸준함이 돋보인다. 그에게 충돌하는 가치들을 융화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손부남이 90년대 초부터 추구해 왔던 상생이나 연결이 그저 공허한 구호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높이 7미터, 가로 9미터 크기의 작품으로, 나무판들을 접착제로 붙인 베니어판 24 피스를 붙여서 완성한 것이다. 싸구려 소재처럼 보이는 합판은 그가 1995년부터 사용한 재료이며, 입체작품 재료인 스티로폼도 2006년부터 사용한 재료다. 합판이나 스티로폼같이 ‘고급스러운’ 미술에 어울리지 않는 재료들은 그 옆의 캔버스 작품들이 보조처럼 여겨질 만큼 전시의 중심을 차지한다. 


인공성이 강한 합판이나 스티로폼을 그것의 원래 출발이었던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활용했기에, 이질적 재료들은 상생하게 된 것이다. 패널 여러 개를 이어 만든 거대한 직사각형은 어릴 적 누런 종이 장판지를 떠올리는 따스한 색감을 가진다. 그곳에 자리한 모든 존재들의 원인을 제공한, 만물의 근원 빛이 가득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관객의 시선을 잡아 끌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바글바글 깔려있다. 그렇다고 꽉 차 있는 것은 아니고, 변화를 위한 여백이나 공기감도 있다. 마치 그 앞의 입체물의 그림자처럼 검게 그려진 인체 좌상을 통과하는 듯한 검은 선들은 생겨났다 사라지는 사고와 감각을 떠올린다. 물질적 측면으로 보자면, 검은 색은 모든 것이 생겨나고 다시 돌아가는 색으로, 스티로폼의 재료인 석유의 색이기도 하다. 하얀 스티로폼 조상(彫像)은 생성 소멸했던 검은 물질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누런 바탕색과 색감의 차이가 안 나게 그려진 이미지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징을 울리는 남자의 모습이다. 




전시전경



이 거대 화면에는 생각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이 공존한다. 삼라만상에 대한 비유이자 그것에 대한 사유이기도 한 작품이기에, 주체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생각하는 사람이나 바탕의 징치는 사람은 거인적 존재다. 그렇지만 검은 색 인간의 경우 옆모습 즉 그림자같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있어 타자의 면모를 띈다. 그를 통과하는 듯한 이미지들은 곧 바탕처럼 흐릿하게 변화될 것이다. 신명나게 징을 치는 남성 또한 징소리만큼이나 시공간 저편으로 사라진 시간의 초상일 수 있다. 현실계를 나타내는 거대한 화면은 봄철 연초록 잎 새가 가을에 색색으로 물든 뒤 떨어져 가루가 되어 흙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 연상된다. 휘어진 가슴팍을 통과하는 자신의 일부들은 타자들이 주체로, 주체가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한다. 작가는 이 형태에 대해 ‘본인이 앉아서 생각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그에게 ‘삶은 선택의 연속’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데카르트의 언명 이후 근대적 주체의 상징이라 할 만한 주제가 있지만, 그 양상은 타자와 분리되고 군림하는 그 고독하고도 초월적인 주체는 아니다. 


새로움과 독창성, 창조와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이끈 그 주체는 가장 취약한 상황일 때 자기연민과 자아중심주의의 면모를 띄며, 편협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손부남의 작품에 보이는 타자적 주체는 타자들과 더 자연스럽게 공존하기 위해 자신을 변형시킨다. 구부러진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타자에게 더 개방적인 모습이다. 주체의 완전 개방은 죽음이다. 죽지 않고 개방의 정도를 최대한으로 하는 것에 작업의 관건이다. 기호학자 움베르코 에코는 [열린 예술작품]에서, 형식이라는 말은 유기체 또는 자체의 고유한 삶의 리듬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자체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물리적 실체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형식은 사고와 느낌 그리고 소재를 조화롭게 배치하고 작품이 만들어져 나가면서 작품 자체가 요구하고 드러내는 법칙에 따라 이 세요소를 통일시켜 나가는 구조화된 대상이다. 자연/인공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유가 있지만, [열린 예술작품]의 맥락에서 본다면 뛰어난 형식은 이러한 분리도 연결시키는 것이다. 




손부남_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있다_ 2020_mixed media on canvas_ 120×400cm



숨은 그림찾기 처럼 찾으면 보이지만 완결된 형태는 없다. 이미지의 재현이 아닌 기호화된 형태이기에 기호의 속성 그자체에 내재한 불완전성인 것이다. 현대의 언어학적 사유에 의하면, 기호는 그자체로 충만하지 않고 상호적 연결, 즉 상호텍스트성을 통해서만 의미화 된다. 작품 속 기호-이미지들은 생성 소멸하는 과정 중에 서로 얽혀있다. 누런 바탕은 햇빛 가득한 대지의 색감도 잠재해 있다. 지구와 생명이 생겨난 이후 수많은 생성과 소멸이 있었다. 손부남의 작품은 그 흔적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라서, 사라짐이 없다면 생겨남이 있겠는가라는 원초적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과정이 중요하기에 한 순간이 고정된 듯한 재현주의는 거부되어야 했다. 오디오 매니아이기도 한 그에게 소리의 비유는 중요하다. 소리는 결코 물화된 이미지처럼 한 자리를 영원히 꿰어 차고 앉아있지 않다. 소리는 곧이어 올 또 다른 소리를 위해 사라진다. 그러나 소리는 여운을 남기고 이어진다.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로 그려진 평면작품들은 좀 더 추상적이며, 돌가루 등을 사용하여 촉각적인 느낌이다. 전시장 여기저기 집합을 이룬 채 걸린 평면작품들은 거대한 거울의 방처럼 서로 반사하면서 조응하는 관계망 속에서 또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가로로 긴 작품 4개 붙인 것은 하얀 여백과 힘찬 필획이 있는 동양화 풍으로, 식물과 새의 이미지가 보인다. 세로로 긴 작품을 8개 붙인 것은 질감과 색감, 명도의 차이가 조금씩 나는 평면적 작품들이며, 6개의 긴 작품을 붙인 것은 색상의 차이가 크다. 같은 크기의 작품은 마치 하나의 본질이 다양한 외양을 취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그것은 각자 내재한 본질적 다름이기보다는 실재의 다양한 상태를 말한다. 한 작품에서 저 깊숙이 있던 붉은 요소가 전면화 되면 붉은 색조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관계이다. 한옥에는 세로로 긴 작품이 양옥에는 가로로 긴 작품이 어울린다고 보는 작가에게, 가로로 긴 동양화 풍의 작품과 세로로 긴 서양 추상화 풍의 작품은 서로에게 다른 형식을 입혀본 것이다. 




