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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혜 / 접고 펼쳐지며 생멸하는 몸풍경

이선영

접고 펼쳐지며 생멸하는 몸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영혜의 ‘명령하는 몸’ 전은 오랫동안 객체 취급을 받아 오던 몸을 주체로 격상시킨다. 특히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몸의 위상은 타자화되곤 하였다. 그렇지만 몸은 강하게 억압되고 잊혀지는 순간에도 그 힘을 거둬들인 적이 없다. 점점 더 커지는 몸의 영향력은 직접 겪기 전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다. 머리만큼이나 몸을 써야 하는 작업은 몸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마음은 하늘을 날고 싶은데 몸은 땅을 향한다. 작품을 시작하고 완성하는 이는 엄연히 작가이건만, 이제는 작업이 허락해줘야 가능한 것이다. 기계적 과정이 아닌 도약과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 몰입만이 그 묵직한 현실을 잊게할 텐데, 그 또한 물고 물리는 문제다. 수시로 엄습하는 피로는 작업의 리듬을 끊는 고통스런 부분이다. 작가는 ‘얼마 전까지도 나는 내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은 생각과 달리 엄격한 물리적, 화학적 반응의 결과로 나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명령하는 몸-강박,나무패널위에섬유,바느질,아크릴로 부분채색 ,2020



몸풍경,-식물되기,112cm85cm3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몸은 초월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존재다. 노동 또한 몸을 쓴다. 하지만 예술적 작업은 그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노동과 달리 작업은 오로지 홀로 감내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작업을 시작할 수 없음, 지속할 수 없음은 예술과 이별하는 전형적 증후다. 물론 예술은 늙어서도 젊음을 유지시켜주는 마법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설렘은 젊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과 운의 결합체인 작업은 점점 진입 장벽을 높인다. 몸은 마음만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물질성을 드러내고 강요한다. 김영혜의 전시부제에 ‘명령’이라는 키워드가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명령을 무겁게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몸의 변형, 해체, 죽음을 억압하고 감출 것이 아니라, 공존하게 한다. 심지어 마음껏 발산한다. 화사한 색감, 부드러운 표면, 때로 유머러스해 보이는 몸풍경은 축제적 요소까지 포함한다. 


겉으로 보면 재난과 축제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경계의 와해나 상호적 침입에 의한 혼돈 이미지 또한 양가적이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면서 출렁거리며, 그렇지 않았으면 표현하기 힘든 이질적 국면을 전면화한다. 죽음이 있어야 삶도 가능하다는 자명한 진리를 잊지 않는다. 삶의 이면으로 죽음을 보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조건이다. 그래서 ‘명령’이다. 의식되지 않아서 투명하게 존재해왔던 몸은 이제 불투명해진다. 몸 자체가 미디어적인 속성을 띤다. 흔히 말하는 ‘화면의 물성’은 그림이 가리키는 대상이 아니라 그림 자체를 보게 하는 불투명성을 의미하는데, 이제 몸도 자신의 물성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에서 몸적 현실을 모두 극복한 듯한 문화도 있다. 가상현실을 현실로 착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나 그 밖의 유심론적 철학은 현실계를 제멋대로 상정한 코드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명령하는 몸-동물되기, 70cm130cm, 패널위에 섬유,바느질,아크릴로 부분채색



명령하는 몸-바다생물, 75cm60cm3cm,나무패널 위에 섬유, 아크릴로 부분채색, 바느질, 2020



그러나 몸은 주체의 정신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투명한 무엇이 아닌, 어르고 달래고 대화해야 하는 성가신 파트너다. 김영혜는 그간의 전시를 통해 자신 안의 타자를 꺼내 보이며, 몸을 가진 존재라면 아무도 회피할 수 없는 문제를 작업의 화두로 삼는다. 95세의 노모,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죽을 반려 동물 등과 함께 사는 것도 영향을 주었을 자전적 요소다. 다른 물질의 배열로 순환하게 될 몸의 마지막 국면, 즉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머나먼 사건이 아니다. 바이러스에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지는 상황은 죽음이 삶 만큼이나 편재함을 알려준다. 불편할 때 만이 존재가 의식되는 몸은 치명적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친 시기에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널리 공유됐다. 삶의 한 조건인 유기체의 경계는 극히 취약함이 밝혀졌다. 김영혜는 ‘스미고 섞이면서 변화하는 몸’을 표현한다. 작품 속에서 인체의 부분을 떠올리는 기관들은 동물이나 식물로 변화한다. 


