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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 / 서로에게 드리워진 현실과 환영의 그림자

이선영

서로에게 드리워진 현실과 환영의 그림자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림의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한 모더니즘의 긴 여정에 화면의 평면성이라는 조건이 있다. 대중들에게는 부조리해 보이는 그 ‘중요한’ 문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어진 예술의 자율성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자율적일 수 없는데도, 그것을 요구받는 것은 삶과 예술 모두에게 무리수였다. 어떤 자율성도 이상(理想)이다. 이상이라고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단지 이상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만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이래, 그림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것은 창문이나 거울의 비유다. 그러나 그에 대한 철학적 근거는 더 오래된 것이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유럽 재현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론이 ‘자연 대상을 최대한 유사하게 복제하는 눈속임 기법을 따른 작품이 완성도 높은 회화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분업화가 가속화된 근대에 와서 회화를 회화이게끔 하는 요소만 주목하자는 미학적 개념에서 평면성은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것은 ‘다른 예술로부터 빌어왔다고 생각되는 모든 효과들을 제거’(그린버그)한 결과였다. 이를 통해 ‘순수성과 독자성, 질적 기준이 보장된다’(그린버그)고 믿어졌다. 평면성은 서사를 비롯한 잡다한 것들을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이른바 환원의 과정이다. 이러한 평면성은 ‘순간적으로 대상의 전모를 파악하는 초시간적 핵심’(로잘린드 크라우스)을 전제한다. 가령 김병진이 끌어들인 자연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배제하려던 것이다. 모더니즘 미학에는 자연과 결연된 채 그 스스로가 자연이 되고자 한 모순적 관점이 깔려있다. 반대로 예술의 철저한 인공적 조건을 의식하는 또 다른 방향은 좀 더 선명했지만 개념과 제도라는 틀에 얽매여 있다. 자연은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모하지만, 예술은 순간을 영원으로 고양시키려 한다. 모더니즘은 삶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예술의 차이를 의식한다. 회화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정의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철학적으로는 무관심성을 중시한 칸트주의의 유산이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18세기에도 있었던 회화의 정의--‘회화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이다’--를 인용한다. 김병진도 3차원 사물을 2차원으로 드러낸다. 그 위에 철선으로 드로잉 함으로서 생겨난 또 다른 검은 선들은 평평한 대상으로서의 회화를 강조하면서 배반한다. 조명 조건에 따라 현실처럼 진하게 드리워지는 검은 형태, 즉 그림자는 현실과 환영이 차이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캔버스보다 더 반듯한 평면은 역설적으로 본질의 상대성을 말한다. 철 지난 평면 타령을 하는 이유는, 그림처럼 걸려있는 김병진의 작품들이 어떤 그림보다도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가로 세로줄을 맞춰서 벽면의 조건에 따라 설치적 방식으로 붙여질 때도 평면의 조건은 유지된다. 아니 확장된다. 40×30×3cm의 평면들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천고 6 미터가 넘는 공간에 수백 개가 도열 된 모습은 어느 하나도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식을 갖춘다. 


그것은 또한 자연의 다양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종횡으로 확장되는 그의 작품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열려있다. 환경의 차원까지 확장되는, 중심이 없는 중성적 배열은 지속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의 시공간적 전제는 개별적으로는 모더니즘이지만, 집합되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감각과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매번 즉흥적 방식으로 배치된다. 10번의 전시가 있다면 10번의 다른 배치가 생겨날 것이다. 그는 그림의 형식을 가지고 미니멀리즘의 효과를 낸 셈이다. 30x30cm의 경우 모서리에 곡면이 있지만, 퍼즐같이 또 다른 방식의 구성이 가능하다. 정사각형 작품들은 바둑이나 장기같은 유한 속의 무한한 게임을 가능하게 한다. 직사각형 작품의 경우 책이나 도록의 크기를 염두에 두었다는 이 비율은 특별한 사물처럼 밀도 있는 무엇이 켜켜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책의 방식처럼, 시간적 추이만이 한 면 한 면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양파껍질 같은 사실과 진실을 전달할 것이다. 