손부남_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있다_2020_mixed media on canvas_200×360cm



입체감보다는 선이나 평면이 중시되는 그의 작품이 더 가까운 것은 동양 쪽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는 종교적이지만, 종교 그 자체는 아닌 점 또한 동양적 사고와 조응하는 부분이다. 따로 서예를 배우기도 한 손부남에게 검은 선으로 그려진, 기호와 이미지 중간 단계의 도상은 한문을 비롯한 상형문자의 방식과 유사하다. 상형문자는 조합이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끈다. 가령 그는 어린 손녀를 보면서 ‘묘(妙)’함을 발견한다. 한자에서는 뜻과 뜻이 만나서 또 다른 뜻을 낳은 상상력이 풍부한 인류 문화의 보고이다. 어떤 형식이든 한 번에 그려졌다기보다 시간적 차이들 둔 것들을 마주하게 한다. 작가 말대로 ‘한 공간 안에 다양한 블록이’, 또는 ‘병풍처럼 따로따로 그려서 연결’시킨다. 재현이 아닌 생성의 작품은 이 마주침 속에서 생겨나는 사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도 화면과 화면 사이에도 겹침과 이어짐이 존재한다. 길게는 수 십 년의 차이도 있는 화면들 사이의 간극은 수평적, 수직적 겹침을 통해 의외의 연결을 낳는다. 


역설이 변수가 아닌 상수인 그의 작업에서 부재와 부족은 연결의 조건이다. 대작을 마주보고 스티로폼을 깍아 만든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는 불안정하다. 툭 치면 넘어질 것 같은 구부정한 모습이다. 스티로폼으로 깍은 또 다른 작품은 사각형 좌대 위에 두발로 안정감 있게 지탱하고 서있다. 인간 이미지들이 새겨진 몸체 위에 앉아있는 새다. 새는 여기와 저기를 연결한다. 손부남에게 새는 자신의 ‘희망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 자연적 존재와 결합할 때 더 완전해 진다. 동물을 도구적 대상이나 기계로 보고, 인간 내부의 동물성을 극복하려 했던 사유와는 크게 다르다. 새 이외에도 인간과 오래 함께 해온 소나 말, 그리고 연꽃 등 여러 동식물의 도상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스티로폼 변형 작품은 그림들과 같이 걸려있기도 하다. 스티로폼으로 깍은 입체물 또한 인간상의 정확한 재현은 아니다. 석고상과 대리석에 비한다면 더 취약한 재료이며, 주로 공업용 재료라는 사실은 그 순수함을 더욱 의심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잡다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하나의 본질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 출렁이는 존재다. 


손부남_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있다_ 2020_mixed media on canvas_ 200×480cm




‘발견도 창작’이라고 믿는 작가에게 스티로폼은 나약하지만 썩지 않는다는 특징으로 다가온다. 이 재료는 불에 약하지만 불에 효과적이어서 ‘불 맛을 입히면’ 견고해지는 특성이 있다. 합판 속의 검은 실루엣이 실재 화 된 것처럼 보이는 이 허연 덩어리는 죽은 생명이 고여져 만들어진 물질로부터 추출한 화학물질로, 이 또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사체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물질은 먼 후대의 세대에게 유용한 에너지원이 되어 주었다. 손부남의 작품에서 연결은 죽 이어진 하나의 선이기 보다는 중층적인 것들의 연결에 가깝다. 단층이나 칼처럼 단절을 통한 연결이다. 주술적 목적으로 겹쳐 그려진 동굴벽화처럼, 캔버스 비용을 아끼기 위해 그림 위에 또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말이다. 난 멜링거는 [고기]에서 석기시대의 동굴 벽에는 물소, 무소, 곰, 사슴, 들소, 사자 같은 동물들의 그림이 빽빽하게 그려진 반면 사람은 작게 표시되거나 대개 새의 머리나 사슴머리를 달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매우 뛰어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한 동물의 그림 뒤에 가려져 묘사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 자리에 없는 동물을 그린 것은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서 동물에게 주술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라고 본다. 조르주 바타이유도 [에로스의 눈물]에서 주술적 의식을 행하던 장소였던 동굴에서 발견되는 새의 얼굴을 한 남자의 이미지에서 타자와 하나가 되는 샤먼의 황홀경을 읽는다. 그것은 자연에서 생존하는 것이 절박했던 시대의 신비적 사유지만, 최소한 자연을 ’정복한‘ 이후에, 자연을 수단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과 구별된다. 손부남의 작품에서 인간과 새가 합체되는 이미지는 자연을 합리적 이해와 도구화가 아니라, 경외 때로는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말한다. 근자에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바이러스는 인간이 결코 자연을 초월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손부남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은 자연이 오랫동안 억압된 타자였지만, 이제 모든 것이 연결 된 세계의 몸통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말한다. 

  

출전; 청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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