변화는 지속적이며 예측불허이기에, ‘되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사지의 단은 불그스름하고 뭉툭하다. 가장 활발하게 분열하는 이 말단부는 변신을 추동한다. 이전 작품에도 보였던 주렁주렁 달린 젖가슴들은 생산력 있는 몸을 암시한다. 그것은 물처럼 변화무쌍하다. 패널 위에 천으로 작업하는 방식은 이번 전시에서 여러 방향으로 볼 수 있는 입체의 양상을 띈다. 작품 [명령하는 몸-서 있는 동물]은 입간판 처럼 접히는 대칭적 몸을 보여준다. ‘빛나고 부드러운 섬유로 표현된 피부’와 보철(補綴)같은 양상을 띤 구조물의 결합이다. 팔꿈치인지 발꿈치인지 알 수 없는 부분들이 같은 크기로 분절되어 다른 색의 평면에 배치 된 작품은 부위별로 포장된 고깃 덩어리처럼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하다. 작품 [명령하는 몸-애니멀랜드]는 기관들이 빨래처럼 틀에 걸쳐 있는 모양새며, [바다생물]은 흘러내리는 액체 같은 몸의 지지대가 보인다. 




명령하는 몸-상처,흉터 그리고 무늬, 각30cm30cm15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명령하는 몸-상처,흉터그리고 무늬, 각30cm30cm15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동물을 기계로 간주하던 17세기의 세계관은 이제 인간에게도 적용되고 있지만, 김영혜는 가장 간단한 장치를 통해 접고 펼치는 몸의 양상을 표현한다. 동시에 그 몸들은 틀을 벗어나고 꿈틀댄다. 엉덩이의 틈을 중심으로 가운데가 벌어진 형태는 대칭적 몸을 반영하지만, 그런 모양새로는 자연스럽게 걸을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변이의 와중에 동식물을 구별할 수는 없지만, 나무처럼 위를 향해 분지하는 것들은 ‘식물되기’에 해당한다. 작품 [명령하는 몸-강박]은 몸체 여럿이 겹쳐져서 지그재그로 자라나는 듯하다. 뭉툭한 말단 부위에 대해 작가는 ‘쉬지않고 주변을 탐색하며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는 몸조각들’로, 그것들은 ‘이유 모를 강박과 불안에 시달리는 나의 신경을 닮아있다’고 말한다. 변화는 분화이자 성장이지만 동시에 쇠약과 죽음이기도 하다. 상처를 닮은 무늬들이 있는 작품은 특이한 아름다움과 병적 징후를 교차시킨다. 지금은 땡땡이 무늬지만, 그것은 부정형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유기체의 삶과 죽음은 엔트로피의 증감에 달려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에서 모든 생명체는 그것을 에워싼 환경에서 자유롭게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서 엔트로피의 과정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며, 어떤 생물도 죽음이라는 평형상태, 즉 그 육체가 완전히 풍화되어 공기나 흙으로 환원되는 상태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생명반응은 ‘열려진 계’이며 물질이나 에너지를 외부와 교환하는 복잡한 변화를 되풀이한다. 제레미 리프킨에 의하면, 생명반응은 살아있는 이상 평형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없으며, 생명반응에서는 엔트로피가 아니라 자유로운 에너지의 흐름이 중요하다. 상처자체가 유기체의 자족적 질서를 교란하는 무질서, 또는 또다른 생명의 과정이다. 작가는 이러한 무늬/상처에 대해 그것은 ‘또 다른 입구이자 출구’라고 말한다. 작품에는 그러한 출입구가 산재한다. 변화는 그만큼 많이 일어나며, 해석 또한 그렇다. 