정보화 시대에 예전만큼의 입지를 갖지 못하는 책이나 도록은 아직도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사물 중 하나이다. 사물은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과 환영의 복잡한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가는 침묵하는 사물의 겹을 늘려가며 표현을 확장하고자 한다. 프랑시스 퐁주는 [사물의 광란]에서 ‘사물들 내부의 뚜껑을 열고, 그 두께 속으로 여행하길 제안’한 바 있다. 김병진의 작품에서 꽃은 프랑시스 퐁주나 미니멀리즘이 염두에 두는 사물은 어떤 말과 일대일 대응 관계가 아니라, ‘사물과 말 사이의 미로와 같은 복잡한 움직임’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러한 이행과정은 작품 속에 켜켜이 자리한 불연속적인 층에서 일어난다. 사물과 말은 완전히 겹쳐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은 해결되어야 할 모순이 아니라, 작업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는 원동력’(퐁주)이 된다. 책이나 도록같은 프레임의 평면에 자연을 담는 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 


화면에 자리한 자연은 꽃이나 잎을 연상시키지만 고정되지 않고 유동한다. 동물과 비교해서 식물은 고정 되어있는 듯 하지만 식물은 조금씩 움직이며 성장한다. 살아있는 식물에 먼지가 쌓일 수는 없다. 인간에게 최초의 식량을 제공한 식물은 자연을 대표해왔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식물은 ‘살아있는 현실,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삶의 표명’이라고 말한다. 화분들 하나하나, 또는 표본 상자에 식물 하나씩 안치된 듯한 작품은 실재처럼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복잡해진 실루엣은 한 번에 파악하기 힘들기에, 볼 때마다 다르게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평면 위에 색깔 있는 액체를 떨어뜨린 듯한 유동성뿐 아니라, 미세한 움직임의 환영이 있다. 동질이상의 형태와 색채, 그리고 그것이 자리하는 공간은 매 순간 변신한다. 작품의 배열에 따라서 변신의 방향과 속도감도 달라질 수 있다. 


인공적 도료로 칠해진 색은 환영의 요소다. 관객은 푸른 색조에서 하늘을 붉은 색조에서 노을을, 기타 다른 색조들에서 어떤 꽃들과 연관된 색들이 공간을 점령함을 본다. 일상어에서 색의 이름이 꽃이나 과일과 연결된 게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물감은 자동차 도료처럼 공업시대의 산물 이전에는 식물로부터 추출된 것이 많았다. 색이 화학적 공정을 거쳐 대량 생산되고 표준화되면서, 색은 자연물로부터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넓은 벽에 설치된 작품은 공간을 시간화 한다. 즉 공간적 형식을 통해서 변화를 표현한다. 요즘 작업은 네온을 비롯한 빛으로도 선조(線彫)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에 드로잉 하는 행위에 내포된 잠재적 움직임은 더 활성화될 것이다. 만약 금속의 녹을 방치 한다면 평면에 얼룩진 녹들은 시간을 공간화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녹은 쇠라는 매체의 또 다른 물성이다. 현재까지는 막 생산된 산뜻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밀도 높은 밑 작업을 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같은 작품은 쇠로 바탕 면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자동차 도료로 바탕칠을 했으니 그보다 더 평면적일 수는 없다. 무광이지만 재료의 본래적 속성을 살린 마감처리 때문에, 굳이 만져보지 않고도 매끄러운 느낌이 전달된다. 액체의 부드러운 선이 흔적으로 남은 평면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바탕 면의 물리적 조건을 시각화 한다. 김병진의 작품에 내장된 평면성이라는 조건은 캔버스의 실험과도 다른 차원이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평면성을 실험하기 위해 캔버스 천을 염색하거나 올을 풀고 하는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현대 미술사가 평면성에 대한 물신적 숭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분석은 어느 때 보다 정교했다. 그의 작품은 금속을 다루는 기술력에 의해 만들어진 반듯한 평면이며, 이미지는 그 위에 얹어지듯 그려진다. 실물에 대한 것이든 관념에 대한 것이든 재현의 깊이는 배제된다. 


재현주의가 특정 관점을 물신화한 시스템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리얼리즘’으로 옹호될 수 없다. 미끈한 색 면에 자리한 이미지는 일단 시작하면 완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을 법한 속도감이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필 획이 보이는 것이 그가 사용하는 광물질 재료와는 전혀 다른 동양화의 느낌도 있다. 요즘은 자연이나 자연에 가까운 방식에 끌리는 편이다.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낸 작가는 자신의 무의식을 채우고 있던 자연적 형상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려 한다. 그에게 자연은 재료가 아니라 과정에 반영된다. 그러나 일과(一過)적인 것일수록 제대로 고정될 필요성이 있다. 일순간 지나가는 영감을 어떻게 소통/유통시키는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은 결국 형식에서 찾아진다. 물론 그 힘을 너무 과장했을 때 형식주의에 빠지고 작품은 닫혀버리며, 형식은 장식화된다. 김병진이 자연과는 거리가 먼 듯한 재료들로 자연을, 그것도 자연의 과정을 포획하려는 의지에는 역설적 요소가 있다. 


그의 작품은 섬세한 차이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화면의 순도가 높다. 거기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미끄러지듯 활강한다. 최근 작품에는 식물이 주로 그려지지만, 철제 바탕 면에 그려진 이미지는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식물이나 식물의 생명력을 염두에 두고 툭툭 던지듯이 그려진 것들은 거의 식물 모양의 얼룩에 가까울 따름이다. 작업 중에 옆에 식물을 놓고 참조하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식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린 것이다. 그렇다고 관념의 도해는 아니다. 식물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가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으며, 다시 꺼내는 순간 원래 모습과는 다른 무엇으로 나타난다. 재현이 아닌 생성이다. 예술을 매체 중심적이 아니라 인간의 심신으로 생각할 때, 예술의 ‘본질’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특정 형태와 의미를 겨냥한 재현의 노고가 아닌, 차이의 유희를 받아낼 평면은 많이 준비되어 있다. 


쇠라는 물질적 저항감이 큰 재료를 거의 부드러운 흙이나 물감처럼 다룰 수 있는 점은 차이를 포획하는데 유리한 지점이다. 자동기술처럼 쓰여진/그려진 이미지는 어떤 종을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성을 말한다. 그것은 현상이나 원형의 재현이 아니라, 반복과 차이 속에서 제시된 것이다. 작가는 부지런한 어부처럼 계속 그물을 던진다. 벽에 하나 가득 걸린 평면들은 매번 다시 던진 그물에 걸려 나온 포획물이다. 많이 던질수록 이질성이 드러날 확률은 높아진다. 김병진은 감은 오지만 확증은 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을 마주한 탐색자처럼 작업한다. 그의 작품은 얼룩 심리 테스트처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의 평면 작업은 글자나 아이콘 형태의 요소를 하나하나 용접하여 입체를 만드는 조각 작품의 치밀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의 조각은 오랜 작업과정에서 체득한 기술과 감에 의해 짜 맞춰지는 정교한 퍼즐 같은 스타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작가로서의 성공을 안겨준 요인이다. 


그에 비한다면 유동적 이미지들이 주를 이루는 최근 작품들은 자신의 분야가 아닌 곳에서 좀 더 자유롭게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쇠와 자동차 도료로 만들어진 평면의 이미지는 추상적이다. 그 위에 우툴두툴한 느낌의 철선으로 용접하여 얹은 이미지가 합체되어야만 화면은 지시적 속성에 조금 가까워진다. 즉 ‘이건 무엇을 그렸다’는 의미가 성립된다. 식물 모양의 얼룩은 식물 형태로 견고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작품에 따라 모호한 경우가 있다. 무엇이 그려졌건 조각되었건, 그려진 이미지와 조각된 이미지 사이에 떨어지는 그림자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주재료인 철을 비틀고 접합하여 사물의 형태를 금속으로 하는 드로잉’이라고 말한다. 그냥 드로잉과 다른 점은 그림자가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요즘 작업에 대해 ‘그림자가 있어야 완성’감이 있다고 말한다. 그림자는 현실과 환영 사이의 게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된 재현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는 재현이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 존재가 아니라 부재로부터 탄생했다고 본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고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인용하면서 회화가 선으로 윤곽을 그린 인간의 그림자에서 최초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회화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체의 부재와 그 투영된 형상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재현이 그림자에 근거를 두었던 근본적 목적은 부재중인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보조물이었음을 강조한다. 플리니우스의 예에서 알 수 있는, 예술적 재현의 탄생이 음화(陰畵)에 있다는 가설은 최초의 회화가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회화는 본질과 가상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유희가 된다. 차이는 반복을 전제한다. 물론 반복은 두 가지가 있으며, 예술은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과학에서는 한 용어가 다른 용어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반면, 예술은 대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후자는 재현이 아니라, 반복될 뿐이라고 본다. 무한히 반복되는 사물들의 순환인 허상은 재현주의가 무너진 현대미술에서 다시금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김병진의 작품 또한 식물, 또는 자연의 모상이 아니라 허상, 즉 시뮬라크르(simulacres)다. 질 들뢰즈는 무한한 반복이 차이의 고유한 역량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것은 ‘비유사성과 계속되는 불일치를 긍정하고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 등을 긍정’한다. 들뢰즈는 시뮬라크룸이 플라톤적인 위계들을 뒤집고 유일하고 이상적이며 신비적 특권을 가지지 않은 미술작품에 새로운 모범을 제공한다고 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팝아트를 든다. 그림자로도 그려지는 김병진의 작품은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는 의미에서의 팝아트이기보다는 그 철학을 공유한다. 원래 그림자는 실재에 비해 2차적 존재지만, 김병진이 평면이라는 조건에서 만든 맥락에 따르면 그 위상이 달라진다.