명령하는 몸-서 있는 동물, 148cm60cm3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아크릴로 부분채색, 바느질, 2020



작품 [몸-상처, 흉터 그리고 무늬]는 젖가슴을 포함한 살 덩어리가 여러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표면에 찍힌 둥근 무늬는 또다른 젖가슴이 되려는 것인지, 젖가슴이 퇴화한 것인지 모호하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유사하다. 작가는 ‘지금의 우리는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의 한 순간이다. 모든것은 쉬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해간다. 일상적이며 평범한 순간은 고정되는 순간 특별해 진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변화의 국면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을 촬영하여 포토샵으로 간단하게 움직임을 주었다. 변형은 변형을 또 낳아서, ‘그것이 다시 작업의 단초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기관으로 분절된 몸 조각들이 다시 재구성되면서 새로운 기관, 새로운 개체로 재탄생’했다. 바느질이라는 오래된 촉각적 작업에 디지털 작업이 더해진다. 2020년의 한 작품 제목처럼 [바느질 된 몸]이 된다. 개체는 기관들로 나뉘고 기관들은 헤쳐 모여 또다른 유기체를 생성하며, 여기에서 또다른 기관들이 독립한다. 


재현은 변화하는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킨 것일 따름이다. 변화만이 영원하다. 그것은 욕망의 특징이기도 하다. 변화란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강박’에 의한 것이다. 욕망을 성에 한정하지 않는 새로운 정신분석의 흐름에 조응한다. 물질로서의 몸은 끝없이 변화한다. 앙드레 지오르당은 [내 몸의 신비;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의 3/4이 1년 이내에 실제적으로 사라질 것이며 다른 원소들이 이식될 것이라고 본다. 그 책이 나열하는 놀라운 통계들에 따르면, 눈의 각막은 1주일, 뼈들은 5년마다, 근육은 7년마다 갱신된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채로 감지할 수 없는 대체 작업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내 몸은 여전히 바로 그 사람이기는 하지만, 화학적으로 결코 동일인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앙드레 지오르당은 유기체는 살기 위해서 언제나 약간 죽을 필요가 있고 지체 없이 다시 소생해야 함을 강조한다. 내 안의 모든 것은 스스로 갱신되는 것이다. 




명령하는 몸-서있는동물, 28cm60cm10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아크릴로 부분채색,바느질 ,2020



명령하는 몸-서있는동물, 28cm60cm30cm, 나무패널 위에섬유 ,아크릴로 부분채색, 바느질, 2020



명령하는 몸-애니멀랜드 (측면이미지)



김영혜의 작품은 그러한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극화시킨 것이다. 특히 흐르는 물과 유방같은 기관과 중첩시킨 이전의 작품들은 변화에 있어서 물의 역할을 암시한다. 앙드레 지오르당은 세포, 세포 소기관, 효소와 막 등으로 이루어진 소우주로서의 몸은 물로 둘러싸이고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몸이 거의 지방 없이 혹은 단백질의 반을 제거 당하고도 작동할 수 있는데 비해, 20%의 물을 잃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수태 후 며칠 지난 태아는 95%가 액체이다. 앙드레 지오르당은 물이 우리에게 이토록 귀중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물로써, 물과 함께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유기체는 격세유전적인 변화를 태내에서도 반복한다. 존 리겟은 [얼굴문화, 그 예술적 위장]에서 인간의 태아는 다섯 번째 주를 지내는 동안 분명히 어류의 아가미처럼 보이는 형체를 가지는 단계를 거친다고 지적하는데,  이 아가미는 몇 백만 년 전 인간의 먼 조상이 바다에서 살았다는 증거다. 