 

이상적인 평면적 조건 위에 얹혀진 잠재적 형태와 3차원상에 그려진, 조금은 더 구체적인 선조(線彫)의 중첩에서 추상과 구상 간의 광학적 유희가 펼쳐진다. 수백 개에 이르는 작품 중에서 몇 개만 샘플로 살펴보자. 작품 [Double Drawing 1]은 하늘색 모노크롬 위에 대략 툭툭 찍은 형상들이 그 자체만 보면 추상적이다. 그 위에 금속 선으로 이파리들이 붙은 가지 형태가 얹어져 있다. 노란색이 칠해진 금속 선이 떨어뜨리는 그림자가 한데 얹힌 복합적인 작품이다. 뒤에 일련번호만 달리 붙은 [Double Drawing]이라는 제목은 중층적으로 행해진 드로잉을 말한다. 드로잉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실수와 우연을 포함한 많은 변수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실험적이다. 특히 금속 선으로 이리저리 구부려 만드는 3차원 ‘드로잉’은 회화성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손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여 거칠거칠한 촉감을 새겨 넣는다. 이러한 촉각적 측면은 그의 매끈한 작업이 시각적 코드로 환원될 가능성을 상쇄시킨다. 


김병진의 작품은 사각형이라는 관례적 프레임 안에 무엇인가를 담아서 보여주는 투명한 시각을 거부한다. 그것은 ‘double’이라는 교란적인 개념이 표현하는 바이다. 그의 박사학위 청구 작품 중에는 대상의 조명 조건을 여러 위치에서 여러 강도로 실험하면서 인덱스적인 특징을 가지는 그림자의 위상을 모호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시각성은 불확실하지만 무엇인가를 담는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재현주의의 근거가 되었지만, 그의 또다른 개념인 코라는 재현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특히 재현주의와 가부장주의의 관계를 의심했던 여성 이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플라톤이 말한 기이한 ‘그릇’인 ‘코라’는 생성의 유희를 행한다. 존 맥컴버는 [데리다와 시각의 폐쇄]에서 플라톤이 [티마에우스]에서 ‘볼 수도 없고 형식도 없는 어떤 것이면서도 모든 것을 담고서 영원한 본질들을 생성의 유희로 끌어들이는 그 그릇’을 통해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의한다고 인용한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우리는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사물이 변화하고 존재하게 되고 사라져가는 것을 봄으로서 그 그릇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즉 [파에돈]이 기록하듯이 ‘우리는 감각적인 사물이 향하는 바, 즉 영원한 완전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을 통해서만 거꾸로 그 그릇을 본다’는 것이다. 어느 날 영감에 의해 시작되었고, 현재 가속도가 붙은 끝이 없는 계열로서의 작품은 시각의 맹목성에 대한 예술가의 대응일 것이다. 존 맥컴버는 이러한 대상을 형식이라기보다는 데리다가 말하는 흔적(trace)이라고 말한다. 흔적은 이데아와 밀접한 형태(form)가 아닌, 기타 등등의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나머지들’의 중요성을 말했다. 노랑 바탕에 이파리 둘 붙은 식물은 식물이라는 실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자율적 색채로 칠해져 있다. 지시대상으로부터 멀어진 색이나 선에 비한다면, 그림자는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준다. 자율적 색과 형태는 늘 실재감을 휘발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초기 추상 화가들은 그 점을 가장 염려했다. 


그 결과는 장식이고, 장식이란 특정 기능과 연관된 자율적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티스같이 출중한 화가가 양자를 통일한 이래, 여전히 (공예적)장식과 (예술적)표현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능주의의 산물인 유선형이 기능과 관계없이 장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예술만 표현인 것도 아니다. 미술사에서는 아르누보, 상징주의, 표현주의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양자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일련의 반(反) 순수주의 및 반(反) 환원주의의 흐름은, 그린버그를 비롯해서 회화에서 장식을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선명성만 부각시킨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작품 [Double Drawing 3]에서 진달래 바탕에 여러 색으로 찍힌 식물 형상은 밝은색으로 칠해진 선조가 그 우툴두툴한 면을 부각 시킨다. 작품 [Double Drawing 4]는 대개는 태양을 향해 서 있는 식물의 자세를 빼고는 무엇인지 알기 힘들만큼 선과 형태, 색채가 엉켜있다. 


층층이 달리 적용된 색감은 마치 멋쟁이들이 옷을 코디하듯 선택된다. 작품 [Double Drawing 5]는 작가가 직접 칠하지 않은 검은 선, 즉 선조의 그림자가 다양한 색과 형태의 유희를 강조한다. 평면 한가운데 형상을 배치하는 게임 원칙은 지켜지며, 잠재적 프레임을 넘어서지도 않는다. 그러한 형식적 구도는 추상적 초상화같은 느낌으로도 다가온다. 화면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으며 관객과 마주 보는 구도에 깔린 시각적 관습의 힘이다. 그것은 관객 앞에 마주해 서 있는 무엇이 인체를 연상시키는 것과 같은 차원이며, 조각과 출신인 김병진에게도 초상과 인체는 기본 감각으로 남아있다. 평면과 이미지, 그리고 선조로 이루어진 3개의 층이 조금씩 어긋나는 방식을 통해 사이나 경계의 공간이 생성된다. 투명한 재현을 통해 무엇인가를 확언하기보다는, 애매한 관계 전체를 통해 말한다. 아니 은유한다. 조명의 조건에 따라 그 또한 가변적일 수 있다. 


그러한 경계의 공간이 최대한 확장될 때 3개의 층은 서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흐트러져 버린다. 이때 선조는 이미지의 확언이 아니라 해체를 추동한다. 정반합에 근거한 변증법적 사고가 총체성이 가능하리라 믿어졌던 이전 시대의 산물이라면, 이원론은 거부하는 해체는 해체대상이 조차도 이미 해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대 철학의 가설은 난해함과 허무주의를 결합시킬 따름이다. 그림자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불확실한 또 하나의 교란적인 선으로 가세한다. 이러한 복잡한 광학적 조건과 달리, 자동차 도료로 그려진 산뜻한 색감은 팝아트 같은 느낌을 준다. 만화나 문자 등 애초부터 평면적 소재를 ‘재현’했던 팝아트 또한 그러한 경계 위에 존재했기 때문에 유사성은 근본적이다. 대중문화의 코드는 그것이 또 다른 실재가 될 정도로 문화적 생태계가 포화되어 있다면 그 또한 리얼리즘이다. 팝이든 추상이든 현실의 한 조각인 것이다. 


대중문화와 예술의 관계를 연구해온 언론학자 허버트 갠즈는 창조자 지향형(creator orientation)의 문화와 향유자(user) 지향형의 문화로 나눈다. 그에 의하면 부유한 후원자를 잃은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은 대중에게 소외되자,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 줄 동료만을 위해서 창조하였다. 고급문화는 창조자 지향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문화적 지위와 권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에 대중예술은 대체로 향유자 지향형이며, 수용자들의 가치와 소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한다. 허버트 갠즈에 의하면, 고급예술과 그 비평의 근거가 되는 칸트식의 무관심적 관조의 미학은 키치로 대변될 수 있는 대중문화의 열렬한 관심성과는 구별된다. 단기간에 집중적인 소비를 통해 스스로를 고갈시키고 다른 욕망의 대상으로 끝없이 이동하는 문화적 소비는 현대문화와 일상적 삶의 주류가 되었다. 김병진의 경우, 가장 보편적인 가치인 ‘LOVE’라는 단어를 용접해서 강아지 같은 귀여운 대상을 조각한 작품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는 대중적인 작품에도 복잡한 그림자 유희를 이용하여 삶의 어두운 측면을 암시하긴 했지만, 지난 15년 간 대중에게 알려진 김병진의 작품은 대체로 ‘소비의 사회’(장 보드리야르)에 걸 맞는 상품과 작품을 오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중성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10년 넘게 뉴욕에 작업실 겸 사무실을 운영한 이유기도 하다. 그에게 예술의 자율성은 끝없는 모색을 통해 쟁취되는 것이지 예술 자체에 새겨져 있는 선험적 관념이 아니다. 최소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유통은 모든 작가들의 희망 사항이기도 하다. 보드리야르는 ‘매스 미디어적 소비를 규정하는 것은 실재계를 코드로 바꾸는 절차의 일반화’라고 비판했지만, 코드의 요소들의 조합에 근거하는 새로운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김병진의 시뮬레이션 미학은 코드 뿐 아니라, 그림자를 포함하여 좀 더 다양한 요소를 끌어들이면서 예술이 하는 질문을 다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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