풍경은 변화의 장(場)이다. 김영혜는 몸을 풍경화하면서 변화를 표현한다. 니콜라스 미르조예프는 [바디스케이프]에서 ‘재현의 과정에서 신체는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sign)로 나타나기에, 신체는 하나의 대상이기보다는 영역’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영혜의 작품 [몸풍경]은 몸이 새로운 가지를 내는데, 가운데 나무처럼 기본 축이 있지만, 마치 접붙인 것처럼 횡적으로도 자라난다. 근육질 몸의 옆모습같은 몸풍경은 지그재그로 꺾인 관절이 괴물같다. 마치 씨눈처럼 생명의 역량이 모여있는 말단부는 진한 붉은색을 띤다. 리좀 또는 촉수를 떠올리는 단편들은 포자처럼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츠가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말하듯이, 몸은 하나의 본질이기 보다는 ‘간격으로, 순수한 차이로서 자취를 드러낸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몸의 실체가 가변적이라 함은 몸의 물질성과 관계되지만, 이 ‘물질’에 가해지는 문화적 힘을 간과할 수는 없다. 




몸풍경,70cm100cm3cm, 나무패널 위에 섬유,바느질 ,2020



몸풍경,70cm100cm3cm,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자른 고깃덩이처럼 일정한 크기로 배열된 살덩어리들, 입간판처럼 생긴 구조물에 배치된 기관들은 코드화할 수 없는 것들을 코드화하는 집요한 산업을 떠올린다. 구조를 벗어나거나 잘린 단면이 이상한 무늬로 변하는 상태는 틀 지우려는 힘 자체를 변화시키려 한다. 근대 이후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굳은 과학과 기술 또한 몸을 새롭게 틀 지우고자 한다. 수전 보르도는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과학과 기술은 결정론적 육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적 상상에 도달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재정비, 변형, 수정할 수 있다는 환상에 고무된 이데올로기로 몸을 한없이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음으로서, 몸의 역사성, 숙명성, 물질성에 도전한다. 몸을 의지대로 바꿀 수 있다는 패러다임은 성형수술의 예에서 보여지듯,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이끄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자연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하지만, 그 기준은 시대의 유행, 내지는 지배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것은 몸을 기계적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관점의 연장이다. 수전 보르도는 17세기 기계론적 과학과 철학에서 가정하는 육체의 본능적인 속성은 생물학적 프로그램의 체계로 완벽하게 수량화될 수 있고, 또한 이론상으로는 통제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육체와 구별되는 사유 주체를 상정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21세기의 과학으로 부상한 생명공학에도 남아있다. 유전자 조작, 장기의 상품화 등을 통한 인간 개조가 SF적인 상상력을 따르리라는 예상은 가능하다. 보철기관(prothesis)을 연상시키는 입간판 구조의 기관들이 산뜻하게 나열된 작품들은 몸이 운명이 아닌 선택일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샌더 길먼은 [성형수술의 문화사]에서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 있는 계몽주의적 환상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 될 수 있다고 믿는 바의 총체’인 자율적 인간은 모순적이다. 몸의 변경을 의료산업에 의탁하는 것은 자율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몸풍경,100cm70cm3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몸풍경,52x70cmx3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샌더 길먼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되라’,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여라’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라’, ‘자신을 변화시켜라’는 문화적 강조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고 본다. 변화는 양날의 칼이다. 자연이 아닌 문화의 기준에 맞춰 몸을 변형하는 것에 이해관계, 즉 이데올로기가 끼어든다. 권력의 최종적인 기착지는 몸을 조정, 조절하는 것이다. 작가는 최근 넷플릭스에 가입했는데, 거기에 접속하면 할수록 시스템이 자신의 정보를 쌓아 놓고 있음을 느낀다. AI 알고리즘이 개인의 취향을 추적하여 본의 아닌 세뇌나 중독의 과정에 빠지게 한다. 작가는 ‘종이 신문은 관심 기사 외에 옆의 기사도 보게 된다’고 하면서, 디지털 문화의 편향성을 지적한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콘텐츠는 넘쳐나지만 권태는 더 커지고 자극의 강도도 더 세진다. 요약 로봇의 활발한 활동은 그렇게 제공된 콘텐츠들이 전체보다는 유형화된 관념으로 이식될 가능성이 높아짐을 알려준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현대는 역사보다는 신화에 더욱 가까워진다. 접촉과 접속의 관계를 생각해온 작가로서는 이제 대세가 된 디지털 문화에서 몸이 억압되거나 아니면 남용될 가능성 또한 본다. ‘헬스& 뷰티’를 내걸고 밤낮없이 영업하는 상업적 환경은 몸 또한 자본과 유착된 권력의 회로 속에서 순환하게 된다. 동영상이 가미된 김영혜의 최근작품은 이 회로를 우주적 풍경으로 만들었다. 얼마 전 ‘축약본’으로 본 어떤 SF 영화는 인류의 욕망에 의해 망가진 지구를 떠나 부유층만 따로 사는 인공 행성에서 전신 스캐닝으로 건강과 젊음을 되찾는다는 설정이 이야기를 이끈다. 동식물이 인간의 이해관계에 맞게 육종되었듯이, 동물되기와 식물되기를 떠올리는 몸의 다양한 변신에 권력과 자본이 끼어들 여지는 많다. 물론 지배적 질서는 과학기술이라는 보다 중성화된 표현을 애호하지만 말이다. 니체와 푸코가 권력의 계보학에서 주장했듯이, 권력은 억압일 뿐 아니라 쾌락이기도 하다. 




몸풍경52cm70cm3cm,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날씬함과 젊음에 강박으로 사로잡힘과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일중독에도 빠져야 하는 현대인에게 권력과 자본은 몸에 차곡차곡 쌓인다. 전제군주 시절에 몸은 잔인한 공개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20세기 제국주의 전쟁 시대에 몸은 정치의 영역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 거시정치보다는 미시정치가 중요해 졌다.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봉건사회는 화폐와 생산력이 거의 발전하고 있지 않았기에, 신체야말로 사람들이 좌우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므로 신체중심의 징벌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처벌, 즉 권력기술은 군주제 시대에는 신체에 낙인을 찍는 잔인한 의식을 통해 이루어졌고, 차츰 사회로 이전되어 신체의 훈련으로 변화한다. 처벌 중심의 무대를 대신해서 나타난 것이 감옥이라는 획일적인 장치다. 사회는 광인을 배에 태워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거나, 범죄자를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들려 한다. 


규율과 훈련, 더 나아가 스스로를 조절하게 하는, 권력이 내재화된 개인의 생산 또는 주체의 탄생이다. 김영혜의 작품 속 다양한 잠재태로 존재하는 살덩어리들은 어떤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권력에 의해 성형된 형태일 수도 있고, 촘촘한 권력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변신을 추동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쟁취했다고 믿어졌으나 김영혜의 작품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불가능하다. 종과 종이 혼합되고 그 또한 생멸하는 과정중에 있다. 사실 유성생식의 과정을 보면 생식정보는 늘 혼합하면서 진화해 왔다. 접속과 접촉은 타자를 전제한다. 주체란 관념론이 상상하는 것처럼 완전하지 않다. 김영혜의 작품 속 기관들은 유기체의 일부로 고정되지 않고 단편이 되어 떠돌고 접합하고 다시 분열한다. 나무처럼 위로도 증식하지만 덩굴처럼 옆으로도 증식한다. 뭉툭한 말단은 주변을 더듬으면서 나아가며 새로운 연결망을 구축한다. 이러한 방식을 누군가는 리좀으로 누군가는 유목으로 개념화하기는 했지만, 수많은 타자들과 연계하는 방식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명령하는 몸-서 있는 동물 118cm65cm30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2020



철학자 정화열은 [몸철학]에서 근대성이 타자공포증(heterophobia)에 바탕을 두고있다면, 탈근대성은 타자애호증(heterophila)에 바탕한다고 평가한다. 오랫동안 타자였던 몸은 ‘대안의 정치학’의 주인공으로 복귀한 것이다. 존재가 아닌 ‘되기’에 바탕한 김영혜의 작품은 혼합적 존재들을 촉각적으로 표현한다. 동영상까지 가세하면서 키메라는 또 다른 서사를 추가했다. 개체들은 우주선처럼 각기 떠돌다가 충돌하거나 만나고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주변 환경과 구별되는 생명은 배경과 하나가 되며, 또다른 탄생을 준비한다. 앙드레 지오르당은 우리 자신을 매우 한정적인 경계를 지닌 플라톤적인 형태가 아니라, 혼합적인 존재로 검토해야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생명체의 나이인 30억년의 오랜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세포들의 공생의 강렬한 재배합의 산물인 새로운 시스템을 탄생시킬 정도로 서로 얽혀 있는 수십억의 기관들로부터 조합된 키메라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기존에 이미 존재했던 접촉에 대한 공포는 더욱 강조되었지만, 치유 또한 접촉없이 불가능하다. 김영혜의 최근 작품에서 존재들이 만나는 방식은 자못 우주적이다. 작품 [몸풍경]은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거인의 형태 중간에 떠 있는 구름 같은 것들이 특이한데, 자세히 보면 누워있는 인체 형상, 즉 또 다른 살덩어리들다. 푸른 배경에서 그냥 솟아 나온 듯한 몸은 별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먼지로부터 기원한 생명을 떠올린다. 작가는 ‘SF영화를 보면 별과 별이 인간이 모여 사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작은 우주로 ‘자신의 궤도를 돌면서 자장에 의해 영향을 주고 받고 스미거나 섞인다’. 그것은 만유인력처럼 작동한다. 제임스 글릭은 [아이작 뉴턴]에서 중력(gravity)을 발견한 뉴턴은 그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 의미를 ‘무거움’에 둔 점과 달리, 끌리다(gravitate)에 방점을 찍었다. 




명령하는 몸-상상트리,100cm100cm, 나무패널 위에 섬유, 바느질, 디지털로 배경처리,2020



즉 ‘달은 지구를 향해 끌리고(gravitate), 이러한 중력(gravity)의 힘에 의해 당겨져 항상 직선운동에서 벗어나 궤도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 실체인 몸 또한 이제 무겁다고만 간주되지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이 강조된다. 뉴턴적 용어로 바꾸면, 천체의 섭동(攝動)같은 것이다. 섭동의 사전적 의미는 ‘행동을 다스리고’, ‘태양계의 천체가 다른 행성의 인력으로 타원 궤도에 변화를’ 일으킨다. 몸에 작동하는 힘은 우주에 작동하는 중력처럼 보편적이다. [내 몸의 신비;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에서는 성인의 경우 4.5평방 미터의 피부로 다시 덮여지고 우주 안에 집계된 별들보다도 많은 수십만 조의 원자로 이루어진다. 자연과 문화는 동급이 아니다. 지오르당에 의하면 문화의 나이는 2만년이 채 안되었다. 동물성의 나이 30억년 혹은 40억년과 비교할 수 없다. 나를 지배하는 시스템의 대부분은 나의 동물 선조들에서 시험된 바 있다. 


[내 몸의 신비]에 의하면,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역사, 생명의 장구한 역사를 공유한다. 생명의 역사가 내 세포 안에 언제나 분명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물, 공기, 대지는 나와 동일한 원소를 함유한다. 나는 지구, 내가 살고있는 행성의 물질 전체와 장구한 역사를 공유하는 우주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주적 비전이락고 해서 관념론은 아니다. 형이상학처럼 최초나 최후를 가정하기보다는, 언제 시작된 지 알 수 없고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영원한 과정에 잠시 참여할 따름이다. 이때 예술가는 물질의 상징을 통해 그러한 변화에 참여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엔트로피]에서 말하듯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에너지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는 것뿐이다. 열역학의 제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더 조성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가능한 것은 변화시키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김영혜의 ‘명령하는 몸’ 전은 물리적 법칙과 생명의 법칙을 근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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